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도 홍길동>, 종방에 부쳐

 


애초에 파격으로 시작했던 만큼 끝까지 그냥 판타지나 가상역사/대체역사로 가버렸으면 더 좋았겠다 싶기도 했지만, 그건 사실 홍자매의 야심을 오해한 거였다. 홍자매 버전의 홍길동은 굉장히 세심한 설정에서까지 원전 홍길동을 가져오는 반면, 원전 홍길동이 오늘날에 가질 수 있는 전복적인 의미를 최대한 끌어냈고 원작의 시대적 한계는 물론 주제의 한계까지 가볍게 뛰어넘었다. 15%의 시청율 속에서 이 드라마를 열렬히 시청했던 팬들마저도 대체로 ‘드라마가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고 불평을 하지만, 내 감상은 그렇지 않다. 비록 무수한 단점들과 아쉬움이 노출되긴 했어도, <쾌도 홍길동>은 한국의 그 어떤 드라마나 영화가 해내지 못한 어떤 경지를 획득했다. 그것은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상업적인 매체가 어떻게 가장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성을 획득해내는가, 어제의 고전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가에 대한 어떤 전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전 글에서 썼듯, 이 드라마는 한 사람의 영웅이 민중을 이끄는 게 아니라 민중이 영웅을 만들어내고 그 영웅을 앞세워 그 어깨에 짐을 얹어주는 방식을 보여준 한편, 실재와 허구 간의 상관관계와 실재가 허구화되는 방식 및 허구가 다시 실재화하는 방식을 흥미롭게 보여주었으며, 나아가 이미 충분히 쌓여진 예술과 이야기의 전통 안에서 수직의 방향이 아니라 ‘팬픽’이라는 형식을 통해 수평의 방향으로 어떻게 예술의 범위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쾌도 홍길동
<쾌도 홍길동>은 공중파에서 보기 드문, '대놓고 혁명을 선동하는' 드라마였다.


그렇다, 사실 <쾌도 홍길동>은 허균의 원전인 ‘홍길동전’,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홍길동’이라는 허구 캐릭터에 대한 팬픽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기존 원전을 분명히 밝히면서 원전과 지금의 현재 사이의 틈새를 비집어 새로운 의미로 채우고, 기존에 존재하던 캐릭터에 새로운 색깔과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항간에 사람들이 말하는 ‘포스터모더니즘적인’ 예술방식일 수 있다. 이 안에서 한 시대에 머물렀던 고전은 현대적인 옷을 갈아입으며 새로운 의미를 덧입는다. 그리고 왜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고전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해내고 어떻게 교훈을 현실세계에 접목시켜야 하는지 깨닫는다. 조선시대의 홍길동은 적서차별에 들고일어났지만, 현실의 홍길동은 계급에 들고 일어나야 한다. 홍길동이 죽은 직후 <쾌도 홍길동> 안에서의 조선은, 이제 신분제는 폐지됐으나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시대가 되는 것도 슬쩍 스쳐지나간다.


