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공 64호]”오빠 못 믿니?” 상황에 대한 종합적 분석

명랑성과학연구회
2006년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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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본문과 상관 없습니다.

어느 깊은 밤. 남녀가 모텔 앞에서 잠시 멈춰서 있다.
여자는 그곳을 떠나려 하고, 남자는 붙잡으려 한다.
“사랑한다면, 오늘 밤 나를 지켜줘요.”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가 말한다. 그녀의 눈가에 옅게 어린 눈물이 애처롭다.
여자의 눈을 한참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 천천히 입을 연다.
“오빠. 못 믿니?”

“오
빠. 못 믿니?” 라는 문장은 사실 대단히 함축적인 말이다. “오빠를 믿어라.” 라는 회유의 의미가 있을뿐더러, “오빠를 그렇게
못 믿었었니? 실망이구나.”와 같은 감정 자극의 전략도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나를 믿어다오”와 같은 현재
시점에서의 믿음을 요구하는 말일뿐더러 “오늘 이후로, 내가 너를 책임질테니 앞으로는 나를 믿어다오.”와 같은 미래 시점에서의
믿음을 강요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나를 믿고, 너를 맡겨라.” 정도이며, “사랑한다면, 오늘 밤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과 붙여서 해석하자면 “그건 싫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입에서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라면 이미 여자의 마음은 결정이 된 상태다.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줘요.”라고 말을 하는 것은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남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자신의 뜻을 세우며,
여기에 다음날의 어색함까지 커버하려는 전략적인 멘트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졸리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갑시다.” 정도일 것이며,
모텔 앞에 서있는 그 장면과 붙여서 해석하자면 “오빠 마음은 알겠지만, 싫어.”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상황이라면,
남자가 대단히 불리하다. 여자의 마음은 집에 있고, 남자의 마음은 모텔에 있는 동상이몽의 순간에,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붙잡아
모텔 동시 입장을 성공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오랜 기간의 고된 작업이 막바지에 치달아 남녀가 모텔 앞에 같이 서
있는 장면까지 갔다면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에 판단력이 흐려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제 한 골만 넣으면 경기는 끝나는
상황인데, 종료시간은 다 되어오고, 더 이상 날릴 뻐꾸기도 없는 체력적 한계 상황이 도달한 상태에서 남자는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기에 “오빠. 못 믿니?”라는 문장은 사실 “일단 모텔에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라는
의미에 “제발. 부탁이다.”라는 사정을 섞은 마지막 공격인 것이다. 그러나 불리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날린 슛은 언제나 과녁에서
벗어나는 법. 경기를 결정짓는 쇄기 골이라고 쏜 문장이지만, 사실 그 문장은 자살골이다. 여자도 알고 있다. “오빠. 못
믿니?”의 의미를.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60년대 감성으로 살아가는 백치미의 여인이 아닌 다음에야, “오빠. 못 믿니?”가
“오빠를 믿지 마라.”의 우회적 표현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기에 대부분의 상황은 모텔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잠시간
왈가왈부하다 결국 여자는 집에 가고, 남자는 집에 가다 우울한 마음에 소주 한 잔 하는 것으로 종료되고 만다.

따라서
현명한 남자라면 “오빠. 못 믿니?”와 같은 문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먼저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이
나오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는다. 이 말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복잡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현명한 남자가 여자와 함께 모텔 앞에 같이 섰을 때는 모든 작업이 물밑에서 마무리 된 상태인 것이며, 더 이상의 돌발변수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마무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된다면, 오늘은 이쯤에서
작업을 마무리하고 바이바이 하는 것이, 오늘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내일 먹을 사과나무를 심는 작업인의 마인드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모텔 앞에까지 같이 갔던 일은 다음을 위한 복선으로 남겨두고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면, 내일 정말 지구가 멸망해버리기에 오늘 결과를 봐야 한다면, 현명한 남자는 여자의 말을 꼼꼼히
되짚어 생각하게 된다. 애절한 표정으로 긴 한숨마냥 내 뱉은 여자의 말 “사랑한다면, 나를 지켜 줘요.” 이 말.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해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차근차근 짚어 보면, 비비고 들어갈 구석이 충분히 있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깡패 국가가 아니다. 대로변에 있는 모텔 앞에서 강제로 여자를 어쩌구, 저쩌구 할 만큼 대한민국의 치안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다시 말해, 남자가 지켜주고 말고를 떠나, 마음에 안 들면 여자가 그냥 집에 가면 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랑하건 안 하건 간에, “집에 가요.”라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가면 되는 것을 가지고 “사랑하면, 나를 지켜 줘요.”라고 말을
했을 때는, 여자는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밤늦게, 모텔 앞까지 남자와 같이 온 상황이라면, 여자에게도
무언가를 바라는 기대치가 있거나, 무언가 남자에게 실망한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게 무얼까? 여자가 기다리는
것이? 남자에게 실망한 것이? 이것은 쉽게 말하기 어렵다. 남자와 여자의 성격과  그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순간의 분위기와 느낌을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전체적인 상황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순간적인
상황해석과 순간적인 상황대처가 동시에 가능한 훌륭한 남자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기에 많은 남자들이 모텔 앞에서 쓴 고배의
잔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홀로 야동을 틀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잠을 청하는 것이리라.

