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치 포인트”, 우디 앨런의 직설화법





나 어릴 적에는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 그 자체가 뭔가 부의 상징처럼 보였을 정도였는데, 그건 우리집이 흔히 말하듯 밥 걱정을 겨우 면할 정도로 가난했던지라 그 흔한 라디오 한 대도 없었고,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줏어와서 고친) 작고 볼품없던 단 한 대의 TV 채널권은 언제나 할머니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음악과 영화는 나보단 좀더 살 만한 집 애들이 가진 것이었다. 당연히 더욱 고립되고 소외되고. 어머니가 교육에 한이 맺혀서 아들이 아닌 딸자식이라도 공부 잘 하는 넘은 대학 보낸다는 굳은 결심이 없었다면, 그에 걸맞게 어릴 적부터 질나쁜 버전이나마 책을 잔뜩 들여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난 너무나 일찌감치부터, 부자는 아니지만 라디오 한 대는 갖고 있었을 법한, 혹은 문화적인 세례를 받은 오빠나 언니를 두어 덤으로 그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아이들마저도 나와 다른 처지의 아이들로 두고 경계했고, 그 대가를 나이를 들고나서 치르기 시작했다.

There is no luck.

도스토예프스키 지침서를 옆에 두어가며 [죄와 벌]을 읽는 크리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다.

영국에서야 락과 영화는 서민문화를, 클래식과 오페라와 문학이 고급문화를 상징할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선 락과 영화, 특히 예술영화가 바로 지식인 문화의 표상이 아니던가.

딱 대학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침 당시 발간됐던 ‘키노’를 옆에 두고 영화를 보았고, 이를 매개로 만난 인간들이 걸작이라 혹은 천재라 떠들어대는 락앨범과 락밴드의 이름을 몰래 잘 기억해 두었다가 테이프로 하나씩 사 모으며 음악을 들었다.

21세기에 영화가 이토록이나 히트를 치는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를 줄은 당시엔 몰랐지만. 이런 까닭에, 게다가 이제는 여자가 아닌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크리스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갔고, 심지어 계급상승을 욕망하며 윤리적으로 타락해가는 그 숱한 영화와 드라마의 그 흔한 주인공들처럼 크리스가 멍청하고 얕은 놈이 결코 아닌 것에 안도했다. 심지어는 내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면서도, 그의 범죄가 결코 들키지 않기를 바랐을 정도였다.

영화의 설정과 줄거리는 우리가 너무나 식상하게 보고 보고 또 보아온 것이다. 하지만 깊이가 다르다. 사람들이 흔하게 예상하는 서투른 윤리적 훈계와 설교도 집어넣지 않는다. 너무나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아프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아주 잘 만드는 사람의 그 능수능란하고 대단한 손길은 어떻고? 당연하다, 감독이 “우디 앨런”이니까. 그리고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이전의 “우디 앨런”이라면 엄청난 블랙유머를 가진 코미디로 풀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면서 이 할배가 미쳤나, 노망이 들었나 싶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 할배가 이렇게 굳은 얼굴로 작정하고서 눈앞에 시퍼런 칼을 들이미는 영화를 보고 들은 적이 없기에. 도대체 우디 할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게다가 이 할배는 원래 러브러브 뉴욕~파가 아니었던가. “스칼렛 요한슨”을 빼고 런던 배경에 영국배우들로 꽉꽉 들어찬, 무시무시하고 염세적이고 ‘직설법’을 구사하는 이 영화가 정말 “우디 할배”가 만든 영화라고?


“매치 포인트”의, 이른바 사람들이 ‘반전’이라 부르는 그 마무리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래, 나는 그걸 바랐다. 하지만 그가 그녀들에게 그런 대사를 할 줄 몰랐고,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 이게 자본주의였지. 크리스는 ‘운’이라 말하지만, 그가 그토록 입에 달던 ‘운’이라는 것이 맨 마지막 장면에서는 크리스가 아닌 가족들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그거다. 운이라는 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내건 은총의 선택이다. 개인의 노력? 성실? 능력? 좋아하는 걸 끝까지 즐기며 하는 것? 웃기는 소리. 자본주의의 간택, 애초의 지배자들의 간택이다.

