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해전? 한국이라서 꼬인 이순신 이야기

‘이순신 제독의 한산대첩’이 4대 해전에 들어가느냐? 라는 의문이 많나 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전 세계 해군사관학교에서 과연 저런 것을 배우는가?’하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곳이 한국이라는 곳이라서, 한국의 전신인 ‘조선’의 장수에 대한 승전이야기라서, 부풀려지고 곡해된 것은 아니냐? 라는 의문인 것이죠.

더군다나 ‘도고 제독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그저 ‘일본’에게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유언비어’가 아닌가? 에 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때, 경무대에서 벌인 ‘가라테’시연이 무식한 관리의 어이없는 발언. 즉, 미국관리에게 ‘저것이 우리 고유의 무술인 태권도입니다’라고 소개해버리는 바람에, 가라테의 변용에 발기술 몇개 추가해 만들어진 지금의 태권도를, ‘쪽팔리니까’ 애써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고유의 무술 태권도’라고 퍼뜨렸던 전례도 있기에 더욱더 의심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총독부 경시청 소속으로 유도와 가라테만 배우던, 순사짓 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경찰이 되었고, ‘택견’을 구사할 줄 알던 사람들은 독립운동 하거나 저자거리 사람들이었기에(김구 선생도 택견의 기술로 일본 순사들을 질러차대셨죠) 이런 어처구니 없는 ‘태권도의 뿌리’가 생겨났지만 뭐 어쩔 수 있습니까?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키 위해서는 ‘사관학교’의 교육시스템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겠죠.

참고로 우리나라의 사관학교는 ‘교육’에 관해서는 ‘대학’과 같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46점의 ‘학점’을 이수해야 학사학위를 받는 것이죠. 그리고 ‘전공’도 세분화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저는 ‘군사전략학과’였습지요. 찾아보니 전기, 정보통신공학, 기계조선, 경영과학, 해양학, 전산과학, 국제관계학, 군사전략학, 외국어학이 전공으로 존재합니다.

허나 전공이 다르더라도 ‘해전사’는 공통필수 과목입니다.

‘해전사’에서 흔히들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이 바로 살라미스, 칼레,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네, 이는 ‘서양사’의 시각에서만 다루어지는 3대 해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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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해전 설명도

여기서 3대라 함을 3가지 큰 해전이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수많은 해전이 있었으나, 해전의 ‘역사적’흐름, 즉 ‘변환점’에 속하는 해전의 ‘축’을 의미합니다.

살라미스 해전은 함선끼리 가까이 다가가 선원들의 육박전을 이끌어내던 기존 해전에서 함선의 앞 부분을 강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상대의 함선에 충격을 가하여 전복시키거나 선원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술을 펼쳤고, 칼레 해전은 함포를 사용하여 ‘집중포화’를 쓰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해전사의 또 다른 변혁점을 보여주었고, 트라팔가 해전은 넬슨 제독의 함대 운용술의 극치를 보여준 해전이었습니다.

커다란 해전이 아닌, ‘역사적 해전 패러다임 변환 사건’들을 뽑아낸 것이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입니다.

그런데 여기 슬그머니 ‘한산대첩’이 4대 해전으로 들어간 이유는 뭘까요?

학익진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상대의 ‘사령선(명령을 내리는 선박)’에게 선공일점사를 하며 상대의 예봉을 꺾고, 무척이나 변화 무쌍한 함대 운용을 벌이며 ‘집중포화’를 사용한 화려한 전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최무선 함대가 1300년대 이미 우리의 선박에 자신이 개발한 함포를 설치했고, 그리하여 우리 수군은 서양보다 200년 앞선 선박함포운용기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칼레 해전 보다 200년이나 이전에 말입니다.

