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소녀적 감성의 성장과 탐험



<오만과 편견>(2005), <어톤먼트>(2007), <솔로이스트>(2009)에 이은 조 라이트 감독의 네번째 장편 영화다. 시대극과 드라마로 알려진 감독이신데 갑자기 16살 나이의 소녀 살인병기가 등장하는 총기 액션물이라니,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의아하다는 생각을 갖고 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조 라이트 감독이라면 이런 류의 영화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풀어냈을런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면 <한나>는 바로 그런 궁금증을 해소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물론 그런 궁금증 해소만을 목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작품의 기본 설정과 줄거리의 신선도라는 측면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는 영화다. 신비로우면서도 무시무시한 능력의 소유자 한나는 과연 어떤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것인지를 붙들고 달려보는 것이 내러티브의 기본 골격인데 주인공 한나가 “DNA 조작으로 살인병기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CIA의 실험으로 태어났고 모든 실험 결과가 폐기되는 참극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였다는 대목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런 한나의 출생 배경 자체가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 너무 흔한 설정이라서가 아니라 조 라이트 감독의 연출이 이런 막후 배경이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드러나는 순간에 대해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세 명의 주인공, 소녀 한나(시얼샤 로넌)와 그녀의 혹독한 아버지 역할을 해온 에릭(에릭 바나), 그리고 두 사람과 오랜 악연을 피로 매듭짓고자 하는 CIA 간부 마리사(케이트 윈슬렛)의 얽히고 섥힌 관계는 영화 후반부의 어느 시점에서야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충분히 암시되고 있는 편이다.


조 라이트 감독이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은 스릴러의 창출이나 액션 씨퀀스의 스펙타클함이 아니라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어느 소녀의 감정을 탐험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핀란드의 설원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한나가 CIA에 의해 발견되는 순간 북아프리카의 사막 지대로 이동한 이후 스페인을 거쳐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밟아나가는 모습을 띄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나는 추격자들을 따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격렬한 육박전을 치르기도 하지만 감독의 관심은 그런 액션 활극의 전시 보다 백지장과도 같았던 소녀의 감정이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채색이 되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다뤄보는 쪽에 있었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시얼샤 로넌이 소녀 살인병기로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설정의 액션 영화 <한나>는 조 라이트 감독에 의해 액션물로서는 다소 지루한 편이기는 하되 만일 속편이 제작된다면 – 그때는 좀 더 액션물에 정통한 다른 연출자가 맡아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겠지만 – 그 시리즈의 첫 시작으로서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작품이 되었다.

언젠가 <한나>의 속편이 만들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한 말씀 남기자면, 최근 액션 영화의 대세는 단연 ‘압도적인 주인공의 능력’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와는 다른 영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한나>에 묻어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답답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 한나도 제이슨 본처럼 좀 더 화끈한 캐릭터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대부분 관객들이 보고 싶었던 한나의 모습은 바로 그런 부분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좀 더 대담하고 강력한 모습의 20대 한나를 속편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이번 <한나>의 비기닝은 썩 괜찮았던 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란 얘기다.


영진공 신어지


 


 

“언 애듀케이션”, 꿈이라면 부디 깨지 말길 바랬건만


줄거리는 단순하다. 대학 입학을 앞둔 여고생이 중년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진학을 포기하고 결혼할 마음까지 먹지만 그것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 아님을 크게 깨닫고 원래의 가던 길로 돌아왔더라는 얘기.

흔한 성장 스토리인 동시에 뼈아픈 첫사랑의 실패담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 <언 에듀케이션>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매혹적이다. 나중에 그 매혹적인 순간들이 얼마나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되었는지 관객 모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했던 만큼 매혹적이다.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담은 주인공 제니(캐리 멀리건)의 대사는 어쩐지 재미가 없다. “인생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얘기는 고리타분한 잔소리에 가깝다. 하지만 제니가 거쳐온 과정을 지켜본 관객들은 그 한 마디에 실린 무게를 함께 느낄 수 있다. 사실 진작부터 불안하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그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강했다. 그래서 아무런 암시도 없이 진실이 드러나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이 꺼꾸로 뒤집혀 버리는 이런 방식을 순순히 수긍하고 만다.

에밀리 왓슨과 케이티 홈즈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듯한 캐리 멀리건은 너무 당연하게도 <언 에듀케이션>의 감정 흐름을 따라가기 위한 열쇠다 – 가끔 주인공 배우에 대한 호불호 때문에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가 좌우되는 경우를 봐서 하는 얘기다.

만약 여고생처럼 보이기만 하던 제니가 햅번 스타일로 차려입었을 때에도 감탄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이 여배우가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고 따라서 영화 자체도 영 신통찮은 작품으로 기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 된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피터 사스가드는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표현보다는 선악의 개념 자체를 흐리게 만드는 부류다. 그래서 데이빗 역할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이 배우 어디서 봤었나 결국 생각해내지 못했었는데 전부 미국인으로 출연한 영화들이었고 실제로 피터 사스가드는 <언 에듀케이션>에 출연한 유일한 미국인 배우다. 그러면서도 완벽하게 영국인 사업가로 변신해 제니와 관객 모두를 홀딱 넘어가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언 에듀케이션>의 이야기를 데이빗의 입장에서 다시 그려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데이빗의 직업은 결국 제니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힌트가 된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의 가치를 잘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빼앗아 가는 일이 데이빗의 직업이었다.
 
어찌보면 남다른 심미안을 가진 타고난 감식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해 데이빗의 삶은 본인과 가족,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를 남겨주곤 하는 것이다 – 어찌보면 영화 속에서 더 자주 다뤄지곤 하는 쪽은 제니 보다 데이빗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 에듀케이션>은 영국의 여성 저널리스트 린 바버가 문학잡지 <그랜타>에 기고한 글을 기초로 닉 혼비가 시나리오로 완성한 작품이다.

린 바버 자신도 동명의 책을 써서 2009년 6월에 출간했다고 하는데 닉 혼비는 린 바버의 책을 참고하지 않고 오직 최초의 짧은 글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서 시나리오를 써내려 갔다. 그래서 데이빗의 캐릭터와 직업은 아마도 온전하게 닉 혼비 자신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언 에듀케이션>은 덴마크 출신의 여성 감독 론 쉐르픽의 섬세한 연출과 함께 아름다운 프러덕션 디자인 담당자의 이름까지 찾아보게 만든다. 앤드류 맥알파인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