그것을 지배자들 스스로 ‘운’이라고 부른다. 니가 운이 좋은 거야, 왜냐하면 우린 널 선택했으니까. 넌 우리 편이 되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까, 그리고 결코 네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 대사가 가족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핏줄로 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다. 그제서야 그는 정말로 그들 사회에 포섭된 것이다. 그가 무슨 짓을 했든 … 안 들키면 되는 거다.



수많은 출세의 욕망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패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출신적인 한계 – 우리가 ‘일말의 양심’이라 부르는 한 가닥의 윤리, 혹은 원래 자리로의 회귀 본능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본주의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가난하지만 자기 고집을 내세우면, 그리고 행복을 찾으려 들다간, 그리고선 감히 지배층과 엮이려 들었다간, 노라 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말씀이다.


영진공 노바리

 


 


 


 


 


 


 



 


 


 

우디 앨런, 스윗 앤 로다운 Sweet and Lowdown (1999)




으하하하, 이 포스터!!!
우디 앨런 감독의 1999년작 <스윗 앤 로다운>은 가상의 천재 재즈 기타리스트 에밋 레이(션 펜)의 변덕스러운 삶을 그린다. 재즈 역사가는 물론, 재즈광으로 잘 알려진 우디 앨런 감독 자신까지 나서 그들의 인터뷰 증언장면과 일종의 ‘재현’ 화면을 교차시켜 일종의 페이크 다큐 기법을 도입했다.

션 펜이 그려내는 에밋 레이는 자신이 세계최고라는 자부심, 그리하여 “예술가라면 응당 이래이래야 한다”는 허세의 자부심이 컸던 만큼, 당대 최고라 알려진 장고 라인하르트에 대해서는 끝없는 열등감과 경외를 가지며 이른바 ‘열폭’하곤 했다. 에밋 레이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에 의하면, 그는 파리에서 장고의 연주를 들으며 두 번이나 그만 기절을 해버렸다고 하니까 말이다.

물론 천재 예술가들의 여자들과의 스캔들은 대중의 가장 큰 관심사일 터. 에밋 레이는 “나는 예술가니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아, 자유로워야 하니 결혼은 안 해” 따위의 말들을 주절거리며 여자들과 연애는 하되 책임감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피했다. 즐기는 건 좋지만 ‘특별한 관계’는 아니라는 거다. 많은 여자들과 그런 식의 연애를 이어갔던 것으로 설정되지만, 영화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것은 해티(사만사 모튼) 및 블랜치(우마 서먼)와의 관계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블랜치는 한편으로 해티를 돋보이게 하는 한편, 레이가 스스로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깨닫게 하는 일종의 ‘계기’로 작용하는 좀더 기능적인 인물이다. 해티가 어릴 적부터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였던 반면 블랜치는 끊임없이 노트에 기록을 하는 작가지망생이다. 고아 출신으로 세탁부였던 해티와 달리 블랜치는 명성과 돈이 있던 가문의 여성이었던 점도, 해티가 레이를 숭배하며 그럴 어린아이같은 심성으로 사랑했던 것과 달리 블랜치가 매순간 레이를 분석하려 들며 그와 일종의 줄다리기 게임을 즐겼던 점도 해티와 블랜치가 얼마나 극명한 극을 이루는 사람들인지 잘 드러내는 특징들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해티는 변덕스러운 레이에게 하룻밤새 버림을 받지만 블랜치는 그 자신이 레이에게 배신을 때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줄거리 요약이 <스윗 앤 로다운>의 아름다움과 근사함을 특징지어주는 요소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이 언제나 천착했던 남과 여의 관계, 또 한편으로는 예술가와 그의 팬의 관계를 버무리면서, 그 특유의 유머와 신랄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 전반을 통해 우리는 허세와 연약함, 자만심과 가련할 정도의 열등감과 자기 방어 기제, 빛나는 재능과 어이없을 정도의 어리석음을 함께 갖고 있던 ‘에밋 레이’라는 인물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만사 모튼과 션 펜

우디 앨런 특유의 신랄한 유머와 션 펜의 탁월한 연기 덕에, 관객의 입장에선 그를 한심스러워하며 조롱의 비웃음에 동참하게 되면서도 동시에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함께 품게되는 것이다. 그건 그가 언제나 무대 위 빛나는 별이 되고 싶었으되, 태생적으로 어둠과 진창에서 태어났고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렇기에 그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투쟁적이었으며, 그럼에도 그런 투쟁의 삶은 언제나 너무나 쉽고도 허무하게 여자와 자고 싶다거나 차를 사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너무나 가볍게 바람에 흩어지곤 했다.

