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실라”, 누구라도 드랙퀸이 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4년에 개봉한 호주 영화가 있다.


영화의 원제는 “The Adventures Of Priscilla, Queen Of The Dessert”.

긴 제목을 줄여 간단히 “프리실라”라고 불리는 이 영화는 세 Drag Queen(여장남자)가 공연을 위해 떠나는 전국 버스 여행을 그 소재로 삼고 있다.


 


199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폐막식에 등장할 정도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긴 영화이다.

재밌는 건 드랙퀸으로 나온 세 주연 배우의 면면인데,


 


 



 


 


저 세 아가씨 혹은 청년 혹은 아줌마 혹은 아저씨 …… 그냥 언니라고 부르기로 하자.


암튼 저 세 언니들은 누굴까?


 


가운데 언니는 바로 이 분이시다.


 


 



 


그러하다. 바로 스미스 요원 되시겠다.


 


 



 


한 눈에 척봐도 스미스요원이지 않은가.


 


 


 


그리고 왼쪽 언니,


그 언니는 이 분이시다.


 


 



 


남장이 잘 어울리는 이 분은 바로 “LA 컨피덴셜”의 에드 엑슬리 형사님이시다.


 


 



 


불타는듯한 긴 빨간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녀.


 


 


 


그리고 오른쪽 언니.


실은 이 분은 좀 고위층 이시다.


 


 



 


짜잔, “스타워즈”에 나오시는 발로럼 의장님.


 


 



 


그 분의 고우신 자태를 보라.


 


 


 


그럼 이 시점에서 세 언니들의 활약상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세 언니의 본명을 차례로 말씀 드리면,


휴고 위빙(Hugo Weaving),


가이 피어스(Guy Pearce),


테렌스 스탬프(Terence Stamp) 이다.


 


휴고 언니는,


“반지의 제왕”에서 리벤델의 영주 엘론드 였고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가이 포크스 였으며 “해피 피트” 에서는 대장펭귄 노아, “트랜스포머”에서는 메가트론인 분이시다.


 


가이 언니는,


“메멘토”에서 레오나드 였으며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페르난도 였고 “허트로커”에서 매트 상사, “킹스 스피치”에서 에드워드 8세, “로크아웃”에서 마리온 이시다.


 


테렌스 언니는,


“콜렉터”에서 프레디로 나와 칸느 남우주연상 받아주시고, 원조 “슈퍼맨”에서부터 조드 장군이셨으며 “원티드”에서 페크와르스키 였고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루드빅 벡 장군이셨다.


 


이러고보니, 영화 “인 앤 아웃”에서 조안 쿠삭의 명대사가 퍼뜩 떠오르고야 만다.


 


 



Is everybody gay?!


(게이 아닌 남자는 없는게냐?!)



 


 


어찌 보면 쌩”마초”의 대명사랄 수 있는 역할들이 너~무 잘 어울리는 이 세 배우가 영화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다른 역할도 아닌 드랙퀸으로 나온 이 영화를 통해서 였다는 게 어찌 아니 흥미로울 수 있겠는가 … 뭐 물론 테렌스 언니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후에 커밍아웃한 거겠지만 …


 


어쨌든 당 영화에서 많은 이들이 좋아라 하는 장면은 세 언니(?)들이 호주의 사막에서 원주민들과 어울려 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에 맞춰 공연을 하는 장면인데, 그거 한 번 보도록 하자.


 


 


 






 


 


아 참, 프리실라는 이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의 이름 되시겠다.


 


 



이 녀석 말이다.



 


 


이 영화에 삽입(응?)되어있는 노래들은 꽤나 많은데, 그 중에 영화의 오프닝 신에 등장하는 “I’ve Never Been To Me”는 한때 드랙퀸들의 주제가로 널리 쓰여졌다.


