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크로넨버그, <폭력의 역사 History of Violence>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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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실 한국포스터가 더 마음에 듭니다만.
작고 구석진 시골마을, 성실하고 사람 좋고 따뜻한 가장네 가게에 강도가 들고, 이들을 물리친 톰(비고 모텐슨)은 졸지에 영웅이 되어 매스컴에 실립니다. 그런데 수상한 자들이 몰려와 가게에 죽치고 앉아 톰을 ‘조이’란 이름으로 불러대며 살벌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이고 왜 엄한 사람을 착각하고는 이렇게 무서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혹시 톰은 정말로 ‘조이’란 이름의 킬러였던 것일까요?

존 와그너와 빈스 로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는 한 남자의 폭력의 역사를 들추면서 폭력의 본질을 흥미롭게 고찰합니다. 사실 우리는 폭력에 무조건적 적대감과 반감을 갖고 있고 폭력을 뿌리뽑아야 할 악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폭력이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성의 힘을 통해 폭력을 통제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필요 때문일 겁니다. 크로넨버그는 폭력은 나쁘다는 섣부른 도덕적 판단으로 영화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묘사하는 폭력은 자신과 다른 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자, 아이러니하게도 더이상 그토록 폭력에 의존하여 인생을 꾸려가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폭력에는 언제나 공격과 방어라는 양측면이 있으며, 이 경계는 때때로 매우 모호해지곤 합니다. 공식적으로 방어를 위한 정당방위의 폭력이었다 할지라도 정작 그 폭력이 실제로 발현된 방식은 공격에 의해서일 수도 있으며, 이를 위한 적정한 선이라는 것 역시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일단 ‘폭력’이란 것과 담을 쌓고 살던 톰의 가정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폭력과 접하게 되는지, 이 가정이 폭력을 사용하게 되는 역사를 주욱 봅시다. 주의드릴 점은, 여기 ‘넘버링된 부분’에서 제가 말하는 폭력은, “폭력은 나쁜 것”과 같은 가치평가를 배제한 채 공격이든 방어든 정당방위든 가리지 않고 언급하며 일단 살펴볼 것이란 점입니다.

1. 톰의 강도 처치 : 이 집에 처음 들어오는 폭력의 존재로, 철저하게 저항/방어로서의 폭력입니다. 강도들이 들어왔을 때 톰은 그들에게 가진 돈 전부를 제안하지만, 톰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자신의 직원이 강도 중 하나에게 강간 위협을 받았을 때죠. 바로 저항이자 방어로서의 이 폭력은 이후 톰의 가정에 계속해서 크고작은 폭력을 불러오는 일종의 시작점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바를 넘어 잽싸게 두 강도를 처치하는 톰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가 방어이고 어디까지가 과도한 건지, 아주 살짝 모호한 지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잭의 쌈짱 때려눕히기 : 1번의 톰의 행동에서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합니다. 폭력은 원래 전염성이 매우 크고 빠르며, 점점 강도가 강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1년 내내 학교의 짱으로부터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단 한 번도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지혜롭게 상황을 빠져나갔던 톰의 아들은 여느 때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녀석에게 분노의 주먹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냐 하면 애가 입원해서 그 부모가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뛸 정도로 패주거든요. 물론 잭이 택한 폭력 역시 그러한 저항과 방어의 성격이 크지만, 잭이 취한 방법은 과연 정당한 걸까요? 심정적으로야 얼마든지 이해가 가지만, 이 아이가 1년 동안 너무나 현명하게 잘 피해온 걸 생각해 본다면 잭의 폭력의 발산이 낯설고 정도를 넘어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 애는 잭을 놀려대며 쳐보라고 했을 뿐, 먼저 주먹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3. 톰의 잭 뺨 때리기 : 2번 상황이 만든 잭과 톰의 갈등 상황에서 다시 하나의 폭력이 추가됩니다. 함부로 대드는 잭의 뺨을 톰이 참지 못하고 친 것이죠. 자 여기에 도달하게 되면, 이전의 폭력이 정도가 지나쳤다곤 해도 어쨌건 정당방위의 형태를 띄던 것과 완전히 다른 국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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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대응을 폭력으로 할 것인가, 다른 방법으로 할 것인가?

