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2″는 2008년판 영웅본색이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물량공세 액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볼까 말까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양조위가 멋있게 나온다는 말에 봤고, 그건 맞는 말이었다. 영화를 보고 여기저기 리뷰를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리뷰가 별로 없다. 아마 상영시간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고 나와서, 그닥 할말은 없는 영화라 그런가보다. 적벽대전은 새로울 것도 없는, 너무나 멋질 것도 없는, 그러나 꽤 재미있는 오락영화다. 내가 본 바로는 그렇다.

1. 양조위가 조조였다면 어땠을까.

흠냐. 이건 뭐. 양조위 좋아하는 나를 위한 서비스 영화였다. 본래 적벽대전의 주역이 주유였던가? 삼국지야 고등학교1학년때 딱 한번 읽고 본 일 없으니 패스. 처음부터 끝까지 나머지는 다 쪼다고, 주유만 멋지다. 캐릭터만 멋지랴 중간에 팬서비스도 마구 날려주신다. 흰옷을 입고 보여주는 멋진 검무. 짤막하고 나이든 남자가 저토록 멋질 수 있다는 데에 감탄과 감탄을. 허나, 양조위는 나쁜놈일때 빛나는 법. 솔직히 양조위가 저렇게 100% 고순도의 멋지기만 한 남자로 나오는 건 매력이 좀 부족하다. 양조위는 퇴폐 + 탐욕 + 허무 + 고독의 4종 세트가 합쳐졌을 때 진정 빛난다.(그렇다 나 남자취향 변태다.)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양조위가 조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장풍의의 조조도 멋졌지만, 아마 양조위가 조조였다면 점점 전투에서 져 갈 때 탐욕의 끝을 경험하면서도 본인의 몰락을 관조하는 듯한 거부할 수 없는 시크(?)한 매력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2. 적벽대전, 2008년판 영웅본색.

오우삼 영화라고 고정관념을 갖고 보아서인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계속해서 영웅본색이 보였다. 영웅본색이 남자들의 로망을 집약해 보여주는 남자들의 순정만화라고 볼 때 적벽대전도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1:200의 싸움. 영웅본색에서는 주윤발 한명이 저렇게 해대고, 적벽대전은 다수대 소수라는 점에서 아마도 약분하면 1:200정도 나올 것이다.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이기는 로망이 있는지. 그리고 비둘기는 여전히 날려대더라. 영웅본색과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하지만 비둘기가 이렇게 중심소품(?)으로 나오는 영화는 쉽게 볼 수 없다. 오우삼 비둘기 페티쉬인가? 그리고 임신한 아내에 대한 로망도 있나보더라. 소교가 임신했다는데 영웅본색2의 공중전화씬(장국영이 죽어가면서 임신한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그리고 강호에서의 의리와 고독에 대한 로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3. 하지만 재미있는 전투씬

떼로 나와서 화살 대빨 쏘아대고, 배 띄우고, 터뜨리는 영화 중에 제일 재미있는 전투신이었다.(물론 이번에도 예외없이 살짝 졸긴 했지만) 일단 원작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그쪽에서 차용해온 재미도 무시못할 것이다. 병법, 진법, 화약, 건축 등에 대한 중국인의 오리지날리티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졌고, 또 그걸 잘 보여주기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0”, “영웅” 등에서 보아온 불량이 아깝고 갑빠가 아까운 전투씬은 아니었다.

이게 끝이다. 오락영화가 오락만 하면 되었지 뭘 바라겠나.

영진공 라이

동사서독, 醉生夢死




“안녕하세요?
오늘은 좀 늦으셨네요.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메뉴는
당신의 기억을 깨끗이 비워드리는
醉生夢死입니다.

이별의 아픈 기억으로 당신이 지금까지
드셨던 천일취(天日醉)보다야 훨씬 고급술입니다.
단 너무 많이 마셔버리면
앞으로 영원히 사랑을 잊어 버리실지도 모릅니다.”



무협로맨스를 지향하는 영화 동사서독은 앙리의 와호장룡보다 훨씬 난해하게 사랑에 대해 그린
영화라고 봅니다. 몇 년전 미국에서 와호장룡이 대 히트를 칠 때 앙리의 이 작품이 결국 왕가위
에게 큰 빛을 지고 있지 않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중경삼림을 더 좋아하지만 사실 동사서독이 중경삼림보다 못한, 와호장룡보다
조금 못한 이유는 딱 한가지인 듯 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본적이 없으니까요.