칼레 해전이 적과의 조우 이후, 무차별적 개별함선 포격전이었다면 한산대첩은 완벽하게 조직되고 통솔이 기가막힌 최고의 해전이라는 것이죠.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학에서나 내려온 3대 해전에 우리 한산대첩이 뒤늦게 4대 해전으로 들어서게 된 이유는 순전히 일본덕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벌인 ‘난’이라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고, 당시 일본은 ‘국가’도 이루지 못한 섬이라고 능멸하는 역사관이었지만 이건 그저 우리의 민족적인 ‘쪽팔림’을 가리기 위한 변명일 뿐입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왕이 오랑캐 때문에 국경까지 피난을 갑니까? 중국처럼 오랑캐가 점령한 왕조가 있으면 중국의 변방민족으로 다 한틀의 역사로 집어넣는 방법을 취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일본이 우리의 변방민족입니까? 우리도 일본역사를 우리 역사로 편입시킬까요? 그건 아니거든요.

조일전쟁이라 명확히 선을 긋는 것은 전 세계 사관(史觀)에 순응하는 명칭이라 보는 것이 옳거든요.

중국이 우리를 속국이라 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매우 잘못된 일이듯, 우리가 일본이 국가가 아니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각설하고,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해군력은 막강했고(항공모함이 꽤나 있었지요 –;),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을 개량한 T형 진으로 러시아 함대를 박살내 버렸습니다.

물론 그 후에 미국에게 깨지고, 결국 미 군정에 놓여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만.

일본이 미국의 통치하에 놓이면서 미국은 늘 하듯 일본을 통해 일본과 주변국의 정보(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습득합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미국의 해군을 괴롭혔던 일본의 해군사에 대한 연구중에 ‘이순신’이 발견 된것이죠. 그리고 그의 전쟁성과가 ‘불패신화’라는 어처구니 없는(에스파냐 무적함대도 결국은 박살났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이유는 그의 함대는 무너진 적이 없다는 얘기지요) 기록에 놀라고, 그의 전술과 16세기에 그런 ‘함포술’과 함대운용술을 갖춘 해군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치를 떱니다.

우리는 역사시간에 ‘세계 4대 문명’이라 배워왔습니다. 이 사관이 요즘은 세계엔 스무개가 넘는 문명이 존재했었다라고 바뀌어 가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세계 4대 해전’이라는 것은 ‘해전사’를 연구하는 교수들의 주장 중에 하나입니다.

아직도 ‘세계 3대 해전’을 배우는 국가도 있고, 영국과 독일, 미국,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세계 4대 해전’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엔 제가 알기론 가르치는 교수마다 ‘다르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우 저렇게 ‘3대’니, ‘4대’니 그런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터닝포인트’를 짚을 때, 3군데를 짚는가 4군데를 짚는가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심지어 위에서 밝힌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쓰러뜨린 ‘쓰시마 해전’, 혹은 ‘일본해 해전'(아쉽게도 아직도 전 세계 전쟁관련 학술서적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문물을 더 빨리 받아들였기에 ‘Sea of Japan’이 많습니다)이라 불리는 해전을 넣어 ‘세계 5대 해전’이라 짚는 교수도 있습니다.

네, 3대고, 4대고, 5대고 중요한게 아닙니다.

말그대로 세계 ‘해전사’에 ‘한산대첩’은 그야말로 ‘백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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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라고, 한국인 교수라고, 저 ‘한산대첩’을 목숨걸고 홍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의 ‘전사(戰史)’를 모두 꿰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교해 볼때, ‘한산대첩’의 가치가 훨씬 드높기에, 잘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에게 알리려 하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인거, 동해가 우리 바다라는 거, 우리만 알고 있으면 안되듯이, 국제 사회에 인정 받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도고 제독의 발언은 ‘기자’들 사이에서 확인할 길이 없기에, 우리나라에서만 도는 낭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허나 분명 존재하는 일제강점기의 기록들은 일본 해군들이 ‘이순신 제독’을 천황 다음으로 숭배하고, ‘軍神’의 예를 갖추며 기렸던 영웅입니다.

그러했기에 일본 군관학교를 나온 우리의 마사오 끈(다카기 끈인가? 박정희)도 100원짜리 동전에 우리 순신이 업빠를 넣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이순신’ 해대면서 교과서엔 별 쓸데없는 말타다가 떨어진 ‘쪽팔린’이야기만 집어넣는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한국’이라는, 60만 대군중 40만이 넘는 ‘육군’을 가진 나라에서 사는 비운이기도 합니다. 물론 북한 때문이지요.

