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검열] 영화 <뮤리엘의 결혼> 中 “Waterloo”

1995년 개봉작 호주영화 <Muriel’s Wedding>에는 지금은 우리에게도 많이 친숙한 두 여배우가 나온다.

주인공 뮤리엘 역을 맡은 Toni Collette는 이 영화 이후 <Sixth Sense>, <Shaft>, <In Her Shoes> 등의 영화에 주연급으로 출연하였고 최근에는 <Little Miss Sunshine>에서 셰릴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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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뮤리엘의 친구 론다 역을 맡았던 Rachel Griffiths는 2001년부터 방영되고있는 미국 드라마 <Six Feet Under>에서 브렌다의 역할을 맡아서 미드팬들에게는 친숙한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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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하고 못나서 따돌림 당하기에 익숙해진 뮤리엘과 그런 뮤리엘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친구 론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 <Muriel’s Wedding>.

아직 못 보신 분들은 구해서 보시기를 권하는 바이며,

이 영화 중 두 친구가 장기 자랑 대회에서 ABBA의 노래 “Waterloo”를 부르는 유명한 장면을 오늘의 가사 검열로 골라보았다.

첫 동영상은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따온 것이고,
두 번째 동영상은 그룹 ABBA가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우승할 당시의 실황이다.

그럼 모두들 즐감~ ^.^

Waterloo
By ABBA (1974)


My my, at Waterloo Napoleon did surrender
Oh yeah, and I have met my destiny in quite a similar way
The history book on the shelf
Is always repeating itself

그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전하였지,
맞아, 나도 그렇게 내 운명을 만났어,
책장 속 역사책의 내용은,
자꾸 반복이 되나봐,

Waterloo – I was defeated, you won the war
Waterloo – Promise to love you for ever more
Waterloo – Couldn’t escape if I wanted to
Waterloo – Knowing my fate is to be with you
Waterloo – Finally facing my Waterloo

워털루, 난 졌고 당신이 이겼지,
워털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였지,
워털루, 그러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어,
워털루, 나의 운명은 당신과 함께 한다는 걸 아니까,
워털루, 마침내 나의 워털루를 만난 거야,

My my, I tried to hold you back but you were stronger
Oh yeah, and now it seems my only chance is giving up the fight
And how could I ever refuse
I feel like I win when I lose

아, 당신을 막아보려 했지만 그대는 너무 강했어,
그래, 이제 난 항복하는 길 밖에 없는 것 같아,
내가 어찌 그걸 거부 할 수 있겠어,
지는 게 이기는 건데,

Waterloo – I was defeated, you won the war
Waterloo – Promise to love you for ever more
Waterloo – Couldn’t escape if I wanted to
Waterloo – Knowing my fate is to be with you
Waterloo – Finally facing my Waterloo

워털루, 난 졌고 당신이 이겼지,
워털루,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였지,
워털루, 그러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어,
워털루, 나의 운명은 당신과 함께 한다는 걸 아니까,
워털루, 마침내 나의 워털루를 만난 거야,

영진공 이규훈

진흙탕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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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진중권
요즘은 진중권의 ‘진’자만 꺼내도 신경질적인 반응과 금새 맞딱드리게 된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식인이나 먹물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진씨 먹물적 태도에 분통을 터뜨린다. 딴에 진씨(보통 진선생이라 호칭하는데, 시장 분위기도 그렇고해서, 그에 편승에 나도 그를 잠시 격하하겠다.^^) 는 대한민국에 몇 안되는 진짜 먹물이고, 놀라운 글쟁인데도, 하여간 그냥 그게 제일 못마땅한가 보다.

하기사, 그간 이땅에서 먹물입네하고 간쭉거리던 대다수가, 허명에 빈깡통들 아니였나. 그들이 내놓은 이 세상의 대한 해석과 대안이 얼마나 멍텅구리들이였나, 그런데 제대로 욕먹을 놈을 잔뜩 주그리고 입을 다물었고, 그나마 그동안 말빨 글빨이 안돼 변방을 몰리던 것들은 작금의 기회를 틈탄, 겸손하고 대중적인(노바리님의 글에서도 수없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 대중이란 단어, 얼마나 실체없고 거지 발싸게같은 개념인가) 지식인냥하면 디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냥 막 헛발질을 되풀이하고 있다. 하여간 이러다 보니 욕먹을 이유가 별로 없는 진씨가, 앞자리에 나섰다는 이유로 폭격대상 1호가 되었다.

