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치 미 이프 유 캔”, 양키즈가 게임을 이기는 이유


왜 뉴욕양키즈가 맨날 이기는지 아니?
강타자 미키맨틀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아니, 상대팀이 양키즈의 줄무늬 유니폼을 보고 기가 죽어버리기 때문이란다.

– 영화『캐치 미 이프 유 캔』에서 프랭크와 아버지의 대화 –

『Being There』(국내 출시명『찬스』) 라는 영화가 있다.

챈스 라는 이름의 나이 한 40 된 개인집 정원사가 그 주인공인데 이 아저씨, 고아출신에 워낙에 약간 머리가 둔한데다가 평생을 그 집에서 나무키우는 일만 해서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나무키우는거 하고 TV 보는 거 밖엔 없다.

그런데 이 정원사가 살던 집 주인이 그만 죽고, 집도 정리가 되는 바람에 정원사는 졸지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이 아저씨, 그만 도로 한복판에서 어정대다가 차에 살짝 치이는데 하필이면 그 차가 미국 제일의 억만장자 재벌 차였던 덕분에 이 아저씨의 인생은 요상하게 풀려가기 시작한다.

차에 치일때 입고 있던 옷이 깔끔한 정장(그에겐 하나뿐인 정장이라 주인이 고급으로 사준 모양인데, 평소엔 입을 일이 없었으니)이었던 덕분에 이 아저씨는 억만장자에게 뭔가 그럴듯한 인물로 오해받는다. 그리고 그가 내뱉는 무의미한 몇마디들이 꽤 의미있는 뜻인것처럼 들리면서 억만장자는 그를 친구로 데리고 다니기 시작한다. 덕분에 이 바보 정원사 아저씨는 갑자기 억만장자 곁에 나타난 신비의 인물로 주변사람들에게 비춰지게 되고 졸지에 주목받기 시작한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그의 뒤를 아무리 캐봐도 나오는게 없다는사실은 (당연하지, 원래 아무것도 없었으니) … 정보기관에서조차 더더욱 그를 대단하게 신비한 인물로 평가하게 만들고,

TV토크쇼에 나와서도 나무 키우는 얘기만 했는데 그게 현 정치상황에 대한 아주 훌륭한 통찰로 오해받으면서, 그는 비밀에 쌓여있지만 아주 머리가 좋고 영향력도 대단한 인물로 간주된다. 그 결과 그는 실제로 큰 영향력을 갖게 되고, 나중에 억만장자가 죽고난 다음에 차기 대통령 후보로 낙점찍히는데서 얘기는 끝난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오해를 통해서 뭔가 있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아주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될 수 도 있다는 얘기였다. 챈스 역을 맡은 사람이 유명한 배우 “피터 샐러즈”(『닥터스트레인지 러브』의 바로 그 아저씨)였던 이 영화는 좀 길다는 거 빼놓고는 정말 재미있었다.


겨울에는 꽃이 피질 않아요. 하지만 봄이 되면 꽃이 피죠 …

그 말씀은 조만간 경제가 좋아진다는 뜻인가요??



실제로 이런게 사기라면, 사기는 우리 일상 속에 종종 일어나는 거 아닐까.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다이아몬드 자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이아몬드를 가치있다고 인정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생겨난 것일까? 나는 그 손톱보다도 작은 돌맹이가 몇백만원씩 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그 돌 자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다이어몬드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냥 여러 보석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처럼 보석의 왕으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DeViers라는 남아공의 다이어몬드 회사에서 “Diamond is Forever”(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007영화의 제목이었기도 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결혼식=다이아몬드” 라는 공식을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킨 다음부터였다.

1980년대,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해 펩시콜라사에서는 펩시 챌린지(Pepsi Challenge) 라는 행사를 시도했다. 눈을 가린 시음자들에게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마시게 하고는 어느 콜라가 더 맛있는지 고르게 한 것이다.

그 결과 펩시콜라를 선택한 시음자가 절반을 넘었다. 이는 두 회사 콜라의 맛에는 감별할만한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펩시콜라가 더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였다. 만약 소비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코카콜라 대신에 펩시콜라를 선택할 것이라는 게 회사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여전히 코카콜라를 마셨다. 어째서 그랬을까?

트위첼의 책 Living it Up(럭셔리 신드롬)에는 또 다른 펩시챌린지가 등장한다. 사람들에게 컵에 따른 에비앙 생수와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생수, 그리고 수돗물을 마시게 한 후 어떤 물이 제일 맛있는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생수맛을 감별하지 못했다. 심지어 수돗물이 제일 맛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낀건 생수 자체의 맛이 아니라 생수의 상표였던게 아닐까?

