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클레이튼>, 계시가 되고자 했던 스릴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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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나 정부의 비리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둘 중에 하나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거대 조직의 비리와 폭력성을 실감나게 보여주던가 아니면 비리에 맞선 주인공의 활약상을 멋지게 그려주던가. 물론 실제의 영화들은 두 가지 요소가 적절히 혼합되어 있으면서 작가의 지향성에 따라 어느 한쪽에 좀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마련입니다. 글로벌 제약 회사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설정의 <콘스탄트 가드너>(2005)와 같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방점은 주인공의 멜러에 찍어주는 작품도 있습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의 감독 토니 길로이가 시나리오를 썼던 제이슨 본 3부작은 주인공의 사실적이고도 통쾌한 액션을 앞세우면서도 CIA 조직의 음모를 파헤치고, 여기에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묵직한 주제까지 전달하며 스릴러 장르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토니 길로이의 감독 데뷔작인 <마이클 클레이튼>은 극중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제목으로 정한 것부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주인공은 조지 클루니입니다. 그가 TV 시리즈 <ER>에서 소아과 의사 역을 할 때 그 눈빛과 표정, 목소리에 반하지 않은 시청자는 없었을 겁니다. 본 시리즈의 토니 길로이가 데뷔작을 내는데 조지 클루니가 원톱 주인공으로 나섰으니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마이클 클레이튼>은 제이슨 본 3부작을 비롯해서 이제껏 토니 길로이가 각본을 쓴 여러 히트작들(<돌로레스 클레이본>, <데블스 애드버킷>, <아마겟돈>, <프루프 오브 라이프>, <베이트> 등)과는 그 궤도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즉, 앞에서 언급한 거대 조직의 비리와 주인공의 활약을 앞세운 단순한 장르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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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이클 클레이튼>도 기본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U/노스라는 글로벌 회사가 만든 제초제로 인해 농부들이 죽었습니다. 이 때문에 7년 간에 걸친 소송이 진행 중이고 주인공은 회사 측 변호를 맡은 KBL 법률회사의 사고 전담 변호사입니다. U/노스가 악당이고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건 너무 뻔합니다.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람마저 죽일 수 있다는 점 역시 충분히 납득됩니다. 주인공은 이 위험에 맞서 진실의 편에 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토니 길로이와 같은 작가가 전형적인 스릴러를 만들고자 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모를리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토니 길로이의 데뷔작 <마이클 클레이튼>은 스릴러의 공식을 거부합니다. 주인공 마이클 클레이튼이 경험하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 영화 초반에 먼저 보여집니다. 죽을 뻔 했는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체험을 통해 살아납니다. 그리고 영화는 4일 전으로 돌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던 내러티브가 다시 현재 시점과 만나는 순간은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입니다. 그리고 통쾌한 역전 만루 홈런을 때리며 순식간에 끝나버립니다.(사실 이 장면의 플롯 조차 너무 뻔하게 읽힙니다) 택시 뒷좌석에 탄 마이클 클레이튼의 얼굴을 롱테이크하며 엔딩 크리딧이 올라갑니다. 여운은 깊으나 스릴을 만끽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은 스릴러가 아닌 인간 드라마로 기억되고자 하는 영화입니다. 시종일관 의도적인 촌티를 냅니다. 80년대 TV 연속극이나 B 무비를 보는 듯한 미장셴입니다.1) 카메라는 마이클 클레이튼 뿐만 아니라 거의 광인처럼 행동하는 선배 변호사 아서(톰 윌킨슨)와 U/노스사의 법무팀장(틸다 스윈튼)의 모습까지, 스릴러의 구성에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지켜봅니다. 모두들 거대 자본과 조직의 불가항력 아래 짓눌린 인생들입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은 이들의 갈등 구조를 부각시키기 보다 각 인물들의 개별성에 주목하는 영화입니다.

