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작전권] 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을까.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야후>에서 블로거로 활동 중인 “가난뱅이” 님의 포스트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 영진공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 <한국전쟁>과 관련 정황에 대해서 정작 우리들은 제대로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판단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이 기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해당 내용과 관련하여 합당한 정정요구나 반론에 대해서는 적극 수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미국에 넘어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럴밖에. 역대 정권에서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였을 테니까. 그에 깊숙이 관여한 한 인사가 이후 군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이이고 보면 군 스스로도 이야기하기가 꺼려졌을 터이고. 그래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한국전쟁 도중 미국에 넘어가게 된 것은 알아도 그 과정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지금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유재흥은 원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물론 일본 육사출신이라는 자체로 문제삼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어차피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사라진 지도 수십 년이 지난 시점이고, 유재흥 자신도 일제에 의한 지배가 시작된지 10년도 더 지난 1920년대 태어났으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조국은 일본이었고, 출세를 하려 해도 일본에 충성해야 했을 터이니 거기에 대해서까지 무어라 하고 싶지는 않다. 일본 육사를 나왔어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김경천 장군 같은 이도 있고, 군인의 귀감이라 할 만한 이종찬 장군 같은 이들도 있었으니 출신 자체로 문제삼는 자체가 우습기도 하고.

문제는 해방이 되고 나서였다.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유재흥 역시 자신의 친일전력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친미와 반공을 부르짖으며 이승만 정부에 합류했는데, 그의 초기 공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제주에서의 4.3항쟁 진압이었다. 2345명의 유격대와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는데, 4.3 당시 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고, 결국 타의에 의해 빨치산에 합류했던 정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구나 알려진 민간인 사망자의 수조차 한참 축소된 것이고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는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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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 자료 사진

좋다. 그것까지야 군인으로서 정부를 부정하고 저항하는 행위에 대해 당연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고한 민간인이든 어쨌든 당시 이승만 정부에 있어 그들은 반란군이었고, 유재흥 역시 군인으로서 그것을 진압할 책임이 있었으니까. 실제 그렇게 명령을 받고 제주도에 파견되었었고. 그러나 제주도의 민간인에 대해 그토록 용맹하던 유재흥이 1950년 6.25 발발 초기 의정부에서 7사단 자체를 아예 해체시켜버리는 위업을 달성한 것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1950년 6월 25일 당시 준장으로 의정부 방면에서 7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유재흥은 경계임무에 소홀히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북한군에 대해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단 사흘만에 서울까지 뚫리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채병덕의 병신짓으로 인해 탄약이 부족하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경계를 소홀히 하고, 조직적인 방어계획 없이 주먹구구로 병력을 운용하다 아예 사단 하나를 해체해버린 과오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정부에서의 졸전에도 불구하고 관운은 있었는지 유재흥은 이후 2군단 군단장으로까지 진급한다. 그러면서 벌인 또 하나의 삽질이 덕천전투다. 1950년 11월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을 거듭하던 연합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자는 희망찬 전망 아래 크리스마스 공세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때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와 있던 중국군이 덕천 일대에서 8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한국군 2군단의 6, 7, 8사단을 포위공격하여 괴멸시킴으로써 연합군은 더 이상의 공세적 군사작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후퇴를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때도 물론 2군단장이던 유재흥은 중국군이 공세를 취하기 전까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거니와 포위를 당하고서도 제대를 유지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정적인 파국을 맞는 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참고로 2군단의 붕괴를 안 연합군 지휘부에 의해 터키군 여단이 동일 지역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중국군의 기습을 받았음에도 제대를 유지하여 후퇴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아무튼 덕천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연합군은 더 이상의 공세적인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긴 후퇴의 길에 들어섰으며, 청천강 방어선까지 무너지면서 저 유명한 흥남에서의 철수가 있었고, 마침내는 이듬해 1월 다시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6월 28일 처음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유재흥에 의해 이듬해 1월 4일 다시 서울이 함락당하는 역사에 보기 드문 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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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자료 사진

그러나 역시나 유재흥은 덕천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3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어 또 한 번의 – 대한민국 군대의 역사에 있어 가장 치명적일 삽질을 준비하게 된다. 저 이름도 유명한 현리전투다.

