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맨”, 우리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Yes해야 하는가.


부엉이의 입을 틀어막아도 진실을 감출 수는 없다.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예스맨”이 생각보단 흥행이 별론가보다. 나는 영화 볼 여건이 좋지 않은 아줌마지만 그래도 짐캐리께서 나오신다는 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짐 캐리 작품의 경우, 남들이 범작이라 하더라도 나는 늘 기대이상의 만족감을 가져왔다.)

짐캐리의 코메디는 젠체하지 않으면서, 잘난척 하지 않으면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코메디와 철학적 질문이 따로 놀아서 영화의 톤(Tone:어조, 분위기)이 왔다리 갔다리 중구난방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은 질문대로, 코메디는 코메디대로 서로 조화되어 일관된 톤을 유지한다.

이번 예스맨도 나는 정말 좋았다. 절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짐캐리는 계속해서 성장하는 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아주 미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 *




1.
우리는 원래부터 예스맨인걸

사람들이 예스맨에 땡겨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누군가 “과속스캔들은 제목이 안티”라고 하던데, 사실 예스맨도 제목이 안티다.
어느 질문에 대해서도 다 예스라고 대답해야 한다니. 그게 뭐 대한민국 살면서 특별한 상황이겠는가. 도저히 이게 코메디의 소재가 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총체적 예스맨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응애응애 하고 태어나서, 겨우 5세 이하일 때만 “시져~ 안대~”를 외쳐보다가,(허긴 요샌 조기교육 열풍으로 5세 이전에도 ‘싫어’와 ‘안돼’를 외칠 자유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학교가선 사랑의 매를 맞으며 일제고사에 yes,
대학다니면서는 높은 등록금에도 yes,
시위 현장에 나가서는 물대포를 맞으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도 yes,
방송법이 날치기 통과되어도 yes,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예스를 외쳐야 하는 비운의 예스맨들이 아니던가.

아니, 그냥 아주 미시적으로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춰봐도 그렇다.
직장인들, 가기싫은 회식도 yes, 생산성 없는 야근도 yes, ‘까라면 까’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Yes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영화의 컨셉을 보면 질리는 게 먼저지, 절대 땡기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No라고 말하면 세상살이가 즐거워진다”는 “노맨(No Man)”이라는 영화가 나오면 누구든지 보러가게 될지도 모른다.

2.
짐 캐리는 누구에게 Yes라고 하는가

하지만, 짐캐리가 억지로 “yes”를 하게 되면서, 누구에게, 어떤 사람들에게 “yes”를 하게 되는지를 보면 “그 예스”와 “이 예스”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 캐리의 yes는 소수자를 향해있다. (영화의 배경이 소수자들의 집합소인 LA라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그가 첫번째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는 노숙자다. 남에게 yes라는 말을 거의 듣지 못할 사람. 그런 소수자에게 yes를 할 수 밖에 없음으로 해서, 차를 태워주고, 핸드폰을 빌려주게 된다. 그 이후, 그가 “yes”라고 말하게 되는 상대들도 거의 대부분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후에 여자친구가 되는 앨리스는 제도권의 금융맨이 상대할 리 없었을 폭주족 히피이며, 옆집 할머니는 성적인 농담이 가미되어 약간 희화화 되긴 했지만 하루종일 말상대 할 사람 없는 독거노인이며, 그가 소액대출을 해주게 되는 이들은 작은 자영업을 하는 신용등급이 낮은 자들이다. 심지어 맘에 없는 휴일 근무 요구에 대해 “yes”라고 말하게 하는 상대인 노먼역시 보스의 외피를 입긴 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면 ‘불쌍한 독거 중년’이다.