박정희가 아무리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병참운용을 좋아했더라 할지라도 육군 별 개수랑, 해공군 별 개수랑 합쳐보면 게임도 안되는 군의 권력구도에서, 해군의 최고 장수가 해군력을 화려하게 다룬 것 보단 ‘군인의 의지’라는 이미지로 부각되는 것이 ‘군대의 윗분’들에게 기분이 거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바뀌었지요, 해상왕 장보고가 TV드라마로 제작되고,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대작으로 방영됩니다.

심지어 기존에 잘 보여주지 못했던, ‘이순신의 함대 운영’이 아주 세밀히 묘사되는 ‘지루한’장면들이 나옵니다.

육군군부독재에 휘둘린 ‘이순신’의 모습이 이제야 제대로 구현됩니다.

병약했던 이순신, 군대의 4대 주요요소인 인정작군(인사, 정보, 작전, 군수)를 모조리 커버해내던 그 뛰어난 지략이 지금까지 가려져 왔던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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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KBS의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고증은 주로 해군사관학교에서 해주었습니다. 임원빈 중령(지금은 대령 진급하셨을라나?, 전 이 분에게 철학의 이해 들었는데 무척이나 졸려 죽을 뻔했죠 –;)님을 중심으로 교수진들이 지금까지 연구해온 것들을 제작진이 원하는 정보마다 세밀히 가르쳐주는 모양입니다.

물론 중간 중간 있었던, 이순신이 선조를 알현한다던가, 거북선이 침몰 된다던가 하는 것은 ‘고증’이 된것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순신의 이미지가 ‘육군에 의해 왜곡된’것이었음을 부숴주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이순신의 해전들이 전 세계 그 어떤 해전 보다도 뛰어난 해전이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사료’가 말해줍니다.

반만년 역사위에 제대로 ‘사료’가 없어서 떳떳하게, 중국과 신경전 할 필요없이 세계에 내세울 민족의 영웅이 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세운 전공들의 ‘사료’가 무척이나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말하는 배후의 ‘논리적 추론 가능한 사건들’은 우리가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웅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도고 제독의 비교평가 따위도, 혹여나 의심갖는 ‘민족주의로 인한 선입견’도 필요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한 것은 ‘유연한 포술’이었습니다. ‘대포’의 운용이 기가막혔던 것이지요.

허나 그 나폴레옹 보다 200년전에.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서, 함대의 포술을 자유자재로 구사케 하고, 7년 조일전쟁 기간동안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역사적 진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해전사’에 대한 자부심은 충분합니다.

‘도고’의 이야기가 유언비어든 아니든.

우리의 이순신은 그런 유언비어론 자체가 필요없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제독’입니다.


영진공 함장

[전시 작전권] 왜 미국으로 넘어가게 되었을까.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야후>에서 블로거로 활동 중인 “가난뱅이” 님의 포스트를, 저자의 허락을 받아 영진공에 게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 <한국전쟁>과 관련 정황에 대해서 정작 우리들은 제대로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판단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이 기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해당 내용과 관련하여 합당한 정정요구나 반론에 대해서는 적극 수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미국에 넘어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럴밖에. 역대 정권에서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치부였을 테니까. 그에 깊숙이 관여한 한 인사가 이후 군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이이고 보면 군 스스로도 이야기하기가 꺼려졌을 터이고. 그래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한국전쟁 도중 미국에 넘어가게 된 것은 알아도 그 과정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지금 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유재흥은 원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다. 물론 일본 육사출신이라는 자체로 문제삼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어차피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사라진 지도 수십 년이 지난 시점이고, 유재흥 자신도 일제에 의한 지배가 시작된지 10년도 더 지난 1920년대 태어났으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조국은 일본이었고, 출세를 하려 해도 일본에 충성해야 했을 터이니 거기에 대해서까지 무어라 하고 싶지는 않다. 일본 육사를 나왔어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김경천 장군 같은 이도 있고, 군인의 귀감이라 할 만한 이종찬 장군 같은 이들도 있었으니 출신 자체로 문제삼는 자체가 우습기도 하고.

