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시간의 법칙과 과잉교육, “아웃라이어”

故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티핑포인트>와 <블링크>의 저자 말콤 글래드웰이 쓴 새 책입니다.
저자가 쓴 앞의 두 책을 다 재미있게 읽었고, 이번에도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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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우리나라가 꽤 많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대한항공의 괌 추락사고에 얽힌 이야기,
권위주의와 계급문화가 어떻게 사고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죠.
그리고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놀라운 학업성취도 이야기가 나중에 나옵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어떤 지역의 농업보다 압도적으로 노동집약적일 수 밖에 없는 아시아의 쌀농사 문화가 근면성이라는 문화를 만들었고, 그 근면성이 학업성취도로 나타났다는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이 같이 나오죠. 근데 중국은 아마 중국 남부가 거기에 해당하겠죠. 북부는 글쎄 …

이제 본론입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원칙은 (역시 다들 아시겠지만) “1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무슨 일이든지 10,000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마스터가 될 최소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1만 시간을 투입해서 마스터가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만 시간을 투입하지 않고서 마스터가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거죠.

1만 시간, 하루에 3시간씩 매일 연습을 한다고 쳤을 때 9년에서 10년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하루에 3시간이 아니라 5시간이나 8시간씩 투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스터에 오르는데 걸리는 기간은 더 짧아지겠죠. 저자는 신동 모차르트 조차도, 이 1만 시간을 채운 다음부터 걸작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진짜 어렸을 때 쓴 곡들은 유치하거나 혹은 아버지가 대신 써준 것으로 의심받는 것들이라는군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1만 시간입니다. 이걸 채우는 자가 성공의 최소 조건을 채우는 것이죠.





1만 시간의 법칙이 있어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죠.

첫 번째,
매일 하루에 3시간씩 10년간 뭔가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개인의 의지로 될 일이 아닙니다. 주변 여건이 받쳐줘야 가능하죠. 10년은 발달단계의 한 두 단계에 해당합니다. 아동기에 시작하면 청소년기나 초기 성인기에 끝나고, 청소년기에 시작하면 성인 중기 쯤에 끝나는 거죠. 그런데 10년간 같은 일을 같은 의미로 계속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내게 중요한 거더라 … 라는 식의 경우가 더 많게 되겠죠. 결국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가 억지로 시키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러려면 문화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앞서의 아시아의 노동집약적 문화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왜 흑인 아이들이 백인아이들보다 성적이 떨어지느냐. 저자가 지적한 거는 간단합니다. 흑인 아이들은 방학때 그냥 논다는 겁니다. 문화가 그러니까. 하지만 백인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은 방학 때 과외를 하죠. 네, 바로 그 과외. 방학 전에는 오히려 흑인아이들의 학업성적이 더 높지만, 방학을 끝내고 나면 백인아이들의 성적이 더 높아지는 비결이 그것이죠. 이것이 축적되어 결국 두 문화간의 거대한 격차를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두 번째,
차별화가 되어야 합니다.
남들도 1만 시간을 채우는 일을 똑같이 1만 시간 채워봤자 그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제가 매일 3시간씩 최소 5년 이상 하는 게 뭔지 생각해봤습니다. 아마 TV나 인터넷을 하는 거 정도더군요. 최근에는 출퇴근하는 데 평일에 한 2-3시간씩 쓰는 것이 추가되었고 … 다들 이런 거는 3시간씩 합니다. 거의 평생 동안 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소용이 없죠. 다들 하는 거니까. 즉, 1만 시간의 법칙이 성공으로 이어지려면 남들이 안할 때부터 시작하는 1만 시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 그런 일이 생길까요? 일단 소수의 말 그대로 선택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빌 게이츠’가 그런 경우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다니던 고급 사립초등학교에는 자그마치 1968년(혹은 67년)에 메인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된 컴퓨터 터미널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펀칭기계로 입력을 하는 기존 컴퓨터가 아니라 키보드로 입력하는 (당시로선)최신형 컴퓨터가! 빌 게이츠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그 컴퓨터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나중에는 그 동네 컴퓨터 회사에서 알바를 뛰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계속 되었죠.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1만 시간을 채웠습니다. 그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게이츠 부모와 같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되는 학부모가 기부금을 내서 컴퓨터실을 지어주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그 아이들 중에서도 빌 게이츠처럼 컴퓨터 논리에 금방 매혹당하는 컴퓨터 천재 자질이 충분한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죠.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한때는 그 가치가 별로 높이 평가받지 못하던 어떤 일을 억지로 해야 했던 사람들도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남들 안하는 1만 시간을 채울 수 있죠. 책에서는 유태인들을 예로 듭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유태인들은 농지 소유를 금지당하고 유태인 거주구역(게토)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던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의 주류 산업인 농업이나 목축업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시계 수리, 야금술, 혹은 고리대금업에 종사하게 되었죠. (여담이지만, 판타지에 등장하는 드워프들이 아마 유태인의 은유가 아니었나 싶더군요. 그들의 직업이 딱 저런 것들이죠)