자신의 거울과도 같은 사람과의 연애와 상처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이미 너무 늦어버린 사람의 가치를 깨닫는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야 이 우주에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넘치도록 넘친다. 재능은 지녔으나 그 재능을 유지해줄 성실함은 없고 더욱이 자만과 허세가 하늘을 찌르던 예술가의 추락, 그것도 처음엔 서서히 진행되다 점점 가속도를 더해 막판엔 겉잡을 수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그 자신은 너무 늦은 뒤에야 그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역시 세상에 흔하게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우디 앨런은 <스윗 앤 로다운>에서 옛날옛적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이 해왔던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독특한 숨결을 불어넣는 데에 성공한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빛나는 듯하다 대공황으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퇴색했던 미국의 그 20년대와 30년대를 그 빛나는 재즈 음악으로 한껏 되살려내고,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어리석은 한 남자를 통해 예술과 삶과, 사랑을 되짚는 것이다.

이후 2000년대의 우디 앨런의 영화들이 여전히 매력은 있지만 어딘가 예전의 우디 앨런답지 않은 맥빠진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스윗 앤 로다운>은 우디 앨런에게 있어서도 가장 찬란히 빛난 뒤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든 그의 영화예술 세계의 가장 마지막으로 빛나는 정점에 있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PS 1. 이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의 2010 시네바캉스의 상영작으로 상영되었다. 1999년경 헐리웃 리포터 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처음 접하고 수입개봉만을 기다렸으나, <브로드웨이를 쏴라> <마이티 아프로디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등이 개봉되고 있던 와중에도 이상하다시피 수입되지 않았던 걸작.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를 10년을 기다려 본 셈이 된다.

PS 2. 기타를 부숴버린 채 망연히 앉아있는 션 펜의 모습을 부감으로 잡은 거의 마지막 숏은 역시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견.

PS 3. 당연한 얘기지만, 음악이 너무 좋다. 중간중간 같이 재즈 잼을 연주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역시나 너무 좋다.

PS 4. 션 펜 오빠 만세! 아울러, 역시 허세와 허영으로 가득찬 블랜치의 모습을 매우 매혹적으로 그려낸 우마 서먼도 뜻밖에 우디 앨런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리는 언니였다는.

PS 5. 2000년대에 우디 앨런이 함께 작업했던 주요 배우 중 그나마 우디 앨런 영화에 잘 어울렸던 이는 스칼렛 요한슨 한 명밖에 없는 듯하다. 그러니 우디 앨런도 요한슨과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함께 작업했던 거겠지만. 사실 이 영화의 사만사 모튼도 우디 앨런의 영화와는 묘하게 불균형을 이루는데, 사만사 모튼이 맡은 해티 역은 워낙에 그런 불균형이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경우라 해야 할듯. 사실 2000년대 우디 앨런 영화 중 최악의 미스캐스팅은 역시 <애니씽 엘즈>의 제이슨 빅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PS 6. 그러므로 결론은… 역시 션 펜 오빠 만세!

영진공 노바리

 

