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나(Syriana)”,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다른 이름





 



“Corruption is why we win.”

“부패 때문에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거야.”
<영화 “시리아나” 중 에서>

시리아나(Syriana)는 미국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의 씽크탱크(Think Tank)들이 소위 중동지역을 지칭하며 실제로 썼던 말이다. 영화 시리아나의 감독 스티픈 개건(Stephen Gaghan)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 용어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이론에 따라 재편되는 중동”을 뜻하며 “자신들이 그리는 그림대로 새로운 국가들을 만들”고자 하는 희망사항을 의미하였다.

이 용어는 Pax Syriana, 즉 “시리아에 의한 평화”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Pax Syriana는 시리아의 레바논 강점기 중 1990년에서 2005년까지의 시기를 지칭하고 있다. 이 시기에 시리아는 레바논을 강점하며 주변국들(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등)이 상호 반목하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 세력이 급격히 쏠리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기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평화롭게” 중동 지역의 석유를 퍼 갈 수 있었고 그래서 이 시기를 Pax Syriana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짤막하게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지역을 분할 점령할 때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의 통치하에 놓였고 이후 프랑스는 시리아의 일부를 떼어 레바논에 편입시켜 버렸다. 그리고 1948년에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인해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급격히 유입되었고 그 세력이 점점 커져 급기야 PLO가 레바논을 거점으로 대 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975년에 기독교인들의 촉발로 레바논 내전이 터지면서 레바논 내 기독교도들은 시리아군을 불러들였고 레바논에 좌파정권이 들어서는 걸 우려한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를 묵인하였다. 그러나 이후 내전이 길어지며 기독교 세력이 계속 열세에 놓이자 이스라엘은 1978년과 82년에 레바논을 침공하였고 2000년까지 남부 레바논을 점령했다.

15년 동안 이어지던 레바논 내전이 1990년에 끝났지만 시리아군은 철수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침공에 대항해 결성 된 시아파 무장세력 헤즈볼라와 협력관계를 맺으며 레바논 강점을 계속하면서 이스라엘에 빼앗긴 시리아의 영토를 되찾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런 상황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악몽이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이제이였다. 시리아가 강점한 레바논을 접점으로 주변의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은 상호간에 충돌하느라 다른 문제에 신경 쓰지도 전략적으로 협력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마치 남한과 북한이 강대국들간의 세력 균형판으로 활용되듯이.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충돌하는 세력 중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우세해서는 곤란했다. 중동지역으로부터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석유를 맘껏 퍼가려면 이들 세력들이 팽팽히 맞서며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대립하는 세력 중 어느 한 쪽이 불리하면 거기를 지원하고 어느 한 쪽이 우세하면 반대편에 무기를 대주곤 하였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얘기하는 Pax Syriana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의 네오콘들은 Pax Syriana가 아니라 아예 Syriana를 꿈꾸게 되었다. “시리아에 의한 평화” 보다는 미국이 시리아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이제이에서 만족하지 않고 아예 그들이 직접 중동을 접수하려 했던 것이다.

자국민 수천명이 죽고 그들의 국가안보를 뿌리까지 부정해버린 사건인 9/11 테러의 주모자라고 미국 정부 스스로가 지목한 자는 빈라덴이었고 또 공언하기를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숨어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잠시 빈라덴을 찾는 척 하더니만 금새 목표를 바꿔 이라크 땅에다 미사일을 퍼부어댔고 최근까지도 이라크 강점을 유지할 뿐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빈라덴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전에 미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과반수가 넘는 미국인이 9/11 테러의 주모자가 사담 후세인이라고 응답한 적도 있었다.


결국 네오콘이라고 지칭되는 당시 미국의 집권세력에게 9/11 테러가 의미하는 건 세계평화, 민주주의 수호, 테러근절을 위한 즉각적 대응이 아니라 그들이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Pax Americana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방아쇠 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네오콘의 토양인 석유자본이 버티고 있었다.

