“레드”, 오락 영화의 황금율이란 이런 것





영원한 다이하드 사나이, 브루스 윌리스를 전면에 내세운 <레드>는 주연급 캐스팅의 연령대에 잘 어울리는 은퇴한 CIA 요원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된 RED라는 단어 자체가 – 공식적으로 정말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Retired but Extremely Dangerous라는 뜻이더군요.

물론 현장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고 있던 이들을 극히 위험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죠. 은퇴한 CIA 요원들을 갑자기 살해하려고 달려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부여잡고 정신없이 달려나가는 – 미국 전역을 돌아다닙니다 –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레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형적인 줄거리이지만 그것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연출의 몫이죠. <레드>는 무엇보다 코미디 영화의 기조를 시종일관 유지합니다. 코미디가 중심이 되면 허풍스러운 전개나 액션도 너그럽게 봐줄 수가 있게 되고 심각함에 몸을 긴장시키기 보다는 안락의자에 편히 기대어 누운 듯이 편안하게 감상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레드>는 코믹함을 기반으로 과장된 액션과 중년의 로맨스를 조화롭게 버무린 데다가 화려한 스타 캐스팅까지 더해지면서 오락 영화로서는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요즘은 확실히 압도적으로 우세한 능력을 보여주는 액션 캐릭터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이런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아닌 맷 데이먼 주연의 제이슨 본 3부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 사실적인 긴장감이 더해지면 금상첨화입니다.

<레드>의 주인공 프랭크 모스(브루스 윌리스)와 그의 옛 동료들 역시 CIA로 부터 ‘RED’ 인증을 받을 만큼 압도적인 능력의 소유자들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의 분위기가 보는 이들을 긴장시키는 서스펜스나 스릴러에 있지 않고 잔뜩 이완된 분위기의 성인용 코미디가 주조이기 때문에 남녀노소 모든 관객들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반면에 일단 이 영화가 자기 취향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상당한 호평과 함께 반복된 관람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장르적 쾌감의 수위가 상당한 편이라 하겠습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칼 어반과 좁은 사무실에서의 열혈 액션을 보여주는 브루스 윌리스의 노익장도 멋지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신 헬렌 미렌의 ‘파티 드레스 입은 채로 중화기’ 액션 역시 너무나 근사했습니다만 <레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헬렌 미렌과 짝을 이룬 브라이언 콕스의 로맨스 그레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레드>는 프랭크 모스를 중심으로 불의한 시스템과 맞서 싸우는 동시에 새로운 인생과 사랑을 지켜낸다는 줄거리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제 막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프랭크와 사라(메리-루이스 파커) 커플 보다 이반(브라이언 콕스)과 빅토리아(헬렌 미렌)의 오랜 세월 끝에 되찾는 사랑이 좀 더 보기 좋았습니다.

러시아의 이중 스파이였던 이반은 빅토리아와의 사랑으로 인해 조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처지였지만 영화 속의 사건을 계기로 옛사랑을 다시 찾게 되는 인물인데요, 굉장히 많은 작품들 속에서 대체로 악역만 도맡아 해왔던 브라이언 콕스의 코믹 연기였기에 더욱 호감이 갔던 것 같습니다.




위험에 빠진 전직 CIA 요원 프랭크와 평범한 노처녀 사라의 로맨틱 액션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레드>는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나잇 & 데이>(2010)와 매우 유사한 컨셉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요,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한다면 단연 <레드>의 압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레드>는 결과적으로 프랭크와 사라의 로맨스 비중이 적게 다뤄질 수 밖에 없었을 만큼 앞에서 언급한 이반과 빅토리아의 또 다른 로맨스가 있는가 하면 존 말코비치와 모건 프리먼의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훌륭한 조연 연기까지 포진해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브루스 윌리스와 몸싸움까지 하게 되는 현직 CIA 요원 윌리엄(칼 어반)이나 최종적으로 ‘악의 축’ 역할을 하게 되는 군수회사의 CEO 알렉산더(리차드 드레이퍼스)마저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니 한참 재미있게 달리다가도 결국 끝나고 나면 허전한 장르 영화로서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영화적 포만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칼 어반과 브라이언 콕스는 모두 제이슨 본 3부작에 출연했던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레드>는 드디어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제이슨 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잘 유지해온 브루스 윌리스의 독특한 액션 캐릭터를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독거노인 프랭크 모스의 집 안 모습은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이기 이전에 브루스 윌리스의 첫 출세작이 되었던 TV 시리즈 <블루문 특급>(Moonlighting, 1985)에서 침대 하나와 큰 여행 가방이 전부였던 데이빗 에디슨의 아파트를 연상케 합니다.