이런 경우, 여자의 마음을
해석할 길이 없다면, 여자가 요구하는 기대치가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면, “오빠. 못 믿니?”와 같은 후기 산업
사회에서나 통할 것 같은 멘트를 날리기 보다는, 차라리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낫다. 여자가 자리를 떠도
그렇게 20분간 서 있다면, 여자가 다시 되돌아올 가능성이라도 높아지니까. 말빨에 자신이 있다면 보다 세련된 화술을 구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사랑해. 그래서 너의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같은 말은 그 특유의 느끼함 때문에 안 통할 것
같지만, 의외로 분위기가 확보된다면 먹히는 말이다.

여자의 “사랑하면, 나를 지켜줘요.”라는 말은 그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남자에게 떠넘기는 대사다. 이걸 역이용해, 책임을
다시 여자에게 되돌려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오빠를 사랑하지 않아?”와 같은 대사는 여자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된다. 이렇게 되면 여자 입장에서는 선택권이 자신에게 넘어 왔음을 인지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반전상황에 당황하게 된다. 보통은
이 경우 “사랑하지만, 그것과는 달라요.”라는 여자의 멘트가 뒤 따라 오지만, 이 경우 남자의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체념이 섞인 듯한 동문서답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이 정도까지 되면 상황은 난감해지고, 해결방법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지만
“오빠. 못 믿니?”와 같은 멘트가 발생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종료로는 이어지지 않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가질수
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춥다. 들어가자.” 와 같이 모든 상황이 마치 끝난 것처럼 말하는 멘트를 날리거나, 아무 말 없이 어깨에
손을 얹고 천천히 움직이게 된다면 보다 쉽게 모텔 동시 입장이 가능해진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 결정타를 날린답시고 “잠깐
쉬었다 가는 거야.” 라던가, “맥주나 한 잔 하자.”와 같은 말은 금물이다. 이런 말들은 “오빠. 못 믿니?”와 동급의
말들이다.


깐 공상과학 소설을 썼다. 앞서의 방법들은 그저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예시일 뿐이다. 상황은 언제나 케이스 바이 케이스고, 건
바이 건이다. 현실은 머릿속과 다르게 상황이 진행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거기까지 왔는데, 들어가지 않는 걸까?”라는
기본적인 물음을 여자의 입장에서 알아내는 것이며, 여자의 마음이 모텔 앞에서 변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
해결하고, 여자의 불안과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게 된다면 복잡한 상황 설정과 그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소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여자의 마음을 배려하는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며, 이러한 노력과 훈련이 생활화 된다면
모텔 앞에서의 난감한 상황은 보다 쉽게 종료 될 수 있는 것이다.

섹스란. 다들 알다시피. 배려와 이해의 미학인 것이다.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

[영진공 64호]조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명랑성과학연구회
2006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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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의 동상이몽


[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여자는 허탈한 표정이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남자 간신히
고개를 들어 여자에게 말한다. “미안해.” 여자는 표정을 가다듬고,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 여자의 괜찮다는
말에 남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다. 괜찮다는데 무어라 말을 할 것인가?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실망감을
읽을 수 있다. 남자는 오늘도 1분을 넘기지 못했다. 이제 갓 체위 하나를 시도했을 뿐인데, 남자는 그대로 끝나 버렸다. 조루는
젊고 건강한 남성성의 표현일 따름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짧은 플레이 시간에 남자 스스로도 한심스러웠다. 사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여자도 괜찮지 않았다. 모텔에 들어와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치는데까지 걸린 시간이 30분이었다. 게다가 애무만 20분.
그런데 막상 본 행사는 1분이라니. 여자는 평소 신앙심 깊은 신자였지만, 오늘은 신이 인간의 섹스를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설계한
것이지 않을까라는 원망까지 하였다. 게다가 오늘은 가장 안전한 날이었다. 임신 가능성 제로인 오늘은 한 달을 기다려 얻은 신의
축복 일이었다. 그런데 그 긴, 30일 간의 기다림을 단 1분 만에 끝내다니. 그저 허탈한 마음뿐이었다. ]


어려운 상황이다. 남자로서는 한 없이 창피한 상황인 것이고, 여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장면이다. 그렇다고 남자는 계속
창피한 표정만 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체면이 있지. 이정도의 고난에 마음 약해져서, 고개 숙이고 있는 것은 가오가
서지 않는다. 상황을 역전시킬 무언가 액션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렇지만 마땅한 것이 없다. 허풍이라도 치고 싶지만, 오히려
유치한 변명이 될까봐 고민스럽다. 여자 역시, 실망했지만 실망했다는 표현을 하기 쉽지 않다. 행여 남자가 상처라도 받는다면,
미안해 질 것 같다. 실수로 “풋”하고 웃었다가, 헤어진 커플도 여럿 봤다. 그래서 오히려 남자가 허풍이라도 쳐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옆에서 그 허풍에 맞장구라도 쳐 줄 텐데. 고개 숙이고 있는 남자에게 오히려 여자가 미안하다.