바로 그런 얘기를 2005년 개봉 영화 “시리아나”는 전하고 있다. 미국이 왜 중동에 집착하며 그런 집착을 어떤 식으로 실행에 옮기는지를, 그리고 “Syriana”라는 말은 결국 “Pax Americana”의 별칭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대통령은 오바마이고 오사마 빈 라덴은 제거되었으며 이라크의 미군은 철군을 하였다. 중동에서는 쟈스민 혁명을 계기로 카다피와 무바라크가 죽거나 실권하였고 … 그리고 이란은 여전히 미국 주도의 제재 움직임에 맞서고 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인물이 바뀌고 세상이 변해도 초강대국 미국과 그 위정자의 속셈과 욕망은 그저 그대로일 따름이다.

영진공 이규훈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조금 실망스럽지만 여전히 유쾌한 영화



어울리지 않게 낭만적 사랑을 믿고 있는 – 그러니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낭만과이다 – 부류 중 하나인 나는, 연애 경험이 그리 많지 않다.

남남이든 여여든 남녀든 유시진이 어느 만화에서 말했던 대로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 것은 우주적 차원에서 기적이라 믿고 있는데, 그 사랑을 서로 확인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의 시작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니까, 잘 생기고 진국이고 성품도 좋고 능력도 있고 게다가 ‘인권 변호사’라는 그럴 듯한 직업도 가진 남자와 사랑을 확인을 하긴 했는데, 그걸 과연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브리짓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고난은 그의 무뚝뚝한 성격이 아니라, 그와 그의 세계가 가진 허위의 속물의식이고, 이것은 그 둘의 명확한 계급 차에서 출발한다. 하긴,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고, 그래서 살고 있는 세계가 기초적으로 생겨먹은 모양도 다른데 말이다.

브리짓 – 과 나, 그리고 내 주변 친구들 – 에게 있어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그런 거고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은 상류층의 극우 또라이들이나 내뱉는 말이지만, 그의 세계에선 그게 절대적 믿음인 것이다. 마돈나가 영국에서 발표한 최초의 싱글이 영국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론 “럭키 스타” 라 해도, 그냥 일반적으로 알려진 “홀리데이”가 정답이 되는 그런 세계가 마크 다아시가 속한 세계이다.

브리짓은 이 세계에서 계속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 마크 다아시와 브리짓이 상반된 두 세계를 능숙하게 오가게 되지 않는 한 말이다.

둘이 그럼에도 사랑을 재확인하게 되는 건 브리짓이 처했던 곤경이지만 –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는 리지 동생의 정분난 야반도주 – 그래서 둘은 사랑을 고백하고 약혼을 하고 해피엔딩을 맞게 되지만, 글쎄, 과연 결혼을 한다고 둘의 사랑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영화가 정말로 실패한 지점은 이것이다. 즉,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이 야심차게 시도한 것은, “사랑의 확인까진 갔는데 유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지만, 이 영화는 또다시 사랑의 확인만 할 뿐, 유지를 위해서 정작 보여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있긴 하다. 그건 우리의 브리짓의 자신감 결여와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다.

‘출렁이는 뱃살이 당신의 매력’이라고 말해주는 애인 앞에서 당당하게 뱃살을 내밀지만 예쁘고 늘씬하고 똑똑하고 상류층 출신 가문의 동료 변호사가 애인 곁에 자주 출몰하자 당장 의부증이 발동하는 브리짓의 모습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 앞에 당당하자는, 그리고 사랑의 필요조건은 믿음과 신뢰라는 쓸 만한 교훈을 얻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둘의 사이를 정말로 힘들게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원작소설에서 마크 다아시가 브리짓과 헤어진 뒤 정말로 레베카와 잠깐 사귀고 – 그래서 섹스도 한 번 하고 – 브리짓과 다시 연결되기 위해 그토록 혐오했던 자기계발서들을 몰래 읽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건, 관계의 유지를 위해 마크 다아시가 변하고 노력했던 부분들이다.

하지만 영화엔, 그게 없다. 오로지 브리짓 탓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유있고, 공감할 만한 브리짓의 일련의 행동들은 정말로 “주책”이 되고 만다.