그의 yes는 효율과 효용을 떠나 (아놔~ 왜 갑자기 ‘실용’이라는 말이 떠오르냐) 누구에게나, 어떤 질문에나 동등하다. 그래서 효용,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라면 절대하지 않을 ‘한국말 배우기’와 휴일을 ‘네브라스카 링컨에서 보내기’에 기꺼에 yes라고 한다. 그래서 그 덕에 틱틱거리는 한국인 노처녀에게도, 자살을 시도하려는 히스패닉에게도 마음을 열고 그들의 삶에 관여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마이너들에 대한 편견 없는 yes.
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3.
예스맨이 기부천사보다 아름다운 이유

예스맨의 러닝타임 2/3쯤 이르러 칼(짐 캐리)의 행보를 보면, 히피인 여자친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노숙자 쉼터에 가서 무료배식 봉사를 하며, 대출 허가 도장을 쾅쾅 찍어대며, 북한과 내통하는 간첩이 아닌 담에는 쓸모도 없는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인이라는 소수인종과 더 가까운 소통에 성공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짐 캐리의 표정이다.

이때 짐 캐리는 결연하지도 않고, 성스러운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즐겁게 임한다. 그가 하는 yes는 자동에 가까운 yes이기 때문에, 자신의 yes가 소수자들을 돕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생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우월감 또한 찾아볼 수도 없다. 소수자에 대한 ‘yes’를 ‘베푼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당위’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숙자인 닉과도, 한국 노처녀 수미와도 그는 대등한 친구의 위치일 뿐 제공자와 수혜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의 칼은 몇백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훌륭해 보인다.

강요된 Yes Man


예스맨의 막바지에 이르면 꼭 No해야하는 일에는 No를 해야한다는 것이 예스맨의 철학이라는 것도 볼 수 있다. 나의 편견이 다른 이들과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땐 스스로에게 No Man~ No Man~ 야유를 보내본다. 꼭 No라고 대답해야 할 때인가? 그렇다면 자신있게 No라고 외쳐보련다.


Yes해야 할 때와 No해야 할 때를 알고 외치는 자의 앞뒷옆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영진공 라이

007의 권총들: Walther PPk 와 P99 이야기



그의 정체가 진짜든 가짜든, 그가 뭘 하는 사람이든 간에,
국민의 입을 강제로 막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 IMAGE 1 =-


2006년, 말끔한 본드인 ‘피어스 브로스넌’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느닷없이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험상궂은 금발 깡패를 본드라고 들이대는데 성공한 첫 번째 영화가 <카지노 로얄>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 봐도 참으로 훌륭한 본드 영화입니다. 일단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참신하고 멋있죠. 영화는 본드가 이제 막 살인면허를 취득한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본 본드 영화의 출연진 소개 중에서도 가장 멋진 클립이 등장합니다. 트럼프 카드와 권총과 본드의 액션이 2D와 3D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 인트로는 정말 근사하죠. 그리고 이 인트로가 끝나면 정말로 우직하고 무지막지한 본드가 한명 튀어나와서는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합니다.


Casino Royale – 007 Intro – MyVideo
이 훌륭한 인트로!!!

이렇듯 완전히 새로워진 영화의 주인공이나 분위기로 봐서는 감독도 참신한 인물일 것 같지만 놀랍게도 <골든아이>를 만들었던 마틴 캠벨이 이 영화의 감독입니다. 그러고 보면 브로스넌을 처음 본드로 소개했던 <골든아이>도 개봉 당시에 참신한 본드영화라는 칭찬을 들었죠. 주디 덴치를 M으로 소개한 것도 바로 그 영화부터였습니다. 마틴 캠벨은 이름이 좀 평범(캠벨 깡통 수프가 자꾸 생각난다는…)하고 소위 말하는 작가적 작품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알고 보면 헐리웃 영화계에 암약하는 진짜 실력자 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양반이 만든 다른 영화로는 <마스크 오브 조로>와 <버티컬 리미트>가 있는데 모두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꽤나 쓸만한 성과를 올린 영화들이죠. 전부 헐리웃식 영웅의 성장을 다룬 영화라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어쨌든 덕분에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는 아주 성공적인 출발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후속편을 기대하게 되었죠.