영화를 보다 보면 시대의 상황이나 극장 주들의 상영시간 단축 요청 등 제작사의 흥행의 이유로
이유 없이 잘려나가 반 쪽짜리 영화로 밖에 볼 수 없는 영화들이 생깁니다. 그 중 대표적인 편집
잘못으로 관객들에게 어필이 안되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데 이러한 예의 영화들을 찾아보면
4시간의 원작을 자랑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2시간 이상 잘려 개봉되어 줄거리의 혼돈을
가져 왔던 Once upon a time in America나 제작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스러운 해피엔딩으로
되어버렸던 블래이드 러너 그리고 상영시간의 문제로 30분 이상 잘렸던 오우삼 최고의 명작
첩혈쌍웅, 시네마천국 등등이 아쉬움을 가져 왔던 영화라 할 수 있겠지요

오늘 다시 꺼내는 동사서독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정통 서정무협 동사서독은
지루한 제작 기간으로 인해 오히려 중간에 취미 삼아 찍었던 중경삼림이 더 세계적으로 히트하는
바람에 맥빠지게 개봉되었고 상영시간은 달랑 100분 남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원작이 약 4시간
이라고 하는 낭설만 있지 도대체 기승전결을 알 수 없는 형이상학의 영화가 되버린것 같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4시간짜리의 원작을 찾아보지만 중화권에 살고 있지 않고 설사 있더라도
중국말이 맹탕인 나에게는 어불성설에 불과 할 뿐이다. 미국에서 구한 DVD역시 100남짓의 한국
개봉 시 편집과 대동 소이 할 뿐입니다. 그래서 중경삼림보다 타락천사보다 동사서독은 난해한
영화이고 어려운 영화로 보입니다. 그 당시 중화권의 최고 배우들 장국영, 장만옥, 양가위,
임청하, 양조휘까지 각기 한 홍콩 영화의 대가들이 모인 종합 백과 사전적인 영화임에도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이미지는 쓸쓸하게 우울하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마치 소설이 아닌 한편의 서정시를 보듯이.




동사서독은 왕가위 철학의 집대성으로 보입니다. 그의 사랑 3부작 아비정전, 중경삼림, 화양연화
에서의 화두들이 모두 녹아 있습니다. 사랑은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것이 아니나 떠나 보낼때에
오히려 지고 무상한 아름다움으로 꽃이 핀다고 강변하는 듯 합니다. 사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이루어져 결혼으로 끝을 맺고나면 그 후에는 지루한 현실만이 남아버려 우리가 언제
사랑을 했었나란 의문 부호에 빠질때가 많습니다.

거기까지 전개하지 않더라도 누구던 가슴한구석에 모셔 놓고있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애틋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늘 다가오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요.

영화에서 동사건 서독이건 그 둘과 이루어지지 못했던 임청하건, 장만옥이건 모두 다 쓸쓸한
일상을 보냅니다. 그리고 후회를 하면서도 그 인연들을 바로 잡지 못합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고 영화는 화두를 던집니다. 이루어지 못한 사랑이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고… ….

블레이드러너도 결국 완결편이 나오고, 원스어폰어타임인 아메리카도 10여년전 4시간짜리
완결편을 보았습니다. 동사서독의 완결판을 볼 기회는 없을까요. 아님 떠나간 사랑은 그저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놓고 그냥 일상을 살아도 별 지장은 없어 보이니 그렇게 진달래꽃 한 그루를
키우면 될까요?

거의 10년 만에 다시 본 동사서독에서는 장국영도, 왕가위도, 장만옥도, 임청하도
그리고 양조위도 우울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인생을 가르칩니다.

인생 뭐 있니,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


영진공 클린트

양조위, 그의 치명적인 이(易).

사용자 삽입 이미지미리 말해두자면 저는 양조위를 배우로써 정말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광빠모드로 그의 브로마이드를 사들이고, 그의 팬싸인회를 따라다니고, 하는 등 인간 자체의 양조위를 따라잡기 위해서 난리를 친건 아니었지만, 영화배우로써 제 가슴을 떨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제게 있어선 양조위가 유일합니다.

3대 7명으로 구성된 가족 전체가 영웅문 1,2,3부를 가장 추천 윤독도서로 읽어대는 집안에서 자란 관계로 ‘칠구에서 피를 흘렸다.’ ‘혈도를 짚어 마비를 시켰다’ 등의 문장을 읽으며 한글을 익혔고, 저의 가슴을 콩딱 콩딱 뛰게 했던 가상의 인물들은 아더왕도, 신데렐라도, 왕자님도 아닌 곽정, 양과, 소용녀, 사손, 장무기, 이런 인물들이 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지요.

그런데 그 후 몇년이 지나 당시 중학생이던 오빠가 빌려온 의천도룡기 시리즈 한편으로 소설 속의 장무기는 ‘양조위’의 얼굴을 입고 현실이 되었습니다. TV에 나와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이 있다는 개념이 생긴 이후, 제가 등장인물의 이름이 아닌 배우의 이름을 따로 외웠던 것도 양조위가 처음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제가 나이가 들어갊에 따라 양조위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흐뭇한 매력을 점점 더해가면서 여전히 저의 과거가 아닌 현재를 지키고 있습니다. 참 행복한 일입니다.


