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영에게 박수를 … 미네르바에게 지지를 …


요 며칠 문근영과 미네르바가 화제다.

문근영의 참으로 아름다운 기부행위가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안겨주어 화제이면서 동시에 이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헐뜯고 있는 일부 정신 나간 인사들이 입방아에 올라있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인터넷포탈 다음의 아고라 경제 게시판(이하 아고라 경방)에서 글을 쓰는 논객인데, 이 분의 경제전망이 매우 정확하고 정교하여 화제이면서 또한 이 분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 공공연하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여서 커다란 논란이 되고있다.

당사자들은 그저 자신이 하여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라 느끼고 있을텐데, 우리 사회는 이마저도 못 견뎌하는 못난 사회가 되었는가 보다.

이에 영진공은 두 분에게 뜨거운 박수와 지지를 보내고자 한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편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


 


문근영 님에게.
그대의 고운 마음씨와 손길에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생각하실 것이기에 실은 이런 감사의 글을 올리는 게 멋쩍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덤덤하게 글 몇 줄 올리는 걸로 요란한 박수를 대신하렵니다.
마음 편히 하시고요, 좋은 작품을 통해 계속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미네르바 님에게.
님이 아고라 경방에 처음 글을 쓰실 때부터 즐겨 읽으며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대의 “극사실주의”를 좋아하였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에게 외치는 절절한 사자후에 공감하였습니다.
그대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고 주류언론이 상업주의의 손길을 뻗치리라는 걸 그때는 예상치 못했었는데, 이리도 심각하게 우리 사회가 험악해지고 말았습니다.
부디 건강 잘 살피시고 건필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영진공 이규훈



 


 

영진공이 추천하는 지구촌 노래들





세계 경제가 혼돈의 물결 속에서 좀체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국가경제 책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시행으로 인해 우리의 경제는 얼마전에 어떤 인사가 장담한 3000이니 747이니 하는 숫자가 엉뚱한 위치에서 실제로 달성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에 빠져있다.

상황이 이럴진데, 정작 책임자들은 종부세 무력화에 지방세 신설 양도세 폐지 등 자신들을 포함한 극히 소수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보존하는데에 눈이 벌개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피해자들은 오히려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가해자들을 옹호하는 저질동화같은 상황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훗, 어쩌겠는가, 세월이 그러할진대.  허나 이 웃음이 절망과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악착같이 살아보자는 다짐이다.

자, 이제 공동체는 사라졌으니 각자 알아서 움직여야 한다.  그걸 잘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기분전환도 필요한 법.  그래서 여기 몇 곡의 지구촌 노래들을 모아모아서 여러분께 소개하노니 부디 즐겨 감상하시어 노여움과 회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데 도움되기를 바랄 뿐이다.

1.
Cancion del Mariachi
By 안토니오 반데라스 (Antonio Banderas)

요거 멕시코 노래 되게따.  도입부의 기타소리만 들어도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TV프로그램이나 광고에서 자주 쓰이는 곡인데, 이 곡은 로베르또 로드리게즈 감독의 영화 “데스페라도(Desperado)”에서 주인공인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Los Lobos와 함께 부른 곡이다.

제목의 뜻은 “마리아치의 노래”인데, 여기서 마리아치란 유랑 가수를 말한다.


2.
Le Moribond
By Jacques Brel

프랑스로 가보자.
그쪽의 대중가요를 샹송(Chanson)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수로는 에디뜨 삐아프, 이브 몽땅 등이 있다.
오늘 준비한 곡은 벨기에 출신의 샹송 가수이자 작곡가인 쟈끄 브렐(Jacques Brel)의 1961년 작품인 “Le Moribond”이다.  “죽어가는 남자”라는 제목의 이 곡은 우리에게 Terry Jacks의 “Seasons In The Sun”이라는 리메이크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브렐의 대표곡 중 “Ne me quitte pas”도 역시 “If you go away”라는 리메이크가 더 널리 알려져있다.
 
 

3.
Da Troppo Tempo
By Milva

다음으로는 옆 동네 이탈리아.
이태리의 대중가요는 Canzone라고 부른다.  사실 이태리의 canzone나 프랑스의 chanson이라는 명칭은 라틴어의 “cantio”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가사가 있는 노래(당시에는 주로 성가)를 뜻하는 것이다.

이태리의 대표 선수는 바로 그 분, 밀바(Milva) 되시게따.  1939년 생인 이 가수는 1961년에 산레모 가요제를 통해 데뷔한 이래 오랜 기간 깐쪼네의 슈퍼스타로 군림하였고 우리 나라에서도 공연을 한 바 있으며 현재도 음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들으실 곡은 “Da Troppo Tempo”, 즉 “내 인생의 노래”라는 뜻.


4.
To treno fevgi stis okto
By Alexia

서구 문명의 태동과 발전에 있어서 이태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나라 그리스.
근대에는 이탈리아의 국민들이 무솔리니로 대표되는 지독한 독재에 시달렸고 그리스의 국민들도 1960~70년대에 혹독한 군부독재에 탄압받았다.
이 시절의 저항운동가 중에 “위대한 작곡가”로 불리는 Mikis Theodorakis (그리스어로는 Μίκης Θεοδωράκης)가 있다.  압제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하기까지 했던 그는 저항운동을 수행하면서 작품활동에도 매진하여 그리스 민중음악의 대부로 존중받고있다.

그의 작품 중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곡이 있는데, 바로 조수미의 곡으로 알려진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이다.  Alexia의 노래로 준비 해 보았다.