남녀는 서로의 생각에 잠시간 말이 없다.
침대 위로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남녀의 동상이몽은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조루에 대처하는 남자의 세 가지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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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지금 이 상황이 진심은 아니야.."

보통 이 경우, 입을 먼저 여는 것은 남자다. 어찌되었건, 현 상황의 원인제공자는 남자니까. 남자입장에서 특별히 할 말이 없을
것 같지만, 막상 말을 꺼내면 휘두를 수 있는 변명꺼리는 여럿 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변명은, 원인을 외부환경이나 평소와
다른 몸 상태에 돌리는 것이다.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래. 게다가 왜 이리 조명은 밝은 거야?”
이런 변명, 의외로 효과적이다. 주위 환경이나 몸 상태가 마음속에서 소망하는 섹스 시간을 따라가지 못했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여자 입장에서도 “그래. 다음에 잘 하면 되지.”라며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변명에는 부작용이 있다. “다음에는
정말로 잘해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되게 되며, 이 명제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에는 정말 잘 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또 못하면 “몸 상태 때문에 그런 것이야.”라는 지금의 변명은 거짓이 되며, 억지로 구겨 세웠던 남자의 자존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섹스를 할 때마다, “오늘도 몸이 이상하네? 오늘은 왜 이리 방이 어두운거야?”라는 변명으로 일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 정말 다음에 잘 할 자신이 있거나, 혹은 열심히 단련하고 훈련하여 강해질(?) 자신이 있거나, 혹은
다음부터 이 여자와 섹스를 하지 않을 계획이 아니라면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변명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조금 현명한 남자라면 훨씬 더 담백한 변명을 하게 된다. “미안해. 내가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 이해해줘. 다음부터는
정말 잘 할게.” 이런 변명 얼핏 들으면 정말 쿨해 보인다. 남자라면 누구나, 침실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강력한 변강쇠가 되거나,
혹은 섹스를 온몸으로 마스터한 섹스 킹이 되고 싶고 싶어 한다. 그런 남자의 일반적인 침실 판타지를 이겨 내고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이런 종류의 변명을 하는 남자들에게 박수를! 용기를 내어 한 변명이고 고백이기에 여자들도
남자들의 진심을 이해한다. 정말 잘 하고 싶었는데, 안 된다는데 무어라 할 것인가? 그저 잘 하라고, 다음에는 더 잘 해 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밖에. 그러나 여자들도 알고 있다. “앞으로 더 잘 할께”라는 남자들의 이런 종류의 변명은, 학창시절
성적표를 받아온 자식이 부모님에게 무릎 꿇고 앉아서 하게 되는 “앞으로 더 좋은 성적을 받아올게요.”라는 변명처럼 진심만
가득하고 실천은 빈약한 고백이라는 것을.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단은 믿어야지.

말로 승부를 하는 남자라면 로맨틱한
변명을 꺼내게 된다. “미안해. 참을 수가 없었어. 너를 그만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야.” 고개를 숙이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하는 남자의 이런 변명에 여자들은 할 말이 없다. 사랑한다는데.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는데. 현재의 상황이
실망스럽지만, 기분 나쁠 것까지는 없다. 상황을 아름답게 종료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변명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상당한
모순을 안고 있는 말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일찍 끝난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래 섹스를 하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또한 사랑하면, 사랑하면 할수록 더 빨리 끝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돌려 생각하면, 변강쇠와 옹녀의 3시간짜리 한판은 미칠
듯이 미워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시간이라는 결론이 되며,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섹스를 했다면 초단위로 결론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모순은 시간이 지나, 그대로 이 남자에게 되돌아올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몸 컨디션이
좋아 오랫동안 섹스를 하게 되었을 때, 이 남자는 여자에게 무어라 그러겠는가? “오늘은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조루에 대처하는 여자의 세 가지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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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나도 날고 싶어..."


어색한 상황에서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은 남자지만, 상황을 종결짓는 키를 갖고 있는 것은 여자다. 남자의 변명은 스스로에 대한
자기위안이기도 하지만, 최종 목적은 여자의 이해를 구하는데 있다. 여자가 납득하고, 이해해야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향후 남녀간의 섹스라이프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여자가 하게 된다.