당시에는 천대받는 일이었습니다만, 지금도 그렇던가요. 이런 유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을 때, 그 가능성은 제대로 빛을 발휘합니다. 고리대금업은 금융이 되었고, 시계 제조기술이나 야금술은 정밀가공기술의 기초가 되었죠. 이렇게 성공한 유태인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법률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었지만, 이들에게도 역시 주변부에 해당하는 일들만이 주어졌죠.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기업의 인수합병 따위는 비신사적이고 지저분한 변호사업무였습니다. 잘나가는 로펌들은 아예 손도 대지 않던 일이었죠. 그 잘나가는 로펌들은 동시에 유태인을 동료로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태인 변호사들은 천시받던 기업 인수합병일을 해야 했고, 그 분야에서 1만 시간을 채울 시점에 천시 받던 인수합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버렸죠. 미운오리새끼가 따로 없더구만요. 결국 이들은 주변부로 밀려난 덕분에, 주변부에서 마스터가 되었고 그들이 마스터한 기술이 주류가 되면서 성공한 부류가 되어 버린 것이죠.

여기에 든 것들은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예들 중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캐나다 프로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출생월이 대부분 1,2,3월에 몰려있는 이유도 설명하고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명예문화의 차이, 아시아의 완곡어법 문화의 특성, 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어떤 마을 사람들은 심장병이 그리도 적은지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그리고 왜 아시아 아이들이 PISA 같은 수학능력 시험 점수가 높은지도 같이 설명하죠. 답을 간단히 하자면, 아시아 아이들은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도 계속 붙잡고 매달립니다. 풀릴 때까지. 미국 아이들은 그 도중에 포기하고요. 그저 그 차이 뿐이랍니다.

덧붙여, 미국 교육정책의 초기 입안자들은 ‘과잉교육’을 우려했다더군요. 즉, 지나치게 많은 교육을 받으면 사람이 맛이 간다는 거였습니다. 그런 속담도 있었죠.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멍청이가 된다. 근데 그 사람들이 한 말들을 읽어보니 그냥 멍청이가 아니라 ‘또라이’ 가 된다는 투더군요. 영화 <샤이닝>에서 잭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긴 여름방학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과잉교육을 우려해온 전통 때문이라는군요. 읽을 때는 “참 그 양반들 별 (기특한) 걱정 다했네…” 싶었는데, 최근에 어떤 기사를 읽고 그들이 정말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누군가가 그랬다죠? 일주일에 뭔 책을 2-3권 읽고 신문은 매일 3시간씩 읽고 어쩌고 정부에서 내놓는 보고서도 … 주저리 주저리 …

이제 이해가 가는 거죠. 결국 그 동안의 그것들이 다 과잉교육의 폐해 였다는 사실이 …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교육도 자기 그릇에 맞게 받아야 한다 이겁니다.
안 그러면 그렇게 됩니다.

영진공 짱가

[굿바이 칠드런], 나찌는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있다.