우디 앨런, <스쿠프> <영진공 70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3월 13일

코폴라는 우디 앨런을 ‘진정한 작가’로서 노상 부러워했다는데, 이번 주 씨네21의 정성일은 그가 ‘세련된 취향을 가졌을지언정 진지한 작가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음, 정성일의 그 글을 대충 ‘건너뛰기 독서’를 하다가 이 구절을 보니, ‘작가영화’하면 뭔가 졸립고, 진지하고, 유머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우울하고, 언제나 인상을 찌푸린 채 인간과 사회와 우주에 대해 고민을 늘어놓는 영화들이어야 할 것같다. 실제로 ‘진지함’이라는 게 촌스럽고 안쓰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 세상이니, 그런 ‘진지한’ 작가영화들이 뭔가 ‘대단한 것’으로 격상시키는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또다시, 소위 ‘천박한 대중’과는 유리된 채 난척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되는 것 같은걸. 나같은 ‘천박한 대중의 일원’은 가까이 하면 안 될 것같은… 그러니 잉그마르 베르이만에 대한 내 개인적 애정은 꽁꽁 숨겨두고, 우디 앨런을 작가영화에서 제해주신 그 센스에 오히려 고마워하도록 하자. 모든 작가(오퇴르 auteur)들이 스타와 작업하길 기피하지 않았으며 – 오히려 기회가 된다면 열렬히 그 기회를 이용했으며 – 때로 상업영화 씬에서의 성공을 간절히 원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사적으로 은밀히 기억할 일이다. 고다르라 해서 별로 예외였던 것같지도 않다. 하여간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리지널 포스터는 좀더 어두운 분위기
우디 앨런이 스칼렛 요한슨과 작업을 해주시는 바람에 <매치포인트>와 <스쿠프>가 일반 극장가에서 개봉했고 그래서 설비 좋은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겐 행복한 경험이다. 나야 스칼렛 요한슨도 너무너무 좋아하니까. 숀펜과 작업한 <스윗 앤 로다운>도 개봉되지 않았고, 그나마 휴 그랜트가 나왔다고 <스몰타임 크룩스>가 하이퍼텍 나다 정도에서 개봉했던 걸 생각해 본다면, 메가박스니 CGV니 하는 극장에 버젓이 우디 앨런의 영화가 걸리는 건 내게 어떤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애니씽 엘스>는 또 얼마나 초라하게 개봉했던가. (물론 헐리웃의 스타들이 총출동했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유>는 그나마 좀 많이 걸렸었다. <마이티 아프로디테>는 동숭?) 작년 5월경, 필름포럼에서 우디 앨런 특별전을 할 때 본 다섯 편의 영화들을 아무디 다시 되새겨봐도, 우디 앨런의 영화가 주는 유쾌발랄함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웃음, 그리고 그 사이로 가슴 싸하게 만드는 어떤 슬픔이 한국의 관객들과는 어쩜 이렇게 궁합이 안 맞는지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우디 앨런의 여주인공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엽냔 말이다.


난 풍만한 섹스어필로만 이미지가 굳어가는 듯한 스칼렛 요한슨을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덜렁이 아가씨로 그려준 우디 앨런 영감이 너무 고마웠다. 약간 탁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우디 앨런 식 대사들을 다다다다다 내뱉는 스칼렛 요한슨은 더할 나위없이 ‘우디 앨런식 여주인공’으로 보인다. <애니씽 엘즈>에서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던 크리스티나 리치와 달리, 스칼렛 요한슨은 왕년의 다이안 키튼이나 미아 패로만큼의 오오라엔 못 미쳐도, 그들의 그 지적인 분위기와 달리 약간 맹하면서도 더없는 사랑스러움으로 나름 새로운 우디 앨런식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매치 포인트> 이후 우디 앨런이 스칼렛 요한슨과 또 한편의 영화를 찍고있단 소식을 접했을 때만도 그저 ‘아, 요한슨이 이뻤나봐’하고 말았는데, <스쿠프>를 보고나니 그 양반이 왜 요한슨을 탐냈는지 알 것같다. 우디 앨런은 그녀의 영민한 재능과 아름다움을 높이 사고 자기 영화에 잘 어울릴 거라 예측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자기 나이보다 대여섯 살에서 많게는 열 살 위의 여자를 연기하고 있는 이 조숙한 여배우에게 자기 나이에 맞는 ‘놀이로서의 연기’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영화 안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샌드라(혹은 제이드)를 바라보는 우디 앨런의 눈에 어찌나 애정과 기특함이 담뿍 들어있던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아 너무 귀엽고 예쁜 요한슨 양. 휴보다는 우디와 더 잘 어울리는.


마지막 엔딩을 보며, 왠지 찡해져왔다. 샌드라를 자기자식처럼 그리 염려하고 아끼다가 결국 죽음을 맞고는, 저승사자의 배 안에서도 여전히 너스레를 떠는 그 코믹한 시드니의 에필로그가, 내겐 극중 인물인 시드니의 말로라기보다는, 우디 앨런 자신의 실제 심정을 토로하는 듯이 느껴졌다. 많은 감독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걸 보며 우디 앨런 역시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며 그 길을 생각해 보는 것이겠지. 하긴, 난 언제가 될지 몰라도(되도록이면 아주아주 나중이었으면 좋겠다) 우디 앨런이 실제로 죽는다면, 저승사자의 배 위에서도 여전히 코미디 영화의 디렉션을 하며 주절주절 수다를 늘어놓을 것같다. 바로 시드니처럼.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