물론 그만한 폭격이야 진씨가 그간 받았던 공격에 비하면 별 대수도 아니고, 심지어 스스로 그 정도 수준은 즐길만한 내공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있는지라, 나 역시, 다른 심약한 글쟁이들에 비하면 그가 나서준 게 너무도 고맙다. (그래도 모른다, 몸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본다.)

사람들은 또 진씨가 왜 이렇게 나서게 되었나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그건 그간 그가 보여준 그의 모습을 전혀 모르는 질문이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진씨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른다. 그들에겐 진씨가 그냥 갑자기 툭하고 나와서 자기도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이름이나 날리고 싶은 공명심에 사로잡히 삼류 기고가 수준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간 민노당에서, 진보누리에서 그리고 수많은 매체에서 그가 싸워온 이력과 내용을 본다면, 그가 이 논쟁에서 과연 어떤 적과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어을 사용하는 사람중, 이 싸움에서 가장 잘 싸울 파이터가 그라는 걸 안다. 도리어 난 그가 이런 저질 이슈에서 대해서는 별 관심없을까 걱정했는데, 역시 그는 진짜 맑시스트다. 진짜 진보주의자다.

전투는 황무지에서도, 고급살롱에서도, 시장판에서도, 진흙탕에서도 해야한다. 시간만 된다면 때와 장소는 가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비위좋은 혁명가들이 별로 없다는 건 우리가 너무 잘 알지 않는가. 이에 반해 싸워야 될 장소에 늘 나타나는 진씨가 내게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존재인가. 맑스 행했던 대로 하는 그는 진짜 맑시스트다. (글을 쓰다보니 슬슬 진빠가 되어가고 있다.ㅋㅋ)

어떤 분이 지적하길 진씨는 자신의 논리로 상대편를 감화시킨 적이 있냐고 묻는다.난 있다고, 그렇다고 했다. 그분은 내가 뭔가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거다. 그분은 이야기 하겠지, 진씨가 지난 수년간 온갖 매체에서 보인 싸움박질에서 늘 안티수만 늘고 늘 반대편과 열받아 뭉치게 만들지 않았냐고…

근데 보자. 수개월, 수년이 지나고 보면, 늘 살아남은 이는 진씨다. 그 반대편 안티들? 어디간지 모르게 스리슬쩍 종적이 모연하다. 기고만장 진씨는 ‘봐라, 지금 상황을, 예전에 내가 말한대로 아닌가. 그때 짓고 까불던 아그들은 다 어디있노?’ 식의 분위기다. 열받아 뭉친이들. 이성이 아니라 그저 진씨 말재주에 놀아난 애들은 나중에 스스로 해체다. 이거 당연한 거다.

진중권의 편? 그가 언제 추종집단의 숭배나 권력을 원했나? 진중권의 편은 계급뿐이다. 노동자들이다. 인터넷에서 난장질하는 아그들의 대부분은 진중권에게 훈육의 대상일뿐 적도 편도 아닌 것이다. 상황이 이쯤되면 인터넷 아그들은, 분노(?) 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어쩌랴. 그게 그에겐 아주 상식인데 말이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반장이 일갈하지. ‘강력계는 좀 그래도 돼’…우하하하, 서랍속 볼펜 장면 하나하고 반장의 이 대사만 건졌던 영화다.  진중권쯤 되면 그래도 된다고 본다. 아니 그래야 된다. 진씨쯤 되는 이가 이땅에 있다는 거 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늘 하는 말이지만, 개인 진중권을 숭배 하지말고, 믿지도 마라. 그가 무슨 신이냐, 예수냐, 그는 인간이고 그저 한명의 진보적인 지식인일뿐이다. 그가 당장 내일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자본과 기득권에 충성맹세를 해도 하나도 놀라서 호들갑떨거 없다. 똘똘한 진보적 브레인 하나 잃어버린 건 아쉽지만,개개인의 삶을 다 관리하자고 하는 거 애시당초 틀려 먹은 것이고 어차피 혁명과 개혁은 계급이 하는 것이다. 그의 선택은 개인의 영달로 묻어버리면 끝이다. 그를 믿는 건, 계급속의 진중권이고 변혁속의 글쟁이 진중권이다.
 
