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희망이 없어, 멋있던 기억.,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영진공 66호>

과거사진상규명위
2006년 12월 31일

제 젊은 친구분의 블로그에 답글로만 달았다가 , 또 다른 친구분의 핀잔 듣고 본방에 올립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세대가 가진 새로운 영감은 …. 언제나 어제 그것의 반성이다.

제가 영화 ‘비트’에 늘 아쉬운 건, 진짜 원작 ‘비트’가 가진 얄팍하나만 진실한 시대정신입니다. 우리시대가 먹고사는 그 사실을 그렸던 데 반해, 영화는, 훨씬 단세포적이고 말초적이고 찰나적이고 개인적이고 우짜고 저짜고입니다.

제가 가장 좋은 영화평자게서는 김성수에 대해 늘 상당한 호감을 보여주셔서 그점 무시할 수 없고, 제가 제일 아끼는 동료 한분도
영화 비트에 대해 늘 끝없는 찬사를 주시지만, 원작이 가진, 얄박하나만 계속 지켜온 삶과 존재의 정서를 영화가 한 줌의
청춘광고물로 전락 시킨 건 늘 답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영화를 만들어 볼 기회가 온다면, 그리고 그게 오리지날 시나리오가 아니라면 그 대상은 언제나 ‘비트’였습니다.

김성수의 비트보다 잘 포장할 자신은 없지만, 그 보다 원작이 보여주고 싶었던 그 정서는 더 잘 살려낼 자신이 있습니다.(물론 김감독도 못해서 못한게 아니라 안해서 그런 거겠죠.)

로미와 민의 차이는 현실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대로입니다.(그 현실감이 허화백을 당대 최고의 환쟁이로 남겨줍니다.) 로미가 겪는
고통은 민의 고통과는 차이가 있고, 그걸 쉽게 계급이라고도 할 수 있고, 차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존재의 시작을 늘
고통스러워하고 반성하고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계급에서 그런 천부적 능력을 남름대로 주어 받았지만, 결국에 그들
스스로 그들의 존재 방식에 적응하고, 이 시대의 사람처럼 살아가는 그 천부적 능력 때문은 아니였습니다.

그들이
꿈이 없었다는 건 그들의 각자의 환경을 이겨내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얼마나 행복합니까.
세상은 성공이니 뭐니 하면 각고의 노력을 각각의 개인에게 요구하지만…사실 그건 침략이고 공격이고 약탈입니다. 그들은 꿈을
꾸지 않을 수 있는 재주가 있었기에 나름 멋있고, 또 주인공이였습니다.
그들 주위의 사람들은? 환규는? 태수는? 로미의 주위사람들은? 그들은 꿈궜죠. 우리가 그이들 처럼 삽니다. 주인공들은 그래도 행복합니다. 꿈꾸지 않아서 그들을 허화백은 주인공으로 낙점했죠.

엔딩은? 모두 꿈꾸지 않았습니다만. 처음부터 약탈의 꿈을 꾸지 않은 민은 담담하게 행복합니다.

그들이 개인적 영달을 위한 꿈을 꾸지 않았기에, 즉흥적이고 즉각적인 세대임에도 (잘못된 것에 대해 심사숙고 하지 않고 바로 반대하고 반박하는 진실한 세대) 결국 성실한 삶을 가지게 됩니다.

홍콩 삼류 느와르처럼 싸움박질 하다 죽어가는 정우성(그가 민이라는 건 어불성설)에 비해 길거리의 노점에서 b자 데이프를 파는
민이에게 전 공감하고 자기애같은 사랑을 느낍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루하게 보일지도 모르는 삶을 찬찬히 챙겨가는 불세출의
파이터에게 전 존경심을 보냅니다.

꿈을 꿀 필요가 없는 세상은 행복합니다. 그 다음은 꿈이라도 꿀 수있는 세상이
행복하겠죠. 실현 불가한 꿈만 꾸거나 꿈조차 꿀 수 없는 세상은 참담합니다. 비록 시작에는, 꾸어 볼 꿈조차 없던 젊은이들이,
선선히 비루한 기성의 삶이나만 꾸려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이 인간들이 가진, 거의 유일한 이유이자 가치입니다.

적어도 그들은 그 다음 ‘비트’세대에게 더 커다란 반항과 행복의 자리을 넓혀 주었습니다.

…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원작에 장면하나, 이사짐 센터 직원으로 나간 민을 깔보던 어떤 이에게, 민이 보여준 그 ‘침착함’과 ‘당당함’….제가 가진 완벽한 환타지. 제가 그렇게 멋지게 보일 시간이, 남은 평생에 있을런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장
버디(yibudd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