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프리어즈 - 더 퀸> <영진공 71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3월 26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영화는 영국의 여왕, 특히 지금도 영국에서 왕으로 존재하면서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에 있는 엘리자베스
2세를 중심으로, 다이애나가 죽은 직후 1주일간을 그리며 영국의 군주제라는 정치 시스템이 현재 처한 상황을 분석한다. 큰 줄기를
보자면, 다이애나가 죽고 아무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던 영국왕실이 여론의 뭇매를 맞다가 노동당 블레어 총리의 설득에 결국 대국민
생방송 추도사를 발표하고 모든 왕궁에 조기를 게양하며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게 스토리의 다다. 대통령제의 공화정이 마치 정치
시스템의 다인 듯 느끼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그저 다이애나의 죽음을 둘러싼 남의 나라 가십거리를 다룬 영화 정도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독재체제를 경험했고 여전히 그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 이 영화가 던져주는 의미는 그렇게 가벼운
것만이 아니다.

다이애나 생전에 엘리자베스 여왕과 사이가 그닥 좋지 않았음은 전세계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영국 왕실이 보인
‘냉담한’ 태도는 아주 쉽게 왕실의 ‘쪼잔한 완고함’으로 비난받곤 한다. 하지만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군주의 내적
갈등이란, 다이애나에 대한 사적 감정 차원이 결코 아니다. 애초에 영국 여왕이란 존재 자체가 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려니와
– 그녀는 영국 그 자체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 , 그녀의 갈등은 자신, 나아가 영국 전체가 기반하는 엄격한 전통과 법도를 어느
선까지 수호해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이다. 물론 국민의 집단적 감정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국민의, 혹은 국민의 대리자들의 승인을 거쳐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그 누구든 엄격하게 준수하는 데
있다. 입헌군주정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군주조차 헌법 아래에 있다는 얘기고, 군주조차(아니 군주부터) 법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다이애너’라는 존재가 갖는 특별한 위치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다이애너는 왕족의 친모이지만
이혼을 통해 공식적으로 왕가를 떠난 사람이다. 이 사람을 왕족으로 예우해야 하는가, 아닌가?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자의든
타의든) 평민의 신분이 된 남자는 평민인가, 왕족인가?

이것은 매우 소소한 물음 같지만, 법으로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사례는 어떻게 해석하여 처리해야 하는가? 라는,
민주주의 / 법치국가에서 상존하는 어려운 물음의 매우 구체적인 버전이다. 왕실이 취한 입장은 엄격한 규범의 준수인데, 이것이
‘인정머리 없다’고 도의적 비난을 받거나, 해석상의 문제에서 이견과 반박을 받을 순 있을지라도, 절차적 / 규범적 측면에서는
하자가 없으며 충분히 이유가 있는 선택이다. 왕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엄격한 법도와 규칙을,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사람이라 하여
예외로 치는 건 과연 합당할까? 왕실과 영국 전체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이애너의 존재가 이제껏 내려온 왕실의 법과
규칙에서 예외적인, 전례가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다이애나’라는 개인이기에 예외를 허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애나’의 특수한 위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따라 왕실의 법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단지 ‘다이애나’ 이기에 예외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은, 법과 규범의 존재 이유를 무색하게 만드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왕의 완고함이 더 나쁜가, 법질서의 침해가 더 나쁜가?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막 신임 총리로 선출된 토니 블레어의 행보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토니 블레어의 정치 감각을
균형있는 것으로 그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가 포퓰리즘에 영합한 마마보이에 불과하다며 조롱하고 있다. 스티븐 프리어즈는 이
영화에서, 선거 당시까지는 영국 내 개혁세력의 최선두였고 노동당 출신의 최연소 수상 피선출자였음에도 임무를 시작하자마자 지독하게
보수화해버린 토니 블레어의 근원적 한계를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조의를 표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개혁의 최선두로 격식을 지양하던 그가 한편으로는 여왕의 존재에 경도되어 여왕을 한껏 방어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왕에게 ‘왕위 자리가 위험하다’는 일종의 ‘협박’을 통해 (규범 해석상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다이애나 한 사람에게 왕실
법도의 예외를 구하는 내용을 ‘권고’한다. 영화에서도 언급되지만 왕이 버킹검 궁에 거하고 있지 않는 경우 그 어떤 상황이든 –
심지어 왕의 친부모가 죽었다 하더라도 – 버킹검 궁에 왕기가 게양될 수 없다. 국민들은 왕궁에 조기가 게양되지 않았다며 분노하고
왕실을 비난하지만,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해 왕실은 설사 버킹검 궁에 조기를 게양하고 싶어도 게양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의 요구 중에는 다이애너를 당연히 왕족으로 예우할 것은 물론 “모든 왕궁에서의 조기 게양”까지 포함되어 있다.
토니 블레어의 행보의 근원은 뛰어난 균형감각과 타협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민주주의의
적이다. 다이애너의 죽음에 대한 왕실의 대응이 결코 합리적이었다 할 수는 없지만, 왕실을 설득하는 근거는 포퓰리즘에 기댄 정치가
아니라 법과 규범의 가치를 인정하는 전제 하에서 이의 해석과 적용의 범위에 근거해야 했다.