 


그런데 이 노래, 많은 분들이 Charlene의 1982년 버전이 오리지널이라고 알고들 계신데 … 실은 1976년 Randy Crawford가 오리지널이고 Charlene 버전은 1977년에 처음 발매되었다가 Hot 100차트에 97위로 살짝 인사만 하고 사라지고 말았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1982년에 모타운 레코드 직원이 라디오에서 이 노래를 듣고 사장에게 재녹음을 건의하여 Charlene이 다시 불렀는데, 이게 그만 …… 대박을 치고 말았다는 그런 전설같은 레전드 사연이 있는 노래이다.


 


그냥 뭐 그렇다는 얘기고 이쯤에서 그 노래를 감상하며 이 글을 급정리하고자 한다.


 


I’ve Never Been To Me
By Charlene (1977, 1982)
영화 “프리실라” 중에서 …



 


 




Hey lady, you lady, cursing at your life
You’re a discontented mother and a regimented wife
I’ve no doubt you dream about the things you’ll never do
But, I wish someone had talked to me
Like I wanna talk to you ……


 


여인이여, 그래요 당신, 지금의 삶에 진저리 치시나요,


당신은 지금 엄마 역할이 싫증나고 아내라는 틀에 얽매어있는게 불만이죠,


분명 당신은 앞으로도 절대 못해 볼 일들을 해 보는 꿈을 꾸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지금 당신에게 하려는 말을,


누군가 이전에 내게 해 줬기를 바라고 있어요,


 


 


Oh, I’ve been to Georgia and California and anywhere I could run
I took the hand of a preacher man and we made love in the sun
But I ran out of places and friendly faces because I had to be free
I’ve been to paradise but I’ve never been to me


 


그래요 난 조지아, 캘리포니아 그리고 갈 수 있는 곳 어디라도 가보았어요,


난 성직자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태양 아래서 사랑을 나눈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난 고향을 떠나야 했고 친한 이들을 멀리 했어요,


난 천국에 있었지만, 한 번도 원래의 나로 살아보지 못했죠,


 


 


Please lady, please lady, don’t just walk away
‘Cause I have this need to tell you why I’m all alone today
I can see so much of me still living in your eyes
Won’t you share a part of a weary heart that has lived million lies….


 


여인이여, 여인이여, 가지말고 내 말 마저 들어보아요,


내가 왜 지금 이렇게 외로운 처지가 되었는지 당신께 꼭 얘기하고 싶으니까요,


난 당신의 눈빛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어요,


백 만가지 거짓말에 지친 당신 마음의 일부만이라도 내게 털어놓지 않으실건가요,  


 



Oh, I’ve been to Niece and the Isle of Greece while I’ve sipped champagne on a yacht
I’ve moved like Harlow in Monte Carlo and showed ’em what I’ve got
I’ve been undressed by kings and I’ve seen some things that a woman ain’t supposed to see
I’ve been to paradise, but I’ve never been to me


 


그래요 난 니스에 가봤고 그리스의 섬에서 요트에 앉아 샴페인을 맛보기도 했죠,


난 몬테카를로에서 진 할로우처럼 행동하며 남정네들에게 내 몸매를 뽐냈죠,


난 왕의 손에 옷고름이 풀려보았고 여자에게 보여져선 안될 것들을 보기도 했죠,


난 천국에 있었지만, 한 번도 원래의 나로 살아보지 못했죠, 


Hey, you know what paradise is?
It’s a lie, a fantasy we create about people and places as we’d like them to be
But you know what truth is?
It’s that little baby you’re holding, it’s that man you fought with this morning
The same one you’re going to make love with tonight
That’s truth, that’s love ……


 


그대여, 천국이 뭔지 아시나요,


그건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가고 싶어하는 곳에 대한 환상을 섞어 만들어낸 거짓이예요,


그대여 진정한 천국을 알고 싶으세요,


그건 바로 지금 당신이 품에 안고있는 아기,


오늘 아침 다투었지만 밤이 오면 어김없이 사랑을 나눌 당신의 남편이예요,


그게 진실이고 그게 사랑이예요,


 