배려라는 단어는 안드로메다 정도에 날려 버린 여자, 혹은 남자에게 언젠가 한 방 펀치를 날려주기를 벼려왔던 여자, 혹은 쿨함을
가장한 아무 생각 없는 여자는 이런 상황에서 그저 웃을 뿐이다. 그것도 비아냥을 섞어. “사정 한 거야? 아니면 흘린 거야?
흐흐” 남자 입장에서 이런 농담은 거의 치명적이다. 가슴에 칼이 꽂힌다. “째째하게 그러지 말고, 조금 더 힘을 써봐. 아낄 때
아껴야지.” 남자는 아끼고 싶어서 아낀 것이 아니다. 거기까지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짜 끝난
거야? 장난하지 마.”이라며 생끗 웃는 여자의 순진한 웃음까지 더해지면, 남자는 처참한 확인사살을 당하게 된다. 어쩌라구.
어쩌라구. 마음속으로 눈물 흘리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자의 조루현상을 비웃는 여자. 이 남자와 더 이상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다. 물론, 남자가 받을 상처를 예상하지 못하는 순진한 여자거나, 그 정도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쿨한 여자라면, 남자의 상처를 가슴에 난 털뽑기 정도의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받는 상처는 털뽑기가
절대 아니다. 비유하자면 가슴털을 라이터로 지지는 정도가 될 것이다. 가슴에 난 털은 다시 솟아나기라도 하겠지만, 라이터로
지져버린 털은 다시 솟아나지 않는다. 남자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현명한
여자들은 이런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 남긴다. 남자의 변명은 변명으로 인정하고, 그냥 기다린다. 담배라도 한 대 피던가,
텔레비전을 보던가, 아니면 다시 샤워를 하던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시간을 보내며,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린다. 어떤 타이밍?
남자의 고추가 다시 서는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성기를 섹스 후에 바로 세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정
시간이 지나야, 남자의 페니스는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정신을 차려 섹스가능한 자세가 갖추어진다. 남자마다 정신을 차리는 그
시간이 다르기에, 그 시간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남자의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그 시간이 달라지며, 여자의
노력이 더해지면 그 시간은 비례하여 짧아지게 된다는 것이 민간 성의학계의 정설이다. 기다림의 열매는 달다 했던가? 두 번째 하는
섹스는 처음에 비하면 훨씬 길어지게 된다. 남자 입장에서도 급한 불은 꺼진 상태이기에 훨씬 여유롭다. 이런 여자의 대응은 굉장히
현명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지만,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그건 두 번째가 불가능한 남자가 많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라면 두 번째
섹스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갈수록 한 번에 두 번하는 (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으리라.) 이런 섹스가 쉽지 않다. 삼십대가 넘어가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조루 현상이 심한
사람이라면 두 번째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예외 상황을 제한다면, 가장 효율적인 여자의 대처라 할 수 있다.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 가장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여자의 대처는 남자에게 화를 내는 상황이다. 이건 정말 회복 불능이다. 여자가
버럭 화를 낸다고 해서, 남자가 무릎 꿇고 빌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는 이런 행동은 더 이상 관용과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다. 따라서 화를 내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제
우리 섹스는 그만하자.”가 아니라,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라는 의사표현이 된다. 실제 이렇게 여자가 화를 내서 깨진
커플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 여자는 남자가 아주 짧은 시간에 사정을 하며 자체 신기록을 달성하자, 그냥 옷 입고 말없이
모텔을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여자의 소식을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는..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절대 화는 내지 말자는 것이다. -.-


조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남자의 변명을 세 가지로, 여자의 반응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았지만, 이건 그저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일 뿐이다. 사실, 상황 분석과 대처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 글 중간 중간 “어쩌라구”라는 추임새를 넣었는데 이게 남자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방법이 없다. 조절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 섹스 도중 애국가도 부르고, 이번 달 카드 값도 계산해 보고, 김정일 얼굴도 생각해 보고, 부모님 얼굴까지
그려 보고, 심지어는 이차 방정식까지 풀어 보지만, 그래도 조절이 안 되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저 스스로에 대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기에 뻔히 구질구질한 변명임을 알면서도, 구태여 변명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변명은 해도 안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인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는데, 성적이 나오지 않는 수험생의 안타까운 마음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당연히 아쉽다. 밥만 먹으면 바로 한 번씩 때리는 신혼부부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중년 부부, 혹은 젊은 연인의 섹스는 특별한
이벤트가 된다. 기대가 섞인 이벤트가 허무하게 끝나는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조급하게 화를 내거나, 비웃지는 않는다. 남자가 받을 상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속으로
화를 삼킬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다. 상황을 해결하는 열쇠는 여자에게 있다. 넓은 마음으로 남자를 이해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남자의 조루 상황을 이해하고, 다독여야 한다. 남자의 변명이 구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깊은 믿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음에 더 잘하겠다는 남자의 다짐 역시 유치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랑 가득한 신뢰로 믿어 주어야 한다.

