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하트”, 절주를 결심하게 하다




Crazy Heart, 2010 



토마스 콥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크레이지 하트’는 술에 절어 사는 늙은 컨트리 가수 배드 블레이크(제프 브리지스)의 모습을 담담한 시선으로 조명한다. 영화의 주인공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모습의 배드는, 지난 사랑에 변명하지 않고, 차갑게 대하는 아들에게조차 자신의 이야길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단념한 듯 인생의 마지막 근처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신문기자 진(매기 질렌할)의 등장은 특별하다.

언제나처럼 난, 순진한 관객이 되어 영화같은 사랑의 해피엔딩이라든지 아들과의 훈훈한 재회 같은 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감상적인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애초 벗어둔 연민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제 갈 길을 걷는다. 남녀의 만남이 사랑 말고도 내면의 변화를 일으킬 긍정적인 힘을 지녔음을 고요히 전하며. 

영화를 오롯이 ‘감상’토록 이끄는 힘은 배우에게 있는데, 제프 브리지스는 마치 배드 블레이크인양 열연을 펼쳤다. 남은 감상을 관객의 몫으로 남긴 크레이지 하트는 좋은 영화다.

극적 반전도, 운명의 장난도 등장하지 않지만 감정을 드러내고 설명하기보다 되레 한발 물러나 인물의 ‘그대로’를 쫓는 이 영화가 좋다. 스스로를 객관화하곤 자신을 들여다보며 제 마음의 정리정돈을 잘 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하듯이.

또 하나, 배드 블레이크의 거친 숨소리와 빈번한 토악질, 대충 풀려진 허리춤을 보노라면 진심으로 절주를 결심하게 된다. 그런면에서도 … 이 영화 참 괜찮다.


영화의 주제곡 “Weary Kind” by Ryan Bingham
 


영진공 애플

 

“크레이지 하트”, 음악은 드라마의 디테일을 채워준다


제프 브리지스에게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석권하게 해준 작품. 그간의 연기와 비교할 때 특별히 <크레이지 하트>에서의 연기가 아주 각별했다기 보다는 연기자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연기자의 삶을 살아온 공로상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기존의 작품들에서와 달리 제프 브리지스가 직접 컨트리 음악을 노래하고 기타 연주까지 해내고 있는 부분은 그간에 보여준 연기의 지평을 한 단계 넘어선 것이 맞긴 하다. <사랑의 행로>(1989)에 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등장해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일이 있긴 하지만 이번 <크레이지 하트>는 영화 시작부터 거의 깜놀 수준의 연주 실력을 자랑한다. 후배 가수로 출연하는 콜린 파렐 만큼은 립싱크겠거니 했는데 확인해보니 브리지스와 마찬가지로 직접 부른 노래란다.

듣던대로 <더 레슬러>(2008)와 비슷한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프로 레슬러와 컨트리 가수라는 차이가 있을 뿐, 인생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중에 마지막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설정은 거의 판박이에 가깝다. 하지만 <더 레슬러>가 그 전환점에서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몸을 날리며 마무리되었던 것과 달리 – 전환점이라기 보다는 막다른 길로 묘사된 쪽에 가깝긴 하지만 – <크레이지 하트>는 좀 더 현실적인 계기를 통해 갱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드라마의 극적인 구성이나 확장 해석을 가능케 하는 상징성을 따지자면 <더 레슬러>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에 비해 밋밋한 편이지만 그 대신 <크레이지 하트>는 드라마의 디테일을 상당 부분 음악으로 대신 채워넣으며 명실공히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음악 영화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 첫 장면에서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기르고 너부대대해진 몸집으로 볼링장에 들어서는 제프 브리지스는 <위대한 레보스키>(1998)에서의 “더 듀드”를 연상케 한다. 코엔 형제의 필모에서나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 이력에서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

– 화려하진 못해도 오직 음악만으로도 그럭저럭 생계 유지가 가능한 미국은 역시 부러운 나라다. 물론 극중의 배드 블레이크(제프 브리지스)는 그 이상의 재능을 가진 뮤지션으로 나온다.

