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나는 꿈을 꾸었네

 



 


 


 


 


수잔 보일(Susan Boyle)이 하도 집안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옆집 사람한테 고소를 당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기사 참고)


 


수잔 보일이 누구냐하면 수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 중에서,


엄청난 반전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인데,


 


지난 2009년 “Britain’s Got Talent”에 47세의 나이로 참가하여,


극성맞은 아줌마의 외모와는 다르게 놀라운 가창력으로 결승에 올라,


2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 기세를 몰아 그녀는 세계 투어를 하기도 하였고, 발표한 앨범


“I Dreamed A Dream”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챠트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처음 오디션장에 들어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그걸 한 번 보도록 하자.







 


 



 


그녀가 오디션에서 부른 노래의 제목은 “I Dreamed A Dream”.


이 곡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레미제라블 (Les Misérables)”에,


삽입되어있는 곡인데 극 중에서는 Fantine이 부르는 노래이다.


 


프랑스에서 조촐하게 만들어졌던 이 무대극을 영국의 제작자가 뮤지컬로 만들어 공개한 것이 1985년, 그리고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진 건 1987년.


 


그 후로 이 뮤지컬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극 중의 하나로 손 꼽히며 브로드웨이에서 지금도 계속 공연 중에 있다.


 


우리에게는 쟝발잔과 신부의 에피소드 정도로 알려져있는 작품, “레미제라블”.


허나 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프랑스 혁명 시기 가난과 핍박에 허덕이던,


“비참한 인생들 (Les Misérables)”이다.


 


 









 


 


 


그러니까 극 중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Fantine처럼,


직장을 잃고 생계를 위해 매춘의 길로 들어서는 이들,


그녀의 딸 Cosette처럼 어릴때부터 학대와 착취에 시달리는 이들,


처참한 대우를 받으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던 공장노동자들,


그런 사회의 현실에 분노하여 혁명을 외치며 투쟁에 나서는,


Marius 같은 이들이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과 지금의 우리 현실이 구조적으로 뭐가 그리 다를까.


누리는 사회적 자원의 양이 늘고 정치 참여의 정도와 기회가 넓어졌지만,


근본적인 구조가 변하지는 않은 듯 하다.


 


요즘은 오히려 소위 선진국의 부자들과 고위정책담당자들이 지레 나서서,


호들갑스럽게 자본주의의 종말을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는데,


과연 그들이 머리 속에 그리고있는 미래의 사회구조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의 심중과 우리의 꿈은 결국은 일치하게 될까.


 


 


 


I Dreamed A Dream


From the musical “Les Misérables”


 


 


 



 


 


 


 


There was a time when men were kind
When their voices were soft
And their words inviting
There was a time when love was blind
And the world was a song
And the song was exciting
There was a time
Then it all went wrong


 


사람들이 서로를 챙겨주던 때가 있었지,


그때는 모두가 다정한 목소리로,


서로를 이해하는 말들을 나누었어,


그때는 사랑에 조건이란 건 없었어,


세상은 온통 노래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노래는 모두 흥겹기만 했었지,


그런 때가 있었어,


그런데 그 모든 게 잘못돼 버렸어 ……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When hope was high
And life worth living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I dreamed that God would be forgiving
Then I was young and unafraid
And dreams were made and used and wasted
There was no ransom to be paid
No song unsung, no wine untasted


 


그 꿈을 꾸었던게 언제였던가,


부푼 희망과,


삶의 의욕이 넘치던 그때,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꿈꾸었지,


신은 모든 걸 용서하시리라 꿈꾸었지,


하지만 그때 난 어리고 겁이 없었어,


그 꿈들은 옛일이 되었고 잊혀진채 버려졌다네,


그때에는 사람을 몸값으로 흥정하지 않았지,


그때에는 누구나 노래를 불렀고, 모두들 술을 나눠 마셨지,


 



But the tigers come at night
With their voices soft as thunder
As they tear your hope apart
As they turn your dream to shame


 


하지만 한밤 중에 그 호랑이들이 나타나고 말았지,


천둥처럼 낮고 음산한 울음을 그르렁대면서,


그 놈들은 나의 희망을 갈갈이 찢어놓았고,


그 놈들은 내가 꾸었던 꿈을 수치로 바꿔 놓았지,  


 



He slept a summer by my side
He filled my days with endless wonder
He took my childhood in his stride
But he was gone when autumn came


 


그는 나와 함께 여름을 지냈다네,


그는 나의 나날들을 멈추지않는 경이로 채워주었지,


그는 내 어린시절을 그의 걸음으로 감싸주었지,


그러나 가을이 오자 그는 떠나버렸네,   


 



And still I dream he’ll come to me
That we will live the years together
But there are dreams that cannot be
And there are storms we cannot weather


 


난 여전히 그가 내게 돌아오리라 꿈꾸고있네,


우리 오랜 세월을 함께 살거라 믿고있다네,


하지만 이뤄지지 않을 꿈이 있다는 걸 나는 아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고통들이 있다는 것도 아네,   


 



I had a dream my life would be
So different from this hell I’m living
So different now from what it seemed
Now life has killed the dream I dreamed.