※ 디워의 흥행에 난 정말 크게 관심없다. 심씨보다 더 추악하고 악독하게 돈을 버는 사람 수도 없다. 조폭나물이나 비참무보다 못할 것 없다. 문제는 영화 디워가 아니라 우리의 어설픈 광기라고 다시 한번 말한다.

※ 정말 디워에 흥행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면….이런 말을 해준다. 디워가 흥행했다고 다음번에도 심씨가 성공하리란 보장없다. 그에게 배가 아프더라도 참아라. 이 바닥이 워낙 살벌해서, 이번 성공이 아무리 커도 다음번을 보장못하고, 다음의 실패는 앞선 성공의 2배이상 고달프다. 그러니 심씨가 진짜면 정말 걱정할 것 없고, 가짜라도 걱정할 거 없다. 역사는 최종적으로 정의롭고 평등하다.

영진공 버디

마우저 밀리터리 권총과 스타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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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896년. 유명한 폴 마우저P.Mauser 선생네 회사에서 Feederle 3형제가 권총을 하나 설계해서 만들어냈습니다. 작동방식은 당시 가장 만만했던 쇼트리코일, 발사시 총열을 포함한 총의 윗부분 전체가 뒤로 살짝 밀리면서 노리쇠를 잡아주던 걸쇠가 밑으로 떨어지고 노리쇠만 뒤로 더 튕겨나가며 탄피 배출, 노리쇠가 원위치 하면서 재장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폴 마우저 선생

당시에는 매우 보기 드문 반자동권총 이었죠. 이 총에 붙은 별명이 “빗자루 손잡이(Broomhandle)”인데, 총의 손잡이가 당시에 청소용 빗자루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죠.


어쨌든, 그 당시에 제대로 작동하는 반자동권총은 보르하르트 권총(루거 P08 권총의 원조) 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 이 신형 권총은 매우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마우저 영감님은 자신의 역작인 마우저 소총 (독일군이 1차대전과 2차대전까지 주구장창 사용한 바로 그 볼트액션 소총)과 마찬가지로 이 권총도 군용으로 대량주문 받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마우저 밀리터리” 라고 지었죠. 그러나 결과는 그만큼 신통치는 않았습니다(그래도 1939년에 생산 종료할 때까지 1백만정 정도가 생산되었다고 하니 완전 실패작도 아닙니다). 총이 상당히 복잡하고 비쌌거든요. 주력무기인 소총도 아닌데 고작 호신용에 불과한 권총에 그만한 비용을 들이려는 군대는 별로 없었죠. 뭐 그래도 기본적으로 소총의 구조를 많이 이용한 덕분인지 작동은 매우 믿음직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총알도 꽤 센 7.63밀리 마우저탄이고 그게 10발씩이나 들어가니 나름 화력도 좋았죠.


내부 구조 졸라 복잡하고


장전방식도 소총과 거의 같습니다. 노리쇠를 뒤로 당기고 클립을 꽂아 죽 밀어넣어 장전…


게다가 총을 보관하는 홀스터가 개머리판으로 변신하는 방식입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자동권총의 개념이 명확치 않던 그 시절에는 이렇게 권총 홀스터=개머리판 개념이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사진의 위에 있는 총은 세계최초의 실용화된 자동권총 보쳐드 권총(다시 말하지만, P08 루거의 시조), 아래는 마우저 권총. 둘 다 개머리판이 홀스터 입니다.



이렇게 꺼내서



손잡이에 끼우면 개머리판이 달린 반자동총으로 변신

이런 “비싸지만 화력 괜찮은 작은 무기” 를 필요로 하는 곳은 사실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부자들, 개인 용병들, 마적단들, 게릴라들 이었죠… 그리고 실제로 이런 곳으로 많이 팔려나갑니다. 우리나라 독립군도 이 총을 많이 썼습니다. 원래 이 총이 중국으로 많이 팔려갔고, 중국의 마적단을 거쳐 독립군에게 까지 전달된거죠. 당시 적당한 가격에 쓸만한 자동권총은 이게 거의 유일했거든요. 그래서 만주지역에서의 전쟁을 다룬 영화나 멕시코 해방군(사파타 같은)을 다룬 영화 등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총이기도 합니다.

