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아쉬운 부분이 하나, 둘이 아니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식객>에 나름의 기대를 했던 건 그게 허영만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기 때문이다.

원작이 그렇게 훌륭하면 <검은 집>처럼 대충 만든다 해도 재미가 있고,

<타짜>는 원작에 버금가는 재미를 선사해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식객>은 어떤 감독이 메가폰을 잡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단 사실을 내게 가르쳐 준 영화에 그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식객에서 아쉬운 부분은 하나 둘이 아니다.

첫째, 주인공인 김강우(성찬) 편인 정은표와 라이벌인 임원희(오사장)의 편에 선 김상호가 왜 군대 선후배 관계여야 하는가이다.

둘이 친해야 할 이유라곤 억지웃음을 유발하는 것 말고는 없었는데

설정 자체가 무리라 그런지 난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둘째, 오사장을 악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려놨다.

요즘 트렌드는 악인과 선인의 경계가 모호한 게 특징인데,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없다해도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안가리는 오사장의 모습은 그냥 짜증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악의 유전성까지 언급하는 것 같아 불편했는데,

이런 류의 선악구도는 좀 시대착오적이 아닐까 싶다.

셋째, 소를 잡은 대목.

좋은 소를 구해오라는 과제가 떨어졌을 때

성찬 주위의 사람들은 성찬이 기르는 소를 잡자고 하나

정은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타이른다.

“저건 소가 아니야… 성찬이 동생이야. 너 같으면 네 가족을 잡아먹고 싶겠니?”

하지만 성찬은 그 소를 잡음으로써 ‘동생론’을 편 정은표를 무안하게 한다.

성찬이 요리대회에 참여하는 계기는 오사장에 대한 경쟁심이 생겨서인데

내가 털 있는 동물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자신의 사적 목적을 위해 동생처럼 여기는 소를 꼭 잡아야 했을까?

까짓것 최고의 요리사로 인정 못받으면 어떤가?

그 소와 함께 호형호제하며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너희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며 성찬이 울 때,

난 그게 악어의 눈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밖에도 <식객>은 잘 만든 영화가 아님을 여러 곳에서 증명하는데,

소의 근출혈을 뒤늦게 발견해 극적 효과를 노리는 유치함도 그 하나다.

만화 <식객>을 딱 두권밖에 못봐서 모르겠지만

원작은 이렇게 이상하진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원작은 성찬이란 청년이 전국을 돌면서 맛을 찾는 거였는데

여기선 그게 요리대회로 탈바꿈하고 만다.

요리가 기술임은 분명하지만

미각이 100미터 달리기처럼 등수를 매길 수 있는 분야가 아닌 것도 사실 아닌가?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홍대앞 떡볶이를

다른 친구는 자기 동네가 더 맛있다고 우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대회에서 우승을 못한다고 해서 그 요리사가 실력이 없는 건 아닐텐데,

오사장이 종합 2위를 달린다고 해서 매출이 50%로 떨어진다는 발상도 지나치게 유치하다.

게다가 민족주의적인 내용으로 마무리를 하는 것도

요즘 트렌드로 봐서는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내가 <한반도>를 괜찮게 평가하는 건

그 영화가 애초부터 그런 의도로 기획되었고

내용 자체도 그럭저럭 공감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낭만자객>에서 난데없이 나오는 민족주의의 발현에 난 뜨악했고

그 비슷한 느낌을 <식객>에서도 받는다.

아무리 잘줘봤자 10점 만점에 7점인 이 영화는

TV에서 추석특선 시리즈로 나올 때 보는 게 나을 듯하다.