4. 톰의 악당 처치, 잭의 총기발사 : 집앞에서 그 수상한 자들, 즉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의 일당이 제안하는 차 뒷자석에 앉기 전, 톰은 잽싸게 옆엣 놈을 선제 공격하고 잔챙이 악당들을 처치하지만 가슴에 총을 맞고 칼 포가티와 몸싸움을 벌이며 위기의 순간을 맞습니다. 이 순간 그의 목숨을 구해주는 게 잭입니다. 잭은 아버지의 엽총을 포가티에게 쏘고 아버지를 구해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부자간의 화기애애한 화해로 흐르진 않습니다. 톰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비로소 톰이 숨겨온 과거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잭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총을 쏘긴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과거 악당이었다는 것도, 상대가 악당이었긴 해도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구한 대신, 아버지의 죄의 짐을 물려받게 되는 장면입니다.

5. 에디에 대한 톰의 난폭한 행동 : 집안에서 4번의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에디는 패닉 상태에 빠져있고, 톰은 이전과 달리 ‘조이’의 모습으로 에디를 매우 난폭하게 대합니다. 에디의 목을 조르고, 톰을 외면하고 그냥 계단을 올라가려는 에디의 발목을 붙잡기도 하고요. (음, 아마 넘어뜨렸던 거 같은데…) 사실 이 장면이 결국 부부강간으로 이어질 줄 알고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는데 뜻밖에 사태가 반전되네요. 매우 폭력적으로 시작했던 두 사람 간의 대립은 오히려 에디가 주도하는 굉장히 거친 섹스로 순식간에 변모하고, 섹스가 끝난 뒤 톰은 계단 밑에 초라하게 남겨집니다. 이 장면의 카메라의 구도와 편집이 재밌습니다. 처음엔 두 사람의 풀샷으로 시작하지만 곧 카메라는 이들에게 밀착해 특정 부위들을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결국 이걸 저 계단 위에서 계단 밑 톰을 카메라로 잡는지라 정말 ‘섹스 뒤 초라하게 남은 궁상남’ 장면으로는 순위권에 들 장면.

6. 악당 소굴로 들어가 처치 : 뭐 이후는 자신의 과거와 절연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달려간 톰이 자신을 죽이려는 형 리치와 그의 부하들을 모두 ‘입이 떡 벌어질 솜씨’로 차례로 처치하는 장면. 사실 저 4번에서도 톰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음… 그러고보니 1번에서도 그랬네요. 그러니까 톰은 원래 정말로 솜씨가 좋은 킬러였던 겁니다. (그 재주를 썩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사실 그런 재주는 그냥 썩혀버리는 게 훨씬 낫습니다.)

정리해 보면, 이 영화에서 톰의 가족 구성원들이 연관된 폭력씬은 총 6곳입니다. 이 영화는 사실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속에 들어있는 폭력에의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기도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사태가 그렇게 끔찍하게 흘러가고 또 총으로 깨진 턱이랄지 이런 걸 또 다 보여주기 때문에 끔찍하지만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어떤 쾌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사실 폭력엔 매혹과 혐오가 동시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대체로 영화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폭력씬을 다룸에 있어 혐오감을 강조해 폭력에 대한 도덕적 반대를 끌어내거나, 죄책감을 느낄 건덕지는 애초에 차단시키고 순수한 쾌감(주로 시각적인)에만 몰입하게 해주는 게 일반적인 영화들의 패턴입니다만,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씬은 매혹과 혐오를 동시에 보여주고 자극하며, 우리가 통칭 폭력이라 부르는 것들의 다양한 이면과 그 복잡한 결을 짧고 굵으며 단순한 이야기 안에 꽤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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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 사용된 스틸. 폭력의 두 가지 얼굴.