조루
란 육체적 감각의 예민함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의 미숙함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인 예민함이 그 원인인 경우가 더
많다. 육체적 예민함은 치료가 어렵지 않다. 비뇨기과 병원이나 성인용품 쇼핑몰을 뒤지면 남자 혼자서 수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예민함은 남자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온갖 상업적인 미사여구로
다양하게 포장된 여자의 몸을 단순히 몸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은밀한 판타지로 점철된 섹스라는 행위 역시, 남녀
간에 나누는 단순한 육체적 사랑 행위로 받아들이려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굵은 모래와 굵은 소금을 2대 1 비율로 섞어 남자의
페니스를 비비는 철사장 훈련을 30일간 아침저녁 식후 30분씩 하게 되면, 조루가 극복된다고 믿는 분들에게는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이건 정신적 조루 증상을 무시하는 발상일 따름이다. 여자의 따뜻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포용이 함께 할 때, 조루는
육체적 정신적 차원 모두에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섹스란 그저 남녀 간의 육체적 마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섹스가 단순한 육체의 향연이라면, 인간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결혼제도와 남녀 간의 섹스 갈등을 주지 않았을 것이며,
금요일 밤에 하는 부부 클리닉 코너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적 마찰과 더불어 정신적인 감정의 교류가 존재하기에 섹스에
눈물 흘리는 여자와 섹스에 자부심을 느끼는 남자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섹스란, 서로의 감정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나오는 성과물 같은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얻게 되는 선물 같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자의 따뜻한 배려와 이해만이
조루해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은, 그러기에 여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말은 아니다. 같은 곳을 향해 보기 위해 여자가 남자를 향해
손을 내미는 모습이며, 사랑이라는 긴 항해를 위해 올리는 돛단배의 돛처럼 남자의 사랑을 보듬기 위한 섹스의 한 과정일 따름인
것이다.

신앙심 가득한 여자는 문득, “신앙이란 어느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랑은 지금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신께서 남자와의 사랑을 시험하고 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과 신의 뜻으로 이 순간의 어려움을 극복하리라. 여자는 그렇게 기도한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하나. “왜 신은
우리의 사랑을 하필이면, 조루를 통해 시험하시고 계신 걸까?” 여자는 그렇게 자신의 신실한 믿음 위에 솟구치는 의심 하나를
지우지 못한다.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

[영진공 64호]<랜드 앤 프리덤>

과거사진상규명위
2006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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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자유,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
스페인 내전을 다룬 영화와 책은 많지만, 켄 로치의 이 영화가 특별히 회자되는 건 그 복잡다단했던 정치적 지형, 그리하여
이제껏 은폐되거나 숨겨져왔던 스페인 내전의 ‘계급혁명적 본질’을 제대로 담아낸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 막연하게 ‘프랑코의 쿠데타에 반대한 반 파시즘 전선’으로, 혹은 “키스할 때 코는 어디에 두어야 하나요?”로 대표되는,
낭만적(전쟁터만큼 낭만주의가 활짝 만개할 수 있는 공간이 또 있을까) 로맨스의 공간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일군의 좌파들이
바라보는 스페인 내전의 성격은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다. 제2 공화국의 어수선하고 힘없는 공화국 인민정부가 시스템적 권력을 명목상
가진 반면 철도, 전화 등 공공부문을 장악하며 힘을 키워가던 노동조합이 실질적 권력을 가지며 인민정부와 권력을 양분하고 있었고
또한 카탈로니아 분리주의 운동이 힘을 얻어가던 상황에서,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던 인민정부 대신,
반동세력을 막아내고 노동자, 농민의 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기치 하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나 싸웠던 전쟁, 그리하여 혁명을 향해
한걸음 성큼 나아갔던 전쟁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다. 그렇기에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내전’이 아니라, 스페인 ‘혁명’으로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반-프랑코 전선에 섰던 사람들은 입장이 다양했으며, 이들을 대략 셋으로 분류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파시즘 전쟁과 혁명은 동시에 달성되어야 한다는 입장 : 통일노동자당(P.O.U.M, 품)과 전국노동자연맹(CNT,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둘째, 일단 반파시즘 전쟁에 승리하고서 혁명을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 : 통일사회당(P.S.U.C.)과 노동자총연합(UGT, 사회주의 계열 노동조합)
셋째, 반파시즘 전쟁에 승리하고 자본주의적 정부 구성 – 혁명 반대 : 우익 자유주의자, 공산당(일명 스탈린주의자)

혁명을 반대하는 세번째 입장에 공산당이 들어가 있는 것이 처음에는 낯설어보일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소련은 국제역학적
관계 때문에 결코 스페인의 혁명을 원하지 않았고, 스페인 공산당은 다른 나라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소련 공산당을 추종했으며,
스페인 혁명의 실패는 이 세번째 계열의 배신 탓으로 설명되곤 한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소련의 무기를 공급받은 세번째 계열이
권력을 장악해갔는데, 이 와중에 첫번째 계열은 숙청의 대상이었고, 두번째 계열은 포섭과 회유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통일노동자당은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라 낙인찍히며(스탈린 집권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한국의 7, 80년대 ‘빨갱이’란
말만큼이나 위력적이었다), 파시스트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불법단체로 선포되었고, 통일노동자당 소속 의용군들은 무장해제를 당하며
투옥되거나 암살당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랜드 앤 프리덤>이 취하고 있는 관점이기도 하고, <랜드 앤 프리덤>과 세트라 부를 수 있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가 취하고 있는 관점이기도 하다.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 데이빗 카(이안 하트 분)와 조지 오웰은 모두
통일노동자당 소속의 의용군에 속해 있었다. 영화의 말미, 제복과 신식무기로 무장한 ‘인민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이
와중에 블랑카가 죽는 장면은 바로 통일노동자당이 불법단체로 선언되고 이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된 시기, 1937년경이다.
<랜드 앤 프리덤>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혁명을 위해 싸우며 희망과 좌절과 상처를 동시에 안는 의용군들의
모습을, 외국인 참전병인 데이빗 카의 시점으로 다룬다. 어수룩한 기강과 후진 무기에 환멸을 느낀 데이빗 카는 도중에 당적을
공산당으로 바꾸고 인민군으로 적을 옮기지만, 바르셀로나 시가전(조지 오웰도 묘사하고 있다.)에서 CNT 동지들과 대치하면서 느낀
환멸 때문에 결국 공산당원증을 찢고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의 전선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위에서 길게 서술한 내용은,
<랜드 앤 프리덤>이 취하고 있는 시/공간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일 뿐,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바로 영화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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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의 유품에서 나온 동지들의 사진