Sometimes I’ve been to crying for unborn children that might have made me complete
But I took the sweet life, I never knew I’d be bitter from the sweet
I’ve spent my life exploring the subtle whoring that costs too much to be free
Hey lady……
I’ve been to paradise, (I’ve been to paradise)
But I’ve never been to me


 


가끔 난 나를 완전하게 해주었을,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이를 생각하며 울어요,


그 대신 선택한 달콤한 인생, 그게 이리도 쓸줄은 절대 알지 못했죠,


난 우아하지만 결국 웃음을 파는 인생을 사느라 너무 큰 댓가를 치렀죠,


여인이여,


난 천국에 있었지만, 한 번도 원래의 나로 살아보지 못했어요,



 


 



영진공 이규훈


 


 


 


 


 


 


 


 


 


 


 


 


 


 


 


 


 


 


 


 


 


 


 


 


 


 


 


 


 


 


 


 


 


 


 


 

“프로메테우스”, 파랑새 설화의 SF 버전



 


 


 


 



 


 


 


 


 


* 스포일러 잔뜩 … 주의 요망 *


 


 


 


 


과학적이거나 논리적인 세부사항에서 빈틈이 많긴 하지만, “프로메테우스 (Prometeus)


는 여운이 깊게 남는 영화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정서적인 구조가 아주 간결하고 두툼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믿음과 배신의 과정, 선망과 환멸의 과정, 그리고 원망과 복수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3가지 과정은 우리가 성장하며 겪었던, 그 중에서도 가장 뇌리 깊숙이 남았던 정서적 경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영화는 외계인과 인간, 탐사대와 데이빗 이라는 구도를 사용한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관객들은 한 인간형 외계인이 웅대한 지구의 자연 속에서 정체불명의 물질을 섭취하고 분해되는 장면을 본다. 배경음악이나 주변 환경, 그리고 그 사건의 결과를 보며 대개의 관객들은 그것이 진화를 촉발하기 위한 일종의 희생이라고 해석한다.


 


그로부터 수억 년 후, 인류는 고대 벽화들 속에서 그 외계인의 자취를 찾아내고 흔적을 따라 우주탐사여행을 떠난다. 이 프로젝트의 발제자인 두 고고학자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그들은 그 픽토그램을 부모가 남겨놓은 초청장이라고 해석하고, 자신들이 부모를 찾아가는 첫 번째 자녀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이 외계인들에 대해 막연한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 기대와 희망은 행성에 도착한 이후 그들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헬멧을 벗고 무모한 탐사를 벌였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창조주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분들이 우리에게 해롭거나 나쁜 것을 주실 리가 없어.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거야!”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인류가 만들어낸 새로운 종, 안드로이드 데이빗에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극적인 차별을 한다. 데이빗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들이 그렇게 만든 것에 불과하며, 데이빗에게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즉 영혼이 결여되어 있다고 믿는다(사실 데이빗에게 결여된 유일한 능력은 아마도 생식능력 뿐이리라). 그래서 그들은 데이빗이 인간을 흉내낼수록 더 거부감을 보인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그 데이빗은 찰리 박사에게 질문한다. “인간은 왜 자기를 창조했을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외계인에게 묻고자 하는 질문이다. 찰리는 “그냥 그저 그럴 수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별다른 이유도 없고, 큰 뜻도 없고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해 본거지 라는 얘기다. 이 대답에 대한 데이빗의 반응은 저릿하다. “만약 (니들) 창조주로부터 그런 대답을 듣게 된다면 (너는) 어떤 기분일까?”


 


이 두 가지의 태도, 자기들의 창조주에 대해서는 원대한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자기들의 창조물에 대해서는 비하와 경멸적 태도를 보이는 인간의 이중성은 사실 복선이다. 그 복선은 외계인의 DNA가 인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사실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단서를 통해 결말을 암시한다.


