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어느 사채업자의 되도 않는 구라

 

 


 


 


이 글은 최근 개봉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나름대로의 감상을 써 본 것입니다.


스포일러가 가득하오니 아직 이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얼른 빠져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김파이씨는 자신이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다고 느끼고 있다.


 


동물을 좋아하고 매사에 호기심이 넘치던 어린시절을 지나 평탄하게 생활하던 그에게 그 일이 닥친 건 5 년 전, 그가 열 다섯 살 때였다.


 


목수일을 하며 개집도 만들고 새집도 만들며 생활비를 대던 가게에 점점 일거리가 줄어드는 걸 견디다 못한 파이씨 아버님은 급기야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렇게 서둘러 작은 트럭에 짐을 싣고 서울로 가던 날, 하늘에서는 갑자기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렸고, 빗 속에서 중심을 잃은 트럭은 그만 전복을 하고야 말았다.


 


 


 




 


 


 


처참한 교통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파이씨,


하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 하늘은 파이씨에 대한 시험을 거두신 게 아니었다.


 


이삿짐을 싣고 달리던 그 트럭은 무보험차량이어서 사망한 가족에 대한 보상금은 커녕, 오히려 중상을 입고 1년 넘게 병원 신세를 져야 했던 파이씨가 홀로 산더미같은 병원비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것이다.


 


억이 넘는 병원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던 어린 그에게 병원측은 많은 액수를 깎아주었지만, 그렇다고 공짜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사채업자에게 돈을 꾸어서 겨우 병원비를 메꿀 수 있었다.


 


퇴원은 하였지만 여전히 여러가지 후유증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잡역 등을 하며 약값 마련하기에도 허덕이던 파이씨는, 어쩔 수 없이 연락처를 바꾸고 노숙생활을 하는 등 사채업자와 부딪히지 않도록 나름 엄청난 노력을 하였다.


 


 


 




 


 


 


허나 사채업자는 결국 파이씨 앞에 나타나고야 말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손 등에 선명한 호랑이 문신을 하여서인지 호랭이 성님이라 불리는 그는 하이에나라는 별명을 가진 똘마니와 함께 기어코 들이 닥쳐서는 다짜고짜 파이씨를 강제로 차에 태워 어느 허름한 건물로 끌고갔다.


 


“파이 형제님, 그 목에 걸린 건 뭔가요?”


건물 안에 있는 커다란 방 안 중앙에 있는 의자에 우격다짐으로 앉혀진 파이씨에게, 특이하게도 형제님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는 호랭이가 말했다.


 


사고 이후 파이씨는 항상 목에 두개의 목걸이를 걸고 다녔는데, 그건 사고 현장에서 파이씨가 수습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모님의 유품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각자의 띠에 맞춰 함께 하고 다니시던 원숭이와 말 모양의 금목걸이였다.


 


호랭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이에나는 잽싸게 파이씨에게 덤벼들어, 두 목걸이를 거칠게 벗겨내서는 호랭이의 손지갑 안에다 얼른 넣어버렸다.


 


그리고 하이에나가 방 안 구석에 놓여있던 TV를 켜고 볼륨을 높이자, 호랭이는 파이씨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파이 형제님 … 세상 살기 많이 힘들죠? …  그렇다고해서 인간의 도리를 어기시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호랭이는 장광설을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하이에나의 발길질과 손찌검이 연달아 파이씨에게 가해졌다. 신체에 가해지는 극심한 고통은 참으로 견뎌내기 힘들었지만 호랭이의 되도 않는 설교질도 그 못지 않게 고통스러운 파이씨였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순간,


호랭이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며 뭐라 읊조리던 말이 파이씨의 귀에 그 어느때보다 또렷하고 큰 소리로 들어와 박히기 시작한 것이다.


 


“파이 형제님,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 이 모든 게 다 하늘의 배려라고 말이예요 …”


파이씨는 숙였던 고개가 저절로 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다 하늘!이 예비하신! 시험!이라고 생각하시란 말이죠 …”


어느새 파이씨는 호랭이의 눈을 두려움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이게 다 그 뭐냐 … 그래 … 일체유심조! … 그 … 중 이름이 뭐더라 … 암튼 … 그거!”