(스포일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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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클레이튼>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논란이 될만한 부분은 주인공이 기밀 유지 서약을 저버리고 U/노스의 중역들을 경찰에게 넘기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입니다. 사실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마이클 클레이튼이 자신에게까지 밀고 들어온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8만 달러에 팔린 자신의 양심을 끝내 저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결국 그와 같은 극적인 반전은 생각해내지 않았을런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마이클 클레이튼을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낸 언덕 위의 그 말들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들이 추천하고 아서가 죽기 전에 줄쳐가며 읽던 붉은 표지의 판타지 소설2) 속 삽화 중에 말 한 마리가 들어있긴 했습니다. 그리고 마이클은 아들에게 “넌 강하니까 이겨낼거야. 난 알아.”라고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폐인이나 다름 없는 주인공, 아버지와 아들, 어린 아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그 판타지를 좋아하던 광인, 판타지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언덕 위의 종마 세 마리, 그리고 구원. 그와 같은 계시적인 체험이 있어야만 우리는 체제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는 걸까요? 절반쯤 광인이 되어야만 사무실 밖으로 나와 세상을 다시 둘러볼 수 있게 되는 건가요? 자발적인 용기과 결단을 통해서는 결코 진실의 편에 설 수가 없는 걸까요? 영화는 단지 마이클 클레이튼과 같은 처지의 미국에게 그와 같은 계시적 체험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을까요? <마이클 클레이튼>이 대중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부분은 스릴러의 공식을 벗어던진 독특한 내러티브 구성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모호하게 형상화된 현실 인식과 주제 의식에 있습니다. 분명한 한 가지는 스릴러의 달인 토니 길로이의 감독 데뷔작에서는 모든 것이 의도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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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런 점에서 토니 길로이의 시나리오를 기초로 많은 영화를 감독한 테일러 핵포드의 지극히 단조로운 화법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토니 길로이의 연출은 다른 감독의 스타일을 따라했다고 하기 보다는 의도적인 화법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좀 더 박진감 넘치는 스릴러의 연출을 원했다면 얼마든지 제이슨 본 시리즈의 스텝들을 불러모으거나 유사한 스타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요구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촬영 감독인 로버트 엘스위트의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보아도 연출자가 원했다면 얼마든지 더욱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보여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제가 단기 기억상실증이 있어서 이름이나 책 제목 같은 건 절대 외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테판님 포스트에서 찾아왔습니다. <마법의 영토>(Realm and Conquest)라는 제목의 책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책은 아니라고 하네요.

영진공 신어지

<비포 선라이즈>, 제시처럼 사는 법

여행을 꿈꾸거나 준비중인 이들에게 로망이 되어버린 영화 < 비포 선라이즈 >
현실과 닮았기 때문일까. 다르기 때문일까.

무궁화 호 열차 안에는, 두 눈을 찡끗거리며 지금 묻지 않으면 남은 인생 자꾸만 생각날 거 같아 우리 여기에 같이 내려 하루 동안 함께 거닐자고 제안하는 제시(에단호크)가 없을테지만.. 여지를 남겨두고 싶으니 ‘아직까지 없었다’ 로 해두는 편이 나을 거 같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왜 나는 기다리기만 했을까.
매력적인 제안을 ‘받’는 셀린느(줄리델피)를 꿈꿀 때, 반대로 제안을 ‘하’는 제시가 되어보면 어떨까. 단 하룻밤의 시간이 꿈처럼 흩어질 줄 알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읽을 줄 알고 솔직하게 전달할 줄 아는 용기를 지닌 제시. 나는 제시가 되고 싶다. 제시의 용기를 닮고 싶다.

어디선가 읽고 고민했던 물음..
’죽음이 눈앞에 있다면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릴까, 사랑’한’기억을 떠올릴까.’

놓치거나 기다리지 말고 다가가는 것. 함께 걷자고 보고싶다고 사랑한다고 먼저 말하는 것. 심장이 두근거릴 때 그것을 죽이기 보다 유지시킬 줄 아는 것이 제시의 방식이 아닐까.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며 제시처럼 내 삶의 주인공은 철저하게 내 자신이 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새 11월도 중순을 지난다. 이 재빠른 시간에게 억울하지 않으려면 제시처럼 살아야 한다. 늦기 전에…알게 돼서 다행이다.


영진공 애플

Falling slowly


영화 ‘Once’의 OST ‘Falling slowly’


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이 멤버로 있는 밴드 ‘The Frame’의 연주 영상.


그런데 피아노 치는 여자는 영화의 여주인공이다.


이 여자가 왜 저기 앉아 있지?


영화 ‘once’ 짧은 평.


참으로 윤리의식이 뛰어난 영화. 자고로 과유불급, ‘과부와 유부녀에겐 급급해 하지 않는다’는 유부녀 노터치 정신을 실천한다.


너무 얌전하다, 얌전하다, 얌전하다.


끗.


영진공 철구

드라마 <24>를 통해서 생각해보는 정보화의 속도

 

지금 보실 영상은, 스스로는 드라마 <24>의 94년도 미방송 파일럿 버전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CollegeHumor라는 곳에서 만든 패러디물입니다.