영화 『매트릭스』에는 주인공인 네오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초능력 소년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한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을 구부리려고 하지 말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 대신에 진실을 인식하려고 해봐요.
네오: 무슨 진실?
숟가락꼬마: 숟가락은 없다는 진실 말예요.
네오: 숟가락이 없다고?
숟가락꼬마: 그걸 깨닫고 나면 구부러지는 것은 숟가락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될 거예요.


숟가락은 없다(There is no spoon).
따라서 숟가락이 구부러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숟가락을 보는 내 마음이 구부러지는 것이다.

이는 왜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에비앙 생수를 더 맛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콜라가, 생수 그 자체가 맛있는 것이 아니라 그 콜라와 생수를 보는 내 마음이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솝우화에 허영에 찬 까마귀 이야기가 있다. 대충 이렇게 진행된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허영과 자만에 찬 어떤 까마귀가, 공작새들이 떨구고 간 깃털을 주워서 자기 털에다 꽂았다. 그리고는 그전 친구들을 얕잡아 보며 자신만만하게 아름다운 공작새들 무리 속으로 찾아갔다.

공작새들은 당장에 이 침입자를 간파하고, 작은 까마귀의 그 빌려 꽂은 깃털을 뽑고, 주둥이로 쪼면서 마구 쫓아냈다. 불행한 작은 까마귀는 가혹한 벌을 받아 몹시 슬퍼하면서, 그전 친구 있는 데로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기 친구들 틈에 끼려고 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이 작은 까마귀가 전에 얼마나 으시댔는가를 생각하고, 큰 소리로 호통치면서 자기네 무리에서 쫓아내자 이 작은 까마귀가 바로 조금 전에 얕잡아 본 친구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자연이 만들어 준 그대로 만족해 있었다면 손윗 사람들의 징계도 받지 않고 또 친구들의 경멸도 받지 않았을 텐데.”


이솝 이야기에는 늘 교훈이 따라다니는데, 이 이야기의 교훈은 너 자신을 알아라(Know then thyself)이다.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네 분수를 알아라, 너의 본질에 충실하라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예들은 이 까마귀가 어쩌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한다.
까마귀의 잘못은 자기 주제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말 제대로 잘 연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공작새에게 들키지만 않았다면, 그의 정체성 그의 본질은 까마귀가 아니라 공작새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마치 드비어스의 상술이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다이아몬드는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보석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었고, 코카콜라의 유서깊은 반복광고가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그냥 맛있는 콜라를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어서 은행의 융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럴듯한 턱시도를 입혀서 그럴듯한 차의 운전기사처럼 연출하고 자기는 그 차의 뒷자석에 앉아 은행을 찾아간다. 그리고 왜 이래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아들에게 맨 처음 나온 교훈을 알려준다.


양키즈가 강해서 이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양키즈는 강할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긴다는 교훈. 이건 너 자신을 알고 네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이솝의 이야기와는 정 반대의 아주 발칙한 교훈이다.

유감스럽게도, 공작새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실패한 까마귀처럼 아버지는 실패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고 실천에 나선다. 전학간 학교에서 일주일간 (학생이 아니라) 임시교사 노릇을 해보기도 하고, 가짜 결석계를 제출하러 온 여학생에게 진짜 결석계처럼 보이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몰락이 확인되자 아들은 집을 나가서 판을 더 크게 벌인다.

수표를 위조하고, 위조 수표가 먹혀들어가려면 수표를 내놓는 사람의 신분이 그럴듯해야 함을 깨닫고는 자신의 정체성을 위조한다. 당시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인 비행기 조종사에서 의사로, 특수요원으로 다시 변호사로 그는 정체성을 바꾸어나간다. 프랑스에서 FBI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최소한 5년간, 그는 성공했다. 250만 달러를 위조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심지어 진짜 변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아무리 5년간 잘 살았다 하더라도 그건 결국 일장춘몽이고 사기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미성년자에다 고등학교 중퇴에 불과한 그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수감생활의 대부분을 FBI에서 위조수표 수사 담당 요원으로 일하면서 보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만큼 수표위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진짜 요원이 된것이다.

이 수표는 ... 은행 직원 짓이네요.

게다가, 형기를 마치고 나서는 위조하기 어려운 수표 제조법에 대한 특허를 내서 그 특허로 수백만달러를 다시 벌어들였고, 지금도 잘 나가는 보안회사의 오너가 되어 있다. 그의 자서전은 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가 되어서 다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말이다 …


그는 양키즈의 승률에는 정말로 그 줄무늬 유니폼의 힘이 작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로 뭘 보여주려고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내가 본 것은 이미지의 승리, 이 발칙한 원칙의 승리였다.

물론 그가 그 증명을 위해서 단순히 사기만 친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의와 성의를 다해서 사기를 쳤다. 그 결과 그는 한가지 영역에서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그에게 가르쳐준 또 다른 교훈 처럼, 그는 우유에 빠졌으나 포기하고 빠져죽은 생쥐가 아니라 죽기살기로 헤엄을 쳐서 우유를 치즈로 만들어 디디고 살아남은 생쥐가 된 것이다.