지금의 영국 여왕이
‘역사상 최장 재위기간’을 자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헌법에 근거해서다. 입헌군주정 하에서는 왕의 자리를 두고 더이상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일어날 수 없다. 반면 이것은, 시스템이 만약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군주정을 포기한다면, 지금의 왕실은 그
즉시 평민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토니 블레어가 여왕에게 내민 카드는 바로 이 사실을 들어 협박하는 것이었다. 여왕의 입장에서,
물론 그 자신의 안위도 달려있는 문제고 이를 고려하지 않지는 않았겠지만, 이는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는 혁명의 순간이자 영국
최대의 위기가 될 터이다. 여왕은 존재 자체로 영국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왕은 블레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이는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포퓰리즘에 법과 전통이 항복한 예에 속할 것이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시대가 달라졌으니 왕실도 달라져야
한다’는 허울좋은 말로 포장이 되겠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각종 여우주연상은 당연히 헬렌 미렌 거였다. 그러나 스티븐 프리어즈도 훌륭했다

ps1. 요즘 [키노] 생각이 많이 난다. 아마도 [키노]였다면 몇 달 전부터 <더 퀸> 같은 영화의 사진이
실렸을 것이고, 개봉월 호에는 <더 퀸>과 <아버지의 깃발>의 스틸과 빽빽한 글이 족히 20페이지는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두들 다이애나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만 얘기하지 이 영화의 감독이 바로 그 스티븐 프리어즈라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는다. 90년대 후반만 해도 <더 밴>과 같은 자그마한 영화도 비디오를 통해서나마 소개가 됐지만, 지금은
<미시즈 헨더슨> 같은 영화는 주디 덴치가 나온다 해도 소개되지 못한다.

ps2. 공화국으로 건설된 건 1948년이지만 한국은 실질적으로는 준-군주제였다. (박정희 체제와 김일성 체제,
둘 다 실은 군주제와 대통령 공화제의 과도기적 형태가 아닌가.) 공화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태국이나 영국의 군주정을 무시하면서도
추진성과 돌파력 어쩌고 하며 이명박이 대세라는 놈들이나 ‘강력한 대통령’ 어쩌고 하는 놈들 보면 한국에 실질적으로 군주정을
바라는 놈들이 정말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왕도 노예도 아닌 동등한 인간이다, 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그러니 (서민 출신인) 나도 왕 할 수 있다’로 오해하는 놈들 정말 많다. 민주주의가 뭔지,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어머니 하나님을 아십니까?” <영진공 71호>