이것은, 속편 제작팀이 전편이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었나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브리짓은, 평범하고 결점 많고 적당히 영악하려 하지만 별 수 없이 어리숙하고 사회적 성공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은, 그러나 끝없이 자신을 긍정하고자 노력하며 낙천적인, 우리 시대 여자들의 모습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그저, 브리짓이 뚱뚱한 몸으로 벌이는 일련의 해프닝에 웃느라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술고래에 줄담배에 통통하고 민망한 실수들만 줄줄이 저지르면서 예쁜 척, 귀여운 척하곤 거리가 먼 나이먹은 노처녀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통상 사람들이 주책이라 생각하는 한 여성의 어떤 면도 충분히 사랑스러울 수 있음을 보여준 게, 그런 여성이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게 전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이다.

마크 다아시가 반한 브리짓도 마찬가지고, 그는 그렇기에 “당신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했던 것이다. 전작에서 원작소설에는 없는 ‘두남자 유치싸움씬’이 굳이 들어간 것도, 그렇게 (사회적 편견의 눈으로 보면)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여자를 위해 두 남자가 치고받고 투다닥을 할 수 있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점잖은 척하는 남자들의 후까시란 게 실은 그렇게 유치하고 웃기는 것임을, 실은 그것이야말로 ‘내숭’임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기 위해 두 남자의 격투씬은 유치함이 더욱 과장되었고, 이것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을 단단히 살려준 씬이 되었다.)

또한 이 격투씬이야말로, 치사스럽고 능글맞은 대니얼 클리버와 진지하고 속 깊으며 겉으론 무뚝뚝해도 속으론 열정으로 들끓고 있는 마크 다아시의 성격을 몸으로, 단적으로 드러낸 씬이다.

속편에서도 두 남자의 결투씬은 반복된다. 물론 상체를 바짝 위로 세운 채 종종걸음으로 도망가는 대니얼 클리버의 ‘왠지 치사스럽고 웃긴’ 도망치기와 큰 보폭으로 열심히 쫓아가는 마크 다아시의 ‘폼만큼은 멋진’ 추척이 코믹한 건 사실이지만, 두 남자의 대조적인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는 못한다. “난 유부녀가 더 땡겨”는 충분히 대니얼 클리버다운 밉살스러운 ‘매 벌기’ 발언이지만, 치사스럽진 않다. (전편에서 대니얼 클리버의 치사스러움은, 마크 다아시 뒷통수 가격과 브리짓한테 엄살 부리기 등으로 딱 표현된다.)

뭇 여성들이 열광한 마크 다아시 캐릭터 분석도, 좀 잘못되어 있다. 전편에서 콜린 퍼스가 보여준 마크 다아시의 매력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오만함’으로 오해되곤 하지만 실제론 소심하고 – 언제나 브리짓을 따라다니던 그의 눈빛! – 속깊고 진지하면서도 따뜻한, 그리고 나뭇토막처럼 뻣뻣해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펄펄 들끓고 있는 열정이다.

속편 원작소설에서 이런 마크 다아시의 모습은 약간 변하기는 하지만 – 조금 더 인간적이고 연약한 면을 드러낸다 – 속편 영화에서의 마크 다아시는 그저 주변 사람들의 평에 의해 설명될 뿐 (“당신은 오만해” “난 그 녀석 잘난 척해서 밥맛이었어”)이다. 마크 다아시는, 겉으로 표나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사랑을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노력하는 캐릭터이다.

물론 콜린 퍼스는 태국 교도소 면회씬이나, 스피커폰 전화통화나 미팅 같은 ‘브리짓 실수연발’ 씬에서 마크 다아시 특유의 무뚝뚝한 자기방어적 성격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애인의 모습을 드러낸다…만, 정작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변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완벽한 남자’일 뿐이다.

영화는 그래서, 둘이 행복해지려면, 전적으로 브리짓이 그의 세계에 맞춰 (서민적인) 자신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그닥 유쾌하지 않은 결론을 전제해두고 있다. 결국, 각본과 연출의 방향에서 이미 캐릭터가 잘못 잡힌 것이다. 얄미운 대니얼 클리버의 유들유들한 매력도 지나치게 단순해졌고. (그저 섹스광으로만 묘사되다니.)

하지만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은, 그래도 유쾌하다. 그것은, 좀스럽고 치사한 나쁜 남자 대니얼 클리버, 알고보니 진국 마크 다아시의 매력을, 한계가 명확한 각본 내에서도 최대한 드러내 주고자 노력한 “휴 그랜트”와 “콜린 퍼스”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이제 브리짓 존스라 하면 더이상 다른 사람을 떠올릴 수 없는, 완벽한 브리짓 그 자체의 “르네 젤웨거” 때문이기도 하다.