이 총은 처음에는 반자동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한발씩 나가는 방식) 권총이었지만, 나중에 스페인의 아스트라 라는 회사에서 이 총을 불법복제 하면서 아예 자동권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뻔뻔하게도 아스트라 M900 시리즈라는 고유 모델명까지 붙여가면서 말이죠. 장전방식도 오리지널의 고색창연한 클립장전식에서 벗어나 아예 상자형 탄창(요즘 자동권총들은 다 이 방식인데)을, 그것도 20발들이 상자형 탄창을 사용해서 재장전도 쉽고 연발사격도 더 오래 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원작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고 하죠.
그걸 보고 열받은 마우저 아저씨께서도 1932년에 완전자동 사격이 가능한 변형을 내놓았는데 그 모델은 M712 혹은 M1932 라고 불립니다. 거의 스페인제 해적판 마우저를 다시 베낀 거죠.


M712

이 권총을 여기 Guns In Movie 코너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 총이 <스타워즈>에서 매우 요긴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총


열심히 사격중인 핸 솔로 아저씨

주로 공화국군 (레이어 공주와 루크와 핸솔로와 요다의 바로 그 공화국)의 소형화기로 등장합니다. 물론 SF틱 하게 변형되긴 했지만, 원형은 마우저 M1896 바로 그겁니다.


일본 등의 오타쿠들께서 같은 모델을 자작하기도 합니다.

<스타워즈>에는 이 마우저 말고도 여러가지 고색창연한 총들이 많이 재활용되었습니다.


제국군의 기본화기 (스톰트루퍼 블라스터)는


영국군의 SMG 스털링을 변형했고


제국군의 권총은


역시 같은 스털링의 단축형 버젼을


제국군의 장총은


독일군이 만든 세계최초의 GPMG(다목적기관총) MG34를…


공화국 군도 이에 질세라 독일이 만든 세계 최초의 Assault Rifle(돌격소총)인 STG44 를


자기들 기본 제식화기로 사용합니다.

그외에도


2차대전때 영국군이 많이 사용한 루이스기관총을 변형해서


제국군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원래 그렇게들 많이 합니다.
옛날 총에다 뭔가 덕지덕지 붙이면 의외로 신비한 이미지로 변형되기 쉽거든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그 유명한 <에일리언2>에 등장하는 펄스라이플도 2차 대전때 연합군의 주력 SMG인 톰슨 기관단총을 원형으로 합니다.



정확히는 위는 톰슨, 아래 유탄발사기는
스파스 12 라는 이태리제 반자동 산탄총을 반동강내서 뒤집어 붙였죠.

사진들의 주된 출처는 아래입니다.
이외에도 위키나 구글신을 통해 이곳 저곳에서 찾아썼습니다.

http://www.starwars-tw.com

http://nono06.hautetfort.com/


영진공 짱가

Pearl Jam, AT&T에게 검열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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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rl Jam

RSS로 구독하고 있는 PJ News (Pearl Jam의 공식 팬클럽 Ten Club의 뉴스)에서 며칠 전에 들어온 걸 오늘에야 확인했다가 깜짝 놀랐다. 올해의 롤라팔루자를 스폰서링한 AT&T에서 웹캐스팅하던 도중 펄잼이 불렀던 노래 “Daughter”의 가사 일부를 지워버린 것. 펄잼은 Daughter를 부르면서 노래 후반 간주 부분에서 Pink Floyd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의 일부를 삽입해 연주했고, 보컬인 에디는 가사 일부를 다음과 같이 바꿔 불렀다고 한다.


    George Bush, leave this world alone.
    George Bush, find yourself another home.