영화 “굿바이 칠드런(Goodbye Children)”의 원제는 “Au Revoir Les Enfants”이고 프랑스 출신 감독 루이 말(Louie Malle)의 1987년 작품이다.  이 영화는 루이 말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87년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목에 있는 Au revoir는 불어로 헤어질 때 서로 나누는 말인데, 영어로 Goodbye라고 쓰긴 하지만 실은 “다시 보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신부님과 아이들이 이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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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감독이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나래이션을 루이 말 자신이 직접 하였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의 어느 시골에 있는 사립기숙학교에 전학생이 한 명 온다.  그 소년은 프랑스 사람인 쟝 보네라고 하였지만 실은 유태인 쟝 키펠스타인이었다.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피해 이름을 감추고 프랑스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피신을 온 그 소년은 줄리앙 쿠엔틴의 옆 침대에 짐을 풀게 된다.  쿠엔틴(소년 시절의 루이 말)과 보네는 여느 소년들이 그러하듯 서로 투닥거리면서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렇게 둘의 우정이 깊어가던 어느 날 …

이 정도만 들어도 어느 정도 감이 오시겠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성장영화이고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비판하는 영화이다.  그런 주제와 이야기를 차분한 시선과 익숙한 톤으로 화면에 담고 있기에 이 영화는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기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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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른쪽이 루이 말 감독

사실 나찌의 유태인 학살과 인종청소 만행의 실상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영화는 아주 많다.  퍼뜩 떠오른 것만 적어도 “안네의 일기” “홀로코스트” “소피의 선택” “뮤직박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 등등.  아시아 문화권에 살고있는 내가 느끼기에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다.
 

소피의 선택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니다, 많은 게 아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범죄 중의 하나인 인종청소에 대한 고발과 경고는 아무리 많아도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그 다양한 경고와 각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범죄가 모양만 바꿔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히틀러는 죽었다.  그를 추종하던 나찌들도 대부분 죽거나 사라졌다.  그런데 왜 그들의 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발생하고 있을까?  코소보, 체첸, 티베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할 것 없이 나찌가 저질렀던 범죄가 왜 자꾸 다시 발생하는 것일까?

희대의 범죄자 히틀러
그건 나찌의 범죄가 히틀러의 광기에서 비롯된 게 아니며 당시 독일에 모여있던 미치광이들의 공모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범죄는 인류의 순결성과 자기 민족의 고결성을 지키겠다고 저지르는 미친 짓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범죄는 주동자와 동조자들이 남들보다 이익을 더 챙기고 나아가 남의 것을 모두 빼앗아 독점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확신 속에 저지르는 조직범죄인 것이다.  내세우는 명분이 무어든 이 범죄는 탐욕만이 유일한 동기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범죄는 어디에서고 어느 때고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나찌와 유태민족간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도 생길 개연성이 항상 존재하는 범죄인 것이다.  히틀러를, 챠우세스쿠를, 밀로셰비치를 처형해도 이 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탐욕이 정당하다고 욕심이 미덕이라고 미화되는한 우리의 아이들은 계속 사라질 것이고 고통받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랬듯이 이 영화에서도 밀고자가 등장을 한다.  그런데 이 밀고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도 결국 남들이 다 그러듯 그의 이익을 추구한 것 뿐인데 말이다.

안다.  이런 논리가 바로 이 땅 친일파들의 더러운 변명과 맞닿아 있음을.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밀고자를 이해할 순 있어도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하고 이를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용서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불행이 닥쳐온다.  단죄되지 않은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어떠한 형태로 추구해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음을 경험하게 되어, 차후 어느 시대가 되어도 자신의 이익과 이를 획득하기 가장 좋은 위치인 권력을 잡으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대부분 잠시라도 그걸 이루게 된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너무나 자주 있어왔다.   

      
이 영화는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온 가족이 휴일을 맞아 모처럼 함께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이다.  불행한 역사의 한 시기가 배경이다보니 결말이 해피엔딩일 순 없으나, 화면에 그려지는 것은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담담한 심경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실없이 깔깔대는 영화나 무작정 까고 부수는 영화가 꺼려지는 분들에게 한 번 보시라고 추천해 본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