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러버”, 섹스로 가질 수 있는 것 …


당당히 밝히기 뭐한 나이가 되니까 신기하게도 인간관계가 자동으로 정리가 된다. 원래 친구가 많지 않기도 했지만, 가끔은 외롭도록
혼자인 시간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동행하지 않는 관계를 힘들어하는 성격상 이건 잘된 일이다.

참, 멋스런 영화 <S러버> 를 보고 왜 이렇게 글 문을 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랑도 우정도 돈 앞에 무너지는 영화 속 관계도에 내가 싫어하는 부류의 이들이 종횡무진 등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S러버 줄거리바로 가기 


제아무리 섹시 절정의 애쉬튼 커쳐라 해도 난 그가 (제작자로써) 창조해난 인물 ‘헤더’ (마가리타 레비에바) 와, 그녀의
마지막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영원한 사랑이나 조건 없는 사랑 같은 구닥다리 이야길 하자는 건 아니다. 그저, 섹스와
사랑이 크게 혼동되는 요즘 시대에 섹스로 돈과 관계(relationship)를 동시에 얻는 삶의, 사랑의 방식은 고민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분명한 건. 여러 고민거리를 안겨준 영화 <S러버>는
고 얄팍한 사랑방식을 통찰력 있게 반영한 매력적인 핫트렌드 할리우드영화라는 점이다. 영화는 꽤나 흥미로운데 그 중 ‘니키’와
연상녀 ‘사만다’의 관계는 특히 그렇다. 둘의 다양한 체위의 숨 가쁜 섹스신엔 두 눈을 깜빡이기조차 아깝다.

물론 영화 속 ‘니키’와 현실 속 애쉬튼 커처가 겹쳐 보인 까닭도 있다. (애쉬튼 커처와 16살 연상의 부인 데미무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나와 같은 관음증 적 상상을 펼치는 관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잼잼 거리는 커쳐의 재치와 용기에
감탄하고 말았다.

또 하나, 마치 <영화는 영화다>의 소지섭 간지처럼,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애쉬튼 커처 의 매력은, 특히 완벽하게 어울리는 멜빵 패션은 극장 문을 나와서도 보고 싶고 자꾸만 기억이 난다.

영화 속 ‘니키’가 참 사랑을 진심으로 맛보았을지, 지독한 현실을 아프게 읽어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니키’도
애쉬튼 커처도 그리고 나도, 동시대 청춘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나름의 고민으로 사랑과 미래를 충실히 준비하고 있을 뿐…

영진공 애플

<반지의 제왕>과 고디바(Godiva) 초콜릿으로 본 관음증과 노출증

명랑성과학연구회
2006년 9월 13일

강릉에 사시는 이 아저씨. 보여주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으면..

얼마 전, 아내의 누드와 애인의 섹시한 사진을 올려놓고 구속( 혹은 불구속) 되었던 사람들은 강변한다. “이게 무슨 잘못이냐고. 우리가 성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아이들한테 사진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조용히 모니터 보고 즐기자는 건데, 왜 이걸 가지고 지랄하는 거냐고”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다. 대학생부터 간호사, 대기업 직장인, 심지어 대학교 겸임교수까지 붙잡혀간 그 사건을 식당에서 같이 TV로 보며 밥을 먹던 옆에 아저씨는, “미친놈들”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했으니까.

이 정도가 가장 무난한 합법이다.

우리 사회에는 보여줘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봐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이건 사회가 정한 룰이다. 사회마다 그 기준은 다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의 목 아래 10cm 미터, 배꼽 위 10cm까지는 어른만 볼 수 있다는 기준이 있다. 또한, 팬티 안은 어른이고 애고 자시고간에 절대 다른 이성의 것을 봐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그게 법이다. 물론 결혼이라는 돈 많이 드는 절차를 통과하면, 같이 결혼한 사람끼리는 서로 보여줘도 되고, 봐도 된다는 더 상위의 법에 적용받게 되지만, 일단 결혼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이성의 팬티 안을 쳐다보는 것은 무조건 범죄행위다. ( 아. 애들 것은 “보여줘도 된다.”는 관습적인 합의는 있다. 단, 이 경우에도 함부로 보면 구속이다. )