이 영화를 통해 폭력이 가진 두 얼굴, 즉 자상한 얼굴의 보호자와 피냄새에 굶주린 야수가 사실은 한몸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도 있고, 이와는 별개로, 죄로 물들었던 과거는 완전히 돌이키지 않고 감추기로 무마하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끌어낼 수도 있겠지요. 혹은 이 영화의 ‘톰/조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바로 킬러 조이/성실한 가장 톰의 두 얼굴로 유지돼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특히 저 5번에서 제시되듯, 폭력의 시도를 폭력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저지하는 것보다 다른 제3의 방법으로 그 폭력을 무화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다시 확인할 수도 있겠죠. 이 영화 전체에서 보듯, 최초의 폭력은 계속해서 연쇄적인 폭력을 일으키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장의 자리가 비워진 식탁에서, 모든 폭력들을 목격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한 막내가 아버지의 자리에 접시를 놓습니다. 느림보 님이 지적하신 대로, 손에 피를 묻히고 들어온 자를 과연 여전한 가장으로 식탁에 맞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영화는 그를 말끄러미 응시하는 에디와 그런 에디 앞에서 복잡한 표정을 한 톰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버립니다. 저는 이 가정이 결국 톰을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것이 이제껏 우리가 폭력을 받아들인 방식이니까요. 비폭력을 외치고 폭력을 범죄시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지만, 합법적인 폭력조직 – 군대 – 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의 아이러니한 삶입니다.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톰/조이는 듀나님이 지적하신 대로, 폭력을 매우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폭력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결국 폭력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책은 폭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통제하느냐가 될 것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ps. 극장에서 끊기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싶네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정말 몇 년만에 중앙시네마에서 영화를 봤는데, 지금은 미로스페이스에서만 그것도 하루에 딱 한 번 상영합니다. (8월 20일까지군요.)

ps2. 비고 모텐센도 좋지만 마리아 벨로가 너무 멋집니다. 제가 굉장히 선호하는, 약간 서늘하고 지적인 타입의 미녀. <코요테 어글리>에서 바 주인언니로 나왔던 분이군요.

ps3. 에드 해리스 분량이 너무 짧아요. 칼 포가티 죽었을 때 “애개, 에드 해리스 벌써 아웃이야?” 이러면서 아쉬워했다는… 하긴, 드물게 ‘악당’으로 출연해주신 윌리엄 허트의 출연분량은 훨씬 더 짧지요.

[권두언] “새 출발에 즈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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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진흥 공화국(영진공)”은 영화에 대한 이안(異眼)으로 교류하는 문화 놀이터를 지향하며 2004년 11월에 첫 호를 발간하였습니다.  블로그와 웹진을 혼합한 형태로 운영되는 “영진공”은 영화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문화 현상을 주제로 삼아 다양한 시각과 사고를 제공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간 72호를 발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상호의 시각과 가치를 존중하는 블로거들의 결합인 “영진공”은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기사를 구성하고 있으며, 운영에 있어서도 어떠한 상업행위의 연계 없이 구성원의 비용 분담과 역할 분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71호 발간 이후 최근까지 여러 가지 내부 사정으로 인해 “영진공”의 활동이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1호에서 71호에 이르기까지 “영진공”은 자체 설정한 목표를 실현하고 나름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부족하나마 주기적이고 일상적으로 활동하였다고 자부하고 있으나, 최근의 활동 침체에 대해서는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영진공”을 찾아주시는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제 “영진공”이 73호의 발간과 함께 새로운 모습과 각오로 다시 뜁니다.  변한 것은 사이트의 디자인 일뿐, 구성원간의 존중을 통한 결합과 역할 분배로 이루어지는 운영구조가 그대로 지속되며 문화와 영화에 대한 이안(異眼) 도 흔들림 없이 추구합니다.  길었다면 길었던 침체기를 지나 73호를 발간하면서 “새 출발” “새 각오” 등 거창한 말을 쓰긴 했지만, 이는 지금까지 해왔던 “영진공”의 임무를 더욱 열심히 수행하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다시 힘차게 활동을 시작하는 “영진공”을 격려와 비판의 눈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라고 또한 우리의 작은 문화 놀이터에 많이 놀러 와 주시기를 감히 부탁 드리는 걸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2007. 8.

영진공 서기장 이규훈 拜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