부제는 <잭 바우어 AOL 3.0으로 세계를 구하다>


[Flash] http://www.collegehumor.com/moogaloop/moogaloop.swf?clip_id=1788161&fullscreen=1



내용은 보시면 아시겠지만 (MSN메신져 대신 AOL을 쓰던) 1994년의 정보인프라를 배경으로 지금과 같은 <24>의 이야기를 전개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안습상황의 종합선물세트죠. 그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테러범들의 아지트에 잠입한 우리의 잭 바우어씨, 드디어 시한폭탄을 발견합니다.


시한폭탄은 폭발 1분전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하필이면 CTU 본부에서 삐삐가!!


급하게 공중전화로 달려가 본부와 통화를 하니 이메일로 보내기에는 폭탄 설계도가 너무 크다는군요. 얼마냐 크냐면… 자그마치 플로피 디스켓으로 3장 분량!!!


플로피 디스켓 용량이 한 장에 512킬로바이트(메가가 아니라 킬로다)였나?


다시 말해서 플로피 3장이라면 커봤자 한 1.5메가쯤 되는…



그래서 결국 CTU 본부에서는 도트프린터로 폭탄설계도를 출력하고 있습니다만,


한 페이지 출력하는데 한 15초 걸리죠. 다 출력하기 전에 폭탄 터질 듯.


그나마 (아마도 팩스로 보내려고) 출력용지 옆의 릴과 걸리는 여백을 뜯어내다가


출력물이 손상되는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고…


그나마 도트프린터 해상도로 설계도나 제대로 출력될지 의심이 됩니다.




안습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은 전화모뎀을 써야 하는데 이게 삐이이 거리는 큰 소리를 내는데다


로그인 했다는 AOL 특유의 웰컴 메시지까지 우렁차게 울려퍼지지만


다행히도 테러범들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군요. (왜?)




게다가 전화모뎀이라 인터넷을 하다가도


누가 전화를 쓰면 인터넷은 자동 차단되는 또 다른 안습상황..


심지어 대통령이 전화 걸어도 통화중이네요.


이건 좀 심했네요. 명색이 CTU인데 전화회선이 달랑 하나라니…




CTU 본부에서는 아마도 테러범들의 메인프레임에 접속했는데


자그마치 Geocity (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냐)를 통해야 하는데


하필 지금 다운 된 모양…(이건 잘 못알아들었음)




어쨌거나 간신히 폭탄해제 암호를 찾아내 폭발직전에 폭탄을 해제하는데 성공.


잭바우어 요원은 니나 브라운과 더 채팅을 하고자 하지만


니나양 그럴 수 없다는 군요. 이유는?



“우리 인터넷이 시간제로 요금을 내는데 이제 시간 다됐어…안녕…”




네, 그래서 24시간이랍니다..

1994년만 해도 그런 시절이 있었드랬죠.


비록 웃자고 만든 거지만 지금은 CIA요원들도 적을 기습하거나 감시할 때 휴대폰 영상통화기능으로 생중계를 하는 <본 얼티메이텀> 같은 영화를 보다가 이런 영상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영진공 짱가

발레리아 브뤼니-테데시, <여배우들>





이 영화는 여주인공인 마르셀린(발레리아 브뤼니-테데시)의 엄마와 이모의 대화씬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의 대화에 언급되는 마르셀린은 콧대를 한껏 높이며 이 남자 저 남자 갈아치우고 변덕을 부리는 도도한 철부지 여배우로 제시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곧 화면에 첫 모습을 드러내는 마르셀린은 마치 마네킨처럼 너무나 가지런하게 빗어내려 가발처럼 보이는 단발 금발머리를 하고, 무표정 위에 진한 화장을 입고, 온몸을 가리는 빨간 롱코트를 입고 등장합니다. 그 무표정한 얼굴로 늦었다고 투덜거리며 엄마와 이모가 묻는 말에 무뚝뚝하게 대꾸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는,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곧 택시를 잡으러 뛰어가 버리죠. 하지만! 절대! 이런 모습에 속으면 안 됩니다. 사실 마르셀린은 ‘차갑고 도도한’ 것과는 삼만 광년은 멀리 떨어진 푼수 아가씨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셀린이 탄 택시가 도착한 곳은 극단 사무실이 있는 극장. 그녀는 택시에서 내리며 머리를 정리한다고 매만지는데, 이때 머리가 자연스럽게 헝클어지며 비로소 마네킨 가발 같은 머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머리가 됩니다. 이후로는 머리를 올리건 내리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가 되는데 마르셀린의 캐릭터 역시 솔직담백하게 묘사됩니다.