재외공관소식
2007년 3월 25일

기독교에 삼위일체라는 것이 있다지. 불교 군종병 할때 깨달은 사실. 불교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두고두고 3이라는 숫자를 즐겨쓰는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도 꽤나 큰 듯.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다가 나도 나름의 삼위일체를 가지고 있다. (말도 안되는 논법이지만..;;)
성자와 성부와 성령… (맞나)같은 것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나의 삼위일체는

걷기 괜찮은 거리

걷기 괜찮은 날씨

귀에 꽂은 괜찮은 음악


세개 되시겠다. 없다는 이어폰/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정처없이 걷는, 텅~ 빈 머릿속으로 만두속 채워넣듯 음악이 꾸여꾸역
밀려들어오는 느낌을 병적으로 사랑하여 마지 않는 바,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닙시다.”라는 서울시의 연료절약 캠페인을 본의아니게
고수하고 가끔은 이해 안갈 정도의 먼 거리도 걸어서 돌아가는 똘아이스런 습성을 소유하고 있음이다.

최근 구입한
e2c(이어폰)가 지나치게 훌륭한 차음성으로 귀를 틀어막아 발생한 주변환경과의 단절로 인해 길거리에서 트럭이나 피자배달
오토바이와 정면충돌할 뻔한 적이 몇번 있기는 하였으나, 뭐 아직 죽거나 병신이 되지 않은 관계로 이와 같은 습성은 당분간 유지될
전망이다.

안그래도 번잡하고 시끄러우며 공기 더러운 서울 시내에서 위와 같은 삼위일체의 환경을 찾기란 쉽지 않은데,
어쩌다가 찾은 경우 없다는 행보관의 눈초리를 피해 완벽하게 짱박힐 3종창고 구석탱이를 발견한 말년 병장의 기분으로 더없이
행복감을 느끼며 mp3 혹은 mdp의 볼륨을 올리곤 한다.

며칠전.
지인과의 만남을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선 없다는 종로를 지나 동대문으로 가는 길로서 천계천을 택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아직 넉넉하게 남은 시간. 봄처럼
따뜻했던 날씨 덕에 오후 날씨는 몸을 움직이기 딱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청계천 길은 –
명박이가 이 말을 듣고 자부심을 갖거나 기뻐하는 건 죽기보다 싫지만 – 없다의 취향 3종 셋트를 모두 만족시켰다.

며칠전 구입한 윤미래3집 cd를 광녹음한 md의 볼륨을 높이고,
살짝 덜 끊인 라면 면발처럼 탱탱하고 유려하게 리듬을 타는 우리 미래양(완전소중 윤미래!!)의 랩핑을 흥얼거….리려고 하는 찰나.

누군가 나의 등을 쿡,쿡,쿡 세번 찌름으로서, 막 유체를 이탈하려는 나의 영혼의 발목을 콱 잡아챈다.
어렵사리 찾은 나의 삼위일체는 비눗방을 터지듯 퍽.
동시에 친절하며 배려심 넘치며 젠틀…하려고 항상 노력하는 없다 역시 아스트랄로 날아가 버린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낸다. 샴페인 병을 막고있던 코르크 마개를 뽑아낸 듯, 거품처럼 짜증이 흘러나온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안녕하세요. 설문 조사좀 하려고 하는데… 혹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있으세요?”

….끄-_-^응…

“없습니다. 수고하세요.”

이번엔 40대 아주머니가 정면에서 내 도주로를 차단한다. 아, 2인 1조였구나… 씨바 청계천 길은 너무 좁아…순간, 진짜 순간이지만 오른쪽 어깨로 하복부 딥 태클을 감행하며 그녀를 흐르는 물속으로 밀어버리는 상상을 했다.

“잠깐이면 되요. 8문항밖에 안 되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면 되거든요.”

……그래? 솔직하게 대답하면 된다고? 좋아 알았어. 똑똑히 보이게 대문짝만하게 써주지.
객관식은 모두 패스. 주관식만 썼다.