5.
кони привиредливые
By Vladimir Vysotsky

이번에는 저 위쪽 러시아로 가보자.
스탈린 시절의 소련은 암흑의 시기였다.  혁명의 대의는 사라졌고 냉전에 기반한 대중통제가 “인민”들의 목을 조르고 있을 때, 민중들의 생각을 절절한 언어로 읊어 마음을 달래 준 시인이 있었으니 그가 블라디미르 비쇼츠키(1938 ~ 1980)이다.
(참고:
http://windshoes.new21.org/music-vysotsky.htm)

그가 남긴 작품들 중 “야생마”라는 곡은 영화 “백야”에서 미하일 바르시니코프가 춤을 추는 장면에 나오면서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져있다.


6.
Samba De Janeiro
By Bellini

자, 대륙을 넘고 넘어 다시 남미로 …
여기서 문제, 브라질의 언어는???  스페인어, 아니죠~ 포르투갈어, 맞습니다~
남미에 대한 서구의 침략은 스페인이 시작이었는데 당시 경쟁자였던 포르투갈이 뒤늦게 교황청의 권위에 기대 쟁탈전에 뛰어들면서, 양자는 대륙 서쪽은 스페인이 갖고 동쪽은 포르투갈이 갖는다는 조약을 맺는다.  이 시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미션”이고 배경이 그래서 이과수폭포지역인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호나우두가 브라질에도 있고 포르투갈에도 있는 이유이다.

뭐니뭐니해도 브라질은 쌈바.  그래서 준비한 곡이 Bellini의 “Samba De Janeiro”.

더 좋은 곡들이 많겠지만 순전히 리듬과 비트가 흥에 겨운 이유로 선택했다능~



 7.
Tubthumping
By Chumbawamba

자, 다시 대륙을 바꿔 영국으로 가서 마무리를 합시다.

Chumbawamba는 무정부주의 정치성향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그룹이다.  그래서인지 그룹 이름도 아무런 의미가 없이 그냥 지어진 것이다.
이런 그들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1997년에 대히트한 “Tubthumping”이라는 곡 덕분이다.  신나는 리듬과 계몽(?)적인 가사 덕분에 이 노래는 여러 스포츠이벤트와 컴퓨터게임의 테마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정치성향을 잘 모르고 행사에 초청하거나 곡을 쓰겠다고 했던 이들은 나중에 많이 당황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건으로 1998년의 브릿 어워드를 들 수 있겠다.
 
(아래 동영상 참고)


“Tubthuming”은 선동, 연설 또는 정치인의 뜻을 가진 속어인데,
노랫말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우리 서민들과 노동자들이 잘 견디어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자는 외침이다.

 

끗.


영진공 이규훈

디센트(The Descent, 2005), “B 무비로 만나는 키에슬롭스키”


러닝 타임이 다소 짧게 느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웰메이드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세 가지 색 3부작 가운데 <블루>를 보면 줄리(줄리엣 비노쉬)가 교통사고로 유명 작곡가인 남편과 딸 아이를 잃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뒤늦게 남편에게 임신한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등 자기 삶의 기반이라 믿었던 모든 것들을 잃게되는 상실의 고통과 몹시 더디고 힘든 극복의 과정을 탁월한 영상 감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

공포 영화 한편 봐놓고 왜 뜬금없이 키에슬롭스키 영화 얘기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디센트>의 주인공들이 동굴 탐험 중에 만나게 되는 상황은 주인공 사라(샤우나 맥도날드)의 내면적 갈등을 구체화시킨 은유라고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블루>에서의 줄리와 마찬가지로 사라도 교통사고를 통해 남편과 딸 아이를 잃었고, 절친한 친구인 주노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사고 1년 후 친구들과의 탐험 여행에 참여하는 등 일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한편 여행에 참여한 6명의 친구들 가운데 주노는 일행들 가운데 리더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여행 가이드북를 일부러 차에 놓고 옵니다. 그리고 동굴 속에 갖히는 곤경에 빠지고 나서야 “새로운 탐험 루트를 발견하여 거기에 사라의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사라에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주노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사라를 꼭 데리고 나가야한다며 끝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이라크 전쟁에 동맹국들을 끌어들인 미국 같기도 하고 그런저런 정치 지도자들의 행태 같기도 합니다. 악의는 아니었지만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 또한 과연 그러합니다.

<디센트>에서의 동굴 괴물은 실제로 그런 존재가 있을 법도 하다는 데에서 참 흥미롭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빛이 없는 동굴 안에서만 서식한 일종의 유인원으로 마치 박쥐처럼 시력이 아닌 청각으로만 대상을 인지합니다. 그리고 무슨 대단한 초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들을 해치기도 하지만 오히려 주인공들에 의해 잘 죽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에일리언이나 좀비류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 중반부터 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는 ‘미지에 의한 공포’는 상당 부분 해소되어 버리는 게 사실입니다. 주인공들이 이들과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실망하실 호러팬들도 있을 것 같구요.

다시 사라의 얘기로 돌아오자면, 몹시 고통스러운 심리 상태이면서도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려던 사라는 일행으로부터 떨어져나와 홀로 죽음의 공포와 맞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 고통의 외연화’가 이루어집니다. <지옥의 묵시록>의 오마쥬로 보이는 장면에서 주인공 사라는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여기에 주노의 악행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얻게 되면서 사라는 완전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제는 동굴 속 괴물들 보다 오히려 사라가 더 무섭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수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심약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갑자기 <라스트 모히칸>으로 돌변하시니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더군요.

<디센트>는 스타급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B급 호러 무비이긴 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나 이들이 맞부닥치는 상황들, 그리고 마지막 결말 부분까지 무척이나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도 누가 먼저 죽느냐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친구고 뭐고 없는 안타까운 인간의 본성도 적절히 묘사합니다. 구태의연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라의 절망적인 내면을 시각적으로 묘사해낸 마지막 장면이 오랜 잔상을 남깁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