절대무공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코미디와 로맨스가 조합된 독특한 브루스 윌리스만의 이미지는 지금도 여전히 관객들에게 편안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영진공 신어지

 

“체인질링”을 돋보이게 하는 교차편집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 작품인데 그 실력 어디 갈까. <체인질링>은 그 명성에 값한다. 깊이 있는 연출과 거장다운 시선 + 안젤리나 졸리의 열연까지, <체인질링>은 열거한 장점만으로도 만족도가 높은 작품이다. 그러니 이상 리뷰 끝???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건 한 가정의 유괴사건이 LA 공권력의 부패로 치환되는 거대한 이야기를 단순해 보일 만큼 간결하게 다루는 영감님의 솜씨였다.

잘 알려졌다시피 <체인질링>은 1928년 LA에서 발생한 ‘와인빌 양계장 살인사건’(Wineville Chicken Coop Murders)을 다뤘다. 더 정확하게는, 이 사건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월터 콜린스의 어머니 크리스틴 콜린스의 평생에 걸친 아들 찾는 과정을 그렸다. 여담인데, 같은 소재를 론 하워드가 메가폰을 잡았다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강인한 모성의 고군분투기로, 스티븐 스필버그였다면 크리스틴이 겪는 아픔에 포커스를 맞추며 결국엔 가족 화해 드라마로 마무리 지었을 소재를 이스트우드 옹은 ‘절대 악을 퇴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무슨 소리냐고? 자세한 ‘썰’은 줄거리부터 확인한 후에. 

LA에 거주하는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은 전화교환수 감독관으로 일하며 아들 월터를 보살피는 싱글 맘이다. 아들과 채플린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문제의 토요일, 일손이 딸린다며 동료들은 크리스틴을 회사로 불러들인다. 하지만 이를 어째, 엄마 없는 토요일을 보내게 된 월터는 행방불명이 된다. 다행히 5개월 후 경찰은 월터를 발견하지만 크리스틴은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시점부터 이야기는 관객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다!) 되풀이되는 그녀의 반항에 뿔난 존스(제프리 도노반) 경찰은 크리스틴이 엄마로서의 의무를 방기하고 억지 주장을 펼친다며 급기야 정신병원에 가두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때, 평소 LA 경찰의 부패와 비리를 폭로해오던 구스타브(존 말코비치) 목사가 합류하면서 월터의 유괴사건은 선량한 시민과 악랄한 공권력의 대결구도로 변모한다.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등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인간이 이에 맞서는 행위를 무덤덤하지만 고귀하게 그렸던 이스트우드의 태도는 <체인질링>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전작에서 사건에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를 묘사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변화하는 사건을 묘사한다. 즉, <체인질링>이 주목하는 건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슬퍼하는 크리스틴의 눈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하기 위해 선량한 시민을 정신병자로 모는 부패한 공권력에 맞서는 그녀의 분노다. 그러니까 이스트우드 감독이 <체인질링>을 통해 드러내는 관심사는 유괴범을 잡는 데 있지 않고 공권력의 무능을 파헤쳐 본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다.

<체인질링>은 실제 사건을 바탕(Based on)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실화(A True Story)다. (이를 강조하려는 듯 흑백화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금세 컬러로 바뀐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기가 막힌 이야기가 어떻게 사실이냐며 혀를 내두르지만 이스트우드 감독은 바로 그 점에서 영화의 힌트를 얻은 것 같다. 그것이 공권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거대 악(惡)이란 바로 공권력의 부패라는 것을!

그래서 이스트우드는 관심 없는 척 하다가 어느 순간에 월터의 살인자로 추정되는 인물 고든 노스콧(제이슨 버틀러 하너)을 불러내고 놀랍게도 LA경찰의 부도덕을 이 자의 살인행각과 동일시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를 위해 이스트우드 옹이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교차 편집이다.

※ <체인질링>을 안 보신 분들이라면 이 글 곳곳에 지뢰가 깔려 있으니 알아서 스텝 밟으시길.


이미 밝혔듯, <체인질링>으로 이스트우드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거대 악의 실체, 즉 공권력의 부패다. 거기에 이 더럽고 추잡하고 비도덕적인 공권력을 박멸하고자 하는 바람까지 담았다. 고든 노스콧의 목에 줄을 달아 사형시키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스트우드는 노스콧의 아동 살해와 (죄 없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가둠으로써) 그녀의 사회생명에 무참히 도끼질을 가한 LA경찰의 부패는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어떻게? 교차편집을 통해.