그러자 파이씨는 입가에 고인 피의 맛이 달다고 느끼게 되었다.


 


“하늘이 있어 … 나를 이용하사 파이 형제님이 가장 필요할 때 돈을 내리시는 은혜를 베푸셨고 … 그리고 그 은혜를 갚지 않고 계속 하늘을 거역하시는 파이 형제님에게 다시 나를 보내시어 하늘의 뜻을 가르치게 하신 거란 말입니다 … 그러니 이게 다 파이 형제님이 바르게 살도록 예비하신 하늘의 시험임을 굳게 믿으셔야 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즈음에 파이씨는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방탕한 인간이었는지를 진심으로 뉘우치기 시작하였고 눈가에는 참회의 눈물이 굵게 맺히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파이씨가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보며 잠시 말문을 닫았던 호랭이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자, 형제님 … 이제 하늘에 당신의 믿음을, 당신의 충심을 보여주실 때입니다. 이제 곧 형제님을 도우러 사람이 올 겁니다 … 그가 파이 형제님의 눈과 심장과 간을 하늘에 되돌리게 도와 줄 겁니다. 파이 형제여, 기꺼이 그에게 형제님의 믿음을 맡기실 거죠?!”


 


파이씨는 멈추지 않고 계속 눈물이 흘러나오는 눈망울을 크게 뜨고 호랭이를 향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앞에 모았다.


 


 


 




 


 


 


바로 그때였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까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순간 강렬해지는가 싶더니, 열려진 창을 통해 갑자기 하늘에서 강력한 번개가 타고 들어와서는 TV 앞에 서 있던 하이에나를 내려 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어이없고 처참한 광경에 너무 놀란 호랭이는 기겁을 하며 서둘러 방안을 빠져나가려다 제 풀에 넘어지면서 단단한 바닥에 머리를 박더니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너무도 놀라운 일의 충격에 파이씨는 온 몸이 굳어지며 꼼짝할 수가 없었지만, 이내 이 모든 게 하늘이 예비하신 일이라는 믿음이 떠올랐고 그러자 비로소 파이씨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호랭이와 하이에나의 주검을 뒤로 하며 건물을 빠져 나온 파이씨의 손에는 뺐겻던 목걸이가 들어있는 호랭이의 손가방이 들려있어서, 그 안에 있는 자동차키로 호랭이의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가서 그 안에 들어있는 돈으로  고기집에 가 맘껏 소고기를 사 먹었다.


 


커다란 포만감과 함께 고기집을 나서면서 파이씨는 정말 이 모든게 하늘의 절묘한 계획임을 절실히 느꼈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름대로 착하게 살아왔기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던 거라고 느끼게 되었다.


 


 


 



 


 


 


며칠 후 무심히 차를 몰고 가던 파이씨는 경찰에 의해 검문을 받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경찰서로 연행되어 취조를 받았다.


 


취조가 끝나자 담당 형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힌 조서를 파이씨 앞에 내밀면서 서명을 하라 하였다.


 


[이 사건 용의자 김파이는 사채업자이자 장기밀매업자인 일명 호랭이와 일당 일명 하이에나에게 납치되어 외곽 건물에서 심한 구타를 당하던 도중 강제로 장기적출을 당할 뻔 했으나, 마침 그때 내린 폭우가 창을 타고 들어와 TV 전원선의 합선을 일으켜 근처에 있던 일당 하이에나가 감전으로 사망하였고 이에 호랭이가 당황한 틈을 타 김파이가 덤벼들어 호랭이의 머리를 방바닥에 마구 찧어 사망케 한 후 호랭이의 손가방과 차량을 탈취하여 도주한 사건임.]


 


그러면서 담당 형사는 김파이씨의 기구한 인생사에 측은지심을 느껴서인지 정당방위라는 의견을 검찰에 올렸고,


 


이후 김파이씨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나와 지금은 단칸방이나마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나름 잘 살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안 감독이 이제 막 종교철학 개론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인 건지,


아니면 이 세상 모든 철학과 종교를 섭렵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 건지,


내내 헷갈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헷갈림의 원인이 내 부덕의 소치임을,


그리고 사물의 양면성에 대한 내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고 주절주절 뇌까리고 있다.