문제는 해방이 되고 나서였다.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유재흥 역시 자신의 친일전력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친미와 반공을 부르짖으며 이승만 정부에 합류했는데, 그의 초기 공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제주에서의 4.3항쟁 진압이었다. 2345명의 유격대와 1608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는데, 4.3 당시 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고, 결국 타의에 의해 빨치산에 합류했던 정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구나 알려진 민간인 사망자의 수조차 한참 축소된 것이고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는지 감히 추측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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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 자료 사진

좋다. 그것까지야 군인으로서 정부를 부정하고 저항하는 행위에 대해 당연한 임무를 수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고한 민간인이든 어쨌든 당시 이승만 정부에 있어 그들은 반란군이었고, 유재흥 역시 군인으로서 그것을 진압할 책임이 있었으니까. 실제 그렇게 명령을 받고 제주도에 파견되었었고. 그러나 제주도의 민간인에 대해 그토록 용맹하던 유재흥이 1950년 6.25 발발 초기 의정부에서 7사단 자체를 아예 해체시켜버리는 위업을 달성한 것은 무어라 설명해야 할까?

1950년 6월 25일 당시 준장으로 의정부 방면에서 7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유재흥은 경계임무에 소홀히 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북한군에 대해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단 사흘만에 서울까지 뚫리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채병덕의 병신짓으로 인해 탄약이 부족하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경계를 소홀히 하고, 조직적인 방어계획 없이 주먹구구로 병력을 운용하다 아예 사단 하나를 해체해버린 과오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정부에서의 졸전에도 불구하고 관운은 있었는지 유재흥은 이후 2군단 군단장으로까지 진급한다. 그러면서 벌인 또 하나의 삽질이 덕천전투다. 1950년 11월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북진을 거듭하던 연합군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자는 희망찬 전망 아래 크리스마스 공세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때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와 있던 중국군이 덕천 일대에서 8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한국군 2군단의 6, 7, 8사단을 포위공격하여 괴멸시킴으로써 연합군은 더 이상의 공세적 군사작전을 유지하지 못하고 후퇴를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때도 물론 2군단장이던 유재흥은 중국군이 공세를 취하기 전까지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거니와 포위를 당하고서도 제대를 유지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정적인 파국을 맞는 데 크게 일조하게 된다. 참고로 2군단의 붕괴를 안 연합군 지휘부에 의해 터키군 여단이 동일 지역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들은 중국군의 기습을 받았음에도 제대를 유지하여 후퇴하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아무튼 덕천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승승장구하던 연합군은 더 이상의 공세적인 군사작전을 포기하고 긴 후퇴의 길에 들어섰으며, 청천강 방어선까지 무너지면서 저 유명한 흥남에서의 철수가 있었고, 마침내는 이듬해 1월 다시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6월 28일 처음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유재흥에 의해 이듬해 1월 4일 다시 서울이 함락당하는 역사에 보기 드문 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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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철수 자료 사진

그러나 역시나 유재흥은 덕천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3군단의 군단장으로 임명되어 또 한 번의 – 대한민국 군대의 역사에 있어 가장 치명적일 삽질을 준비하게 된다. 저 이름도 유명한 현리전투다.

1951년 당시 연합군에 의한 재차 역습에 의해 다시금 전선이 고착되자 중국군은 서부와 중부전선에서의 지지부진한 전황을 타개하고자 21개 사단을 동원해 미 10군단과 한국군 3군단이 포진한 인제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다. 인제를 돌파하여 서부전선을 포위하겠다는 전략인데, 돌입한 중국군에 의해 미 10군단에 속해 있던 한국군 5사단과 7사단이 돌파당하면서 중국군 한 개 대대에 의해 3군단의 보급로이자 퇴로이던 오마치 고개를 점령당하게 된다. 바로 이때부터가 문제였다.