<랜드 앤 프리덤>은 역사 교육용 텍스트가 아닌 ‘영화'(feature – 극영화)인 것은, 주로 인물의 묘사를
통해 드러난다. 남녀 할 것없이 혁명에 대한 신념으로 총을 잡은 이들은 비록 기강은 엉망이고 허술한 무기로 무장했을지언정,
단순히 ‘죽고 죽이는 인간 사냥게임’이 아닌, ‘혁명’의 과정에 함께 하고 때로 지켜보면서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사랑과 상처와
눈물과 웃음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켄 로치의 영화를 보며 항상 감탄하는 것이 그가 인물을 그리는 방식인데,  글로 이렇게
서술해놓으면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것같지만 실제로 그의 영화 안에서 인물들은 제대로 발을 펴지도 못하고 참호 안에서 잠을 자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웃고, 농담하고, 사랑에 빠지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살아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묘사된다. 블랑카와
쿠간의 ‘연애행각’을 두고 동지들이 던지는 편견과 추측의 말이나, 그 블랑카를 두고 농담으로 데이빗 카를 놀려먹는 동지들,
쿠간의 죽음 앞에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마음을 다잡는 블랑카의 모습 등은, 혁명같은 거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인간적 보편성’으로 호소하는 힘이 있다. 이념에 홀려 기계가 돼버린 인간이 아니라, 신념이 있지만 때로 회의하고,
갈등하고, 절망하는 인간. 나약하고 불안하기에 더욱 강해질 수도 어리석어질 수도 있는 인간, 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상처와
눈물을, 켄 로치는 대단히 건조하면서도 호소력 넘치게 전달하는 힘을 갖고 있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는 ‘토론’의 장면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내가 멋대로 한 계열로 묶어버린 <랜드 앤
프리덤>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는 공통적으로 극장에서 뉴스릴을 보는 장면과 살벌한 토론 장면이 길게 들어
있는데, 이 장면들은 두 영화 모두에서 인물의 심적 변화나 사건 전개에 있어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다. 좌파적 이념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영화적 테크닉’으로는 낮은 점수를 줄 수도 있는 이 장면들을, 나는 켄 로치 영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장면 구성 방식으로 여긴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소위 ‘문학적 완성도’를 해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제11장을 굳이 넣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11장이 오웰의 빛나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토론 장면은, 바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직접 행사하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준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이 장면은 사실 스페인 내전을
둘러싼 저 다양한 정치적 노선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모든 농토의 집산화를 이루는 입장과,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를 지지하는 입장의 대립은, 사실 위에서 서술한 두번째 입장과 세번째 입장이 그대로 대립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자, 토론과 논쟁을 통핸 민주주의적 의결방식의 작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미국 공산당 출신의 로렌스(톰 길로이 분)가 나중에 인민군 장교로 등장해 품의 동지들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하는 장면은 그러므로, 영화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장면이 된다.

한편 뉴스릴을 보는 장면은 내게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켄로치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여겨진다. 새로운 사건에 대한
정보를 굳이 책이나 신문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두컴컴한 극장의 뉴스릴을 통해 접하는 것. 켄 로치는 인터뷰 등에서 곧잘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말을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대해 알고 그
혁명의 기운을, 역사를 받으며 변화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할아버지의 유품을 통해 스페인 내전을 알게 된 데이빗의
손녀가 영화 마지막, 장례식에서 붉은 손수건의 흙을 무덤에 함께 부어주며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올리는 것처럼, 그리고
‘투쟁!’이라고 나지막히 속삭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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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퇴행은, 여자동지들의 손에서 총을 뺏던 그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펑펑 쏟았다. (비디오가 아닌 ‘필름’의 위력은, 그리고 뭔가를 조금 알고 보는 것은 확실히
다르다.) 영화의 시작, 그 붉은 손수건 안의 흙이 나오던 시점부터. 바르셀로나 시가전 장면, 거리를 하나 사이에 두고 저
전화국의 CNT 동지들과 대치하며 주고받는 총성과 외침, 어제 함께 싸웠던 동지들이 오늘, 적이 되어 총을 겨누고 있게 된 그
기막힌 상황, 그리고 영화의 말미, 심지어 한 부대에서 싸웠지만 인민군 장교가 되어 부하들과 함께 이들에게 총을 겨눌 때, 그
분노와 절망과 상처의 외침과 눈물, 그리고… 블랑카가 죽는 슬로우 모션 장면.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질 것만 같았다.
그저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며 콸콸 눈물을 쏟아내는 수밖에.