마틴 캠벨 감독

그로부터 2년 후, 마침내 두 번째 다니엘 크레이그의 본드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가 개봉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만큼의 참신함을 보여주지 못해서 많은 이들이 실망했죠. 아무래도 감독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마크 포스터. <네버랜드를 찾아서>나 <몬스터스볼>, 최근의 <연을 쫓는 아이>로 작품성은 충분히 인정받은 양반이지만, 아무래도 본드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 보기엔 이 양반은 자기 내면과 과거를 되짚어가는 이야기에 능숙한 감독 같아요. 그래서인지 <퀀텀 오브 솔러스>도 지난 번의 연인 베스퍼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죠.


http://kr.youtube.com/watch?v=59TSvb6PeMs
화질이 좀 구리다능 …

영화는 인트로부터 베스퍼에 대한 기억 혹은 악몽에 시달리는 본드를 보여줍니다. 근데 그게 좀… 사방에서 본드를 쫒아다니는 거대한 모래 여인이라니… <미이라>의 한 장면 같기도 하죠.. 본편에서도 이 베스퍼의 이야기는 나머지 이야기와 그렇게 딱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크 포스터 감독, 본인도 질렸는지 다시는 007 영화 감독 안한다고 했다고 …

물론 본드는 이번에는 제대로 제이슨 본에게 사사받은 듯 육해공으로 온갖 우직 액션을 보여주며 활약하지만 과거의 연인 베스퍼 이야기에 새로운 본드걸인 까밀(올가 쿠릴렌코)까지 등장하니 이게 서로 엉켜버리고요. 그 결과 영화는 전반적으로 과거에 붙잡혀버린 본드의 답답함을 벗어버리지 못하죠. 그리고 총기 애호가의 관점에서 봤을때도 이 두 번째 본드영화는 과거에 대한 집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바로 그 이야기(뭔 이야기? 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질문, 제임스 본드의 권총은 무엇일까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당연히 월터 PPk입니다.



소음기를 장착한 상태의 PPk

이 월터 PPk는 총기 개발사에 길이 남을 걸작품입니다.
독일의 칼 월터(독일어로는 카를 발터)사는 1930년대만 해도 그냥 그렇고 그런 쪼마난 호신용 권총을 만들어파는 작은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1차 대전 후 독일이 엄청난 경제난을 겪던 시절에 호신용총기 수출로 돈을 좀 만지게 되자 호신용을 뛰어넘어 군용 권총 시장까지도 넘볼 수 있는 신제품을 개발하기로 작정하죠. 당시 자동권총들은 주로 싱글액션이거나 안전장치가 부실해서 조작하기가 까다롭고 위험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월터 사에서는 보다 안전한 더블액션 작동방식의, 디코킹과 방아쇠 잠금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레버를 장착한 권총을 개발하기로 합니다. 그것이 바로 월터 PP 였습니다.



전설의 시작, 월터 PP. PPk 보다 좀 큽니다

이 권총은 그 당시의 권총들 중에서는 그야말로 군계일학 이었습니다. 레버만 내리면 해머가 원상태로 복귀(디코킹)되면서 동시에 아무리 방아쇠를 당기거나 충격을 주거나 땅바닥에 집어던져도 절대로 발사가 되지 않는 거의 100% 안전한 권총. 하지만 레버만 원래대로 올려놓으면 언제든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가 되는 매우 간편한 권총. 그것이 바로 PP였던 것이죠. 게다가 디자인까지 매우 멋진데다가 구조도 단순해서 제조하기도 쉽고 고장도 잘 안납니다. 이런 권총은 그 이전까지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 총은 개발되자마자 국제 총기시장에서 대박을 터트렸고, 독일경찰과 군장교용 권총으로도 채용됩니다. 원래 PP가 경찰용 권총의 약자였으니, 월터는 노리던 목표를 제대로 맞춘 셈입니다.

그 와중에 이 PP를 귀족들의 호신용 권총으로 팔기 위해 조금 더 작게 줄인 모델이 개발됩니다. 바로 그것이 PPk 죠. 여기서 마지막의 K는 독일어로 짧다는 뜻의 단어 kurz의 머릿 글자입니다. 이 꼬마 PP, 그게 바로 007의 손에 쥐어진 권총이었던 것이죠. 자그마치 1962년 숀 코너리가 쪼만한 베레타를 반납하고 월터 PPK를 지급받은 이후, 1997년까지 쭉 그랬습니다.