크리스틴과 구스타브의 헌신으로 LA경찰의 무능을 증명해 존스 형사를 재판 석에 앉히는 순간, 이스트우드 옹은 다음 장면에 노스콧의 재판과정을 병치한다. 존스와 노스콧의 재판은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평행하게 놓음으로써 동일시하는 것이다. 하여 크리스틴이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경위를 설명해달라는 변호사의 질문에 존스 형사가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다음 장면에는 여지없이 자신은 무죄라며 소리치는 노스콧의 경우가 끼어들고, 존스 형사가 LA경찰직에서 영구 제명 판결을 받는 순간, 노스콧 역시 사형 선고를 받는 등 두 개의 악에 대한 동일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교차편집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반면에 20명 이상의 아동을 유괴해 살인행각을 벌인 검거 이전 상황은 회상 형식으로 짧게 묘사할뿐더러 그가 왜 살인을, 그것도 아이들만 집중적으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불친절하다싶을 정도로 설명을 아낀다.

그래서 나는 <체인질링>을 두고 미학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하는 의견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이 현란한 서술법, MTV적인 영상, 능수능란한 CG 등 현대영화를 평가하는 잣대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다. <체인질링>에서 이스트우드 영감님이 보여주는 교차편집 같은 기교는 말 그대로 구식, 고전적이니까. 다만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대가의 호흡과 손놀림은 모두 고전적인 방식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눈에 평범하게 보이는 기법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령, 난 <체인질링> 오프닝에 대해 흑백화면이 컬러로 전환되는 부분을 두고 실화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밝혔다. 이에 덧붙여, 영화의 엔딩에 제시되는 자막을 보면 오프닝의 컬러 전환은 또한 현실에서도 유효한 이야기임을 환기시키려는 장치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체인질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엔딩의 자막이다. 우린 이미 이전 장면을 통해 LA경찰의 부패를 상징하는 인물 존스가 쫓겨남으로써 거대 악이 퇴치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자막. “존스는 몇 년 후 LA경찰에 복귀했고 아들의 생사 여부를 위해 평생을 바쳤던 크리스틴 콜린스는 2006년 사망했다.”

부패한 공권력은 부활하고 정의는 숨을 거뒀다는 비보.

아시다시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보수주의자다. 고전적인 가치를 신봉하는 그가 느끼는 지금의 현실은 크리스틴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부턴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만 신경 쓰는 동안 미국 사람들은 직장 잃어 집 잃어 경제파탄으로 거리에까지 내몰리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는 이스트우드가 팔십 평생 살아왔던 조국이 아니다. 풍요로웠던 나의 집, 나의 가족, 나의 핏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Home Sweet Home, 나의 진짜 미국을 돌려줘! 

공교롭게도 <체인질링>이 공개된 시점은 2008년. 바로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 이스트우드는 론 하워드로부터 <체인질링>의 연출제의를 받곤 바로 승낙했다. 과거의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크리스틴과 같은 의지와 결단력을 통해 현 공권력의 무능과 부패, 부도덕을 퇴치하자고 발언하기 위해, 호소하기 위해. 그리고 덧붙이시길,

“현실은 허구보다 더 복잡하다.”

<체인질링>은 별다른 기교 없이, 시간 순으로 사건이 진행되는 까닭에 꽤 단순해보이지만 그 속은 매우 복잡한 텍스트로 구성돼있다. 그 복잡함을 푸는 열쇠는 다름 아닌, 교차편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체인질링>에서 보여준 교차편집은, 그래서 흥미롭다. 거기에는 영화를 대하는 그의 철학과 더불어 삶에 대한 방식까지 들어있기 때문이다.


영진공 나뭉

 

체인질링, “미니멀리즘의 진수”







미니멀리즘의 진수가 이 영화더군요.
영화가 미니멀하다는 건 아닙니다.
장장 2시간 20분짜리 영화이고, 사건의 시작부터 끝의 끝까지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니까요.

미니멀한 것은 연출과 음악입니다.
이 영화는 일종의 다큐멘터리입니다. 특별히 영화다운 뭔가를 더 붙이지 않죠.
이 영화는 그저 그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영화입니다.
카메라도 조용하고 진행도 조용하고 음악도 조용합니다.
네, 그 음악도 이스트우드 옹의 작품이고요.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 꽤 많은 것이 필요했습니다.
졸리의 연기도 훌륭하고, 시대고증도 좋습니다.
게다가 조용한데도 긴장감은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이스트우드 옹이 이렇게 말하는 거 같습니다.
“영화 뭐 별거 있어? 사건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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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네가 먼저 싸움을 걸어서는 안돼, 하지만 일단 싸우게 되면 네가 끝을 내거라

영화를 보며 우리나라를 떠올린 분들 많을 겁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시스템이 거지같으면, 그 시스템의 문제를 고칠 기회도 생깁니다.
권력이 사람들에게 거지같은 압박을 가할때, 진짜 용기가 드러납니다.
담당자들이 멍청이 짓을 할때 진짜 똑똑한 것이 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공짜로 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 열라 고생하고 머리를 쓰고 힘을 모아야 되죠.