1951년 당시 연합군에 의한 재차 역습에 의해 다시금 전선이 고착되자 중국군은 서부와 중부전선에서의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하고자 21개 사단을 동원해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이 포진한 인제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다. 인제를 돌파하여 서부전선을 포위하겠다는 전략인데, 돌입한 중국군에 의해 미 10군단에 속해 있던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이 돌파당하면서 중국군 한 개 대대에 의해 3군단의 보급로이자 퇴로이던 오마치 고개를 점령당하게 된다. 바로 이때부터가 문제였다.

퇴로를 차단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포위된 상황은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3군단은 예하 3사단과 9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온존하고 있었고, 장차 미군으로부터 공군 및 포병의 지원을 받는다면 역습도 충분히 가능했었다. 보급물자도 적지 않아 최소한 버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고. 굳이 더 열악한 상황에서 완전히 포위되었던 영국 27여단의 가평전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결코 병력의 6할과 모든 물자와 장비를 잃어버리는 한국 전사상 최악이라는 치욕적인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9사단장이던 최석을 비롯한 상당후 고위장교들이 계급장을 떼고 먼저 도망치기 시작했고, 혼란을 수습하고 예하 사단들을 통솔해야 할 군단장 유재흥조차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정찰기를 타고 후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정작 싸우려 해도 지휘할 지휘관 없이 병사들과 하급 지휘관들만이 남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 무얼 어찌 해야 할까? 결국 국군 제 3군단 예하 병력들은 지휘관조차 없이, 체계적인 지휘조차 받지 못한 채, 지리멸렬 와해되어 사흘 동안 무려 70km를 퇴각해야 했고, 모든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병력이 나중에 확인 된 결과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의 빠른 대처로 인해 미 10군단 예하의 예비대와 국군 1군단 예하의 1사단이 대관령을 선점하여 방어함으로써 전선의 완전붕괴를 막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미 2사단이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는 등 1.4후퇴의 치욕을 다시 겪을 뻔했던 최악의 패배였다. 더구나 당시 노획된 물자며 장비며 병력이 다시 중국군과 북한군에 의해 연합군을 공격하는 데 쓰이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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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전투 자료 사진

결국 이 현리전투의 패배로 말미암아 이미 전 해 2군단이 와해된 데 이어 3군단까지 해체되어 3사단은 미 10군단 예하로, 9사단은 국군 1군단 예하로 편입됨으로써 한국군에는 1군단 하나만이 남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컸던 것이 한국군의 작전능력에 대해 미군 스스로가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은 그나마 한국군의 체면이나 입장을 고려해서 육군본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휘했는데, 그 때부터 3군단 해체와 유재흥의 보직해임도 그렇게 벤플리트의 직권에 의해 결정되었고, 심지어 한국군의 지휘를 미국 장성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미군 수뇌부에서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은 이후 한국군에 대한 모든 작전통제권을 미국이 가져가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아직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싸울 수 있는 힘이 충분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지휘관이 먼저 도망감으로써 부대 전체를 와해시켜버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배로 말미암아 한국군은 미군으로부터 모든 신뢰를 잃어버렸고, 장차 스스로 자국 군을 지휘할 권리마저도 빼앗기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유재흥의 공적이니, 두 차례 서울 함락과 2군단과 3군단의 해체, 그리고 작전통제권의 미국 이양등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에 유재흥의 역할이 더할 수 없이 컸다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렇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유재흥은 현리전투 이후로도 여전히 이승만 정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2군단을 와해시키고도 3군단장으로 임명되더니, 현리전투가 있고 나서도 참모차장을 거쳐 군사령관에 3대 합참의장에, 3공화국에서는 국방부 방관까지 역임했다. 적전도주죄가 군법상 즉결처분도 가능한 중죄였음에도 어떠한 책임도 처벌도 지거나 받지 않고 오히려 중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쳤던 것이다. 김홍일, 김석원, 이종찬 등의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이런 인간이 끝까지 살아남아 군부의 실세로 행세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1군단장은 시키지 않았으니 1군단까지 말아먹는 것은 막은 것을 잘 했다 해 주어야 할까?