사실 이 영화만 놓고 보자면 단연 압도적인 매력을 발휘하는 배우는 탕웨이입니다. 스틸사진에서 보여주는 통통하고 평범한 동양아가씨인 이 배우는 영화에서 엄청나게 입체적이고 독특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양조위라는 배우도 이(易)의 캐릭터와 완벽한 조화를 보이고 있지만, 신인 탕웨이 또한 그러합니다. 장치아즈-막부인이라는 1인 2역에 가까운 그 캐릭터 자체도 너무나 멋졌습니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그녀의 연기는 아! 정말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이(易)’가 얘기하는 것 처럼 두려움을 모르는 눈이지요. 그리고 그 두려움 없음은 순수함에서 기인합니다. 알수 없음. 지적인 매력. 그리고 그 안에 깊숙히 자리잡은 깨어나지 않은 색끼. 그리고 그녀가 가진 농염함이란 그 안에서 교태와 천박함은 완벽히 지워내고 도도함과 순진함을 채워 넣은 것입니다. 게다가 ‘젊음’이라는 그 자체의 매력을 최대화 합니다. 한마디로 농염하면서도 풋풋하지요. (탕웨이라는 배우에게 하는 개인적인 바램입니다만.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절대 성형수술 하지 말아주세요. 그 아름다운 얼굴 유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나이가 든다해도 매력이 쇠할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양조위 처럼 우리 곁에서 오래오래 연기해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틸 사진으로는 이 배우의 매력이 설명이 안됩니다.

하지만 저는 양조위, 그리고 그가 연기한 이(易)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제가 오랜동안 좋아하는 배우고, 또한 좋아하고, 가슴 떨려 하면서도 속으로 ‘저 좁아 터진 어깨가 뭐가 좋다고.’ ,’저 알고보면 비겁한 캐릭터가 뭐가 좋다고’하면서 왜 좋은지 스스로도 의문을 가졌던 배우이기 때문에, 이(易)라는 엄청난 캐릭터를 통해서 저 스스로 양조위의 매력을 정리해 보고 싶은 건지도 모릅니다.



아….정말 이(易).라는 캐릭터는 양조위에게 알파요 오메가인 캐릭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양조위가 가진 그 오만가지 복잡미묘한 매력들을 이(易)라는 캐릭터에 모조리 녹여 넣음으로써 그 매력을 극대화시킨다고나 할까요. 영화 홍보자료에는 양조위가 그간 선한 역할만 맡아왔기 때문에 이안 감독이 캐스팅을 망설였다거나, 양조위가 “이제껏 스크린에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양조위를 창조해줄 것”을 주문 받고 완전히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냈다는 얘기가 나와있지만, 사실 오랜 팬인 저로써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양조위가 그간 선한 역할을 맡아왔다는 것에 별로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성룡이라면 몰라도요.) 장무기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중경삼림의 순경은 좀 우울해 보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였고, 왕정문에게 좀 치졸해 보였습니다. 화양연화의 차우 또한 그닥 선하다기 보다는 모호한 인물에 가깝습니다. 해피투게더에서, 또 2046은 어떻고, 최근의 무간도에서는 어떻습니까. 그는 충분히 나쁜놈이거나 최소한 나쁜놈이 될 가능성이 있는 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모호함의 매력을 더해 주는 숨겨진 이유일 수도 있겠지요. 영화 영웅은 제가 영화 자체는 안 좋아합니다마는 그 옷색깔을 신호등처럼 바뀌입고 나오면서 양조의 매력을 색깔의 다양함을 다소 원색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易)가 양조위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캐릭터라기 보다는, 제가 보기에는 그 동안 양조위가 보여준 모든 매력들을 총망라하여 종합판으로 펼쳐 보여주는 매력의 결정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이 매력은 대단히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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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선한 캐릭터인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퇴폐미가 양조위 매력의 핵심


경고!!!이 아래부터는 영화 안 보신 분들은 읽지 마세요. 거의 줄거리 요약에 가깝습니다.


[#M_ 계속 읽기.. | 닫기.. |易라는 캐릭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말 이(易)라는 놈은 대단히 치명적인 놈입니다. 팜므파탈(femme fatale)이 자신의 치명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에 개입하고, 남자를 파괴한다면, 易는 (팜므파탈의 대척점으로 옴므파탈(homme fatal) 이라는 말이 성립한다면) 그 자신이 원래 권력은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치명적인 매력으로 여성과 그 주변을 파멸로 몰아 넣고, 끝끝내는 자신은 자신의 모든 것과, 그 여성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지켜냅니다. 그런데도 심지어 그 여성으로부터도 전혀 원망을 듣지 않지요. 오히려 그녀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겁니다. 정말 치명적인 놈이에요.