종교를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오.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신의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하나인지 둘인지 세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 들어보신적 있으십니까?
신을 고작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유치한 시도는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하듯이, 인간들에게 어머니 하나님도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결혼해서 2세를 낳았으면 그게 왜 인간입니까 하느님이지.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흘려쓰지 않고 성실하고 솔직하게 답변했다. 나 잘했지?

경건하고도 신실한 종교인
거의 없다(1000j100j@hanmail.net)

<클린트 이스트우드 - 아버지의 깃발> <영진공 71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3월 24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 장의 사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미국으로서는 진주만을 기습당한 이상 전쟁에 개입하지 않기가 어려웠겠지만, 일단 한번 개입한 이상 끝까지 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 건 정책결정자가 아니라, 자신의 꿈을 위해 한발짝씩 준비하던 어린 소년들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그 사회에서 “가장 어린 성인들”의 목숨을, 그리고 그외 다른이들의 사회적 목숨을 대규모로 담보로 잡는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전쟁회의론이 확산되던 시점, 막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오지마에서 날아온 조 로젠탈의 사진 한 장은, AP통신을 타고
전세계에 퍼져나갔고, 꺼져가던 전쟁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붙였다. 사진 속 인물들 – ‘우리의 살아돌아온 아들들’ – 이 본토로
송환되어 전쟁기금 모금 캠페인에 동원됐고, 사람들은 타지에서 죽어나간 자신의 아들을 눈물 속에 묻으며 다시 한번 지갑을 열어
전쟁기금을 낸다. (그러고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미국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소문난 공화당 골수 지지자이자 보수주의자. 그러나 이제껏 이스트우드가 걸어온 길은 우리가 보통 ‘공화당
골수 지지자’라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배반한다. 그는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가정을 보듬어 안으며, 젊고 어린 생명들을
염려한다.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깃발은, 젊은 아이들의 존경과 관심을 억지로 뺏고 아이들을 협박하기 위해 호화롭게
채색되어 있지 않다. 그가 창고의 상자 구석에서 주섬주섬 꺼내 내미는 깃발은 세월의 먼지와 그간의 상처의 더께가 얹고 여기저기
닳아빠진, 초라하고 더러우며 색이 바랜 빛깔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별로 높지 않은 목소리로, 그 깃발에 있는
얼룩과 더께와 먼지의 사연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리하여 원색의 황홀한 색감과 막 찍어낸 석유냄새가 진동하는 새 깃발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과 먼지의 때로 찌든 낡은 깃발을 그대로 드러내고, 이것의 아름다움, 즉 진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전쟁의 참혹상은 단지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머리가 떨어져나가는 참혹한 상륙 전투에 대한 묘사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제작한 이가 스필버그여서인지 많은 평론가들은 이 상륙작전 씬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빚지고 있다고 너무 쉽게 쓰고
있지만, 글쎄올씨다다. 상륙작전을 마스타샷으로 보여주고 팔다리 머리 떨어져나가는 걸 묘사하면 다 스필버그란 말인가. 무엇보다도
나는 두 화면의 정조가 매우 달랐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액션 영화고,
<아버지의 깃발>은 전쟁드라마이며, 두 상륙작전은 각 장르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찍혔다(고 생각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주 정조가 긴박감과 어떤 목표에 다가가기 위한 잔혹한 통과단계와 같은 느낌이었다면, <아버지의
깃발>에서는 철모르는 아이들이 별 대비없이 공포의 세계와 마주친 느낌과 같은. 비슷하면서도 꽤 다르다. 그 장면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 때문이기도 하고, 접근 방식 자체가 조금 달랐다는 느낌도 든다. 오히려, 찍힌 방식 자체가 현격히 달라도
<아버지의 깃발>에서의 상륙작전은 <씬 레드라인>에서의 전투씬과 더 비교할 만하다.