함부로 보여주고, 함부로 보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이건 간에 있어왔던 조항이다. 사회마다, 문화마다, 시대마다 얼마나 보여줘야 처벌되는지 어떤 것을 훔쳐 봐야 구속되는지 그 기준은 매우 다르지만, 사회가 합의한 “보여주기의 범위와 훔쳐봐도 괜찮은 대상”을 벗어나는 경우 어느 시대를 막론하건 간에 처벌되어진 것은 역사적인 사실인 것이다.

King Candaules ( Oil on canvas, 1859 )

플라톤의 “국가론”에 보면 “기게스의 반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와 소설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되어서 더 유명한 이 이야기는 초등학교 도덕 참고서에 나오는 이야기만큼이나 건전한 것은 아니다. 리디아(서남 아시에 위치한 고대 국가. BC 680-546 )에 사는 기게스라는 양치기 소년(?)이 투명인간이 되는 반지를 얻고, 그 반지를 이용해 리디아의 왕인 칸다올레스를 살해해 왕이 된다는 이야기의 전후 맥락은 비슷하다. 하지만 권력을 얻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을 하는 것이 도덕적인가를 주제로 다룬 어린이용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와는 달리 어른용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에는 훔쳐보기와 보여주기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가 더해져 있다.

칸다올레스 왕은 투명 반지를 가진 기게스를 자신의 신하로 두게 된다. 그리고 기게스에게 자신의 아내인 여왕의 미모를 자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며, 가장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혼자 보기 아까웠는지, 기게스에게 투명 반지를 차고 들어와 같이 구경하자고 권한다.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투명인간이 되면 여탕에 가보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남성 호르몬의 작동은 기게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기게스는 왕의 제의에 따라 왕의 침실에서 왕비의 누드를 감상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실을 왕비가 알아챈다는 것이다. ( 여기서 의문이 든다. 도대체 왕비는 투명인간이 된 기게스를 어떻게 발견했던 것일까? 부피가 증가하면 투명도가 떨어진다는 법칙 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하여간.. -.- ) 왕비는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이런 노출을 즐기는 왕을 용서하지 못했고, 이에 기게스에게 왕의 살해를 요구하게 되며, 기게스는 왕비의 이런 요청을 받아들여 왕을 살해하고, 왕비와 결혼해 새로운 메름나다이 왕조를 열게 된다.

동서양의 역사 속에서 보여주기의 노출증과 훔쳐보기의 관음증의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 이 사건을 통해, 칸다올레스 왕 (King Candaules) 의 이름을 딴 칸달리즘(Candaulism)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된다. 칸달리즘은 두 사람이 성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에, 제 3의 상대자가 이를 관전하면서 성적 만족을 얻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다. 앞서 아내와 애인의 누드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의 행위는 칸달리즘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명품 초콜릿으로 유명한 고디바 초콜릿.. 맛있을까나.. -.-;;

노출에 대한 어원 연구를 하나 했으니 관음에 대해 건들지 않을 수 없다. 관음증은 영어로 voyeurism, 다른 말로 Peeping Tomism 이라고 한다. Peeping Tomism의 어원은 초콜릿으로 많이 알려진, 고디바의 전설에 등장하는 피핑 탐 ( Peeping Tom )에서 비롯되었다.