 


그네들도 결국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냥 할 수 있으니까 만들어 본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애들이 ‘왜 우릴 만드셨나요’ 따위의 질문을 하러 1조 달러를 들여 수조킬로를 건너왔다고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영화의 결말은 여기서 이미 결정되었다. 인간이라면 데이빗을 어떤 곳에 “인간 대신” 보낼까? 안락하고 친절한 환경? 아니면 인간이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험하고 독한 환경? 자기들은 하지 않을 것을 남에게는 기대하는 자가당착.


 


 


하지만 너는 웨일랜드 제품이야 ...



 


 


데이빗이 인간에게 가지는 감정. 여기서 잠깐, 감정은 합리적인 정보처리의 결과물이다. 아무리 인조인간이라 해도 정보처리능력으로는 인류 상위 1%에 해당할 데이빗에게 감정이 없을 리 없다. 물론 그 감정의 양상은 아마도 빅뱅이론의 셀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데이빗이 인간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비커스가 웨일랜드 회장에게 가지는 감정을 통해 드러난다.


 


데이빗을 만든 것은 인간이나 데이빗이 인류 전체에게 신세를 진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데이빗이 그나마 가장 큰 신세를 진 사람은 자본을 댄 웨일랜드 회장이다. 하지만 나머지 인간들은? 그들과 데이빗은 사실 동격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데이빗을 차별하려 든다. 비커스가 특히 그렇다. 웨일랜드의 인정을 향해 투구하는 그녀는 서자 앞에서 적통을 인정받기를 바라는 적자다. 그리고 그녀가 웨일랜드에게 가지는 감정은 바로 원망과 복수심이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줄 것 처럼 폼은 다 잡으면서도 결코 주지 않는 존재에 대해 느끼는 감정. 데이빗은 인간들에게 거의 비슷한 감정을 경험한다. 그 감정은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외계인에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가 종반을 향해 가면서 관객들은 더 이상 영화의 첫 장면을 숭고하고 거룩한 희생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 장면은 처형이거나, 그들만의 종교적 의식이거나, 아니면 그저 치기 넘치는 도박이었을수도 있다. 이 장면이 인류 창조를 묘사한다고 봤을 때, 결국 이런 해석과 감정은 창조 자체에 대한 것이 된다.


 


 




 



 


굳이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는 인류 창조의 비밀을 이야기하라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나 의미 따위는 아예 없는 것이다. 우리를 만든 애들도 아무 개념 없이 저지른 짓이고, 당연히 우리가 그네들에게 고마워하거나 그네들을 숭배할 이유 따위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네들에게 무슨 대단한 대답이 있으리라 기대하기 보다는 지금 여기 나 자신에게서 인생의 답을 찾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이건 인류 공용의 진리라기 보다는 그저 리들리 스콧 개인의 이야기겠지만, 그렇게 보자면 “프로메테우스”는 전 인류가 공유하는 ‘파랑새’ 설화의 SF 버전인 셈이다.


 



 



영진공 짱가


 


 


 


 


 


 


 


 


 



 


 


 


 


 


 


 


 


 


 


 


 


 


 


 


 


 


 


 


 


 


 


 


 


 

“허트 로커”, 전쟁과 인간만 달랑 남았구나






지난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6개 주요 부문의 상을 수상한 작품이죠.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에게는 첫번째 여성 감독상 수상자로서의 영예까지 안겨다주기도 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전 부인 – 들 중에 하나 – 으로도 알려진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의 대표작은 역시 <폭풍 속으로>(1991)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이 아드레랄린 넘치는 범죄 액션물은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코미디 <뜨거운 녀석들>(2007)에서 대놓고 찬미될 만큼 줄거리와 연출 스타일에 있어서 남성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작품이었어요.

그외 <블루 스틸>(1990)이나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 역시 여성 감독의 영화에 대한 편견을 거부하는 선굵은 스토리라인과 액션 장면들로 매우 인상적인 작품들이었습니다.