 

영진공 서민

[영진공 60호]최동훈, <타짜>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0월 13일

영화에 원작이 있는 경우, 비슷한 캐릭터와 줄거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매체가 완전히 다름에도 부당하게 비교를 당하기 마련이다. 원작을 이미 본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보는 영화 또한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허영만 선생과 그 팬들에게 대단히 실례될지 모르겠지만, 원작을 보지 않고서 접한 영화 <타짜>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졌기에 굳이 아쉬움 때문에 원작을 찾게 만들지는 않더라. 이후에 본 원작 [타짜]는, 솔직히 말해 – 그리고 당연할 수 있지만 – 지루했다. 원작을 보면서 느낀 것은, 영화 <타짜>의 각색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리고 최동훈이 얼마나 훌륭한 감독인지이다.

내레이터로서 정마담을 전면 배치하고, 아귀 및 짝귀와 고니의 인연을 더욱 단단하게 얽은 영화 <타짜>는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원작을 영화라는 매체에 알맞게 성공적으로 스토리를 압축하고 캐릭터를 통폐합하며 촘촘하게 밀도를 더한다. 원작에서 내레이션으로 서술된 부분을 단 한 컷의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원작에 없던 내레이션은 충분히 영화적으로 삽입돼 들어간다. 게다가 원작의 5, 60년대 배경이 IMF 직전인 90년대 중반으로 바뀐 것은 탁월하고 영리하다. 젊은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충분히 현대적 감각을 주면서도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으며, 하루에 몇 천만원씩 도박에 꼴아박는 호구의 존재가 설득력있게 제시된다. 나라 전체가 ‘한탕’을 간절히 바라며 흥청망청하면서도 희망보다는 절망과 불안감이 깔린 채 침몰을 향해 한발한발 다가가는 위기의 그 시대 분위기가 영화의 스토리와 정확히 맞아떨어 들어간다.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이후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아버지상’을 획득한 백윤식은 이 영화에서도 예의 정신적 지주로서, 이미 도인의 경지에 이른 ‘아버지’이자 ‘멘토’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니를 받아들이고 트레이닝시키는 장면은 영락없이 루크 스카이워커를 훈련시키는 요다, 혹은 영웅신화의 멘토이자 현자의 모습이다. 우아하고 품위 넘치며 올곧은. 원작과 달리 그는 ‘딴 돈의 반만 가져가는’ 관행을 처음부터 원칙으로 내세우며 고니에게도 그렇게 가르친다. 배 위에서의 절대승부에서 고니가 ‘난 딴 돈의 반만 가져가!’라 내뱉는 것은 곧 평경장의 원수를 갚는 것뿐 아니라 그의 원칙을 계승함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적자의 정통성을 획득했음을 보여준다.

원작에서 그저 욕심많은 촌뜨기 아줌마였던 정마담은 김혜수에 의해 완벽하게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훨씬 도도하고 우아하며, 훨씬 명민하고 위험한 그녀는 (“나 이대 나온 사람이야!”) <범죄의 재구성>에서 한 단계 진화한 팜므파탈을 보여준다. 주목받기 좋아하며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을 고수하지만 절대로 천박해 보이지 않는 그녀, 여자조차 반하게 만드는 그녀, 영화 초반에 주인공을 객관화시켜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고니에 대한 내레이션을 도맡은 그녀는 말투와 몸짓, 심지어 누드에서조차 압도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그러나 불타는 돈 앞에서 패닉이 되었다가 급기야 고니에게 총질을 하는, ‘무너질 대로 무너지는’ 정마담의 씬은 고니가 열차에 매달려있는 장면과 함께 클래이맥스라 할 만한데, 아무래도 ‘폭발’이 약한 느낌이다.

조승우는… 더 할 말이 있을까? 가늘고 곱상하긴 해도 성깔있게 생긴 얼굴과 굵은 목소리에서 애초에 임권택이 거친 “싸나이” 캐릭터를 맡긴 바 있고, 이 영화에서도 악과 깡과 빠른 머리회전을 자랑하는 고니, 한편으로 여려 보이나 그것이 오히려 독한 칼날로 전화하곤 하는 고니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유해진의 고광렬도 아주 좋다. 아이고참, 뿔테안경에 “양복쟁이” 고광렬이 어찌나 그리 잘 어울리는지. 이밖에 짝귀, 아귀도 아주 좋다.