– 매기 질렌할은 이제껏 본 중에 가장 풍성한 매력을 과시한다. 질렌할에게는 까칠한 성격의 히피 말고도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작품.

영진공 신어지

“어웨이 위 고”, 삼십대 애어른 커플의 성장기

데뷔작이었던 <아메리칸 뷰티>(1999) 때문인지 샘 멘데스 감독은 막연히 미국인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실은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연극 연출가로서 명성을 쌓았던 인물이더군요 –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케이트 윈슬렛과의 2003년에 결혼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하나 추가되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래서인지 샘 멘데스 감독의 작품들은 헐리웃의 메이저 스튜디오를 통해 만들어지면서도 스튜디오가 추구하는 대중적인 성향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메리칸 뷰티>를 시작으로 <로드 투 퍼디션>(2002), <자헤드>(2005),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까지 정확히 3년에 한 편 꼴로 작품을 내놓던 샘 멘데스 감독은 왠일인지 1년 만에 <어웨이 위 고>를 완성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선보였던 작품들과는 여러모로 달라보입니다. 샘 멘데스 감독의 2009년작 <어웨이 위 고>는 국제적인 스타 배우 한 명 없이, 영화 연출가로서의 야심을 훌훌 벗어던진 듯한 선댄스 풍의 소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어웨이 위 고>는 30대 중반의 커플이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하게 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를 새 보금자리를 찾아 다닌다는 내용의 전형적인 로드 무비이자 성장 영화입니다.

손주를 떠맡으려 하지 않는 얄미운 시부모를 시작으로 주인공 커플은 형제, 자매와 친구들이 살고 있는 북미 전역을 차례로 방문해보지만 어느 한 곳도 마음에 드는 곳이 – 바꿔서 얘기하자면 정상적으로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 하나도 없습니다. 뻔한 결론이긴 하지만 마치 어린 왕자와 그의 ‘임신한’ 공주처럼 떠돌던 두 사람은 여자쪽의 버려진 생가를 찾게 되고, 아름다운 호수가의 그곳에서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장소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닥친 새로운 삶의 변화와 도전 앞에서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었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을테고요.

국제적인 스타 배우가 한 명도 없다고는 했지만 사실 <어웨이 위 고>는 좋은 배우들이 참 많이 참여한 작품입니다. 베로나 역의 마야 루돌프는 SNL의 코미디언으로 낯이 익은데 그간 크고 작은 배역으로 꾸준히 노크를 해온 것이 드디어 결실을 맺었는지 당당히 주연 자리를 꿰어차고 안정된 정극 연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버트 역의 존 크래신스키는 <자헤드>를 통해 샘 멘데스 감독과 한번 인연이 있었던 배우더군요.

두 사람의 로드 무비에서 웃음을 담당하는 것은 이들이 만나게 되는 수많은 조연들입니다. 캐서린 오하라와 제프 다니엘스가 버트의 부모로 출연해 오랜만에 코믹 연기의 진수를 선보이고 그외 매기 길렌할, 앨리슨 제니, 크리스 메시나, 멜라니 린스키, 폴 슈나이더 등 낯익은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고 있습니다. 어린 왕자가 방문하는 각 행성들의 주인들처럼 이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눈에 띄는 극적인 갈등과 해소의 과정이 없이 에피소드들이 단순 나열식으로 배치되고 있긴 하지만 워낙 재미있는 진상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는 작품입니다. 억지스러운 소동극이 되기 보다 담담하게 매듭짓는 마무리 방식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오히려 이 영화를 ‘완소’의 단계로 이끌어주는 요인이 되고 있지 않나 싶네요.

감독 샘 멘데스 (왼쪽 남자)

장소를 옮길 때마다 근사한 배경 음악이 나오는데 엔딩 크레딧을 확인해보니 알렉시 머독(Alexi Murdoch)라는 이름의 가수더군요. 최근에 좋은 음악을 사용한 영화들을 많이 봤지만 이 작품 만큼 확실하게 귀를 사로 잡는 영화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OST 앨범에는 알렉시 머독의 곡들과 함께 조지 해리슨, 밥 딜런, 스트랭글러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곡들도 수록되어 있네요.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