 


 


 


 


영진공 이규훈


 


 


 


 


 


 


 


 


 


 


 


 


 


 


 


 


 


 


 


 


 


 


 


 


 


 


 


 


 


 


 


 


 


 


 


 

“결혼 피로연”, 인생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


학부시절, 노년심리학을 배우면서 우리는 노년기의 심리적인 특성을 ‘우내성경애조유의’ 라고 외웠다. 기억력 나쁜 내가 아직도 이건 잘 기억하는걸 보면 참 신묘한 기억법이었던 모양이다. 하나 하나 살펴보자.

우선 노년기가 되면 사람들은 우울해진다(우). 몸도 예전 같지 않고, 외모도 삭아버려서 아무도 자신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데다가, 사회적인 활동에서도 점차 밀려나 뒷방 늙은이가 되어가니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리고 늙으면 내향적이 된다(내). 사실 내향성과 우울증은 거의 같이 가는 증상인데 사람들은 침울해지면 밖으로 나도는 대신에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다. 그게 내향성이다. 평소에 매일같이 친구 불러내서 술 퍼먹던 사람도 우울해지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된다. 우울한 자의 유일한 친구는 자기 자신이니까.

또한 성역할이 바뀐다(성). 대부분 남자 노인들은 여성적이 되고, 여자 노인들은 남성적으로 바뀐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 이유를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세력관계가 역전된 탓이라고 설명했지만, 일부에서는 호르몬의 변화로 설명한다.

사실 남성성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 역할에 기대어 만들어져 있는데 (그래서 실직한 남자는 심리적으로는 거세된 남자와 비슷하다) 그 사회적 역할이 하나씩 사라지는 노년기에 남자가 남성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대로 남자가 주도권을 놓으면 누군가 그걸 다시 잡아야 하는데 그 역할을 여자노인이 하기 쉬우니 여자가 남성적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늙으면 사람이 경직되어 뻣뻣해진다(경). 신체적으로도 유연성이 줄어들고 심리적으로도 그렇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모험심이 줄어들며, 도덕적으로도 경직되어간다. 늙은 개는 새 재주를 배우지 못한다가 아니라 새 재주를 못 배우는 개가 늙은 개란 얘기다.

늙으면 또한 옛것에 대한 애착이 늘어난다(애). 쓸데없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놓는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필요한 것을 못 찾는 수도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쓸데없는 물건들이 자신의 정체성이니까. 내가 예전에 입었던 옷들, 읽었던 책들, 샀던 물건들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은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우리는 아직 그렇게 많이 쌓아둘 만큼 정체성의 역사가 길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늙으면 조심성이 늘어난다(조). 역시 당연한 일이다. 늙으면 몸이 특히 뼈가 약해져 잘 부러지는 데다 부러진 뼈가 잘 붙지도 않는다. 정정하던 노인도 한번 뼈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그대로 가버리시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 활동을 계속 해야지 정신도 온전한데 병원에 오래 누워 있다보면 활동을 못하니 정신이 혼미해지고 덩달아 몸도 약해지면서 결국 급격하게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말년 병장보다는 노인들이다.
 

마지막으로 노인들은 후대에 뭔가 유산을 남기려 하고(유) 그걸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의). 사실 유산은 자식을 위해서 남기는 게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욕구의 표현일 뿐이다. 유산은 재물인 경우도 있지만, 정신이나 전통인 경우도 많다. 어쨌든 누군가 내 존재를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 영향을 미쳤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유산상속의 욕구인 것이다. 사실 자식은 사람들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유산이자 흔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를 낳는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말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노년기의 이런 욕구들을 채우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일단 험한 꼴 볼 때까지 오래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거니와, 한해라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 비교우위를 갖는 동네이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좀 적었고, 변화가 없는 사회이니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 별 흠이 되지도 않았고, 후손들이 대부분 고분고분 말을 들어줬으니 전통이라는 유산도 전수하고 삶의 의미도 찾기 쉬웠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경우에는 노년이 매우 고달파진다. 순환이 반복되는 사회에서야 한해라도 오래 살아서 경험을 축적했다는 게 득이 되지만, 작년 다르고 내년 다른 세상에서는 축적된 경험도 별 소용이 없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의 박탈도 금방 닥쳐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경직성은 변화에 적응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돈을 빼고는) 정신적 유산을 받길 원치 않는다.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리는 거다. 게다가 오래 살기까지 하니, 그 고달픈 노년을 이전 세대보다 몇 십년이나 더 지속해야 하는 현대인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후자의 노년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본다. 진짜 삶의 진실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나는 유산이라는 것도 결국은 그 공수래 공수거라는 진실을 어떻게든 기만해보려는 눈가리고 아옹질이라고 본다. 전통이 제대로 전수된다는 것은 결국 매 세대마다 결국 다르게 해석되고 재창조된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그 전통은 이전세대의 것이 아니라 당대의 것이라고 봐야 하니 말이다.