 


난 꿈꾸었다네,


지금의 지옥과는 전혀 다른 나의 삶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나의 삶을,


하지만 지금의 삶은 내가 꾸었던 꿈을,


죽여버렸다네,


 


 


 


영진공 이규훈


 


 


 


 


 


 


 


 


 


 


 


 


 


 


 


 


 


 


 


 


 


 


 


 


 


 


 


 


 


 


 


 

2009년 그리고 1968년


[문화일보] 발길 돌리는 수문장 (2009.6.5)

[문화일보] 대한문 앞은 아직도 ‘무법지대’ (2009.6.22)

그리고 6월 24일.
대한문 앞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보수단체의 기습을 받더니 철거됐다.


1968 년 1월 18일. 서베를린 쿠프퓌르스텐담 광장에서는 약 2만명의 시민들이 ‘불법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체게바라’와 ‘호치민’을 연호하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판했다.  이 시위에는 독일 학생 운동 지도자 루디 두취케가 있었다.

‘ 빌트 차이퉁’을 비롯 여러 신문들을 소유한 당시 독일의 언론 귀족 악셀 슈프링거는 미국의 세계 정책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독일의 산업귀족 대부분은 독일 제 3제국의 후원자였고, 과거에 히틀러를 공격하지 않은 것처럼 패망 후에는 그들의 새로운 보호자 미국을 섬기려고 애썼다.

악셀 슈프링거의 신문들은 그래서 두취케를 ‘빨갱이’라고 공격했으며 심지어 ‘더러운 일을 경찰에게만 맡기지 마라’라는 제목까지 붙였다.

루디 두취케

뮌헨 출신으로 실직 상태에 있던 요제프 바크만은 매일 이런 신문을 읽었다. 자신의 처지에 낙담해 있던 그는, 학생들을 공격하는 ‘빌트 차이퉁’을 읽고 만족감을 얻었다.

1968년 4월 11일. 루디 두취케는 어린 아들의 약을 짓기 위해 서베를린의 약국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요제프 바크만은 두취케에게 다가가 세 발의 총을 쏘았다. 한 발은 가슴에, 한 발은 얼굴에, 한 발은 머리에.

요제프는 자신을 붙잡은 경찰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마틴 루터 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산주의자를 미워하기 시작한 뒤로 내내 두취케를 내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분노한 학생들이 독일 전역에서 슈프링거의 사무실을 공격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어느 우익 목사가 집회하는 교회로 들어가 마지막 찬송가를 ‘인터내셔널가’로 바꾸어 버렸다.

(1968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중에서)


1968년 4월 11일, 수 천명의 학생들이 슈프링거 신문 베를린 본부 앞에서 루디 두취케 저녁 사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고있다.

총격으로 인해 루디 두취케는 뇌에 심한 손상을 입어 말하기를 다시 배워야했고, 이후 영국과 덴마크를 전전하다가 1979년 12월 24일에 덴마크 거주지에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저격 사건은 독일의 학생운동을 과격일변도로 치닫게하여 바더마인호프가 만들어지는 계기를 제공하였지만, 정작 루디 두취케는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학생운동을 주창하였다.

요제프 바크만은 저격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던 중 1970년 2월 24일에 자살하였다.


바다에서 낙조의 화폭은 하늘 만이 아니다. 해는 자신이 잠겨가는 바다까지 색색의 노을로 물들여 놓는데 그 순간에는 바다에 금빛 찬란한 들판이 생기고 하늘에 석양 짙은 섬들이 생긴다. 바다의 포말은 추수 전 벼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황금빛이고, 하늘의 구름은 땅거미 지는 섬처럼 그림자를 내민다. 낙조의 바다는 들판과 바다와 하늘과 섬을 모두 합쳐놓은 거대한 어울림이다.

유년은 모두 바닷가에서 보냈다. 내 유년의 노을은 그렇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논이 없는 동네에서 난 해지는 바다를 통해 논을 보았고, 다도해가 아닌 동네에서 난 해지는 바다를 통해 섬을 보았다. 뭍의 노을은 그보다 훨씬 소박했다. 열기가 느껴지는 이글거림도 없었고, 모든 걸 다 섞어버리는 어울림도 없었다. 고운 주황과 고운 붉음을 입김처럼 호호 파란 하늘에 내뱉다가 산등성이로 어둠을 뿜고 조촐히 식어 버렸다. 싱거웠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고속도로. 차 왼편으로 그 싱겁고 조촐한 노을이 걸렸는데 수많은 타워크레인이 공성병기처럼 노을 앞에 서 있다. 아산 혹은 오산 근처였을 것이다. 타워크레인이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규모 고층 아파트가 대신할 테니 그 싱겁고 조촐한 노을마저 찾아보기 어려워 질 것이다. 노을이 본시 싱겁고 조촐했을까?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는 바다에서 인간의 손이 닿는 뭍으로 옮아오면서 노을은 싱겁고 조촐해진 것 아닐까?

김훈은 일산을 가르켜 ’10만년의 수평을 30년의 수직이 대신하게 된 동네’라고 했다. 어디 일산 뿐이고, 10만년밖이랴. 이 갸날픈 ‘자연보호 정신’조차 창피할 정도로 도시의 속도는 가파르니 기껏 노을이나 보고 상념이나 찍어내는 일까지 구태의연하고 촌스럽다. ‘디자인 서울’은 그 사이에도 무럭무럭 잘 자라날 것이고.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