이것이 PPk, 작은 PP



한창 때는 이런 선물용 권총까지 인기




구조는 초 간단 !!!




최근에는 프레임(아랫부분)은 PP이고 총신과 슬라이드(윗부분)만 PPk를 끼운,

PPk/S 라는 모델이 인기


총 사진 출처는 대부분 http://world.guns.ru/handguns/

그러다가 피어스 브로스넌이 양자경과 함께 등장한 1997년의 007 영화 <투모로우 네버다이>부터 본드는 예전의 작은 호신용 권총 월터 PPK를 버리고 월터 P99를 쓰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카지노 로열>까지는 그랬죠. 이건 나름 적절한 변화였습니다.


이것이 월터 P99




카지노로얄 출연기념 월터 P99

왜냐하면 PPk는 다 좋은데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거든요.
첫째, 장전되는 탄약의 숫자가 적습니다. 딱 7발 들어가죠. 하지만 007의 적들이 쓰는 권총은 기본 13발에서 15발 혹은 17발이 들어가는 전투용 권총들이니 일단 실탄 숫자에서 밀립니다.
둘째, 탄약의 위력도 약합니다. .32 Auto라는 탄약을 주로 쓰는데, 이 총알은 호신용으로야 어떨지 몰라도 적들과의 과격 액션을 즐기는 본드에게는 좀 부족한 면이 있죠. 요즘이야 전투용 권총은 9mm 파라블럼(우리나라 군도 사용하는 나토 공통 제식권총탄약, .32 Auto보다 많이 강합니다.)이나 .45 ACP(미국의 콜트 45에 사용되는 9밀리 파라블럼보다도 좀 더 크고 강한 권총탄약) 정도가 기본이니까요.
이런 면에서 테러가 난무하는 21세기 본드에게는 작고 약한 호신용인 PPk보다는 같은 월터사에서 21세기를 위해 만든 전투용권총 P99가 어울리죠. P99는 전투용권총의 기본규격인 9밀리 파라블럼탄을 16발 장전할 수 있고 플라스틱 몸통을 사용해서 무게도 가벼운 최신형 전투용 권총이거든요.


PPk 에 들어가는 .32 Auto(본드가 쓰는)와 P99에 들어가는 9mm Parabellum의 비교



세 탄약의 위력비교, 참고로 이 그래프의 설명에 따르면 .32 Auto는 그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수준이고 .380 ACP(나중에 미국에 팔때쯤 추가된 탄)은 전투용 무기로서의 위력을 간신히 발휘하는 탄이라고 평합니다.

출처는 오클라호마 총덕들의 사이트: http://oklahomaconcealedcarry.com/Caliber_Ammo_Selection.html


그리하여, 본드는 <투모로우 네버다이>이후로 어언 18년간이나 P99를 사용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영화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그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갑자기 PPk 로 되돌아 간 겁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분명히 이 영화는 전편에서 몇 분후의 이야기라는 설정이니 전편에서 쓰던 권총을 계속 쓰는 것이 맞는데 말이죠.

아마도 감독의 고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포스터 감독은 의외로 “역시 007은 PPk!” 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혹은 고전적인 007 로 되돌아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덕분에 우리는 우락부락한 다니엘 크레이그가 조막만한 권총을 들고 날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건 어떻게 보자면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자면 상당히 어색하고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 전체가 그렇죠.




카지노 로열에서는 P99를 쓰던 본드가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는 쪼마난 PPk를 …




그러면서 기관단총은 9mm 파라블럼을 쓰는 UMP를… 이 뭐임?

결론, 역시 본드 영화에는 좀 더 경쾌한 감독이 어울린다능..
그리고 21세기 본드에게는 역시 P99라능…




역시 이게 어울림

덧붙여, 마틴 캠벨 최고!
하지만 캠벨 수프는 짜서 싫어!!




짠 캠벨수프



영진공 짱가


‘패떴’ 대본 공개 논란- 리얼과 이미지 사이

“미네르바”를 석방하라.
Free “Minerva”

‘패밀리가 떴다 (이하 ‘패떴’)’ 대본 공개 논란이 아주 재미있다.