우리는 이미 극장가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BBC에서 어떻게 드라마화되었는지(열정을 주체못해 호수에 풍덩 뛰어드는 미스터 다아시의 새로운 면이 추가된), 그리고 이 드라마가 또다시 어떻게 팬픽의 형식을 통해 소설과 영화로 확장되었는지(브리짓 존스 시리즈 소설 및 영화)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홍자매가 이전에 시도했던 <쾌걸 춘향>과 다른 점은, <쾌도 홍길동>이 직접적으로 지금 우리 현실에 대해 발언하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영어공용화 정책과 FTA를 비꼬고 병역비리와 삼성비리를 씹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현실풍자는 시청율이 알파요 오메가인 드라마라는 장르에서 오히려 시청율을 떨어져나가게 만든 주범으로 작용한 감도 있다.) 8, 90년대의 거대담론에 지친 사람들이 탈정치를 부르짖으며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고, 사적인 영역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폐쇄적인 개인에 갇혀 자폐증적 동어반복만 부르짖고, 그 와중에 딴 거 다 필요없고 경제 살리기가 제일이라며 함량 미달의 사람을 지도자로 뽑았을 때, 타인의 사정과 사회의 돌아가는 꼴이 알 게 뭐냐며 자기 설움에만 집중하던 길동이와, 그저 오늘 하루 잘 먹고 재미있게 지내는 것에 만족하던 이녹이는 점차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미셸 바렛의 저 유명한 구호를 직접 몸으로, 아주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에 목이 말라 한량으로만 떠돌던 길동이는 점차 사회 모순에 눈을 뜨고, 자신이 만들고 지켜가야 할 세상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현실화시켜낸다. 이녹이 역시 지식으로 알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옳은 길을 찾아 그 길을 그 스스로 선택하는 과감성을 보여준다. 이들의 죽음은 비록 어떤 면에서는 ‘자살택’에 불과할지 몰라도, 죽음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꿈을 영원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점에서 ‘영생을 얻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회에서 내가 특히 울었던 장면은 활빈당 일동이 굳이 곰이를 산채 밖으로 내보내 살리고, 연씨가 곰이를 무사히 나가게 하기 위해 대신 화살을 막고 죽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홍자매가 단순히 시청자를 억지로 울리기 위해 만든 장면이 아니라고 확신하는데, 이건 내가 홍자매 중 언니 되는 쪽과 동갑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 30대 초중반의 소위 X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정서라고 믿기 때문이다. 온갖 무용담을 가지고 있는 386 선배들에게 쨔질 수밖에 없고 별 거부감없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그 경쟁의 생존방식을 몸으로 익힌 20대들에게 걱정을 느끼는 이 세대는, 선배들의 가치는 유산으로 받았으나 선배들의 과오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그러나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는 게 당연하고 그 후배들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그 와중에 자신의 이야기는 별로 가질 수가 없었던 세대다. 386 선배만큼 권력을 탐할 주제도 못 되기 때문에 그저 후세대들을 위해 내 한 몸 거름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고. 연씨의 죽음은 바로 그 정서를 극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결코 지도자는 될 수 없으나 그 지도자의 가치와 이상만큼은 그대로 유산으로 받은 이 세대가 할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 그 이상이 어린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것밖에 없다. 이것이 88만원 세대 바로 윗세대에 속한 지금의 30대 초중-후반 사람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정서다. 연씨의 죽음은 바로 이 정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현실에 분노하되 결국 절망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거짓희망을 대표하는 율도국 따위를 건설하고 심지어 거기서 왕으로 군림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대신, 위아래 없는 작은 공동체(이것이 바로 ‘꼬뮨’이 아니겠는가)를 건설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홍자매 버전의 홍길동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한다. 아울러 저 율도국이 등장하고 초인 영웅이 등장하는 홍길동전의 저자가 시대의 시스템 한계에 갇힌 기득권자인 은혜(권력의 핵심인 좌의정 영감의 외동딸)로 설정된 것 역시 지극히 타당하고 설득력있는 설정이라 생각한다. 홍자매의 ‘작가’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은 물론 그 작가 집단의 ‘한계’마저도 겸허하게 투영시킨 것이 바로 은혜가 홍길동전의 원저자라는 저 설정이다.


<쾌도 홍길동>이 이토록 내게 준 것이 많은 만큼, 이것이 끝난 현재 가슴 한구석이 참 싸하면서 허하다. 단순히 수요일과 목요일 저녁 채널을 고정하며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져서, 혹은 내가 길동이 역을 했던 강지환에게 반해버려서 더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아쉬움 탓도 아니다. 아니, 드라마가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나는 강지환보다는 홍자매가 만들고 강지환이 그려낸 ‘홍길동’에 너무나 반해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 물론 현실로 눈을 조금만 돌리며 여기저기 참 많이도 보인다. 내가 명함을 여러 장 바꾸는 시간 동안 딱 한 곳에서 여전히 인권운동을 하고 있던 그녀나, 여전히 문화운동을 하고 있는 그를 몇 년만에 다시 보았을 때, 나는 그들이 바로 우리 현실의 홍길동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홍길동에 그토록 반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길동이가 꾸었던 이상, 그리고 길동이가 현실화시켰던 그 코뮨에 더이상 함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진공 노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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