자손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해주지 않는데 손주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로지 유전자의 입장에서야 자손이 필요하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자손은 그냥 놓고 떠나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칼릴 지브란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자녀라는 화살을 미래로 쏘아보내는 활일 뿐이다. 자녀는 당신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존재이다.” 라고 말이다.

『와호장룡』으로 유명해진 “이안” 감독이 1993년에 만든 영화 『결혼 피로연』은 바로 그 노년을 받아들이는, 아니 인생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는 대만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매끈하게 살고 있는 여피족 게이 남자와 그의 미국인 애인(물론 남자)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 게이 남자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전수 받기를 바라고, 자기가 남긴 유산이 지속된다는 증거를 보여주길 다시 말해서 결혼해서 손주를 낳아주기를 바란다. 당연히 아들이 게이라는 사실은 행여 꿈도 꾸지 못한다. 이런 아버지의 끝없는 성화에 못이긴 아들은 가짜 신부를 하나 구해서 가짜결혼식을 열어 아버지를 초대한다.

드디어 유산을 남기고 삶의 의미를 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미국으로 날아온 아버지. 그러나 눈치만 100단이 되어버린 노인네는 점차 일이 자신의 기대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다. 그 과정은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연출되었다) 다행히도 이 아버지에겐 사실을 기만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남아있었다. 결국 마지막에 아버지는 어쩌다 보니 생물학적인 손주를 임신까지 한 명목상의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진짜 애인인 사이먼을 며느리로 인정한다. 아버지가 해변에서 사이먼과 산책을 하다가 건네는 붉은 돈봉투는 바로 그걸 상징한다.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네

그리고 아버지는 빈손으로 대만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 노인네가 공항의 검색대 앞에서 금속탐지를 받기 위해 양손을 들어올리는 장면에서 끝난다. 평론가 정성일은 그 장면을 일종의 항복선언이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그 모습은 항복한 패잔병처럼 처연하기보다는 마치 하얀 학이 날개를 펴드는 것처럼 우아했기 때문이다. 신선이 따로 있나? 삶의 진실을 받아들인 사람이 신선이지 ……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이 속세에서 뒹굴어 댈 때, 신선은 학처럼 날아가는 것이다.

빈손으로 말이다.

영진공 짱가

 

인크레더블 헐크 (The Incredible Hulk), “속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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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튼의 헐크, 잘 어울린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안 감독의 2003년작 <헐크>의 속편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오프닝 크레딧이 흐를 동안 2003년작 <헐크>의 줄거리를 매우 빠른 컷들을 통해 제시하지만, 이 컷들에서 보이는 브루스 배너와 베티 로스는 에릭 바나와 제니퍼 코넬리가 아닌 에드워드 노튼과 리브 타일러다. 오프닝 크레딧이 끝나고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공간적 배경은 <헐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가 머물고 있던 곳, 브라질이지만 이후 영화의 성격은 <헐크>와 다른 길을 간다. 분명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가 가지 않았던 길을 향해 가는 블록버스터이다. 그러나 <헐크>가 이전에 쌓아놓았던 성과를 굳이 무시하거나 부정하지 않은 채 심지어 일정 부분을 계승하기까지 한다.