꽤나 많은 시청자들은 ‘리얼 버라이어티’이니까 ‘리얼’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리얼’이 아니라 대본을 ‘재현’해낸 것일 따름이어서 화가 난 듯하다. 그러니까 ‘리얼 버라이어티’ 안에서 ‘리얼’은 사라져 버린 거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버라이어티 예능 프로그램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미디어는 갈수록 ‘리얼’을 없애고, 그 자리에 자신들이 재현해 낸 ‘리얼’을 담아 넣는다. 그 가장 극적인 사건이 KBS 보신각 타종 행사 때 삽입된 ‘박수 소리’다.

<출처: 디씨인사이드>

그뿐일까? ‘패떴’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은 거기에서 보여주는 출연자들 캐릭터가 그간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른 실제 자신의 캐릭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역시 대본에 의한 재현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있었다. 엉성한 이천희도, 계모 김수로도 다 대본이 만들어 낸 캐릭터일 뿐이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이 예능 버라이어티를 넘어서서 벌어진다. 지난 대선 때 미디어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1년을 통해 깨달아 간다. 대본이 만들어 낸 캐릭터로 출연자들이 인기를 얻듯, 미디어가 만들어 낸 가상의 캐릭터로 누군가는 표를 얻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리얼이 사라지는 순간에 발생한 일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이 이미지는 굳이 리얼할 필요가 없다. 섹시한 여성과 따뜻한 남성이 필요한 시청자와 관객과 독자가 존재하는 한 미디어는 이효리와 배용준의 이미지를 꾸준히 상품화 할 수 있다. 문제는 리얼이 제거된 가상의 이미지가 통용될 수 있는 공간과 리얼이 절대적으로 지배해야 하는 공간이 서로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는 리얼을 좇아야 하는 언론보도에서마저 리얼이 사라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KBS가 보신각 타종 행사는 현장 중계가 아니라 쇼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한 것은 그 현장이 리얼의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의 공간이었다는 변명이었다.

<대통령 선거 광고의 한 장면>

개인적으로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싫어한다. 이미지와 리얼을 가장 혼란스럽게 넘나드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뉴스 보도를 통해 그들은 리얼을 얘기하다가 어느 순간 쇼 프로그램에서 이미지화 돼서 나타난다. 그들의 어디까지가 리얼이고, 어디까지가 이미지인지 불분명해질수록, 살아 있어야 하는 ‘리얼’은 희미해진다.

연예인 성형 문제도 비슷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해 가며 가상의 만들어진 이미지로 자신을 바꾼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성형외과 의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그 이미지가 대중에게 많이 소비될수록 문제는 심각해진다. 우리가 열광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 뒤에는 성형외과 의사의 신기술이 존재하는 것이고 같은 논리로 우리가 지지했던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 뒤에는 미디어 데스크들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마치 네오가 살았던 메트릭스 뒤에는 컴퓨터가 존재하듯이. 아쉽게도 우리에겐 빨간 약도 파란 약도 없다.

현대를 살면서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언어도 미디어를 통해 입력된다. 미디어는 선호하는 언어 습관마저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리고 이 미디어는 끊임없이 가상의 이미지를 제공할 것이다. 리얼이 제거된 이 이미지에 둘러쌓인 현대인은 메트릭스 안의 네오다. 이 메트릭스를 벗어나려면 현대인은 피곤하다. 주어지는 이미지 뒤에 있는 것들까지 투시할 수 있는 시각을 스스로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잃어버린 리얼을 돌려받는 길이고 현대인의 빨간 약이다.

