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성폭행은 있었으나 결과는 긍정적이라고?

 


 

 


 


 


“강제병합 후 일제에 의한 근대제도의 이식과 우리 민족의 수용을 역사교육과정에 명시할 것을 요구 … 일제가 한국 근대화가 끼친 긍정적 역할도 인정하자고 주장”하는 한국현대사학회가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교학사)가 검정심의 본심사를 통과했다고 한다. [기사 원문 링크]


 


그러니까 이들의 주장을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 성폭행을 당해 그 결과로 아이를 출산한 여성에게 ‘네 꼴로는 원체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얻었으니 다행’ 이라는 것이고, ‘그 사내가 너를 강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얻어진 아이가 건강하고 귀여운 것도 사실’이라며 어거지를 부리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강간을 당했어도 결국 괜찮은 유전자가 섞인 아이를 얻었으니 형식은 부정적이지만 강간한 행위는 긍정적이거나 불가피했던 것이라는 요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다.


 


무슨 이런 일이 있을까.


자신의 의사에 반해 주권, 인권, 자원을 강제로 수탈한 자가 끼친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자는 주장이 그저 음지에서 간혹 보이는 것도 아니라 대놓고 버젓이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채택이 된다니 말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되돌리겠다더니 … 이제 나라는 반민특위가 강제로 해체되던 1949년으로 되돌아 가는 중이다.


 


 


 



1949년 당시 남대문로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이후 이 건물은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돼 왔다 [사진 출저: 블로그 보림재]


 


 


 


기독교에는 인간이라면 저지르지 말아야 할 죄악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를 ‘일곱가지 대죄’ 또는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라 일컬으며 항상 이를 경계하여야 하고, 그러지 못할 시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 일곱가지 대죄의 리스트는 역사 속에서 조금씩 수정되어 오다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정해져 내려오는데,


 


1. 교만(Pride), 2. 질투(Envy), 3. 탐욕(Greed), 4. 분노(Wrath), 5. 탐식(Gluttony), 6. 욕정(Lust), 7. 나태(Sloth) 이다.


 


사실 리스트를 보면 굳이 기독교가 전하는 교훈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고 생산이 발달할 수록 인간이 빠져들기 쉬운 모든 유혹을 나열해 놓은 것이라고 해도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일곱가지 대죄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은데, 그것은 바로 … 무지(Stupidity)이다. 여기서 무지라 함은 저학력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목적하는 바를 어떻게든 취하기 위해 저지르는 고집만 남은 멍청함, 맹신, 의도적 외면, 계산된 왜곡, 곡학아세 등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을 비틀고 궤변을 덧붙이다 못해 종내는 다른 큰 죄악을 찾거나 만들어 내어 당장의 자신의 허물을 덮어버리거나 합리화하는 작위적 무지는 그 중 악질이라 하겠지만, 이러한 행위에 멋모르고 동조하거나 방치하는 것도 그 못지 않은 죄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영화 속 음악은 바하의 “G선상의 아리아”

 


 


 


일곱가지 죄악을 모티브로 한 영화 “세븐” (1995, 데이비드 핀쳐 감독)을 보면, 죄악에 대한 심판을 명분으로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이 나온다. 그리고 이 범인에 대해 형사 윌리엄은 시종일관 냉철하게 대처하지만, 열정적인 파트너 형사 데이비드는 범인의 교활함에 넘어가 분노의 죄악에 이르는 함정에 빠진다.


 


그리고 영화 “미션” (1986, 롤랑 조페 감독)을 보면, 자유롭게 살아가는 원주민에게 가해지는 침략자들의 공격에 맞서는 가브리엘 신부와 로드리고가 나온다. 가브리엘 신부는 권력자들에게 읍소한다거나 해보지만 결국 기도를 올리는 걸로 갈 길을 정하지만, 로드리고는 거대한 폭력 앞에 턱없이 부족하다해도 원주민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맞선다.


 


 


 



영화 속 음악은 널리 알려진 “가브리엘의 오보에”

 


 


 


윌리엄 형사가 옳으냐, 데이비드가 그르냐, 가브리엘 신부의 방식이 나은 거냐, 로드리고가 맞느냐 … 이런 논쟁은 각자의 견해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날 거고, 달리 보면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한다는 걸로 봤을 때는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뭐라도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큰 죄악을 저지른 이들은 절대, 한때 실수에 의해 작은 죄를 저지른 이들처럼  죄책감에 힘들어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며 속죄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오히려 더 길길이 날뛰며 합리화와 정당화를 위해 말 그대로 분골쇄신한다.


 


친일이 드러나면 그땐 다 그랬다며 오히려 그 친일로 인해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우기면서 우리에겐 현재 더 큰 위험과 적이 있는데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 한다. 위법과 탈세, 착복이 드러나면 그땐 모두 다 그랬다며 오히려 그보다 다른 중요한 일을 해냈다고 자랑하면서 우리에겐 현재 더 큰 위험과 적이 있으니 거기에 집중하자고 한다.


 


지난 역사를 돌아봐도 큰 죄를 저지른 이들이 스스로 뉘우쳐 잘못을 되돌리고자 노력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나서서 계속 훈계를 하든, 지속적으로 매를 들든 아니면 죄인들이 기를 못 펴게 사회 주도층이 형성되든지 해서야 비로소 잘못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패악질을 안하게 되곤 하였던 것이다.