이(易)가 어떻게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왕치아즈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단계별로 짚어보겠습니다. 네, 물론 제 가슴이 무너졌던 부분을 재 구성한것입니다.



1. 나도 평범한 인간일 뿐이야.
사실 이 치명적임의 시작은 그의 얼굴입니다. 양조위의 얼굴은 상당히 귀여운 스타일이면서 고독하고, 나약해 보이는 데가 있습니다. 바로 가장 치사하거나 가장 사악하게 변할 수도 있는 얼굴이기도 하지요. 이건 젊을 때 부터 그랬습니다. 장무기를 연기하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그 천진한 얼굴은 그 엄청난 내공을 가진 남자가 저렇게 천진하다는 이유로 더 위험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 천진함은 약간의 고독함과 포기할 수 없는 그만의 세계가 내재된 얼굴로 변했지요. 왕 치아즈가 처음 보는 이(易)의 얼굴은 그저 일상의 얼굴입니다. 그는 경호원에 둘러 싸여 있기는 해도 아내에게 ‘잘 놀다오라’고 말을 하며 차문을 닫아주는 사람입니다. 단지 그 행동만으로도 그 얼굴은 자상하지는 않지만 그저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처음부터 왕치아즈 마음의 무장을 풀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그날 집에 돌아와 ‘생각과는 다르게 생겼어’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이 여자. 이미 넘어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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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는 사실 왜소한 범부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2.난 이런데 익숙치 않아.
인적이 드문 레스토랑에서의 첫 데이트에서. 그는 자기 주변사람들은 국가니 민족이니 그런 거창한 얘기만 한다고 얘기하면서, 난 일상적인 대화에 익숙치가 않다고 얘기 합니다. 아!! 이 얼마나 노련한 꼬실링 기법입니까. 얼마나 여자의 마음을 싸그리 앗아가는 말입니까. 저런 몇마디의 말로 그는 “나도 이런 점에서는 순진해”, “나에게 일상이란 없어.” “너와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잘 되질 않네.” “너는 (그런 거창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야. 너와 특별한 관계를 원해.”라는 엄청난 떡밥(?)들을 던지고 있다는 겁니다.
전작에서도 그는 늘 미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장무기는 순진했고, 해피투게더의 요휘는 보영을 사랑하지만 서툴러 보입니다. 화양연화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갖혀 있는 차우도, 2046의 폐인에 가까운 소설가도 선수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마는 선수이지요).


3. 난 신사야.
첫 데이트를 마치고 이는 왕치아즈를 집의 문앞까지 데려다 주지만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정말 첫 데이트에서 끝까지 젠틀한 모습을 잃지 않는데다가 ‘커피 한잔마시고’, ‘라면 먹고’ 혹은 ‘자고’가지 않음으로써 더 여자의 애간장을 태웁니다. 이날의 이(易)의 고무줄 기법(당겼다가 다시 느슨하게 놓아버리는)이 없었다면 왕치아즈 또한 그렇게 이(易)에게 집착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팬이면서도 좀 악의적인 저는 2046의 치사한 젠틀맨십을 생각한 것도 사실이에요.


4. 여기가 호텔보다 안전할 거요.
3년만에 만난 그녀. 이제는 몰락해서 불쌍하게 밀수장사(우리나라 말로 차면 뭐냐. 바세린 아줌마? 미제장사 아줌마? 양품 아줌마? 암튼 )를 하고 있는 그녀를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면서 그가 권하는 말은 다름 아닌 여기가 호텔보다 ‘안전할’거라는 즉, 내가 널 지켜주겠다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동무가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일이 많고 바쁘고 사회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 원래는 가정적이고 부드러운 남자라는 걸 강조하는 거지요.



5. 난 아직 널 몰라.
첫 정사말이에요. 실로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곱씹어볼 수록 이해가 갑니다. 자신에게 미인계로 다가섰던 여성 3명을 죽인 경력. 한시도 몸에서 총을 풀어 놓을 수 없는 긴장감 속의 삶. (레옹처럼 항상 총을 차고 소파에서 앉아서만 잔 사람이 집 밖에서 정사를 벌인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보면 수긍이 갑니다.) 잠시나마 긴장의 끈을 놓았었던 여자와의 재회. 폭력에 물든 일상 아내와의 지극히 판에 박힌 대화 말고는 모든 의사소통을 폭력으로 해 왔던 자… 그런 행동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들이 수도 없이 떠오릅니다. 문제는 이해가 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행동은 원래 이해를 해 주면 안되는 건데 이상하게 이(易)가 양조위가 하면 이해가 간다는 거지요. 왠지 그의 깊은 눈망울과 우울하면서도 차가운 눈빛을 보게 되면 끝없이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게 문제인것이지요. 그래서 양조위가, 이(易)가 치명적인 것입니다.