퇴로를 차단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포위된 상황은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3군단은 예하 3사단과 9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온존하고 있었고, 장차 미군으로부터 공군 및 포병의 지원을 받는다면 역습도 충분히 가능했었다. 보급물자도 적지 않아 최소한 버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고. 굳이 더 열악한 상황에서 완전히 포위되었던 영국 27여단의 가평전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럴 의지만 있었다면 결코 병력의 6할과 모든 물자와 장비를 잃어버리는 한국 전사상 최악이라는 치욕적인 패배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9사단장이던 최석을 비롯한 상당후 고위장교들이 계급장을 떼고 먼저 도망치기 시작했고, 혼란을 수습하고 예하 사단들을 통솔해야 할 군단장 유재흥조차 작전회의에 참석한다는 명분으로 정찰기를 타고 후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정작 싸우려 해도 지휘할 지휘관 없이 병사들과 하급 지휘관들만이 남은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 무얼 어찌 해야 할까? 결국 국군 제 3군단 예하 병력들은 지휘관조차 없이, 체계적인 지휘조차 받지 못한 채, 지리멸렬 와해되어 사흘 동안 무려 70km를 퇴각해야 했고, 모든 장비를 버리고 몸만 빠져나온 병력이 나중에 확인 된 결과 3사단 34%, 9사단 40%에 불과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의 빠른 대처로 인해 미 10군단 예하의 예비대와 국군 1군단 예하의 1사단이 대관령을 선점하여 방어함으로써 전선의 완전붕괴를 막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미 2사단이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퇴각하는 등 1.4후퇴의 치욕을 다시 겪을 뻔했던 최악의 패배였다. 더구나 당시 노획된 물자며 장비며 병력이 다시 중국군과 북한군에 의해 연합군을 공격하는 데 쓰이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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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 전투 자료 사진

결국 이 현리전투의 패배로 말미암아 이미 전 해 2군단이 와해된 데 이어 3군단까지 해체되어 3사단은 미 10군단 예하로, 9사단은 국군 1군단 예하로 편입됨으로써 한국군에는 1군단 하나만이 남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컸던 것이 한국군의 작전능력에 대해 미군 스스로가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은 그나마 한국군의 체면이나 입장을 고려해서 육군본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휘했는데, 그 때부터 3군단 해체와 유재흥의 보직해임도 그렇게 벤플리트의 직권에 의해 결정되었고, 심지어 한국군의 지휘를 미국 장성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미군 수뇌부에서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들은 이후 한국군에 대한 모든 작전통제권을 미국이 가져가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아직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싸울 수 있는 힘이 충분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지휘관이 먼저 도망감으로써 부대 전체를 와해시켜버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패배로 말미암아 한국군은 미군으로부터 모든 신뢰를 잃어버렸고, 장차 스스로 자국 군을 지휘할 권리마저도 빼앗기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유재흥의 공적이니, 두 차례 서울 함락과 2군단과 3군단의 해체, 그리고 작전통제권의 미국 이양등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에 유재흥의 역할이 더할 수 없이 컸다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렇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유재흥은 현리전투 이후로도 여전히 이승만 정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2군단을 와해시키고도 3군단장으로 임명되더니, 현리전투가 있고 나서도 참모차장을 거쳐 군사령관에 3대 합참의장에, 3공화국에서는 국방부 방관까지 역임했다. 적전도주죄가 군법상 즉결처분도 가능한 중죄였음에도 어떠한 책임도 처벌도 지거나 받지 않고 오히려 중용되어 요직을 두루 거쳤던 것이다. 김홍일, 김석원, 이종찬 등의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이런 인간이 끝까지 살아남아 군부의 실세로 행세하고 있었으니… 그나마 1군단장은 시키지 않았으니 1군단까지 말아먹는 것은 막은 것을 잘 했다 해 주어야 할까?

