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재판소의 도돌이표

1.
어느 지인의 블로그에 최근 올려진 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
“논리적인척하는 글을 논리로 맞서주면 논리적인척을 논리로 대꾸해주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그렇다.  논리의 외피를 씌운 억지나 일방적 주장에는 따박따박 논리로 대꾸할 필요가 없다.  그런 말이나 글에 논리로 맞서다가는 정작 논의되어야 할 내용은 사라지고, 누구의 논리가 더 그럴듯하다느니 그래서 누구 말이 더 신뢰가 간다느니 나아가 둘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는 등의 하등 쓸모없는 말싸움만 켜켜이 쌓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 헌법재판소(이하 헌재)의 언론법 권한쟁의 청구 사건에 대한 판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언론법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접어놓고 보아도 도무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내용을 이 나라 최고의 사법기관인 헌재가 무려 104쪽이나 되는 길다란 결정문에 적어 발표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럴 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게 무의미할테고, 그저 비아냥거릴밖에 없을 터이다.
이렇게 말이다.


음주운전은 했지만 사고는 안냈으니까 대단한 카레이서.

사기는 쳤지만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다 니꺼.
병역비리를 저질렀지만 면제가 된 만큼 군대는 니들이나 가라.
영어연수를 가려던 여대생을 미국매춘업소로 팔아넘겼지만 어쨌든 이건 워킹홀리데이.
취업시켜주겠다며 정신지체장애자를 평생 노예처럼 부려먹었지만 어쨌든 취업률 100%.
폭력교사지만 어쨌든 애들 대학은 보냈으니 그 선생님은 킹왕짱.
왕따와 폭력으로 니가 운동을 시작했으니 학교일진은 대단한 트레이너.
노동자를 개처럼 부려먹어도 경제성장만 하면 선진국.
강이 썩어 문들어져도 건설경기와 부동산 호황이면 할렐루야.
노동 탄압의 대마왕 삼성이지만 기부 많이 하니 니들은 자선봉사단체.
독재정권이라도 나만 잘살게 해준다면 에브리씽 오케이.
방법이 개 뭐시기같아도 결과만 좋으면 쥐새끼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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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우리는 역사에 길이남을 개막장의 시대에 서 있는 것 같다. 
p.s 
사실 이런 소재의 기원은 이거였다.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

출처: 명랑문화공작소 블로그

2.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헌재가 어떤 곳인가, 그들이 누군가.
최상위 사법기관이고 최고, 최양질의 논리를 생산 및 규정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들의 법리와 논리는 적어도 이 나라 안에서는 기준이자 레퍼런스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결정이 아무리 비논리라고 해도 마냥 비아냥 거리기만 할 수는 없어보인다.

하여 다시 살펴보았다.
이번 헌재의 결정이 나오게 된 논리의 흐름은 이렇다.

1) 법을 어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효다.
2) 법을 어겼다.           그러나 결과를 부정할 만큼은 아니다.
3) 법을 어겼다.           그러나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라.
4) 법을 어겼다.           그러므로 무효다.

이 네 가지 견해를 종합하니,
[법을 어겼다 –> 그래도 유효다]
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단서를 붙이기까지 했다.
요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여기에서 헌재관계자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정치적 물 타기를 하려고 했다면 속된 말로 이렇게 지저분한 결정을 했겠나. 헌재가 권한침해는 확인해놓고 무효확인 청구는 기각했으니 결과적으로 양쪽에게 어중간한 판결을 내린 게 아니냐는 것은 정치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다. 만일 헌재가 정치적으로 판결할 요량이었다면 아예 문턱에서 차버렸을 것이고, 재판관들이 방송사 테이프까지 증거조사한 마당에 정치적 판결 비판은 어렵지 않나 싶다.”


이런 “지저분한 결정”이 나오게 된 것이 애써 “정치적”이지 않으려다보니까 그렇다는 말인 것 같은데, 정말 그럴까.

보자. 위 네 가지 견해 중에 “지저분”한 고려가 없는 것은 몇 번인가.
1)번과 4)번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이지 않게 “문턱에서 차버”리든가, 무효로 판결하든가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2)번과 3)번의 견해에서 보듯 법리 이외에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한 “지저분”한 결정이 내려져서 오히려 판결이 “정치적”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것 아닌가.

헌재관계자의 말을 또 인용해보자.

헌법재판소의 한 관계자는 “국회 자율권이 필요한 영역까지 헌법재판소가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 무효확인을 선고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헌법재판소가 미디어법 통과과정의 적절성에서 권한침해를 했다고 확인했다면 그 다음은 국회의장이 헌재 결정 취지에 따라 여러 정치의견을 형성하라는 여지가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여야는 헌법재판소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 타협해 다시 발의하는 등 정치적 노력을 하라는 뜻이라는 게다. 실제 헌법재판관별로 온도차는 있지만 피청구인측에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는 것은 당연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는 뜻도 된다고 덧붙였다.

만일 이 같은 일이 국회에서 되풀이 된다면 헌법재판소는 향후 헌법소원에서 준엄히 꾸짖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헌재가 “정치적”이지 않은 판결을 내린 거라면 어째서 단서조항이 붙었는지도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단서조항의 의미는 결국 ‘이번에는 봐줄테니까 니들끼리 쫌 잘해봐라. 그런데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국물도 엄따!’라는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거야말로 법리와 논리를 넘어서는 일종의 고려가 개입된 것이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건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른 잣대를 적용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헌재가 아무리 애써 자율을 권고하는 이행 명령의 성격이라고 강변한다 해도 말이다.