6. 난 피곤한 생존 속에 상처입은 한마리 짐승일 뿐이야.
그의 가장 놀라운 재능은 그가 폭력성을 보여줄 때, 그를 연민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어찌 치명적이지 않을 소냐. 관청 건물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날. 약속보다 늦게 나온 이(易)는 처음엔 그저 점잖게 ‘회의가 늦어졌다’고 말하다가 막부인이 추웠다고 투정하자 ‘피 튀기게 고문을 하고, 자백을 받아냈고, 고문을 하다보니 군사학교 동기’였다고 말합니다. 저항군을 타진했다고 말하면서 막부인을 폭력적으로 다루는 모습을 보면 막부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고 왕 치아즈를 협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이(易)가 가진 치명적인 매력은 그런 말과 행동조차 ‘난 인간적으로 너무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나의 일상은 견디기 힘들다고. 나는 생존에 피곤한 한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투정하며 파고드는 것으로 보이게 만듦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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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상처받은 짐승을 뿐. 고독할 뿐이야.


7. 난 네 앞에서 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어.
일본군 구역(?)의 한 술집에서 두 사람이 술을 나눠 마시고, 무릎을 베고, 또 막부인이 노래를 불러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 두 사람이 유일하게 ‘정상적인 연인’으로 보이는 순간이지요. 막부인의 노래를 듣고, 이(易)는 진심으로 웁니다. ‘난 네 앞에서 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어’라고 말없이 고백하는 장면이지요. 여자는 ‘내 앞에서 만큼은 여려지는 남자’를 ‘원래 여린 남자’보다 백오십만배쯤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공안부장관(?. 정확한 직책과 명칭은 모르겠어요)쯤 되는 놈을 가슴으로 품어야 겠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8. 널 지켜줄게.
다이아몬드반지를 찾으러 간 그 장면. 잔 말재주 안부리면서 은근히 여자마음 불태웠던 이(易)가 이번엔 정면으로 말재주를 부립니다. ‘반지는 잘 모르는데, 그 반지를 낀 당신 손’이 보고 싶었다거나, ‘내가 지켜줄께’라는 말까지. 아….정말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제 가슴까지 다 철렁했습니다. 저 또한 그런 분위기에서는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놈이 나를 향해 그런 눈빛을 보내며 아빠도, 흠모했던 친구도 한번도 지켜주지 못한 나를 지켜준다니요. 결국 그 말 때문에 왕치아즈는 5년간 준비했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동료들과 (그들을 동료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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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캐럿 다이아에, 저 눈빛에 누가 안 넘어가.


9.내 진심이 버려졌고, 나또한 거대한 조직의 힘겨운 톱니였을 뿐이다.
결국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에 이루게 하면서까지도 이(易)는 그 치명적인 간지 좔좔을 버리지 않습니다. 흔들리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바라보는 표정. 유일한 진심을 부정당한 남자의 눈빛.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그 눈빛. 게다가 그 또한 일본군정으로 부터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순간 불쌍해 집니다. 거대 조직의 힘겨운 톱니로, 이용당하고 의심받는 존재. 아… 가슴이 아련해지는 순간. 번득! 하고 다시 정신을 차려봅시다. 이놈은 원래부터 나쁜 놈입니다. 원래 지 민족을 배신한 놈. 배신 한번한 놈이 두번 배신은 못합니까. 게다가 일본도 패망직전인데 이 기회주의자 놈은 언제 물타기 할지 모르는 놈입니다. 일본이 감시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건데, 그 눔의 눈빛을 보고 있다면 한없이 불쌍하고 가련해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잃는 것 없이. 연인의 사랑과 동정까지 오롯이 얻게 되는 겁니다.