그 이오지마에서, 적들은 눈에 잘 띄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던 아이들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조차 못한 채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영화에서 일본군의 복장과 헬멧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아군과 별 구분 없이 그려진다. 우리는 닥이 죽인
공격자가 흑인인 미군임을 어렴풋하게 알아챌 수 있고, 아이라가, 또다른 미군들이 죽인 이가 정말 몰래 살금살금 다가온 일본군인지
적과 아군이 구분 못한 채 패닉 상태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아군-미군인지 확신할 수 없다. 살떨리는 전투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최고의 해병’ 마이크마저도 아군 폭격기에 죽는다.  위생병! 위생병!을 부르는 소리는 노년이 되어서도 닥의 귓가를 맴돈다.
영광과 영웅담의 배경이 아닌, 잔혹하고 처참한 전쟁터. 가까스로 세운 승리의 성조기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장관이 가져가자,
병사들은 깃발을 다시 세우란 명령을 그저 로봇처럼 그대로 수행할 수밖에 없고, 이 장면을 찍은 사진은 영광과 감격의 승리의
장면으로 기록된다. 이들의 사진은 계속 형태를 달리해 재현되어 영웅신화가 만들어지고, 평범한 아이들에 불과했던 그들은 자신에
부여된 호칭 ‘영웅’이 사기극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고(혹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누구도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렇게
캠페인은 ‘사기극’이 된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있다.

비극은 그것이다. 일개 병사의 입장에서, 이미 달리고 있는 전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는 것. 알면서 동원되고, 알면서도
사기극을 함께 진행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캠페인에 알면서도, 속으면서도 지갑을 여는 것. 그것은 영광의 행동이 아니다.
모두가 치는 박수와 환호 소리에 잠깐 그 순간은 웃으며 영웅의 포즈를 취해주더라도, 그들에게 그 경험은 영원한 상처로 남는다.
그것이 전쟁. 그리고 사회가 전쟁을 받아들이는 방식. 그러나 원작자 존 브래들리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말한다. 진짜 영웅을
기리는 방식은, 그런 식의 신화화가 아니라 오히려 신화를 해체하고 그 안에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이것이, 보통 권위와 신화화의 방식에 기대어 젊은 세대를 협박하고 속이는 기성세대에 속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젊은
아이들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일 때, 그 진정성과 감동은 배가될 수밖에 없다. 임종을 앞에 두고 아들을 향해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고,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아버지 앞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당신이 나의 최고의 아버지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난 존경으로 권위를 얻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진정 좋은 아버지인 것이다.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나와, 일단 발생한 전쟁에 대해서 자기가 할 일은 할 수밖에 없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정치적 입장은 현격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아버지라면, 믿고 존경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식 세대들의 ‘전쟁 반대’에 대한 소신과 활동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지켜보고 도와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버지일
테니까.

ps1.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또 깊어진다. 우리같은 젊은 세대들은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그
깊이. 그러나, 노인이 되었다고 모두가 그 깊이를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이다. 이 이상 걸작을 만들어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을 때, 그 정정한 노인네가 들고 오는 다음 영화는 거기에서 더 나아간 걸작을 가지고 다시 내 곁을 찾아온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ps2. 워너 코리아여, 제발제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단 한 관만이라도 개봉해 주세요. ㅠ.ㅠ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300>, “어무나. 늬들 넘 웃긴거 아니니.” <영진공 71호>

공연윤리위원회
2007년 3월 23일

회식때 영화를 보게 되서 (팀원들이 술을 안하다 보니 회식 문화가 이런 식으로 점점 바뀌고 있다. 어찌보면 전사적인 추세이기도
하고), 팀장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300을 봤다. 난 스파트라랑 페르시아랑 싸우는 영화라길래 ‘글래디에이터’, ‘트로이’분위기를
기대하고 봤는데, 보는 내내 ‘씬 씨티(Sin City)’생각 나더라고. 집에와서 찾아봤더니 감독은 다른데, 원작자가 같더라.