영진공 철구

오바마에게 닥친 첫 시련

1.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 내내 침묵하다가 이제 겨우 “우려한다”라는 언급을 한 오바마를 두고 별 수 없는 미국 정치인이라고 말들 합니다.
허나, 지금 그런 판단을 내리는 건 조금 이르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선, 그는 아직 미국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이번 달 20일에 취임식을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현재 그의 손에는 실제의 권력이 하나도 주어져있지 않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가 지난 8년 간 부시 행정부가 장악했던 권력구조를 제대로 넘겨받기까지 적어도 육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그간 미국의 권력을 주무르던 네오콘들에게 여전히 오바마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잔존할 것이고, 오바마는 그런 그들을 한편으론 얼르고 또 한편으론 달래어 가면서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바마는 다 아다시피 기존의 권력구조와는 무척이나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려면 좋으나 싫으나 그들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는 거죠.  그래서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에 기용하고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를 유임시킨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오바마가 할 수 있는 발언이나 행동의 폭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2.
미국이 그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과 돈을 주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1959년에서 1975년까지 지속된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게 된 미국 측 당사자인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1961년의 퇴임사에서 미국의 군산복합체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을 정도입니다.  그 뒤를 이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다 아시는 바대로 군산복합체와 그 정치세력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시도하려던 도중에 암살을 당합니다.  그리고 후임자 린든 B. 존슨은 베트남 전쟁을 확대시켜버리죠.

지미 카터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로널드 레이건은 “위대한 미국의 재건”을 기치로 삼아 지구촌 곳곳에서 갈등과 충돌을 기획하고 실행하였습니다.  중동과 남미에 대한 프로젝트는 공식문서로도 확인이 되죠.  그 결과로 당시 사상 유례 없는 재정적자를 후임인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그리고 죠지 부시는 1990년에 걸프전을 일으킵니다.  약 6개월이 걸린 이 전쟁을 승리라고 자평하고 재선을 장담하던 그는 요새 유행어로 당시 ‘듣보잡’이라고 할 수 있던 빌 클린턴에게 커다란 차이로 패배하면서 대통령 자리를 넘기게 됩니다.

사상 최고의 재정흑자를 구가하던 클린턴의 뒤를 이은 아들 조지 부시는 취임에 이어 곧바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9/11 사태에 대한 정의 구현 차원이라고는 했지만 범인이라고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식처가 아닌 이라크를 침공합니다.  그 이면에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소외 받았던 군수산업과 석유산업의 영향력이 작용했으리라는 일부의 시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2008년,  미국은 심대한 경제 위기 속으로 급격하게 빠져듭니다.  미국의 기존 주류가 이를 회피할 다른 수단을 준비하고 실행할 여유도 없이 경제가 추락하였고, 그 와중에 미국민들은 오바마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3.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이 실은 미국의 중동지역 패권 유지에 대한 실제적 위협이랄 수 있는 이란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과 신문기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란 문제는 최근에 갑자기 대두된 것이 아니라 부시 재임 시절 북한 문제와 함께 내내 이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미국의 권력이 이동하는 지금 시기에 군사행동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제 판단으로는 미처 권력상실을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던, 그리고 오바마 시대와 그 이후를 염두에 둔 네오콘들의 무력시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차기와 차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유력한 두 사람,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을 겨냥하여 엄포를 치는 동시에 피하기 곤란한 함정을 판 거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오바마는 이 함정파기를 뻔히 보면서도 일단 모른 척 넘어가야 합니다.
그의 앞에는 경제 재건이라는 커다란 난제가 함께 놓여져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와 석유 자원 장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바마와 클린턴, 두 사람은 대선 레이스 내내 이란과 북한 문제에 대한 “외교적 해결”을 강조해 왔고, 이를 미국민들은 승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제 회복도 대립이 아닌 공존을 통해 모색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오콘들이 자신들의 방식을 무력으로 제안하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는 건 외교가 아니라 힘이다 … 평소 하던 방식대로 하자 …”라고 말입니다.

대통령 오바마와 국무장관 클린턴은 곧 이 “전쟁”의 당사자가 됩니다.
그들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공격을 멈추게 한다면, 기존 주류들과 등을 져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공격을 방관한다면, 평화를 원하는 국민들에게서 버림받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직 이라크의 상황도 진행 중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어찌 될까요?

그 선택의 윤곽이 드러났을 때 비로소 오바마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영진공 이규훈

 

이스라엘의 무차별 공격으로 희생당한
팔레스타인의 민간인과 어린이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