더 재미있는 건 바로 저 유재흥 장군이 전직 국방부장관이라는 신분으로 전시작전권환수 반대 시위에 당당히 얼굴을 내비치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이룬 최대의 공적인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이양한 것을 다시 되돌려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일까? 나이도 적지 않을 텐데 다른 전직 군부의 고위인사들과 함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나라 망하는 일이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걸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이웃나라를 두고 판타지랜드라 하는데, 이 정도라면 거의 투명드래곤급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원균 정도라면 그래도 할 말은 있다. 임진년 일본군이 처음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도망치면서도 전선이며 물자며 노획당하지 않도록 모두 불태우는 정도는 했었다. 속으로야 어찌되었든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청한 이후로는 이순신의 지시를 따르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었고. 칠천량에서 가장 먼저 도망쳐 조선 수군 전체를 절딴 냈다는 점애서 닮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능한 탓이지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안 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원균이 무덤에서 버럭 할라!


가난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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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작전권] 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을까.”의 30개의 생각

  1. 투명드래곤급이라는 말에 피식~ 웃으면서도 허탈하기 그지 없네요.
    한사람의 과오가 얼마나 큰 결과를 낳았는지.. 좋은 지식을 얻었지만 왜이리 씁쓸한지..

    좋은 글 읽고 갑니다.

  2. 전시,평시 작전통제권 자체는 이미 1950년 7월달에 넘어갔습니다.

    현리 전투의 바보짓은 유엔군측이 국군의 사단이상의 지휘권도 박탈해야 하나를 고민하게 만든거죠

  3.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사람이 군에서 책임자라니요. 처벌을 일찍부터 받아 다른분께서 그 자리를 대신했다면, 한.국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무능보다 더 심한건 용기부족이라죠…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4. 원균을 보는 것도 아니고….. 다른 장성들도 제수없네요. 저 따위 쓰레기를 왜 끌어들었는지….. 통제사 이순신 존경한다는 소리 다시 하면 제가 아구창 날리고 싶네요. 틀린 소리가 아니었어. 이순신을 모독한 조선왕실과 당시 모든 대신들….. 아닌 분들도 다……. 그런데 막장 조선의 상황을 다시 연출하고 싶나봐요. 제기랄….

  5. 아…그런 일이 있었군요 대단한 사람이네요 전시작전권 반대시위에까지 등장하다니….

  6. 한국전사 고비고비에서 큰 일 하신 분이군요. 간첩은 아닌지… 원

  7. 핑백: hanix's me2DAY
    1. 반달곰님/ 이 포스트는 영진공 자체 컨텐츠가 아니라 외부의 저작물을 저자의 양해를 구해 게재한 것이므로 퍼가는 것은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영진공 자체 컨텐츠의 경우는 출처를 밝히시면 얼마든지 퍼가셔도 됩니다.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8. 흠.. 제가 볼 땐 그가 승승장구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즉 그는 미군의 프락치였다고 생각되네요.

  9. バンドーオプぶーラードが思い出されますね。いいポストでした。^^

  10. 핑백: asrai's me2DAY
  11. 그것도 미국의 전쟁계획 시나리오의 일부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미국이 일부러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겁니다.한국군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어요.다 시키는대로 하는 괴뢰 ,허수아비들이었으니까요…모두들 미쿡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 아닌가요?전 그렇게 알고 있어요.

  12. 저도 쎄미님처럼 앞 두단락 복사하고 나머진 링크 걸고 퍼갈께요^^;;
    혹시 안되시면 홈피 남겼으니 말씀해주세요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13. 군단장이였으면 한국전쟁 시에도 나이가 꽤 있을을 텐데 아직까지 살아서 전작권이양 반대시위에 나왔다구요? 참 오래도 사네요

  14. 구일본군출신 장교들 간 연줄로 살아남은 게 아니었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승만때도 그렇고 박정희도 그렇고.. 운빨 하나는 이완용급인 개새..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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