결국 이 치명적인 매력이란, 여자에게 ‘나는 물리적, 경제적으로 보호를 해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그리고 나는 ‘너에게 정서적으로 보호 받고 싶다.’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암수 나뉘어져 있는 모든 동물들이 착각하고 꿈꾸는 짝짓기의 실체일 수도 있고, 동서 고금의 똑똑한 여자들이 불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래도 그한테는 내가 필요해.’라며 제 몸 상하는 지 모르고 자신을 내던지고 희생하며 행복하다 생각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내가 그를 정서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는 착각이 그의 정치적, 민족적 만행과 그의 비뚤어진 인간성 마저도 못 보도록 눈을 막아버립니다. 정말 치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양조위가 맡아온 역할들은 계속해서 그랬습니다. (제가 그의 모든 작품을 본 것이 아니고, 또 시간이 많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 하기 때문에 좀 더 올바르게 얘기하자면 제가 매력을 느낀 캐릭터들은 다 그랬습니다.)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순진한 척 하고 어리버리 한척 하지만, 결국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들을 차례로 망칩니다. 호동왕자도 아닌데, 적국의 공주 조민을 이용하고, 주지약의 장문(아미파)를 위태롭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결국 명교의 교주가 되고, 주원장의 스승이 되지요. 화양연화의 차오는 아내의 외도로 괴로워하는 역할을 연기하지만, 결국 그 자신은 종국에 잃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앙코르와트에서 혼자말 한번 해 주는 것으로 간지좔좔 간지남이 되어버릴 뿐이지요. 2046의 양조위는 훨씬 더 악독합니다. 옆방의 바이링(장쯔이)과 육체적인 유희만을 즐길뿐 마음의 곁을 한치도 내주지 않지요. 춘광사설의 양조위도 다르지 않지요. 그를 떠나고 괴롭히는 것은 보영(장국영)인 것 같지만 그는 항상 사회적으로 생활력이 강한 쪽이고 그의 매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보영 쪽이었습니다.그렇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상처받은 영혼과 위태로운 매력을 발산합니다. 이(易)는 그저 모호하게 나쁜 듯도 한 놈 이었던 양조위의 과거 캐릭터를 원래 나쁜놈인데 알아갈 수록 모호하게 나쁜 놈으로 발전된 캐릭터이며, 또한 이전의 캐릭터들에게 약간은 약했던 현실에서 물리적, 경제적 힘을 가진 권력자라는 매력까지 보충을 하게 됨으로써 그 내공이 강해진 놈입니다. 사실 이런 놈 그냥 두면 안됩니다. 정말 쌩 나쁜 놈이지요.하지만 이 순진무구, 고독하게 생긴 얼굴을 가진 +사실은 권력이 있는 놈의 + 네 앞에서만은 다른 나는 +사실은 상처받은 짐승이며 +위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 느물느물하지도, 서툴지도 않게 아주 노련하게 발산하는데 안 넘어가는 여자가 없는 겁니다.


색.계에서 이런 이(易) 혹은 양조위의 매력의 정확히 대척점을 이루는 것은 연극반 반장(?)인 광위민입니다. 그는 야심있는 젊은이의 오류를 전부,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 무모하고 –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죽이자고 공모하고, 2. 책임없고- 아마추어 활극을 벌이고도 뒷수습이란 없지요. 3.어설프고 – 지가 경험없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여자의 베드씬 연습을 머저리 같은 놈과 하게 하고, 4. 힘은 세지만 능력은 없고. -조직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5.무지하고 – 사랑하는 여자에게 언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 시점에서의 키스라니요. 왕치아즈의 마음이 이미 李에게 가 있기 때문에 ‘3년 전에 했었어야’라는 말로 끝났지 안 그랬으면 ‘따귀 맞고’, ‘그 여자는 모멸감에 떨게’했을 겁니다. 6.사랑하는 여자가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 그 잔혹한 첫 정사를 지켜보고 있었다니, 기둥서방에 다를바 아니지요. 왕치아즈의 분노와 배신감을 알만합니다. 6.게다가 쥐뿔도 없는 주제에 자신만만한척 스스로를 가려서 여자가 그를 연민할 기회도 주지 않지요. 8.자신도 얻는 것이 하나 없으면서 9.자기가 좋아하는 여자까지 망쳐버립니다. 10.그녀의 진심을 한번도 알아주지 못한 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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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생긴건 잘생겼는데, 엄청 찌질하거든?

그러니까 말이지요. 아무리 이(易)가 나쁜 놈이어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때려 죽일 놈이어도. 젊고, 똑똑하고, 야심있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잘생긴 광위민보다는 이(易)가 훨씬 나은 겁니다. 그래요. 그 점이 바로 가장 치명적인 사실이에요. 아…. 정말 치명적이라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네요.



현실에서 이(易)를 만난다면, 혹은 그 전작들에서 그가 보여준 그 매력에 빠져있다면. 우리들은 재빨리 그를 피해야 합니다. 그는 그 자신은 결코 다치지 않으면서도 그 순진한 얼굴을 하고, 그 애써 감춘 아픔을 그 눈빛으로 발산하며, 몇마디 되지 않는 말로 우리의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 버려 우리를 망칠 테니까요. 어쩌면, 내가 빠져버린 양조위가, 양조위의 매력이, 이(易)의 매력이 배우의 그리고 가상인물의 것이어서 다행입니다. 나는 그 매력에 빠져들기만 할 뿐. 다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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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라이

<색, 계>,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린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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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스타 워즈> 시리즈를 꼽고 싶습니다. 외세에 저항하는 반군들의 이야기이고 특히 홍콩 대학 출신의 젊은 스파이들이 목표물로 삼고 있는 매국노 이(양조위)가 다스 베이더의 포스를 뿜어대고 있기 때문이죠.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에서 부자 관계로 전환되는 부분과(정확히는 부자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지만요) <색, 계>에서 왕 치아즈(탕웨이)와 이의 관계가 단순한 남녀 관계 이상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내러티브 구조 상의 유사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색, 계>와 <스타 워즈>를 비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으십니까? 속 알맹이가 아니라 이야기의 골격이 그렇다는 얘깁니다.1)