더 재미있는 건 바로 저 유재흥 장군이 전직 국방부장관이라는 신분으로 전시작전권환수 반대 시위에 당당히 얼굴을 내비치더라는 것이다. 자신이 이룬 최대의 공적인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이양한 것을 다시 되돌려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일까? 나이도 적지 않을 텐데 다른 전직 군부의 고위인사들과 함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나라 망하는 일이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걸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이웃나라를 두고 판타지랜드라 하는데, 이 정도라면 거의 투명드래곤급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원균 정도라면 그래도 할 말은 있다. 임진년 일본군이 처음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도망치면서도 전선이며 물자며 노획당하지 않도록 모두 불태우는 정도는 했었다. 속으로야 어찌되었든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청한 이후로는 이순신의 지시를 따르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었고. 칠천량에서 가장 먼저 도망쳐 조선 수군 전체를 절딴 냈다는 점애서 닮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능한 탓이지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안 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원균이 무덤에서 버럭 할라!


가난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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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갱스터>, 갱스터 영화의 선 굵은 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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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갱스터>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활동한 뉴욕 할렘의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영화는 프랭크 루카스(덴젤 워싱턴)의 성공과 몰락을 그리는 전형적인 범죄물과 그를 체포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공직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던 마약 커넥션까지 소탕해낸 청렴한 형사 리치 로버츠(러셀 크로우)의 수사물을 병렬하며 진행됩니다. 프랭크 루카스의 이야기가 <스카페이스>(1983)를 연상시키는 갱스터 영화의 전형성을 보여준다면 리치 로버츠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비타협적이었던 나머지 파트너와 가족을 모두 잃어버리면서도 그런 강직함을 기반으로 ‘역사적인 전기’를 일궈내는 영웅담에 가깝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 스티브 자일리언의 각본은 원안에서 비중이 적었었다고 알려진 리치 로버츠의 역할을 키우는 동시에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프랭크 루카스의 일대기와 병렬 배치시키는 방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갱스터 장르의 전형성을 답습하지도 않고 기존 걸작들의 꽁무니를 뒤쫓아가는 듯한 모습도 모두 피해나가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일 수 밖에 없는 두 인물이 어떤 점에서 교집합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마침내 만나게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두 인물의 이야기와 함께 제시되는 또 하나의 줄거리는 다름아닌 베트남전입니다. 태국과 베트남 밀림의 헤로인 생산지로부터의 직거래와 미군 수송기를 이용한 물류 라인의 확보, 순도 100%의 마약을 기존 제품 보다 싼 가격에 시장에 내놓으면서 성공을 일군 프랭크 루카스의 사업 방식 자체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가능했었던 만큼 미국의 패전과 철수는 곧 프랭크 루카스의 몰락을 예고합니다. 이를 위해 영화는 TV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베트남전 관련 뉴스를 지속적으로 삽입합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폭력성을 재확인시키기도 하지만 미국이 해외에서 벌이는 크고 작은 전쟁들과 첩보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갱스터 영화로서 미국 사회의 내면적 초상화를 그려내는 데에 성공했던 작품들은 많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미국의 전쟁 경력까지 건드려주는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이제 종전 단계로 치닫고 있는 이라크 전쟁에 관한 비판적 시각으로서도 충분히 유효성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갱스터 영화는 처음이지만 리들리 스콧이 전쟁 영화를 자주 만들어왔고 현재의 미국에 대해 완곡하게나마 자기 목소리를 담아왔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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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갱스터>가 굉장히 잘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남는데요, 그것은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가 마침내 피의자와 기소인의 신분으로 대면했을 때 나온 리치 로버츠의 대사 때문입니다. “당신과 같이 성공한 흑인은 곧 진보를 의미한다. 진보(Progress)는 기득권층의 해체를 의미하지. 당신이 법정에 서게 됨으로써 모든 것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거야.” 이 대사는 막대한 뇌물로 리치 로버츠를 회유하려던 프랭크 루카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번에는 오히려 리치 로버츠가 프랭크 루카스를 회유해 마약 커넥션에 연루된 경찰 조직을 소탕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에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의 양대 ‘똘끼’가 의기투합, 당시 미국 공직사회에 만연해있던 부패를 소탕하고 관객들에게는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진보는 기득권층의 해체를 의미한다”는 대사가 주는 울림1)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아메리칸 갱스터>는 그 자체로도 이미 훌륭한 작품이지만 프랭크 루카스의 등장으로 기존의 기득권층이 붕괴하고 반발하는 모습 만큼은 다소 피상적으로 다뤄진 것이 아니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프랭크 루카스는 자기 생존과 부귀영화를 위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폭력배이기도 하지만 선배 세대와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성공을 일궈낸 인물로 묘사됩니다. 