르네 젤웨거는 침대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 마크 다아시를 그 또랑또랑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리고 어떻게든 사랑을 지키고자 온몸을 던지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 정말 온몸으로 연기한다 – 브리짓의 당당한 용기를 보여준다. (그것이, 각본에 의해 결국은 “주책”이 되고 말아버리긴 하지만.)

전편에서 All by Myself에 맞추어 처절한 외로움을 이쁜 척 하지 않고 완전히 막 가게 드러내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냈던 “르네 젤웨거”는(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그 장면에서 눈물을 뚝뚝 흘린다.), 이번에는 태국의 교도소에 날아왔지만 자신에게 무뚝뚝하게 대하는 마크 다아시를 보며 상처를 받는 씬에서 진정성을 전달하며 또 한 번 사람을 울린다. – 정말로 그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났다. 브리짓의 상처와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자고로, 주인공이 엉엉 울 때보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어떻게든 참으며 웃으려 애쓸 때 관객은 더 슬픈 법이다. 천하의 브리짓을 그토록 아프게 울게 만드는 그 슬픔의 결을, 참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진공 노바리

 

“고 녀석, 맛나겠다”(まえうまそうだな, 2010), 내가 니 밥이다!





감독
: 후지모리 마사야

어린 시절 아버지가 권해준 고기를 손가락 쪽쪽 빨아가며 맛있게 먹었는데 알고보니 그 육질 좋은 고기의 정체가 어제까지도 함께 뚝방을 누비던 누렁이였다는 식도를 죄여오는 사연이 종종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곤 한다.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의 경계가 애매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 시골 곳곳에서 벌어진 이런 비극은 살기위해 먹어야 하는 존재로서 짊어지고 가야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숙명을 외면하고 단지 동심이라는 이유로 다수의 애니메이션이,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어깨동무하며 놀아제끼는 빨갱이 같은 사회를 그리고 있다
. 이는 아이들과 철없는 어른들로 하여금 먹이사슬의 위계질서를 망각케 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예로 최근 10년간 호랑이와 같은 거대 육식동물이 애완동물로 키워지다 에피타이져 신세가 되었다는 해외토픽 기사의 증가는 이런 빨갱이 같은 애니메이션의 작품 수와 분명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 영화는 이런 생태학적 만행에 일침을 가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은 아무리 불알친구라도 자칫하단 골로 갈 수 있으니 긴장하며 지내라는 바람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원작은 “고녀석 맛있겠다”라는 동화책으로 동화 일러스트 작가 미야니시 다츠야의 단순한 형태와 원색들로 그려진 공룡 그림들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당연히 얘기지만 원작이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이렇게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것이다.



동화책 “고녀석 맛있겠다는 티라노사우르스가 주인공으로 열연하고 있는 시리즈 중 하나로 현재 국내에는 5권이 출간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이 시리즈의 이야기들을 모두 엮어서 각색한 것이다. 하지만 동화책의 내용은 하나 같이 뛰어넘을 수 없는 주식(主食)의 벽 앞에서 이별을 맞이하는데 반해 애니메이션은 아쉽게도 이를 모두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해피하게 편집해 놓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동화책과는 너무 다른 그림체이다
. 작가의 개성 넘치는 색과 형태가, 너무나 진부해 보이는 그림체로 바뀌어져 원작에 매력을 느낀 이라면 선뜻 이 애니메이션을 선택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뚜껑을 열어 보면 애니메이션의 그림체 역시 각각의 공룡의 특징까지 감안한, 공들여서 그린 그림으로 원작과의 이질감은 금새 사라지고 애니메이션 나름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작정하고 작품의 마스코트 역할을 하고 있는 아기 안킬로사우르스는 정말 귀여워서 언제 잡아먹힐지 기대하게 만들지만 안타깝게도 잡아먹히지 않는다
. 그리고 동화책에선 볼 수 없는 육식공룡들의 아크로바틱한 액션은 본의 아니게 아이와 함께 시청할 수밖에 없는 아빠들의 지루함을 한방에 날려 줄 것이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