1043년 벨기에의 코벤트리라는 지역의 레오프릭 백작은 영내의 거주민들에게 가혹한 세금인상을 하자, 이에 소작인을 비롯한 영내 거주민들은 거세게 항의 한다. 그러나 악덕 지주인 레오프릭 백작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영내 소작인들은 백작의 부인인 고디바 ( Godiva )를 찾아가 하소연을 한다. 고디바는 레오프릭 백작에게 만약 세금 인상을 취소한다면, 자신이 머리카락만으로 몸을 가린 채 알몸으로 백작의 영내를 가로지르겠다고 약속을 하게 된다. 설마 16세의 어린 부인이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백작은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하게 되고, 이 소식을 들은 백작의 영토 내의 소작민들은 모두 창문을 잠그고, 백작 부인 고디바가 거리를 지나갈 때 부인을 쳐다보지 않기로 결의한다. 고디바는 약속대로 머리카락만으로 몸을 가리고 거리를 지나갔고, 이에 백작은 세금 인상을 취소한다. 이 전설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콘벤트리(conventry) 지역에서는 매년 고디바를 기리는 축제를 한다. 세계적인 초콜릿 명품인 고디바는 이 이야기를 컨셉으로 삼아 만든 제품이다.

Lady Godiva by John Collier

여기까지는 다 아는 이야기고, 잘 안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백작 부인이 거리를 가로질러 갈 때, 창문을 살짝 열고 훔쳐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양복 재단사인 탐(Tom)이라는 사람이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지역 사회의 룰을 깨트렸나 싶은 동정도 개인적으로 있지만은, 하여간 전설에 의하면 탐은 그 일로 인해 눈이 멀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 저절로 멀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람들에 의해 처벌을 받아 눈이 멀어 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 여기서 훔쳐보다라는 뜻의 Peeping과 아까 그 톰의 이름을 따서, Peeping Tomism 이라는 관음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만들어지게 된다.

역사가 이야기하는 “사회의 합의를 넘어서는” 노출증과 관음증의 댓가는 이처럼 크다. 잘못 보여줬다가 목을 잃고 나라를 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 봤다가 눈까지 머는 형벌을 당하기도 했다. 현대라고 다를 바 없다.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허황된 처벌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형벌 – 예를 들어 벌금 500만원, 징역 1년 같은 처벌이 뒤따른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했던 칸다올레스 왕이나 탐은 그나마 역사에 이름이라도 남겼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노출과 관음은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잘못하다가는 범법자가 되어 족보에서조차 파이게 되는 잊혀짐을 얻을지도 모른다.

노출증이라고 하면 여대 앞에서 바바리를 입고 배외하는 일말의 아저씨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관음증이라고 하면 모텔촌이나 으슥한 갈대밭 근처에서 쌍안경을 들고 잠복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그렇게 프로페셔널한 분들만을 노출증과 관음증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 만족을 얻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가벼운 노출을 즐기는 사람이나 포르노를 즐겨 보는 사람들을 노출증과 관음증 환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구분지어 버리면, 세상에 노출증 환자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고, 관음증 환자 아닌 사람이 어디있겠냐만은 그건 이런데서 따질 일이 아니다. 법 만든 사람이나, 사회적 성적 한계를 규정해 놓는 분들이나, 노출증과 관음증에 대한 정신의학적 규정을 지어 놓은 분들에게 따질 일이다.

미셀푸코 캐리캐쳐

미셀푸코는 “몸은 역사적으로 절대 권력의 의지가 가해지는 곳”이라 했다. “몸”은 권력의 목적에 의해, 권력의 기준에 의해 평가되고, 금지되며, 통제되어 왔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노출증과 관음증 기준은 권력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금지하고, 통제하여 왔던 “몸”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권력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권력과 사회적 합의는 다른 말이다. 사회적 합의는 권력이 되지만, 권력은 사회적 합의가 아니다. 현재의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단어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은 권력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권력이 작용한 의지인지,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낸 도덕적 기준인 것인지. 그건 사람들마다의 기준이 다른 일일 테니, 강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저 분들의 처벌이 과장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행여 화를 내실 분이 있을 것 같아 덧붙이자면 “반지의 제왕”과 “고디바 초콜릿”은 낚시 미끼다. 이 정도의 낚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충분히 이유 있는 떡밥으로 인정될 수 있으리라 본다. 인정할 수 없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이 곳에서는 내가 절대 권력이다. 고로, 이렇게 제목을 정하는 것은 내 맘이다. -.-”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