3.
애써 헌재의 입장을 이해하자고 들면, 일단 삼권분립의 같은 축인 국회의 일을 헌재가 처분하려니 어색하기도 했을 터이다.  그리고 같아보이는 사안이라도 정황에 따라 정상을 참작하는 경우가 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벌어진 낯 뜨거운 일에 대해 굳이 법으로 일도양단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었음직도 하다.

말하자면, 음주운전자의 난폭운전에 의해 차량이 파손된 운전자가 가해자를 처벌해 주십사 하자 판사라는 분이 ‘범퍼가 살짝 긁혔을뿐이고 … 사회적 지위도 상당한 가해자가 이후 추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고 … 피해자가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니 … 자꾸 법원에 찾아오지말고 서로 좋게 합의봐서 끝냅시다’라고 권고한 격이라고나 할까.

이 대목에서 실제 있었던 판결이 하나 떠오른다. 근친 성폭행 피해자에게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해당 가해자를 풀어준 그 판결 말이다.

헌재는 이번 판결을 통해 국회와 그 대표자인 국회의장에게 강력한 경고를 한 것이라고, 그러니 국회와 국회의장은 위법한 행위를 거쳐 통과된 법률에 대해 마땅히 자율적으로 추가조치를 취해야만 할 것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국회가 이번 건에 대해 자율적으로 어떤 합당한 조치를 할 수 있다거나 또는 깊은 성찰을 통해 상호 양보를 통한 타협을 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권한쟁의를 신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판결 이후에 보듯이 권한을 침해한 측에서는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과정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측도 공식적인 사과 하나 없으며, 권한을 침해당한 측은 위법으로 인해 빼앗긴 우리의 권한은 어떻게 된 거냐며 억울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헌재는 이번 건에 대해 진정 “정치적”이지 않고 법리에 충실하고자 했다면, 기각/각하 아니면 무효 판결을 내렸어야 옳았다.  이런 고려 저런 사정을 따지다보니 말마따나 “어중간”하고 “지저분한” 판결이 내려졌고, 그로 인해 상황이 일단락되고 자율적인 개선이 진행되기는 커녕 오히려 심판 청구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지는듯 하다.

헌재가 국회에 대해 ‘그대들의 일을 자꾸 우리에게 떠넘기려 하지 말아라’라고 도돌이표를 달고 싶었다면 차라리 그리 했어야 했고, 그도 여의찮았으면 논란의 여지가 없이 수미일관한 판결을 주었어야 했다.

지금 헌재나 권한침해자 측에서는 ‘… 했지만 … 은 아니다’라는 댓글놀이를 하는 이들을 보며 법도 논리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떠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히려 정말 몰법리 몰논리한 쪽이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시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나저나 이 놈의 도돌이표는 도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가려는 건지 답답하기만 하다.

영진공 이규훈

1952년 … 1954년 … 2009년 …

1952년 7월 7일 … 발췌개헌


1952년 7월 7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중략)

이와 같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이범석과 국회 내의 신라파가 중심이 되어 정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임제 등을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따라 구속중이던 10명의 국회의원이 석방되고 피신중이던 국회의원들도 경찰의 연행에 의하여 동원되어 며칠씩
연금되는 테러 속에서, 7월 4일 밤 국회는 기립표결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새로운 헌법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5일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인용: 네이트 사전)] (자세히 보기)

1954년 11월 29일 … 사사오입 개헌

1954년 5월 20일 실시된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은 원내 압도적 다수(203석 가운데 114석)를 차지했지만,
당초 목표였던 개헌정족수 136석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주요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자유당 소속의원과 무소속의원 136명의 서명으로 9월 8일 국회에 제출했다.

개헌안의 주요내용을 보면 국민투표제 가미, 내각
책임제적 요소의 전면적 삭제에 의한 순수한 대통령 책임제,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의 승계제도,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제한 철폐, 일부 통제적인
경제조항의 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로의 수정 등이었다.

이 개헌안이 통과되기까지 연 9일간 국회의사당 앞은 방청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국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여야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은 ‘뉴델리 사건’을 조작, 민주국민당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11월 27일 국회표결 결과 재적 203명 가운데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로 개헌정족수에
1표가 미달,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정권은 이틀 후인 29일 사사오입이라는 기묘한 논리를 적용시켜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사사오입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일 뿐만 아니라,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 규정을 철폐하는 개헌이었다는 점에서
평등의 원칙에마저 위배되는 헌법개정이었다.

[인용: 네이트 사전]

2009년 7월 22일 …

(전략)
또한 방송법 수정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사상 초유의 재투표도 이뤄졌다.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이를 알지 못한 이윤석 부의장은
표결을 마감한다고 선언했고 이에 따라 1차 투표는 부결됐다.

이에 대해 야권이 환호성을 지르자 이윤성 부의장은 황급히 재투표를
선언해 의결 정족수를 채우며 법안을 통과시킨 것.
(후략)

[인용: 야권 ‘재투표’, ‘대리투표’… 본회의 표결 ‘원천무효’ 주장, 노컷뉴스]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