아카데미가 작품상을 안겨준 이라크 전쟁 소재의 영화라고 하더니 과연 이제껏 보아온 이라크 전쟁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라크 전쟁 영화라고 하면 전쟁 반대파의 목소리를 담아 그 허구성이나 복잡한 미국 내 또는 국제 정치의 맥락 위에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그런데 아카데미의 지지를 얻은 이 <허트 로커>라는 영화는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으되 굳이 이라크 전쟁이어야만 했을 이유가 없는, 매우 일반적인 전쟁 영화 – 말하자면 전쟁과 그 안에 몸 담고 있는 인간에 관한 매우 미시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이라크는 없고, 오직 전쟁과 인간만 남아있는 작품이랄까요.



물론 영화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이라크 저항군의 폭탄 테러는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그 안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 내의 현재 상황과 매우 밀접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라크 전쟁의 의미를 캐묻기 보다는 등장 인물들이 전쟁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듯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하기는 하되, 이라크 전쟁의 정치적인 맥락을 배제함으로써 좀 더 전통적인 전쟁 영화로 비춰지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등장 인물들이 그 안에서 영웅 놀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워들 하고 있으니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까지 볼 수도 있기는 하겠네요 – 그럼 안그런 전쟁 영화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실런지 모르겠지만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2009)도 전쟁 영화이기는 하되 그런 느낌이 훨씬 덜 했던 작품이었던 거죠.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허트 로커>는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우 사실적으로 전쟁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가이 피어스와 랄프 파인스조차 영화 속에서 단명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을 만큼 감독은 어느 누구든 눈 깜빡 할 사이에 바로 죽어나갈 수 있는 긴박한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폭발물 제거반인 주인공들을 따라다니는 작품이니 서스펜스의 수준은 거의 공포 영화가 따로 없을 정도이지요. 그러다 임무를 잘 마치고 BOQ에 ‘살아’ 돌아온 주인공들이 노는 꼬락서니는 영락 없는 <폭풍 속으로>에서의 아드레랄린 과다 상태의 남성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임스 상사(제레미 레너)는 일종의 전쟁 중독증이 아닐까 싶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남들은 로테이션 근무가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라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남은 삶의 의미는 한 가지 밖에 없다며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기까지 합니다.




자연스럽게 전쟁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고, 배우들의 연기나 사실적인 연출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견을 달기 힘든 잘 만들어진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허트 로커>를 통해 특별히 어떤 메시지를 건져낼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명시적인 메시지를 찾고자 하는 것 만큼 스스로 영화의 재미를 제한하는 어리석은 짓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적어도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 더군다나 매년 그 결과에 주목하게 되는 유명 영화 시상식의 작품상과 주요 부분을 휩쓴 화제작에서 내가 알고 있는 전쟁에 관한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불편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허트 로커>에서 묘사된 전쟁이요? 당연히 참혹합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 참혹하지 않았던 전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폭발물 제거반이라서 특별한 영화가 된 것인가요, 아니면 이라크에 관한 직설 화법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이라크 전쟁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방법을 알려준 작품이라서 상을 받은 것인가요.








영진공 신어지

“더 로드”, 지옥에 떨어져서도 삶을 선택한 사람들

원작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래 전에 ‘마침내 영화화가 결정되었다. 주연은 비고 모텐슨’이라는 소식을 누군가의 흥분된 글을 통해 접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영화가 마침내 국내 상영관에 걸렸고 저는 여전히 원작에 대해서는 그저 ‘성서에 비견될 작품’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홍보 문구 정도로만 접한 채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이 인류의 멸망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 아이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투라는 사전 정보도 접했습니다 – 관객에 따라서는 이런 정도의 사전 정보는 미리 접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찌되었거나 영화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거나 눈 뜨고 보기 괴롭다 하더라도 중간에 나가버리시면 마지막 엔딩에서 비춰지는 작지만 강렬한 희망의 빛을 보실 수가 없으니 부디 끝까지 인내하시길.