15년간 모셨던 보스는 생산자 직거래를 앞세우고 가게 주인은 커녕 종업원 얼굴도 보일락말락 하는 대형 할인점의 득세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프랭크 루카스는 그와 같은 새로운 사업 방식을 마약 시장에 도입했습니다. 기존의 유통 방식을 깨고 거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기존의 마약 커넥션에 연루된 자들은 몰락하거나 일자리를 잃을 수 밖에 없었죠. <아메리칸 갱스터>는 프랭크 루카스과 그 일당의 폭력적인 측면 보다 개혁적인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는 쪽에 비중을 두는 데다가 영화의 절반은 리치 로버츠의 이야기에 할애하느라 “진보와 개혁이 기존 질서를 허물고 기득권층과 갈등하는 양상”를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데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분은 <아메리칸 갱스터>의 흠결이라기 보다는 이후에 만들어질 또 다른 갱스터 영화들에게 남겨주는 숙제와 같은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마에스트로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리들리 스콧의 연출이나 감독 보다는 각본에 출중한 재능을 보이는 스티븐 자일리언의 시나리오, 덴젤 워싱턴2)과 러셀 크로우를 비롯한 배우들의 흠잡을 데 없는 캐릭터 연기, 그리고 촬영과 배경 음악의 사용 등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아메리칸 갱스터>는 다사다난했던 2007년의 마지막 개봉영화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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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여 정부가 갱스터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집권을 하자마자 탄핵을 당하고 결국 이번 대선을 통해 빽도를 하게된 우리나라의 동시대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점이란 생각에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저는 심장이 벌렁벌렁했더랬습니다. 스쳐지나가는 묘사나 대사로만 끝내지 말고 그런 갈등 상황을 좀 더 부각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프랭크 루카스와 리치 로버츠 모두 기존 질서를 거부함으로써 성공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마침내 두 인물이 의기투합하여 일견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해냈다는 내러티브의 구성에는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2) 9.11 테러 직후 사회 불안을 해소하는데 일조하고자 했던 헐리웃에 의해 <트레이닝 데이>(2001) 같은 작품으로 얼떨결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덴젤 워싱턴입니다. 그가 아카데미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충분한 배우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입증이 되었음에도 그와 같은 정치적 맥락 때문에 신통찮은 영화로 상을 받는 모습이 좀 껄끄러워 보였는데요 이번 <아메리칸 갱스터>는 흑인 배우로서 처음 2회 수상의 영광에 도전하기에 충분한 작품이고 또 그런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됩니다. 남북 전쟁 당시의 흑인 부대의 이야기를 다룬 <영광의 깃발>(Glory, 1989)에서 처음 본 이후로 계속 좋아해왔던 배우였지만 최근엔 다소 매너리즘에 빠졌는가 싶었는데 이번 영화는 덴젤 워싱턴의 복귀라고 해도 충분한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안경>, 사색의 해변으로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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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생 일본의 여성 감독 오기가미 나오코의 세번째 장편 <안경>이 개봉했다. 포스터가 또 희한하다. 안경 쓴 다섯 명이 해변가에서 이상한 동작의 체조를 하고 있다. 같은 감독의 전작 <카모메 식당>(2006)을 본 게 지난 10월 초. 여름의 일본인디필름페스티벌을 거쳐 8월 2일에 정식 개봉했으니 두 달이나 늦게 본 셈이다. <카모메 식당>의 포스터는 정말 가관이었다. 오토포커스 카메라로 찍은 듯한 사진 속 호숫가에 아줌마 셋이 멀뚱하게 서 있다. 영화가 엄청 좋더라는 얘기는 진작에 들었지만 그래도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예매를 하고 보러 가기로 한 날도 정말 힘들었다. 버스 안에서 잠깐 조는 바람에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쳐 한강을 건너버렸다. 이제 다시 돌아갔다가는 저녁도 못먹고 자칫 상영 시간마저 놓칠 수가 있으니 깨끗이 포기하고 가까운 곳에서 다른 영화나 한 편 볼까 망설였다. 우물쭈물 하다가 결국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긴 했다. 이럴 때마다 “내가 영화(映畵) 한 편에 무슨 영화(榮華)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 건가” 생각한다. <슈퍼스타 감사용>(2004)에서 입단 테스트 한번 받아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뛰던 양복 차림의 주인공 모습도 떠오른다. 다행히 상영 시간에 맞춰 <카모메 식당>을 보았다. 그리고 세상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은 행복한 경험을 했다. 송이 버섯을 손에 쥔 김혜자 씨의 그윽한 표정을 지으며 되뇌었다. 그래, 이 맛이야. 이런 영화를 만났을 때의 충만한 기쁨 때문에 나는 좋은 영화를 고르고 또 보러 다니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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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과 <안경>은 모두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주요 출연진도 비슷하다. 그러나 헬싱키의 가정식 식당을 핸드폰도 터지지 않은 일본의 오지로 단순히 옮겨놓기만 한 영화가 <안경>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해다. <카메모 식당>이 “그저 하고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뿐”이라며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쪽이었다면 <안경>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터전을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가꿔나갈 수 있는 비법에 대해 귀뜸한다.