영화의 엔딩을 가능하게 만든 건,
끝까지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한 주인공과,
자기 일이 아니지만 지역공동체의 대표로 정의롭고 단호하고 현명한 전략을 펼친 목사 (물론 요즘 그들이 좋아하는 단어로는 영락없는 “외부세력”입니다만),
상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한 형사,
제대로 준비하고 변론 할 줄 아는 변호사,
막판에 청문회를 통해 상식으로 귀의한 시의원들,
그리고 그들 시의원들에게 압박을 가한 시민들 모두입니다.

이들 중 하나만 없었어도 그 결말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저런 역할들이겠죠.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이 거지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진짜 전문가들, 영리한 전략들, 그리고 아닌 건 끝까지 아니라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단 사실입니다.

이 영화가 왜 청소년관람불가일까요?
이런 영화야 말로 청소년들이 봐야 하는데 말이죠.

최근에 <작전>을 청소년불가로 만든 것도 그렇고…
어디선가 돌로레스 엄브릿지의 향기(라고 쓰고 악취라 읽음)가 피어오르는군요.



영진공 짱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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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히치하이커>)는 78년에 라디오 방송용 대본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는데 처음 영화화가 기획된 것은 82년이었다. 원작자인 더글라스 아담스는 시나리오 작업 도중인 2001년에 사망했고 감독으로 물망에 오른 이는 <오스틴 파워> 시리즈의 제이 로치와 미셸 공드리, 스파이크 존즈 등이 있었지만 결국엔 영국의 젊은 뮤직비디오 감독 가스 제닝스의 장편 데뷔작으로 탄생하게 됐다… 라지만 뭐 이런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다.

영화 속 풍자와 농담의 내용이나 미묘한 뉘앙스로 빚어내는 의미들을 100% 이해하는 것은 영미권에서 태어나 그쪽 문화와 언어에 친숙하지 않은 이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 재미있는 영화를 포기하는 건 지구가 철거되기 직전에 히치하이킹하여 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포기하고 종이 봉지를 뒤집어 쓴 채 뒤로 자빠지는 일과 같다. 무슨 얘기인지 알아먹을 수 있는 것들만 따라 웃어도 “히치하이커”는 올해 가장 웃을 일이 많은 코미디물인데다가 <스타워즈>가 부럽지 않은 제법 스펙타클한 비주얼까지 선사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Don’t Pani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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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오만과 관료주의를 꼬집거나 지구와 인간의 운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은 <히치하이커>가 처음인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그리 예리한 편도 아니다. <히치하이커>는 그런 주제를 너무 심각하게 다루기 보다는 최대한 가볍게, 때로는 터무니 없는 농담처럼 다루면서 오히려 광대한 우주 속에 그리 흔하지 않은 작은 별, 지구의 아름다움들을 찬미하는 경향이 좀 있다. 그렇다고 고리타분하게 ‘지구를 지켜라’식 결말이나 뻔한 계몽적 메시지로 고리타분하게 끝맺지 않는 것 또한 <히치하이커>의 미덕이다.

<히치하이커>는 영국의 워킹타이틀과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공동 제작한 필름팩토리(The Filmfactory)가 제작한 영화다. 영화를 보면 같은 솥단지에서 만들어진 그 밥이란 걸 알게 된다. 약간 얼빵한 중산층 영국 남자를 주인공으로 놓고 영국인 스스로에 대한 농담걸기에 스스럼이 없고 약간의 로맨스 또한 빼놓지 않고 곁들이는 모양새가 그렇다. <러브 액츄얼리> 이후 이제는 친숙한 얼굴이 되어 버린 빌 나이와 목소리만 들어도 특유의 나른한 표정이 떠오르는 앨런 릭먼을 비롯해서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낯익은 많은 영국 배우들이 목소리 출연을 하고 있고, 특히 샘 록웰의 닝글닝글한 원맨쇼와 오랜만에 보는 존 말코비치의 그로테스크한 등장 또한 <히치하이커>만이 줄 수 있는 값진 선물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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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