하지만 극장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내 눈물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역사 한 켠에 스러져 가는 낭만적인 혁명의 기억에 대한
소비일까. 이미 오래 전 지나간 역사이기에 마음놓고 감상에 젖어들며 감정을 소비하는 사치의 행위일까. 비극으로 마무리 된 잘
짜인 플롯의 드라마 한 편에 대한 의례적인 반응일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혁명의 기록을 담은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문화소비자인 자신에 대한 역겨움과, 죄책감 때문에 씁쓸했다. 혁명은 지금도 진행중이어야 하지 않나. 켄 로치가 원했던
건, 그리고 그때, 저 멀고먼 스페인 땅에서 죽어간 저 노동자 선배들이 원했던 건, 그저 한 편의 문화상품을 소비하며 감상에
젖는 건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본지 2주가 넘은 지금, 다시 이렇게 멍청하게 중얼거리고 있다 : 언제고
다시, 또다시 보고 싶다, 이 영화. 진정한 걸작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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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진상규명위 상임간사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영진공 64호]켄 로치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2월 1일

이번에 켄 로치 특별전에서 본 영화들에 대해 감상문을 써보고자 시도하지만, 쉽지가 않다. 몇번을, 시도했다 지우다를 반복하다, 그냥 닥치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를 다시 읽고 있다. 통일노동자당(일명 P.O.U.M, 품)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스페인 내전이 서술되는 것은,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나 [카탈로니아 찬가]나 비슷하다. 심지어 오웰과 데이빗 카(이안 하트, <랜드 앤
프리덤>의 주인공)가 P.O.U.M의 의용군에 소속된 계기 – 우연히 열차 안에서 그쪽 사람과 만나 합류했기 때문에! –
도 비슷하기 때문에, <랜드 앤 프리덤>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느슨하게 각색한 것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아마 데이빗 카가 속해있던 정당도 독립노동자당이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이 독립노동자당원이었다.)

두 작품이 비슷한 것은 같은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한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인”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의용군에
입대하게 되는 과정, 전선에서 생활하는 모습은 다들 비슷비슷했을 테니까. 언어적 차이, 문화적 차이를 겪는 것과 함께, 스페인
내전이 정치적인 방향에서 진행된 양상에 대해 반응하는 것도 비슷했을 테니까. 다만 조지 오웰은 데이빗 카처럼 공산당에 입당하고
국제여단으로 적을 옮겼다가 다시 의용군으로 돌아온 적은 없다. 오웰은 휴가 나왔다가, 데이빗 카는 부상 치료차 후방에 왔다가
‘엉겁결에’ 바르셀로나 시가전에 휘말리는데, 이때 둘은 서로 반대편이다.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계열 의용군으로서 당시
노동조합(정확히, CNT 계열)이 관리하고 있었던 전화국을 사수하는 입장이었지만 데이빗 카는 마침 공산당에 입당하여 제복을 입고
전화국을 접수하기 위해 공격하던 입장이었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데이빗 카가 CNT의 플랭카드가 달린 전화국
저쪽에서 영국인을 발견하고 그에게서 “대체 그쪽에서 뭘하고 있는 거요?”란 소리를 들을 때, 그 영국인이 조지 오웰일지도
모른다고 멋대로 상상하는 건 관객-독자가 취할 수 있는 즐거운 특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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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앤 프리덤>은 5, 6년 전, 처음으로 본 켄 로치 영화이기 때문에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 바로 뒤에
본 <레이닝 스톤>과 함께 이 영화는 내게 ‘켄 로치 영화’에 대한 일종의 ‘각인’으로 너무 강하게 남아있어서, 나는
켄 로치의 영화들을 내멋대로 <랜드 앤 프리덤> 계열과 <레이닝 스톤> 계열로 나누곤 한다.
사회/역사적인, 거시적 질서 안에 개인이 휘말려 들어가는 걸 다루면 <랜드 앤 프리덤> 계열, 개인 혹은 그의 가족이
겪어나가는 사건들을 찬찬히 미시적으로 다루면 <레이닝 스톤> 계열. 구분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라 당연히도 두 계열에
속하지 않는 영화가 더 많긴 하지만 하지만 이게 그래도 내게는 꽤 쓸모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 계열이라 할 수 있는 켄 로치의
최근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과 플롯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하층민들>, <내 이름은 조>는 전형적인 <레이닝 스톤> 계열. <달콤한 입맞춤>은
<레이닝 스톤> 계열로 넣을 수 있겠지만 살짝 변종으로 느껴진다. 역시 근작이라 그간 스타일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롤랑 조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켄 로치 영화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점을 딱 집어 표현한 게 롤랑 조페다. “켄 로치
영화에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꼭 껴안아주고 싶다.” 나는 켄 로치 영화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픽션의 인물들처럼 느껴지지가
않는다. 도저히, ‘만들어진 인물’이라 느껴지지 않는 그 생동하는 인간들, 생생한 인간들. 심지어 그 인물들이 ‘배우들’이라는
너무 당연한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곤 한다. (그리고선 어! 빌리 엘리엇네 아빠 아냐? 이러고 있다;;) 켄 로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시나리오가 개연성이 없다는 둥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둥 하는 소릴 들으면, 난 그들이야 말로 ‘이념을 갖기 싫다는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탈정치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실은 가장 정치적이다.) 그 이념의 편견 때문에 켄
로치의 영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켄 로치 영화에서 혁명의 선전과 이데올로기적 공세만 본다면, 당신은 켄 로치 영화의
3/4을 그냥 망막 위로 흘려보내버린 것이다. 극히 일상적인, ‘영화의 사건’이 될 성 싶지 않은 사건들을 묘사하면서도 그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의 연결이 아닌 ‘플롯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짐 앨런,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와, 낭비 없이 간결하고 건조하게
바로 들어갔다 빠지는 배리 애크로이드의 카메라, 켄 로치와 함께 하는 게리 루이스, 로버트 칼라일 등 켄 로치 전문 배우 혹은
이전엔 연기란 걸 해본적이 없는 비전문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이 모두를 조율하며 구현해내는 연출 등, “켄 로치와 그 친구들”이
만들어내는 성과는 사실,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도큐멘터리 아닌 ‘극영화’로서의 기본기에 충실한 영화를 보여주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빠지고 있다는 소릴 듣고 있긴 하지만(그는 이미 70세의 ‘할아버지’감독이고, 아무래도 그의 최전성기는 90년대
초중반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한편으로는, 한결 여유로워진 그의 후기 영화를 오히려 이전 영화보다 더 좋아하는 관객들도
분명 존재하리라.