대재난의 원인과 사건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극중 대화와 플래쉬백을 통해 대략의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핵전쟁이나 대자연의 역습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사실 <더 로드>는 대재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 보다는 그 이후의 삶에 집중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위를 통해 세상이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다룰 필요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경고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생지옥이 되어버려 오직 고통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할까요. 그런 지옥에서의 삶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대다수 사람들의 심정과 선택이 납득이 갈 만큼 영화는 대재난 이후의 세상을 충분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재난의 광경을 스펙타클하게 전시하는 영화들은 많았지만 그 이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은 거의 없었죠. <더 로드> 속의 광경은 마치 <매트릭스>(1999) 이전 기계들에 의해 인류 문명이 초토화된 직후의 모습, 시온에 모여 다시 반란과 재건을 꿈꿀 수 있게 되기 이전 인류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동식물이 거의 멸종해버린 상황이니 쓰레기를 줍고 벌레를 잡아먹거나 아니면 로또라도 맞은 것처럼 운 좋게 숨겨진 식량 창고를 발견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어리고 병약한 사람을 잡아먹어야만 생존을 할 수 있는 극악의 상황입니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은 배가 고파서 사람을 잡아먹느냐 먹지 않느냐로 간단히 구분될 따름이고, 그런 딜레마가 고통스럽다면 미리 죽는 것으로 이른 안식을 취할 수가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모피어스나 네오와 같은 영웅들이 아니라 그저 살아남기 위해 오늘 하루 발버둥쳐야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처럼 매우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란 그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객들의 잠재적인 낙관 의식 때문에 대체로 상징적인 이야기로 보여지게 되고, 좀 더 근원적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설정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더 로드>는 생지옥이나 다름 없는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아닌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가 각자의 삶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나가야 할 이유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인간의 운명을 신에게 맡기라 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인류 문명의 재건을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일어서라고 힘주어 역설하는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에 비견된다는 코맥 맥카시 원작의 <더 로드>는 사실은 성서 보다는 인본주의 정신의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성서에 비교하자면 구약 보다는 신약이겠지요.

그러나 영화 <더 로드>의 관람 자체가 성서를 읽는 것 만큼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한 편의 영화로서 <더 로드>는 메시지의 전달에 집착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이렇게까지 훌륭한 이야기를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내지는 노파심이 든다고 할까요. 사실은 영화가 다소 밋밋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뭐라 탓하기가 어려운 것이 <더 로드>의 화법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는 차라리 영화 보다는 원작의 풀 텍스트를 직접 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원작을 읽은 것은 아닙니다만 영화는 아무래도 원작의 줄거리만을 시청각적으로 묘사했을 따름인 것 같거든요. 그 장면들 사이사이의 행간을 영화가 재미 없다는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 소설의 영화화로서 <더 로드>는 나무랄 데가 없는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존경심이 우러나오게 만드는 비고 모텐슨의 헌신적인 연기에 기립 박수를 보냅니다.

좀 흉칙한 분장이긴 했습니다만 오랜만에 보는 가이 피어스, 너무 반가웠습니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러나 마지막에 만난 이 베테랑 아저씨는 “어서 길을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원작에선 이에 관한 뭔가 충분한 설명이 있을 것 같은데, 영화만으로 접하고 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인류 문명의 멸망 이후에 생존과 재건을 위해서는 과거 문명의 잔재를 벗어나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 정도입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던 놀라운 아버지였지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 히어로는 될 수가 없었던 거죠. 리어커를 훔쳐가던 흑인을 길 위에서 붙잡아 홀딱 벗겨버린 사건도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 없었던 일이었기에 이래저래 마음에 남습니다.

어쨌든 <더 로드>를 보며 인류 문명의 역사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몇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으며 또한 재건의 희망 역시 그 안에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이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끼린 이러지 맙시다’라고 하는 아주 기초적인 룰을 끝내 지키려는 자와 그런 것 쯤이야 진작에 개무시하며 사는 자, 그리고 그와 같은 딜레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들로 이뤄진 곳이 아닐까요.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