역시나, 치아즈와 이의 격렬한 전쟁과도 같은 정사씬은 과감한 노출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러쉬>(1991)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2) 영화 보다는 주제곡으로 사용된 에릭 클립튼의 Tears In Heaven이 큰 인기를 얻었더랬죠. 마약반 형사들이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스스로 마약 중독자가 되어간다는 얘기였는데요, 후반에 남자 형사(제이슨 패트릭)가 죽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자 형사(제니퍼 제이슨 리)가 홀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조깅을 할 때에야 기다리던 주제곡이 나오더군요. 영화의 장면 중에 두 남녀 형사가 코카인에 취해 사경을 헤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사 장면도 있구요. 치아즈와 이의 정사씬을 보다가 <러쉬>에서 마약에 취한 두 남녀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습니다. 양조위와 탕웨이의 그 표정은 배우들의 연기, 그 이상이더군요. 두고두고 생각나게 될 명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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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정사를 치르는 치아즈는 부모와 이성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젊은 여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치아즈가 연기하고 있는 막 부인이라는 가상 인물이기도 하지요. <색, 계>를 보는 방법3) 중에 하나는 치아즈가 막 부인을 연기하는 영화 속의 영화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치아즈의 아버지는 혼자 영국으로 가 재혼을 해버립니다. 이때 버림받은 치아즈를 위로해주고 그녀의 눈물을 지켜봐준 존재는 룸메이트가 아닌 영화였습니다.4) 왕치아즈가 학생 극단에 참여하고 치기어린 아마추어 암살단 활동에 동참하는 이유도 자기 삶 속의 커다란 결손을 메우기 위함입니다. 치아즈는 자기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여인들을 따라 막 부인을 연기합니다. 완벽한 막 부인을 연기하기 위해서라면 처녀성을 버리는 일 조차 능히 해낼 수가 있습니다. 홍콩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끝난 이후 치아즈의 3년은 아무런 배역도 맡지 못한 신인 여배우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생활의 고단함은 배우에게 독기를 품을 수 있게 해줍니다. 죽느니만 못한 삶에 대한 자기 인식은 이제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용기로 쉽게 치환되지요. 상해에서 새로운 작전의 개시. 다시 막 부인으로 캐스팅된 치아즈는 마침내 이와의 에로틱 멜러를 연기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치아즈와 이의 첫번째 정사 장면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 식으로 첫 정사가 이루어지리라 예상한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이의 캐릭터가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멜러 장르의 컨벤션을 무너뜨리는 츠아즈와 이의 첫 정사는 다름아닌 두 개의 색(色)이 계(戒)를 두른채 맞부딪치는 첫 합입니다. <색, 계>는 계가 해체되고 각자의 색을 드러내게 되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다스 베이더의 갑옷과 루크 스카이워커의 광선검 같았던 각자의 계를 손에서 놓치는 순간, 속살 보다 여린 치아즈와 이의 색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맙니다.5) 하나는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생명으로서의 색이죠. 둘이 바뀌었다 한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똑같습니다. 두 남녀가 계를 두른채 시작해서 마침내 색을 드러내고, 그 색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만다는 이야기는 인간 보편의 경험담이기도 합니다. <색, 계>가 강한 호소력을 지닌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멜러의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전달하는 연출과 배우들의 역량이 관객들의 계를 해체시키고 색을 건드릴 만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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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는 정말 오랫동안 좋아해온 배우이지만 <색, 계>에서는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놀랐습니다. 오죽하면 다스 베이더를 떠올렸겠습니까. 강아지 같았던 그 검은 눈망울이 짙은 회색 연기를 뿜어대는 광경이라니. 이가 상해의 관청 건물 내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그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런 이에게 접근해가는 치아즈는 처음부터 계를 앞세우지 않았더라면 이에게 그런 농염한 눈빛을 보낼 일이 없었겠죠. 그리고 막 부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황홀한 표정이 나올 수가 없었을 겁니다. 살을 맞대면 마음이 저절로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건 치아즈의 막 부인 베드씬 연습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의 계를 풀고 색을 열어젖히기 위해서 치아즈는 막 부인으로이긴 하지만 자신이 가진 색을 전부 쏟아 붓습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그는 절정에 이르지 않아요.” 너무 많이 쏟은 색은 결국 막 부인이 아닌 왕치아즈를 움직이고, 이 영화에서도 다시 한번 모사는 새로운 실재로 전환됩니다.