이런 영화보면서 ‘인종 차별’이니, ‘장애인 차별’이니, ‘성 차별’이니 정치적 올바름을 같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건 그 자체로
황당무계한 생각이니까 그냥 넘어가고. 비주얼과 만화적 잔인함과 액션으로 승부하는 영화라면, 그것만으로 평가를 해 줘야 하는데.
어쩌니. “300”은 그 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갑빠 좋은 남성들 몸매보는 거야. 한 두명이면 족하지 300명씩 나와서
설쳐대는데. 계속 보다보면 그냥 빨래판에 다름 아니고.
화살 무쟈게 날아오는 건 그나마 좋아하지도 않는 ‘영웅’같은
영화에서 우리 연걸이 오빠가 맞아주던거잖아. 똥그란 방패 촬촬촬 돌아가는 것에서도 80년대 홍콩영화 생각나던데(정확히 무슨
영화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음. 버디님 혹시 아시면 알려주시기 바람). 것도 2000년대 판으로 세련되게 만든게 아니라
改惡이 되어버린 판으로 말이지. 피 철철 내 주고 카메라 뺑뺑 돌려준다고 해서 멋진 비주얼은 절대 아니었단거.
게다가 코끼리용사, 코뿔소 용사, 게용사 나올 때는 데굴데굴 웃다가 굴러버렸잖아.
어무나. 얘… 늬들 넘 웃긴거 아니니.

근데, 이거 미국 국정홍보처에서 만든 영화 아닐까? 아… 물론 페르시아 입장에서 만든거.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기개가
좋더라도, 강대국에 아무리 개겨봐야 너만 손해입니다.” 이러면서 이거 제 3국에 풀어가지고 우리 위협하는 영화 아니냐고?
아… 내가 자격지심이라고? 그런 생각도 든다.
근데 보면서 베트남전 생각도 간간히 나더라고 그 엄청난 병력과 물량공세 가지고 300명의 게릴라전 앞에서 엄청나게 손실을 입잖아. 술탄이 중제자로 나서야 할 만큼 말이지. 게릴라들한테 당한 미국 짝으로 보이더라고.

암튼… 이런거나 보다니. 난 시간이 아깝더라고.

공연윤리위원회 상임간사
라이(ley78@hanmail.net)

내 인생의 일본 드라마 <영진공 70호>

과거사진상규명위
2007년 3월 20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즈음 거침없이 하이킥에 몰빵 하고 있습니다. 순풍산부인과 이후로 최고의 시트콤인것 같습니다. 일본은 80년대 유명한 시트콤들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일본어도 잘 모르던 시절에 보았던 시트콤들이라 제목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 그중에서 아직도 기억 나는건 나카야마 미호가 데뷰작으로 나왔던 청춘물인데 정말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매일매일 건강하신가요란 그런 제목인것 같은데.

그나저나 일본에서 몇년전 부터 한류 한류 하지만 사실 일류가 한국에서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시다. 70년대의 우리들이 한국만화라고 알았던 수많은 아동 만화들 그 중에서 제일 창피한 사실은 일본 군국주의의 우회적인 표현이였던 우주 전함 야마토가 한국에서 날아라 태극호로 소개 되었던 사실이던가 마징가 Z를 한국 만화로 알고 살았던 시절 황금박귀 타이거 마스크, 하리케인 수도 없습니다.

반면 일본 드라마는 한국에는 80년대 부터 알려지기 시작 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시절 어둠의 다운로드 경로도 없었지만, 부산지방에서 일본 방송이 전파방해 없이 잡히던 시절이라 그쪽으로 통해서든가 아님 교포님들이 짐으로 붙혀 오시는 짐으로 통해서 일본 노래/일본 드라마/쇼 프로그램이 들어오던 시절이였습니다. 그 당시 사실 한국 TV들의 무분별한 표절은 죄책감 없이 이루어졌고. 90년대 들어와서 인터넷의 발달과 일본분회의 개방으로 인해 점점 라이센스 모델로 변해가고 있지만 사실 일본 방송 문화의 영향은 한국 방송문화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한류가 발전되고 일본인들의 노스탤지어 성향에 맞추어진 우리들의 문화가 힛트하고 있으니 재미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만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우리처럼 주 2회씩 하는 드라마가 아닌 일본 드라마는 주 1회 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후지테레비의 케츠9 (월요일 9시 드라마)는 일본 드라마의 트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NHK는 사극으로 유명하고 민영 방송들의 드라마가 일본 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민영방송들의 드라마들은 일주일에 1회 11회에서 12회로 끝을 맺는 시스템입니다. 분기에 한 편씩 4편이면 1년이 지나가는 것이지요.