그 리고 이 부분을, AT&T가 웹캐스팅을 하면서 사운드를 지워버린 거다. 공연 당시엔 몰랐던 펄잼은 나중에 팬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텐클럽 게시판에 ‘정중한 사과’와 함께, Daughter 곡 전체 동영상과, 편집된 부분/원래 부분을 나란히 붙인 동영상을 올려놓았다. 또한 이 사태가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중대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고 검열당했다고 AT&T를 비난하고 있다. 멤버 중 가장 성격이 참하고 얌전한 Mike McCready 아저씨의, ‘한 미국인의 생각’이라는 에세이도 올라왔다. 자신은 자본주의에 찬성하지만 AT&T와 같은 자본주의 기업은 찬성할 수 없으며, 미국의 정신을 떠받치고 있는 중대한 근간이며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언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검열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조근조근하지만 힘있는 목소리의 항의.


국가권력을 능가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은 이제 과거 폭압적인 국가권력이 자행하던 ‘검열’을 자신이 스스로 자행한다. 비록 <다이하드 4.0>에선 흘러간 밴드 취급을 받긴 한다만 Pearl Jam은 여전히 슈퍼밴드이며 막강한 영향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밴드인데, 그런 밴드도 정치적인 메시지는 이런 식으로 검열을 당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현재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검열엔 저항해도 자본의 검열은 당연하게 여기며 오히려 박수치고 응원한다는 사실. 또한, 자기들이 스스로 떼로 일어나 힘을 행사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검열한다는 사실이 떠올라 기분이 더욱 안 좋다. 나는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 다른 이에게 언어폭력과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폭력을 저지르는 폭력의 자유에는 반대하지만, 여전히 표현의 자유는 소중한 가치이며 지켜야 할 가치라 생각한다. 국가권력이든 자본 권력이든,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막을 순 없다. 당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다른 사람이 같은 권리를 누리는 것을 억압하지 않기를.





Daughter 전곡 연주 동영상





편집된 부분과 원래 부분 대조


영진공 노바리

데이빗 크로넨버그, <폭력의 역사 History of Violence>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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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실 한국포스터가 더 마음에 듭니다만.
작고 구석진 시골마을, 성실하고 사람 좋고 따뜻한 가장네 가게에 강도가 들고, 이들을 물리친 톰(비고 모텐슨)은 졸지에 영웅이 되어 매스컴에 실립니다. 그런데 수상한 자들이 몰려와 가게에 죽치고 앉아 톰을 ‘조이’란 이름으로 불러대며 살벌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이고 왜 엄한 사람을 착각하고는 이렇게 무서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혹시 톰은 정말로 ‘조이’란 이름의 킬러였던 것일까요?

존 와그너와 빈스 로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의 역사>는 한 남자의 폭력의 역사를 들추면서 폭력의 본질을 흥미롭게 고찰합니다. 사실 우리는 폭력에 무조건적 적대감과 반감을 갖고 있고 폭력을 뿌리뽑아야 할 악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만큼 폭력이 인간의 본능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성의 힘을 통해 폭력을 통제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는 필요 때문일 겁니다. 크로넨버그는 폭력은 나쁘다는 섣부른 도덕적 판단으로 영화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묘사하는 폭력은 자신과 다른 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자, 아이러니하게도 더이상 그토록 폭력에 의존하여 인생을 꾸려가지 않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폭력에는 언제나 공격과 방어라는 양측면이 있으며, 이 경계는 때때로 매우 모호해지곤 합니다. 공식적으로 방어를 위한 정당방위의 폭력이었다 할지라도 정작 그 폭력이 실제로 발현된 방식은 공격에 의해서일 수도 있으며, 이를 위한 적정한 선이라는 것 역시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일단 ‘폭력’이란 것과 담을 쌓고 살던 톰의 가정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폭력과 접하게 되는지, 이 가정이 폭력을 사용하게 되는 역사를 주욱 봅시다. 주의드릴 점은, 여기 ‘넘버링된 부분’에서 제가 말하는 폭력은, “폭력은 나쁜 것”과 같은 가치평가를 배제한 채 공격이든 방어든 정당방위든 가리지 않고 언급하며 일단 살펴볼 것이란 점입니다.