PS.
앞에 인용한 영화 『Being There』의 원작자는 폴랜드 태생의 미국이민자인 Jerzy Kosinsky라는 양반인데, 이 양반 역시 상당한 구라꾼이었던 모양이다.


평소에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구라를 잘 치기로 유명했다는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구라인지 잘 구분이 안됐다던가. 그의 인생도 구라와 사실의 오묘한 혼합이었던 모양이다.

배경도 명확하지 않던 이 양반(본인은 예일대 출신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구라였다던가 …)은 미국에 와서 백만장자와 결혼했고(곧바로 이혼했는데, 이혼후 여자는 자살했단다),

자크 모노 같은 유명한 철학자의 임종을 사진찍어서 유명해지기도 했고, “워런비티” 주연의 『Reds』라는 영화에서 단역이지만 중요한 역을 맡기도 했고, 소설과 희곡도 썼다. 그러다가 58세가 되던 1991년에 갑자기 자살해버렸단다.

이 영화 『Being There』 도 결국 본인의 인생을 은유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영진공 짱가

 

‘패떴’ 대본 공개 논란- 리얼과 이미지 사이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Free “Minerva”

‘패밀리가 떴다 (이하 ‘패떴’)’ 대본 공개 논란이 아주 재미있다.

꽤나 많은 시청자들은 ‘리얼 버라이어티’이니까 ‘리얼’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리얼’이 아니라 대본을 ‘재현’해낸 것일 따름이어서 화가 난 듯하다. 그러니까 ‘리얼 버라이어티’ 안에서 ‘리얼’은 사라져 버린 거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미디어는 갈수록 ‘리얼’을 없애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재현해 낸 ‘리얼’을 담아 넣는다. 그 가장 극적인 사건이 KBS 보신각 타종 행사 때 삽입된 ‘박수 소리’다.

<출처: 디씨인사이드>

그뿐일까? ‘패떴’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은 거기에서 보여주는 출연자들 캐릭터가 그간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른 실제 자신의 캐릭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본에 의한 재현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엉성한 이천희도, 계모 김수로도 다 대본이 만들어 낸 캐릭터일 뿐이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이 예능 버라이어티를 넘어서서 벌어진다. 지난 대선 때 미디어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1년을 통해 깨달아 간다. 대본이 만들어 낸 캐릭터로 출연자들이 인기를 얻듯, 미디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캐릭터로 누군가는 표를 얻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리얼이 사라지는 순간에 발생한 일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이 이미지는 굳이 리얼할 필요가 없다. 섹시한 여성과 따뜻한 남성이 필요한 시청자와 관객과 독자가 존재하는 한 미디어는 이효리와 배용준의 이미지를 꾸준히 상품화 할 수 있다. 문제는 리얼이 제거된 가상의 이미지가 통용될 수 있는 공간과 리얼이 절대적으로 지배해야 하는 공간이 서로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리얼을 좇아야 하는 언론보도에서마저 리얼이 사라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KBS가 보신각 타종 행사는 현장 중계가 아니라 쇼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한 것은 그 현장이 리얼의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의 공간이었다는 변명이었다.

<대통령 선거 광고의 한 장면>

개인적으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싫어한다. 이미지와 리얼을 가장 혼란스럽게 넘나드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뉴스 보도를 통해 그들은 리얼을 얘기하다가 어느 순간 쇼 프로그램에서 이미지화 돼서 나타난다. 그들의 어디까지가 리얼이고, 어디까지가 이미지인지 불분명해질수록, 살아 있어야 하는 ‘리얼’은 희미해진다.

연예인 성형 문제도 비슷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해 가며 가상의 만들어진 이미지로 자신을 바꾼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성형외과 의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그 이미지가 대중에게 많이 소비될수록 문제는 심각해진다. 우리가 열광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뒤에는 성형외과 의사의 신기술이 존재하는 것이고 같은 논리로 우리가 지지했던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 뒤에는 미디어 데스크들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마치 네오가 살았던 메트릭스 뒤에는 컴퓨터가 존재하듯이. 아쉽게도 우리에겐 빨간 약도 파란 약도 없다.

현대를 살면서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언어도 미디어를 통해 입력된다. 미디어는 선호하는 언어 습관마저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리고 이 미디어는 끊임없이 가상의 이미지를 제공할 것이다. 리얼이 제거된 이 이미지에 둘러쌓인 현대인은 메트릭스 안의 네오다. 이 메트릭스를 벗어나려면 현대인은 피곤하다. 주어지는 이미지 뒤에 있는 것들까지 투시할 수 있는 시각을 스스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잃어버린 리얼을 돌려받는 길이고 현대인의 빨간 약이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