완벽한 치아즈와 막 부인을 보여준 탕웨이는 신인이긴 하지만 확실히 그 이상의 역량을 가진 배우입니다. 하지만 연기력이 공인된 배우들조차 어떤 영화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 것을 보면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는 역시 연출자의 몫이 큽니다. 말 그대로 디렉팅을 하든 배우가 스스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도록 도와만 주든, 아니면 니 맘대로 한번 해보세요 완전히 풀어놓든, 배우의 캐스팅과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를 만들어내는 건 배우 스스로와 함께 감독이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박한 연기자라 하더라도 명장을 만나면 뛰어난 연기를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고 아무리 뛰어난 명배우라 하더라도 배우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지 못한 감독을 만나면 형편 없는 보릿자루 연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감독은 배우가 캐릭터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그리고 그의 연기가 최대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연기 지도 뿐만 아니라 조명이나 세트와 의상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영향을 미치는 조물주입니다. 양조위도 마찬가지지만 치아즈의 뛰어난 연기는 곧 이 안 감독의 연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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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즈와 이의 색이 그 속살을 드러내는 부분은 침대 위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치아즈가 모국어로 노래를 할 때, 이의 계는 완전히 해체되고 색만 남게 됩니다. 남녀의 색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의 색까지 점령당하고 맙니다. 시대는 두 사람을 적으로 만나게 했지만 인간의 색은 그렇게 만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가 사랑의 증표를 치아즈에게 선물할 때, 치아즈의 계도 크게 흔들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치아즈는 막 부인으로서의 연기를 포기할 수 없었죠. 막 부인이 맡은 역할은 이의 계를 해체하고 색을 완전하게 빼앗는 일이었지 자신의 색 때문에 계를 놓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6캐럿 원석에 흔들렸던 왕치아즈를 완성된 ‘색’ 있는 다이아 반지가 다시 한번 뒤흔드는데, 이때에도 치아즈는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손에 끼었던 반지를 서둘러 빼내려 합니다. 손에 끼고 다니다가 도둑 맞을까 겁난다는 핑’계’를 대면서요. 그런 치아즈를 완전히 무너뜨린 건 이의 말 한 마디였습니다.


“내가 지켜줄께.”


그리고는, 우다다다. 대반전과 긴장의 풀림. 아무 것도 안들리는 멍한 순간. 이제 내 색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처연하게 돌아가는 바람개비. 의미 없이 달아나려 해보지만 이미 갇혀버린 구역. 영혼의 바리케이트. 나도 저녁 밥을 짓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를 수 있는 저 아낙네처럼 살고 싶었건만… 어느 작은 구석 하나도 서투르게 배치하는 법이 없는 대가의 솜씨 그대로입니다. 이 안 감독의 <색, 계>는 그렇게 관객들의 계를 열어젖히고 각자의 색을 드러내놓게 만들고 있습니다.

1) 그럼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부자 관계도 아니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새로운 버전의 <스타 워즈>는 어떠십니까? 쿠~ 쿠~ 내가 지켜줄께. 가요, 어서요. 두 연인은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광선검을 휘두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며 불멸의 사랑이 되는 겁니다.

2) <슬리퍼스>(1996)에서 일약 주연을 맡기 전의 제이슨 패트릭과 제니퍼 제이슨 리가 공연했고 여성 영화제작자인 릴리 피니 자누크의 유일한 영화 연출작이기도 합니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직접 연출까지 해볼 기회를 잡았던 모양입니다. 형사 액션물의 외양을 가진 영화를 그렇게 잔잔한 드라마로 바꿔버렸으니 쫄딱 망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무척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영화입니다.

3) 양조위가 연기한 이의 관점에서 설명해보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긴 합니다만, <색, 계>는 치아즈의 입장에서 따라가는 편이 훨씬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더 많이 나오잖아요) 치아즈의 성장 영화, 치아즈의 사랑과 야망, 그외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는 영화는 볼 때에도 좋지만 보고난 후에도 즐겁습니다.

4)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음을 단단하게 잘 묶어놓고 있다가 영화를 보면서 바보 같은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 걸까요. 삶 속에서 존재하는 또 하나의 계와 색입니다. 영화는 색이다!

5) 이 부분에서는 치아즈 보다 이의 상처가 더 커보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그 황량한 표정이란. 치아즈는 자신의 계를 손에서 떨어뜨릴 수 밖에 없을 만큼 이에 대한 색이 마치 댐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물줄기처럼 쏟아져나왔던 거죠. 치아즈는 색이 상처를 받았다기 보다 색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쪽이라고 하겠습니다. 색이나 생명이나 그 근본은 같은 것이겠지만요.

6) 왜 여자에게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색, 계>를 보면서 평생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심순애에 대한 김중배의 사랑도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한 돈 지랄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도요. 이제 심순애에 대한 김중배의 사랑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합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