1. 톰의 강도 처치 : 이 집에 처음 들어오는 폭력의 존재로, 철저하게 저항/방어로서의 폭력입니다. 강도들이 들어왔을 때 톰은 그들에게 가진 돈 전부를 제안하지만, 톰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자신의 직원이 강도 중 하나에게 강간 위협을 받았을 때죠. 바로 저항이자 방어로서의 이 폭력은 이후 톰의 가정에 계속해서 크고작은 폭력을 불러오는 일종의 시작점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너무나 냉철하게 상황판단을 하고 바를 넘어 잽싸게 두 강도를 처치하는 톰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가 방어이고 어디까지가 과도한 건지, 아주 살짝 모호한 지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잭의 쌈짱 때려눕히기 : 1번의 톰의 행동에서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합니다. 폭력은 원래 전염성이 매우 크고 빠르며, 점점 강도가 강해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1년 내내 학교의 짱으로부터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면서 단 한 번도 힘으로 대항하지 않고 지혜롭게 상황을 빠져나갔던 톰의 아들은 여느 때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녀석에게 분노의 주먹질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냐 하면 애가 입원해서 그 부모가 고소하겠다고 길길이 날뛸 정도로 패주거든요. 물론 잭이 택한 폭력 역시 그러한 저항과 방어의 성격이 크지만, 잭이 취한 방법은 과연 정당한 걸까요? 심정적으로야 얼마든지 이해가 가지만, 이 아이가 1년 동안 너무나 현명하게 잘 피해온 걸 생각해 본다면 잭의 폭력의 발산이 낯설고 정도를 넘어서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그 애는 잭을 놀려대며 쳐보라고 했을 뿐, 먼저 주먹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3. 톰의 잭 뺨 때리기 : 2번 상황이 만든 잭과 톰의 갈등 상황에서 다시 하나의 폭력이 추가됩니다. 함부로 대드는 잭의 뺨을 톰이 참지 못하고 친 것이죠. 자 여기에 도달하게 되면, 이전의 폭력이 정도가 지나쳤다곤 해도 어쨌건 정당방위의 형태를 띄던 것과 완전히 다른 국면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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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 대응을 폭력으로 할 것인가, 다른 방법으로 할 것인가?

4. 톰의 악당 처치, 잭의 총기발사 : 집앞에서 그 수상한 자들, 즉 칼 포가티(에드 해리스)의 일당이 제안하는 차 뒷자석에 앉기 전, 톰은 잽싸게 옆엣 놈을 선제 공격하고 잔챙이 악당들을 처치하지만 가슴에 총을 맞고 칼 포가티와 몸싸움을 벌이며 위기의 순간을 맞습니다. 이 순간 그의 목숨을 구해주는 게 잭입니다. 잭은 아버지의 엽총을 포가티에게 쏘고 아버지를 구해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부자간의 화기애애한 화해로 흐르진 않습니다. 톰이 선제공격을 하면서, 비로소 톰이 숨겨온 과거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잭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총을 쏘긴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과거 악당이었다는 것도, 상대가 악당이었긴 해도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결국 아들이 아버지를 구한 대신, 아버지의 죄의 짐을 물려받게 되는 장면입니다.

5. 에디에 대한 톰의 난폭한 행동 : 집안에서 4번의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에디는 패닉 상태에 빠져있고, 톰은 이전과 달리 ‘조이’의 모습으로 에디를 매우 난폭하게 대합니다. 에디의 목을 조르고, 톰을 외면하고 그냥 계단을 올라가려는 에디의 발목을 붙잡기도 하고요. (음, 아마 넘어뜨렸던 거 같은데…) 사실 이 장면이 결국 부부강간으로 이어질 줄 알고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는데 뜻밖에 사태가 반전되네요. 매우 폭력적으로 시작했던 두 사람 간의 대립은 오히려 에디가 주도하는 굉장히 거친 섹스로 순식간에 변모하고, 섹스가 끝난 뒤 톰은 계단 밑에 초라하게 남겨집니다. 이 장면의 카메라의 구도와 편집이 재밌습니다. 처음엔 두 사람의 풀샷으로 시작하지만 곧 카메라는 이들에게 밀착해 특정 부위들을 클로즈업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결국 이걸 저 계단 위에서 계단 밑 톰을 카메라로 잡는지라 정말 ‘섹스 뒤 초라하게 남은 궁상남’ 장면으로는 순위권에 들 장면.

