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 고전적 주제의 재해석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부인이 아서 밀러의 딸이라는 얘기는 예전에도 언뜻 접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영화 감독이라는 사실은 이번 네 번째 연출작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네요.

레베카 밀러 감독과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처음 만난 건 1996년 영화 <크루서블>의 주연 배우로서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원작자 아서 밀러의 집을 방문했을 때라고 하는군요. 당시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자벨 아자니와 몇 년 간의 동거 끝에 아들까지 둔 상태였고, 레베카 밀러는 몇 년 간의 배우 생활을 마감하고 연출 데뷔작 <안젤라>(1995)를 완성한 직후였지요.




어쨌든 대중들에게는 항참 낯설기만 한 여성 감독의 새 영화를 위해 브래드 피트가 제작자로 나서고, 이토록 많은 주연급 배우들을 조·단역에 캐스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거죠. 대중적인 영향력은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 커플이 최강이겠지만 미국 내 문화·예술계 내부적으로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레베카 밀러 감독 커플 만큼 영향력이 강한 집안도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편은 아닐 듯 합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피파 리의 특별한 로맨스>의 주인공 피파 피(로빈 라이트)는 작가 출신으로 출판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을 거둔 허브 리(앨런 아킨)의 나이 차 많은 부인입니다. 영화는 피파 리의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면서 중년 여성의 자아 찾기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요. 유명한 희곡 작가의 딸로서 성장했고, 유명한 배우의 아내로서 살고 있는 레베카 밀러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적잖게 투영된 작품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 목표 없이 표류하던 피파 리(블레이크 라이블리)가 허브 리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정착지를 발견하게 되었던 그 순간, 유부남이었던 허브 리의 부인 지지 리(모니카 벨루치)가 눈 앞에서 권총 자살을 했고 그 이후 피파 리의 결혼 생활에 대한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해왔다는 부분은 그야말로 내밀한 고해성사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영화 전반적으로 스토리텔링 방식 자체가 기승전결을 잘 짜맞춘 방식이라기 보다는 생각나는 데로 자유롭게 기술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산만하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적은 시간 내에 꽤 많은 이야기와 느낌들을 담아내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고 평가를 해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저처럼 로빈 라이트 – 작년에 숀 펜과 이혼하면서 더이상 로빈 라이트 펜이 아니로군요 – 를 평소에 좋아하셨던 분들이라면 로빈 라이트 연기 경력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실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젊은 시절의 피파 리로 출연한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얼마 전 <타운>을 통해 처음 알게된 배우인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그외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줄리안 무어, 모니카 벨루치, 마리아 벨로 등이 배역의 비중에 상관 없이 적재적소에 등장하며 반가움을 –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 더해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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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좋은 만듬새 … 허전한 뒷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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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근작 <폭력의 역사>는 우선 제가 본 크로넨버그 영화들 가운데 가장 만듬새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상당히 허전한 뒷마무리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만 보면 미셸 푸코의 책 제목 마냥 ‘폭력’의 본질을 다룬 거대 담론 수준의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내용에 비추어보면 ‘한 남자의 매우 폭력적이었던 과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폭력의 역사성이나 대물림과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이 있을텐데, 저는 유독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2006)이 떠오르는군요. 그에 비하면 <폭력의 역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력의 의미를 지극히 개인의 수준, 관객에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스크린 속 타인의 입장으로만 다루는데 그치고 맙니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 샘 페킨파 감독의 <어둠의 표적>(Straw Dogs, 1971)처럼 전개되면서 관객들과 진실 게임을 벌이는 영화를 예상했지만 역시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두뇌 싸움을 즐기는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노출 수위가 꽤 높은 편입니다만 관객을 작정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두번의 정사 장면 가운데 속칭 69라고 불리우는, 대중 영화에서는 거의 금기시되는 체위가 나오고 계단에서의 장면(이럴 땐 계단씬이라고 해야 하나요?)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선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계단 장면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서로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 동시에 정서적인 탈출구로서의 강렬한 느낌을 전달해주는데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서 <크래쉬>의 주인공들을 떠올린 게 혹시 저 뿐인지 궁금하네요) 그외 크로넨버그가 좋아라하는 신체 훼손 장면들이 몇 차례 여과 없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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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누구랄 것 없이 하나 같이 훌륭하다는 점이 <폭력의 역사>를 봐야할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박한 식당 주인과 스티븐 시걸의 모습을 오가는 비고 모텐슨을 중심으로 전반부에는 에드 해리스가, 후반부에는 윌리엄 허트가 주요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두 명배우의 악역 연기, 이채롭고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에드 해리스의 분장과 캐릭터는 왜 저 배우가 여지껏 제대로된 악역을 맡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제대로더군요. 하지만 윌리엄 허트에게 주어진 배역은 약간 덜 떨어진 캐릭터로 설정이 되면서 엄청난 비장감이 감돌아야 맞을 것 같은 영화 후반부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외의 주요 배역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인공의 부인으로 등장한 마리아 벨로(<코요테 어글리>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의 열연을 꼽아야 할테구요, 저는 아들 역으로 나온 에쉬톤 홈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섬세한 시선 처리를 비롯해서 특출난 데가 있는 타고난 배우더군요. 제작자들 보다는 감독님들이 좋아할만한 타입의 젊은 배우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배우는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낯선 두 남자인데요, 배우 보다는 그 캐릭터가 아주 가관입니다. 나른한 한 여름 아침에 모텔 체크아웃을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잔인함이라니. 이들은 드라마의 시작점인 동시에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해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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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해야 할 배우는 역시 비고 모텐슨이네요. 제가 갖고 있는 비고 모텐슨의 이미지는 이 배우의 얼굴을 처음 익힌 <퍼펙트 머더>에서의 비열함과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의 영웅, 두 가지입니다. 사실 첫 인상을 좀 오래 남기는 편이라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별로 믿음이 안가더라구요. 그가 연기한 <폭력의 역사>에서의 톰 스톨과 조이 쿠색이라는 한 인물의 두 가지 면모는 마치 제가 알고 있는 비고 모텐스의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와의 두번째 영화인 매개봉작 <Eastern Promises>(2007)의 예고편과 스틸컷을 보면 나오미 왓츠를 주인공으로 그 주변을 맴도는 듯한 미스테릭한 악인처럼 나오고 있는데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전반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같은 느낌도 주는 웨스턴 풍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필견, 비고 모텐슨 좋아하시는 분들도 필견, 그리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봐주시는 분들까지도 충분히 만족하실만한 영화입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