켄 로치는 지금 또 신작을 찍고 있다. 변함없이 폴 래버티의 시나리오를, 이번에는 <9.11> 때 잠깐 같이 한
– 물론 <랜드 앤 프리덤>과 <히든 아젠다>에서 한참 밑엣 스탭으로 참여한 적이 있긴 하지만 – 나이젤
윌로비 촬영감독과 함께 한다. 프로듀서 짝꿍 레베카 오브라이언도 여전히다. 참 노인네가 정정도 하지. ㅎㅎ 그저 부디,
건강하시라. 그래서 그 식지 않는 열정으로 계속, 영화를 보여주시라.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영진공 64호]크리스 리는 그 영어강사가 아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006년 12월 1일

야구결과 보려고 잠깐 네이버에 들어갔다가 검색 순위를 보고 깜짝 놀랐다.

크리스 리.. ?

기억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한국계 포르노 배우다. 그런데 어떻게 네이버의 검색순위 1위에 오를 수가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여기저기를 뒤지다, 오늘자 쿠키 뉴스 기사 때문인 것 같았다.

“어? 포르노 주인공이 우리학원 선생님?”…
해외서 포르노 배우 활동했던 女 붙잡혀


런데 기사를 자세히 보면, 저 영어 강사가 크리스 리는 아님을 알 수 있다. 크리스 리는 2000년경에 활동하던 포르노 배우다.
기사의 저 영어강사는 2005년 2월부터 9월까지 포르노를 찍었단다. 활동했던 시기가 같지 않다. 그래서 여기저기 둘러서
확인해보니, 캐나다에서 Almond tease 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것 같다. 외국인 남편과 같이 찍었다는 소문도 있고, 저
여선생이 그저 성실한 학생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나저나 억울하겠다. 포르노 찍을 때 한번에 200에서 300달러씩
받았다고 하니, 30차례를 받아봐야 6,000-9,000 달러였을텐데 대한민국에서의 벌금은 1,000만원 안쪽이 될 것이란다.
대충 계산해봐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승희라는 예전 플레이보이 잡지의 모델은 헤어누드를 수도 없이 찍어도, 다리 벌리고
노골적인 사진을 수도 없이 찍어도 우리나라와서는 “대한민국을 빛낸 스타”라고 해서 엄청난 스타 대접을 받았었는데, 어째 이 분은
망신만 당한채 벌금을 내야 하는 것인지.. 정치와 관습에 기대는 그 어눌한 법집행이 씁쓸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신고한 학생이라는 놈.. 정말 웃긴 놈이다. 자기는 어떻게 딸딸이라도 한번 치려고 뒤진 포르노
사이트였을테고, 다운받은 동영상이었을텐데, 그걸 보고 경찰에 신고를 하다니. 그 추잡한 준법정신에 몸서리가 쳐진다.

젠장. 기사보고 어이가 없어졌었는데, 야구도 졌다.
그것도 대만한테.

* 여기 저기 분위기 보니, 동영상 돌겠군..
* 다들 눈 빨개져서 찾아 볼 거면서.. “강사가 저러면 되나.” 라는 젊잖은 교훈을 해 댈 사람들도 많아지겠지..
* 저 여자.. 영어강사는 더 이상 힘들겠지?.. 이민가야 할라나..

영진공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산하
성역사연구회 과장
짬지(http://zzamziblo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