6. 악당 소굴로 들어가 처치 : 뭐 이후는 자신의 과거와 절연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달려간 톰이 자신을 죽이려는 형 리치와 그의 부하들을 모두 ‘입이 떡 벌어질 솜씨’로 차례로 처치하는 장면. 사실 저 4번에서도 톰의 솜씨는 놀라웠습니다. 음… 그러고보니 1번에서도 그랬네요. 그러니까 톰은 원래 정말로 솜씨가 좋은 킬러였던 겁니다. (그 재주를 썩히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사실 그런 재주는 그냥 썩혀버리는 게 훨씬 낫습니다.)

정리해 보면, 이 영화에서 톰의 가족 구성원들이 연관된 폭력씬은 총 6곳입니다. 이 영화는 사실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속에 들어있는 폭력에의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기도 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사태가 그렇게 끔찍하게 흘러가고 또 총으로 깨진 턱이랄지 이런 걸 또 다 보여주기 때문에 끔찍하지만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어떤 쾌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사실 폭력엔 매혹과 혐오가 동시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대체로 영화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폭력씬을 다룸에 있어 혐오감을 강조해 폭력에 대한 도덕적 반대를 끌어내거나, 죄책감을 느낄 건덕지는 애초에 차단시키고 순수한 쾌감(주로 시각적인)에만 몰입하게 해주는 게 일반적인 영화들의 패턴입니다만,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씬은 매혹과 혐오를 동시에 보여주고 자극하며, 우리가 통칭 폭력이라 부르는 것들의 다양한 이면과 그 복잡한 결을 짧고 굵으며 단순한 이야기 안에 꽤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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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 사용된 스틸. 폭력의 두 가지 얼굴.

이 영화를 통해 폭력이 가진 두 얼굴, 즉 자상한 얼굴의 보호자와 피냄새에 굶주린 야수가 사실은 한몸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도 있고, 이와는 별개로, 죄로 물들었던 과거는 완전히 돌이키지 않고 감추기로 무마하는 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끌어낼 수도 있겠지요. 혹은 이 영화의 ‘톰/조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바로 킬러 조이/성실한 가장 톰의 두 얼굴로 유지돼 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특히 저 5번에서 제시되듯, 폭력의 시도를 폭력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저지하는 것보다 다른 제3의 방법으로 그 폭력을 무화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다시 확인할 수도 있겠죠. 이 영화 전체에서 보듯, 최초의 폭력은 계속해서 연쇄적인 폭력을 일으키니까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장의 자리가 비워진 식탁에서, 모든 폭력들을 목격하지도, 인지하지도 못한 막내가 아버지의 자리에 접시를 놓습니다. 느림보 님이 지적하신 대로, 손에 피를 묻히고 들어온 자를 과연 여전한 가장으로 식탁에 맞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영화는 그를 말끄러미 응시하는 에디와 그런 에디 앞에서 복잡한 표정을 한 톰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버립니다. 저는 이 가정이 결국 톰을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것이 이제껏 우리가 폭력을 받아들인 방식이니까요. 비폭력을 외치고 폭력을 범죄시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지만, 합법적인 폭력조직 – 군대 – 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의 아이러니한 삶입니다. 국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저와 여러분은 이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톰/조이는 듀나님이 지적하신 대로, 폭력을 매우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폭력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결국 폭력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책은 폭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잘 통제하느냐가 될 것입니다.

영진공 노바리

ps. 극장에서 끊기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싶네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정말 몇 년만에 중앙시네마에서 영화를 봤는데, 지금은 미로스페이스에서만 그것도 하루에 딱 한 번 상영합니다. (8월 20일까지군요.)

ps2. 비고 모텐센도 좋지만 마리아 벨로가 너무 멋집니다. 제가 굉장히 선호하는, 약간 서늘하고 지적인 타입의 미녀. <코요테 어글리>에서 바 주인언니로 나왔던 분이군요.

ps3. 에드 해리스 분량이 너무 짧아요. 칼 포가티 죽었을 때 “애개, 에드 해리스 벌써 아웃이야?” 이러면서 아쉬워했다는… 하긴, 드물게 ‘악당’으로 출연해주신 윌리엄 허트의 출연분량은 훨씬 더 짧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