아우, 이 장면에서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각색자 최동훈’이다. 영화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감독들도 종종 원작의 아우라에 눌려 줄거리를 쫓아가기에만도 허덕대거나, 어쩔 수 없는 ‘구멍’들을 노출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아쉬움에 원작을 찾아읽게 만든다. (심지어 피터 잭슨도 그랬다.) 하지만 최동훈의 각색엔 그런 게 없다. 고니가 도박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부터 (원작과 달리) 외국으로 튀어 잘 살아가고 있는 에필로그까지, 마치 원작을 통째로 씹어먹어 잘 소화시킨 뒤 같은 재료로 형태도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요리를 내놓은 느낌? 캐릭터도 줄거리도 원작에 충실하다고 느껴지지만, 원작과 꼼꼼이 비교해보면 사실 많은 부분이 바뀌거나 새로 창조되어 최동훈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분명 살아있다. 더 놀라운 점은, 이것은 원작의 원래 재료와 기분좋은 하모니를 이룬다는 것. 원작에서의 도포 두른 고광렬과 영화에서의 양복쟁이 고광렬, 자기 과시욕이 보이는 평경장과 도인에 다다른 평경장은 완전히 다르면서도 같다. 원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힘으로 덮치는 고니, 다소 순박하지만 말주변은 딱히 좋아보이지 않는 고니와 영화에서 능글거리고 주먹과 작두질 이전에 적절한 템포와 박자의 ‘말발’을 자랑하는 고니 역시 완전히 다르면서도 같다. 정마담의 캐릭터와 평경장의 죽음이 완전히 새로 쓰여지면서, 영화는 원작보다 더한 긴장과 스릴을 덧입는다. 영화적 반전 장치로서 훌륭한 이 설정은 이 영화에서 자랑할 만한 ‘열차 대롱대롱, 돈 화라락’ 씬과 연결되면서 “인생무상”의 정조까지 획득한다. 그럼에도 서투른 스토리텔러들이 집어넣기 좋아하는 고루한 권선징악의 설교를 피해가며 해피엔딩으로 맺기까지. 아아아아 씨발 너무 좋다.

‘감독 최동훈’의 능력은 ‘각색 최동훈’의 능력을 한껏 돋보이게 해준다. 그는 훌륭한 각색자이자 감독이다. 연출의 전체적인 톤도 매우 안정되어 있으며 연기 연출 역시 뛰어나고,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영화적인 화면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솜씨가 아주 훌륭하다. (데뷔작으로서는 훌륭하긴 했지만) <범죄의 재구성> 때 뭔가 아슬아슬하게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몇 단계는 한번에 진화해버린 듯. (최동훈에겐 ‘서퍼모어 컴플렉스’란 말이 아예 해당사항 없음, 이다.) 아쉬운 게 있다면 예의 그 ‘교본’ 같은 구성, 그리고 영화 곳곳에 퍼져있던 에너지가 마침내 한곳으로 응집돼 강력하게 폭발하는 게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는 애초에 원작의 굵은 뼈대를 그대로 가져가기 위한 욕심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혜수가 총질씬에서 에너지가 좀 부족했으며, ‘열차 대롱대롱’씬에서 인생무상의 비애와 허무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기에는 조승우가 (그 나이 또래에선 매우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젊다는 느낌, 그리고 감독 역시, 그 정서를 보다 깊이있게 전달하기엔 아직은 젊구나, 하는 느낌. <타짜> 속편 얘기가 나오고 있는 모양인데, 한 15년 후쯤에 최동훈 감독이 다시, 속편을 찍었으면 한다. 아마도 그때엔, 최동훈 식의 탄탄한 스토리 구조가 조금은 느슨해진 대신 그 깊이가 확보될 거 같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