<안경>에는 전작에 없었던 내러티브 상의 대립항이 존재한다. 잠시 조용하게 지낼 곳을 찾아온 타에코(코바야시 사토미)는 낯선 환경과 생활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한다. 갈등 끝에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지만 결국 고생만 실컷 하고 사쿠라(모타이 마사코)의 도움을 받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다. 집에서부터 가져온 무거운 여행 가방을 버린 그 순간부터 타에코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받아들이게 된다. 낯익은 내러티브 구조를 선택한 것은 관객들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서려는 감독의 의도다. <안경>은 또한 이상적인 멘토와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말로 설명하기 보다 스스로 맛을 보고 경험하도록 기다려준다. “비법은 서두르지 않는 데에 있어요.” 빙수에 쓸 팥을 삶을 때 오랫동안 지켜보며 기다리는 사쿠라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미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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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르지 않는 삶의 비법을 따라 <안경>의 카메라도 엄청나게 느리다. 보통 영화에서라면 진작에 휙휙 건너뛰었을 장면들을 인내심 있게 관찰한다. 해변가에 모인 사람들의 일상적인 움직임에서 그리고 그들 앞에 놓인 푸른 수평선 너머에서 사색의 기회를 발견해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는 말로만 떠들지 않는다. 영화에 담을 메시지를 그 자신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 속에 동화되어 그 비법의 결과물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핀란드로 이민을 가서 직접 식당을 차리거나 박민규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2003)의 주인공들처럼 삼천포로 아예 이사갈 필요는 없다. <안경>을 “단번에 찾아올 수 있을 만큼 소질이 있는” 관객이라면 자기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사색의 습관을 가꿀 수 있는 해변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영화관도 사색을 위한 훌륭한 해변가다. 숨가쁘고 골치 아프고 마음 상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꿈의 커뮤니티에 참가하는 일이다. 이 글을 읽고 <안경>을 보기로 했다면 당신도 충분히 “소질이 있는” 사람이다. 평소 차림 그대로, 핸드폰 통화를 할 수 없는 극장이라는 외딴 해변가에 가서 사색의 시간을 체험하고 서두르지 않는 삶의 비법을 배워오기 바란다. 당장 내년 여름휴가에 핸드폰도 인터넷도 안되는 실제 사색의 공간으로 찾아가 보는 일은 옵션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