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탑>, “봉건적인 배려” <영진공 71호>

상벌위원회
2007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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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이 막판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장준혁은 암에 걸리고, 모두가 그를 살리기 위해서 노력중이다.

권력과 술수의 규칙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순수하게
한 사람의 생명을 걱정하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나름대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환자인 장준혁 본인에게는 아무도
병세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병에 대해서는 이제 병원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그의 장인도 알고 친구인 최도영도 안다.
오로지 장준혁 본인만 자기 병을 모른다.

세상에.. 이런 일이… 뭐 드라마에서는 장준혁의 성격을 생각했을때
병을 알게 되면 오히려 병이 더 나빠질 것 같아서 라는 변명을 대기는 한다.
그래도 자기 병에 대해서 자기만 몰라도 되는 것일까?
(덕분에 장준혁은 심각한 병중에도 혼자 차를 몰고 다니는데
그러다가 수술하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을 것 같아 아슬아슬하다.)

적어도 예전에 이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곤 했다.
내 외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위암에 걸리셔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는데 결국 죽을 때까지
본인은 위염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공동체의 속성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역할이나 위치, 자신이 할 일,
간단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지
아니면 그가 속한 공동체가 더 잘 알고 있는지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할 일을 나 자신보다 먼저 주변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것 보다 주변에서 알고 있는 것이 더 정확한 사회의 예는
봉건적인 사회를 들 수 있다.

그 사회에서는
내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내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내가 할 일은 농사일로 정해진다.
내가 사는 지역의 영주, 집안의 가장이 믿는 종교에 따라서 내가 믿어야 할 종교도 결정된다.
내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내가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판단한다.

이런 사회라면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에 대해서도
그에게 가장 옳은 대응책이 무엇인지는 그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
그 병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신 이 과정에서 환자 본인의 권리는 아무도 고려하지 않는다.
어차피 개인의 의지나 판단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준혁이 속한 사회도 그렇다.
따지고 보면 그가 과장이 된 것도 그의 판단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가 과장이 됨으로써 자기 권한이 늘어난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늘어났지만, 그가 신경써야 하는 윗사람들도 늘어났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빚을 지고 자유는 더 줄어든다.
결국 그는 여전히 조직의 부속품이었다. 단지 부속품으로써의 지위가 올라갔을 뿐..
부속품이 자기 생사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부속이 속한 조직이 판단할 일이지.

(우리나라 부모들이 자살을 할 때 애꿎은 자식까지 살해하는 것도 같은 논리의 결과다. 그 아이들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봉건사회에서 자식의 생사여탈권은 어차피 부모에게 있으니까…)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회도 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답이고
부모의 종교나 이념과는 상관없이 내 종교나 이념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바로 나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사회 말이다.

여기서는 어떤 병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제1의 권한 역시 환자 본인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환자는 자기 병에 대한 모든 것을 가장 먼저, 가장 정확히 알아야 한다.
환자가 내리는 판단이 어떻든, 그 선택과 판단은 그의 권한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이런 사회의 기준에서 그 권리를 박탈하는 모든 행위는 범죄가 된다.
(정확히 말해 현대사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금 저 병원 구성원들은 집단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장준혁이 피고로 걸렸던 이전 소송 보다 이 건이 아마 더 클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 병원에서는 환자들이 자기 병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고도 한다. 의사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환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환자들 마저도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 불쌍한 장준혁은 여전히 자기가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부속품으로 시작해서 결국 부속품으로 끝나고 마는가.

상벌위원회 상임 간사
짱가(jjanga@yonsei.ac.kr)

외과의사 봉달희: 한국에서 의사에게 부여된 코드는? <영진공 70호>

짱가의 ‘너 사이코지?’
2007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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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테르 라파이유의 책 <컬처코드>에 따르면 미국인들에게 의사는 ‘영웅’이라는 코드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사람을 살려내는 사람, 죽음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3D 직종에 가까운 직업임에도 유능한 젊은이들이 의사가 되려고 몰려드는 이유도 이런 이미지와 관계가 많다. 이들에게 의사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기 이전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그래서 돈과는 상관없이 가장 어려운 수술을 감당하는 심장이나 신경외과 의사들에 대한 동경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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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성에 대한 연구서 컬처코드, 내용은 좀 뻔하지만...


또한 영웅 이미지에는 자동적으로 인간적인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이 세상에 몰인정한 영웅은 없지 않은가. 따라서 의사들은 굳이 인간적일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 그 자체가 이미 가장 인간적인 영웅의 모습이 되니까. [ER]이나 <하우스>, <그레이아나토미> 같은 의학드라마들이 인기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드라마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죽음의 위험에 맞서 생명을 살려내는 짜릿함을 즐기는 전문가들이다. 하키로 부상당한 환자 옆에서 ‘하키시즌은 외과 의사들에게는 크리스마스’라고 흥얼거리는 의사나, ‘환자의 말은 절대 믿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괴팍한 진단의사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괴팍하더라도 남들은 찾아내지 못하는 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정확한 진단을 내려서 환자를 살려내기만 하면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는다. 애초부터 의사란 그런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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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하우스가 성격 좋아서 인기 있던가...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의사는 어떤 의미 혹은 코드가 부여되어 있을까?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면 아무래도 ‘전문가 영웅’은 아닌 것 같다. 이 드라마에서 거의 유일하게 설득력을 가진 캐릭터 봉달희를 보자.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전형적인 캔디 캐릭터이지만, 그녀는 뚜렷한 목표의식과 동기가 있으며 그에 걸맞게 움직인다. 물론 신참이기 때문에 실수연발이지만 그 실수를 통해서 성장한다. 이렇게 불완전하면서도 잠재력이 충만하고 선의로 가득찬 캐릭터는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이전세대의 캔디와는 달리 이 신세대 캔디는 자신의 감정에도 충실해서 마음에 드는 직장 상사에게는 적극적으로 대시를 해댄다. 현대여성의 감성까지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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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버젼 캔디'라지만, 그래도 생동감은 있으니



하지만 안중근이나 이건욱, 조문경은 얘기가 다르다. 분명히 외과 전문의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전문가적인 침착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감정 과잉이라는 것이다. ‘버럭중근’ 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왜들 그렇게 버럭버럭, 쉽게 흔들리고 오바를 연발하는지… 하는 짓들만 보자면 이들은 전문의가 아니라 십대청소년들 같다. 물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지만, 그 이유들이란 게 전부 ‘출생의 비밀’ 수준이다. 내 생전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가진 의사들만 모여 있는 병원은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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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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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만 그런게 아니라, 하나 같이 기구해...

어째서일까. 나는 이 드라마의 작가가 건드리고자 하는 의사에 대한 코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계속 ‘감정이 철철 넘치고,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권력관계와 상관없이 애정을 남발하는’ 의사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의사들에 대한 원래 이미지가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권력자’ 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의사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아예 <하얀거탑> 처럼 냉정한 권력자의 모습을 곧이곧대로 보여주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과장되게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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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차라리 <하얀거탑>이 더 그럴듯 하다는... 이런 의사들만 봐서 그런지...

* 그레이 아나토미의 캐릭터들도 기구하긴 마찬가지이지만, 그 기구한 과거를 대하는 방식은 천양지차. 어떻게 된게 전문의들이 인턴 보다도 더 유치한건지…

국립과학연구소장
짱가(jjang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