우리는 남자배우보다 여자배우들에 편견을 더 많이 갖고 있고, 이 편견들은 대단히 성차별적인 게 사실입니다. 일단 여배우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들을 좀 모아보죠. 온갖 예쁜 척은 다 하고 새침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고, 제멋대로에 도도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대는가 하면 죽 끓듯 변덕을 부리다가 다른 여배우한테 좋은 일 있으면 그거 질투하느라 정신 못 차리고 시샘하기 바쁘고 허영심은 하늘을 찌르며 어쩔 땐 과잉의 소녀적 감수성을 드러내며 떼를 써대고 작은 일에도 잘 삐지는 데다 히스테리는 겁나게 부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쁘고 새침한 그녀가 의외로 덤벙거리는 모습을 보이거나 망가질 때, 혹은 매우 지적인 면모를 보일 때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그녀에게 반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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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니 테데시와 루이 갸렐. 영화 속 연극 무대에서의 장면


재미있게도 <여배우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있는 이러한 여배우에 대한 편견들을 아주 영악하게 이용합니다. 왜 아니겠어요? 처음 시작부터 저런 식으로 관객들의 뒷통수를 치는데요. ^^ 그러나 주연이자 감독인 발레리아 브뤼니-테데시는, 여배우에 관한 세간의 온갖 편견을 모아 그대로 여주인공에게 투영하면서, 이것을 오히려 사랑스럽고 감성이 풍부한, 더욱이 ‘배우’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더욱 깊은 탐구를 행하고 있는 여성의 특징으로 멋지게 바꾸어 버리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우리가 여배우에게 갖는 편견과 그 편견을 깨는 배우에 대해 호감을 갖는 패턴 그 자체를 주인공에 대한 묘사 방식에 그대로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르셀린이 그토록 변덕을 부리거나 갑자기 억지를 쓰거나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원래 허영심 많고 제멋대로여서라기보다는, 마흔의 나이를 맞아 겪고 있는 극심한 혼란과 초조감 때문이죠.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아기’에 대한 집착으로 집약돼서 나타납니다. 미혼의 그녀는 아이가 너무 갖고 싶지만 남자가 없고, 산부인과 의사는 그녀에게 ‘남성 호르몬 수치가 높다’고 진단해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으며 병원 처방에 따라 먹는 호르몬 약은 어째 별 효과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새로 출연하게 된 연극은, 투르게네프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시골에서의 한 달>인데, 소위 ‘예술가적 자의식’이 너~무 강하신 제멋대로 독재자 연출가 나리는 그녀가 해석한 나탈리아 페트로브나와는 완전히 다른 페트로브나를 요구하며 강압적으로 굽니다. 또, 조연출은 누구냐면 왕년에 마르셀린의 친구이자 라이벌로 결혼과 함께 무대를 떠났다가 조연출로 복귀한 나탈리(네오미 르보브스키)인데, 이 친구는 연극배우로 성공한 마르셀린이 질투나서 죽을 지경인 반면 마르셀린은 그녀의 아이가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또 영화에 은근히 스릴을 더해주는 복선으로 깔립니다. 게다가 연극 속에서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젊은 가정교사 역을 맡은 배우 에릭(루이 갸렐)은 아무래도 배우와 캐릭터를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마르셀린은 그를 ‘에릭’이라고 부르지만, 에릭은 그녀를 ‘나탈리아’라고 캐릭터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은근하게 마르셀린에게 작업 멘트를 던지거든요. 여기에 또 홀라당, 마르셀린은 가슴을 설레 하다가 키스도 하는데, 이들의 관계는 좀처럼 진척을 보진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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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니까 정말 못 생겼다’는 아버지 유령의 구박에 위로를 얻는 마르셀린


배우로서도, 가임기간이 다 돼어 가며 생물학적 시계가 초침을 무시무시하게 날려대는 걸 듣는 여성으로서도, 그녀는 혼란과 패닉에 빠져 허부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우왕좌왕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강력한 코미디가 발생합니다. 감독으로서 테데치는 연극 준비가 진행되고, 드디어 막이 오르는 과정에서 각 캐릭터들을 매우 유머러스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애정이 충만하게 묘사해 가고, 이 과정을 중심으로 마르셀린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매우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갑니다. 한편 배우로서의 테데치는, 매우 난감하고 꼬인 상황에서 진지한 정극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보여주는 코미디 연기뿐 아니라 슬랩스틱 연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마르셀린의 그 복잡미묘한 내면을 너무나 탁월하게 표현해 냅니다. <여배우들>은 진정 훌륭한 코미디 영화입니다.