 


이제는 저들이 스스로 정신을 차려 뭔가를 하거나 아니면 안하거나를 바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나부터 스스로 뭔가를 해야겠다. 공부를 더 하든, 주변 사람들과 자주 진솔하게 대화를 하든, 뜻이 같은 이들과 적극적으로 함께 널리 알리든 말이다.


 


 


 


영진공 이규훈


 


 



 


 


 


 


 


 


 


 


 


 


 


 


 


 


 


 


 


 


 


 


 


 


 


 


 


 


 


 


 


 


 


 

[굿바이 칠드런], 나찌는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있다.



영화 “굿바이 칠드런(Goodbye Children)”의 원제는 “Au Revoir Les Enfants”이고 프랑스 출신 감독 루이 말(Louie Malle)의 1987년 작품이다.  이 영화는 루이 말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87년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목에 있는 Au revoir는 불어로 헤어질 때 서로 나누는 말인데, 영어로 Goodbye라고 쓰긴 하지만 실은 “다시 보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 신부님과 아이들이 이 인사를 서로에게 건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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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감독이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인데,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나래이션을 루이 말 자신이 직접 하였다.

줄거리는 이러하다.  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의 어느 시골에 있는 사립기숙학교에 전학생이 한 명 온다.  그 소년은 프랑스 사람인 쟝 보네라고 하였지만 실은 유태인 쟝 키펠스타인이었다.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피해 이름을 감추고 프랑스 부유층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피신을 온 그 소년은 줄리앙 쿠엔틴의 옆 침대에 짐을 풀게 된다.  쿠엔틴(소년 시절의 루이 말)과 보네는 여느 소년들이 그러하듯 서로 투닥거리면서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그렇게 둘의 우정이 깊어가던 어느 날 …

이 정도만 들어도 어느 정도 감이 오시겠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성장영화이고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비판하는 영화이다.  그런 주제와 이야기를 차분한 시선과 익숙한 톤으로 화면에 담고 있기에 이 영화는 온 가족이 함께 관람하기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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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른쪽이 루이 말 감독

사실 나찌의 유태인 학살과 인종청소 만행의 실상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영화는 아주 많다.  퍼뜩 떠오른 것만 적어도 “안네의 일기” “홀로코스트” “소피의 선택” “뮤직박스” 그리고 “쉰들러 리스트” 등등.  아시아 문화권에 살고있는 내가 느끼기에 이 정도면 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많다.
 

소피의 선택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니다, 많은 게 아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추악한 범죄 중의 하나인 인종청소에 대한 고발과 경고는 아무리 많아도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이후 그 다양한 경고와 각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범죄가 모양만 바꿔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걸 보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히틀러는 죽었다.  그를 추종하던 나찌들도 대부분 죽거나 사라졌다.  그런데 왜 그들의 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발생하고 있을까?  코소보, 체첸, 티베트,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할 것 없이 나찌가 저질렀던 범죄가 왜 자꾸 다시 발생하는 것일까?

희대의 범죄자 히틀러
그건 나찌의 범죄가 히틀러의 광기에서 비롯된 게 아니며 당시 독일에 모여있던 미치광이들의 공모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범죄는 인류의 순결성과 자기 민족의 고결성을 지키겠다고 저지르는 미친 짓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범죄는 주동자와 동조자들이 남들보다 이익을 더 챙기고 나아가 남의 것을 모두 빼앗아 독점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확신 속에 저지르는 조직범죄인 것이다.  내세우는 명분이 무어든 이 범죄는 탐욕만이 유일한 동기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범죄는 어디에서고 어느 때고 계속 발생하는 것이다.  나찌와 유태민족간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서도 생길 개연성이 항상 존재하는 범죄인 것이다.  히틀러를, 챠우세스쿠를, 밀로셰비치를 처형해도 이 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탐욕이 정당하다고 욕심이 미덕이라고 미화되는한 우리의 아이들은 계속 사라질 것이고 고통받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그랬듯이 이 영화에서도 밀고자가 등장을 한다.  그런데 이 밀고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도 결국 남들이 다 그러듯 그의 이익을 추구한 것 뿐인데 말이다.

안다.  이런 논리가 바로 이 땅 친일파들의 더러운 변명과 맞닿아 있음을.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밀고자를 이해할 순 있어도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죄값을 치르게 해야 하고 이를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용서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불행이 닥쳐온다.  단죄되지 않은 그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어떠한 형태로 추구해도 별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음을 경험하게 되어, 차후 어느 시대가 되어도 자신의 이익과 이를 획득하기 가장 좋은 위치인 권력을 잡으려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대부분 잠시라도 그걸 이루게 된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너무나 자주 있어왔다.   

      
이 영화는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온 가족이 휴일을 맞아 모처럼 함께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이다.  불행한 역사의 한 시기가 배경이다보니 결말이 해피엔딩일 순 없으나, 화면에 그려지는 것은 분노와 절망이 아니라 담담한 심경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실없이 깔깔대는 영화나 무작정 까고 부수는 영화가 꺼려지는 분들에게 한 번 보시라고 추천해 본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