지금은 2등이라고 할 수 있는 TBS도 80년대에는 후지TV보다 더 유명했었고 기라성 같은 드라마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럼 일본드라마와 한국드라마는 무엇이 다를까요.

1. 템포가 빠르고 줄거리가 간결하다.
일본드라마는 사전 제작으로 딱 11회 기준으로 시작합니다 인기를 얻으면 1회정도 늘어서 12회 그리고 별로 인기가 없으면 한회를 줄여서 10회로 끝납니다. 보통 드라마 한편이 광고 빼면 45분정도이고 마지막 편은 70분정도 이므로 스피드가 빠르고 몰아보기에도 부담이 없습니다 10시간만 투자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짧은 방송 시간으로 별로 늘어지는 부분이 없습니다.

2. 주제가 자유롭다
한국 드라마는 사실 주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종교/정치/사회 분야의 소재는 늘 분쟁의 소재가 있고 불륜 엽기의 코드가 드라마에 들어온것도 2000년대 이지만 일본드라마는 정말 소재의 제한이 없어 보입니다. 경찰의 무능함을 그리 춤추는 대수사선, 불륜의 실락원, 고등학생들의 섹스와 근친상간, 원조교제를 다룬 80년대의 고교교사, 선생과의 사랑을 다른 퍼스트러브 등등 황당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소재들이 많습니다.

3. 사전제작과 제작비와 인력의 제한에서 자유롭다.
한국드라마의 상황도 많이 좋아졌지만 일본 드라마의 제작비는 한국보다 충족합니다. 돈을 들이면 충실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듯이 그리고사전제작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그리고 많은 인력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만듭니다. 우스개 소리로 일본 영화감독의 반은 드라마 출신 PD고 반은 포르노 영화 감독이라고 말이 있듯이 이와이 슌지. 츠카모토 등등 우리가 아는 많은 감독들이 드라마 출신 입니다.

단점은 없을까요. 아닙니다. 일본드라마의 단점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장점에서 찾아볼수 있습니다 일본드라마는 사실 사랑과 출생의 비밀. 이별 그리고 신델레라 스토리를 적당히 뭉쳐서 만드는 신파 드라마에는 상당히 약합니다. 그런 드라마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아야 하겠지요.

하여간 이제 거의 일본 드라마를 본지 20년이 다되어 가는 군요.
요즘 바뻐서 글을 잘 올리지는 못하지만 내 인생의 일본 드라마 10개를 선정하고 평을 해보기로 합니다 오늘은 일단 드라마들만 선정하고 다음부터 드라마 별로 평 올라가겠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 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클린트 인생의 일본 드라마 Top 10

1. 결혼 못하는 남자
2. 춤추는 대수사선
3. 연인이여
4. 롱베이케이션
5. 비치보이즈
6. 29살의 크리스마스
7. 고교교사
8. 야마토 나데시코
9. 슬로우 댄스
10.실락원

등외
우소코이,트릭,별들의 금화,세칸드찬스,골든볼,오렌지데이즈,게이소쿠,링,사랑따위는 필요없어,섬머스노우,러브제너레이션,도쿄러브스토리,한지붕세가족,GTO,표루교실,한낮의달,동경만경,코쿠센,꽃보다남자,화려한일족,프라이드,야스나리백서,협주곡,뉴욕러브스토리,신이시여조금만더

시와 함께 느껴보는 영화 이야기
클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