그런데 ‘배우 출신의 감독’으로서 테데치의 야심은 이보다 조금 더 큽니다. 마르셀린은 마치 <앨리 맥빌>처럼 돌아가신 아버지와 죽은 전 애인의 유령을 보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심지어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인 나탈리아 페트로브나(발레리아 골리노)의 환영까지 보고는 내 연기 어떠냐며 그녀의 뒤를 쫓습니다. (불안한 그녀로서는 진짜 그녀로부터 반복적인 확인과 승인이 필요한 것이죠.) 여기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배우와 배역을 헷갈리는 에릭의 문제까지 해서, 테데치는 허구의 주인공이 다시 그 허구 속 허구의 인물과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라는 존재의 본질을 깊숙이 탐구해 들어갑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마르셀린에게 상처를 받고 나가버린 에릭, 에릭의 뒤를 쫓는 나탈리아 페트로브나, 그런 나탈리아를 뒤쫓는 마리셀린의 구도는 그 자체로 매우 코믹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장면일 겁니다. 에릭이 매혹을 느낀 건 과연 배우인 마르셀린일까요, 자신의 캐릭터가 사랑하는, 마르셀린이 연기하는 나탈리아 페트로브나일까요? 에릭은 진짜 페트로브나의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당연하죠, 이 환영은 철저히 마르셀린의 것이니까요.) 그런 에릭을 보며 마르셀린은, 페트로브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를 두고 자신이 맡은 배역과 경쟁해야 하는 배우, 혹은 자신을 그저 ‘흉내낼 뿐인’ 배우와 경쟁해야 하는 허구 속 인물의 3각관계 설정의 희비극성은, 배우라는 존재의 본원적인 아이러니를 표현해냅니다. 자신이 받는 사랑이 과연 자신에게 향한 것인지, 자신의 배역에게 향한 것인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 감정, 아울러 허구의 존재를 자신의 몸으로 육화해내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음에도 그 과정은 오히려 반대로 배우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지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는 배우라는 존재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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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시선이 어긋날 수밖에 없는 – 배우와 캐릭터, 혹은 현실과 허구


데뷔작이자 이전작이었던 <낙타에겐 쉬운 일>에서 그러했듯, 테데치는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여배우들>의 이야기를 구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여배우들>은 설사 감독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보다 한발짝 물러서서, 여배우에겐 아마도 매우 보편적으로 보이는 분열을 섬세하게 묘사해내기 때문에, 그녀의 개인적 경험과는 별 상관없이 매우 객관적인 영화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 자신이 여배우일 뿐 아니라, 함께 각본을 쓴 네오미 르보브스키(이 영화에서 나탈리로 출연했죠.) 또한 여배우이자 감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 됐건, 테데치의 유쾌한 유머감각은 자신을 우스갯거리로 삼으면서도 여기에 생명력과 개성을 부여하고, 지나친 자의식의 포로가 되는 함정을 피하면서, 여기에 존재의 본질에 대한 유쾌하면서도 그리 가볍지 않은 문제의식을 녹여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여배우들>은 여배우이자 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여배우이자 감독이기에 취할 수 있는 시선으로 매우 훌륭하게 만들어낸 코미디이자, 연극과 영화에 대한 메타적인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ps1. 영화에서 마르셀린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마리사 보리니는 실제 브뤼니-테체스키의 어머니입니다. 이 모녀가 싸우는 장면, 정말 죽여주죠. ㅋㅋ


ps2. 마르셀린의 죽은 아버지로 등장하는 모리스 갸렐은 에릭 역을 맡은 루이 갸렐의 할아버지로, 이 집안이 또 프랑스의 영화 가문 중 하나입니다. 모리스 갸렐의 아들이자 루이 갸렐의 아버지인 필립 갸렐은 얼마 전 개봉했던 <와일드 이노선스>의 감독이고, 모리스 갸렐 역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입니다.


ps3. 나탈리 페트로브나로 등장하는 발레리아 골레노, 오랜만에 보니 참 반갑네요. <못말리는 람보> 같은 영화의 장면으로 워낙 인상이 깊지만, 그녀는 원래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모델이자 여배우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신작에 출연할 예정이라는군요.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