2003년 개봉했을 당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다소 유보적인 평가를 받았고 일각에서는 저주에 가까운 혹평을 들었던 <헐크>에 대한 논의를 되짚어보면, 블록버스터라는 장르(블록버스터를 ‘장르’라 부를 수 있다면)가 새삼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확인할 수 있다. 저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말은 참 복잡한 여러 가지 뜻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지점에서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러니까 진지한 평론가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블록버스터에 대해 내용이 없다는 둥 플롯이 단순하다는 둥 의례히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마련한 사람들도 정작 복잡하고 진지한 내용이 담긴 블록버스터에 대해서는 은근슬쩍 다른 기준을 갖다댄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는 다소 단순하고 쉬우며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과연 당시 <헐크>에 대한 평을 보면 미국사회에 대한 은유라는 둥, 고전적인 희랍비극의 틀을 가져온다는 등의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블록버스터들, 특히 슈퍼히어로나 안티히어로의 이야기 중 신화적 요소가 없는 작품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체로 모든 블록버스터들은 평범한 / 유약하던 주인공이 힘을 갖게 되거나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권위있는’ 악당과 싸우게 되는데, 저 권위있는 악당이란 곧 ‘아버지 세대’ 혹은 기득권의 비유가 아니던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외디푸스의 신화는 변용되기 마련이고, <헐크>는 그걸 좀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뿐이다. 브루스 배너의 적은 자신의 아버지(‘매드 사이언티스트’ 타입)일 뿐만 아니라 베티의 아버지, 즉 썬더볼트 장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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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섬세하고 감성적인 브루스 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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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지적이고 불쌍한 브루스 배너


한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극단적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지킬과 하이드’ 모티브로 주로 해석되는 헐크의 이야기에, 이안이 강력하게 가미한 것은 ‘미녀와 야수’ 모티브이며, 소위 ‘문명화’라는 과정을 통해 야수성을 억압 혹은 거세당한 현대 남성에 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네바다 사막에서 탱크와 장갑차와 헬기를 장난감처럼 때려부수던 헐크는 베티 로스에게 향하는 먼 길을 돌아오면서 그녀 앞에서 비로소 진정을 찾고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이안 감독은 DVD 코멘터리를 통해 “누가 뭐래도 이 영화는 사랑 영화죠.”라며 능청을 떤다. 이것이 비극적인 것은 가정으로의 귀환 본능, 혹은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욕구를 브루스 배너가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그는 그녀와(혹은 그 누구와도) 결코 가정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는, 레이건 시대의 강력하고 권위적인 우파 아버지 세대로부터 억압당한 클린턴 시대의 유약한 그러나 더 능력있는 리버럴한 젊은 세대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이안 감독은 그가 헐리웃에서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예의 그 태도, 즉 ‘카메라를 든 인류학자’로서 꼼꼼하게 인간과 사회의 본성을 통찰하고 기록하는 태도를 이 영화에서도 드러낸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블록버스터로서는 실패작’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실은 철저하게 미국 안으로 들어갔던 다른 블록버스터와 달리 이 영화가 오히려 미국 바깥에서 마치 지구인을 관찰하는 화성인 과학자처럼 코믹스 문화와 슈퍼히어로를 대하는 미국 대중들의 관심과 호감을 문화인류학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태도가 헐크라는 안티 히어로와 충돌하는 지점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충돌이 과연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따로 노는’ 어색함일까?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매우 ‘생산적인 균열’인 것일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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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한 번 하지 않는 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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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는 커플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를 계승하는 지점은 역시 미녀와 야수 모티브를 더욱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는 것, 그래서 심지어 <킹콩>을 닮은 장면마저 등장한다는 점이다. 억눌린 현대 남성의 폭발이라는 측면은 오히려 <헐크>의 근육질 에릭 바나보다 <인크레더블 헐크>의 비쩍 마른 에드워드 노튼에게 더 잘 어울린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날카롭고 턱이 뾰족해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노튼이다. 노튼이 각본을 매만진 <인크레더블 헐크>는 노튼의 이 왜소한 몸매를 이용한 유머가 여러 번 등장한다.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온 뒤 늘어나고 찢어진 바지 허리춤을 붙잡고 다 찢어진 엉덩이와 허벅지를 노출하며 그토록 불쌍한 거지꼴로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은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브루스가 헐크가 됐을 때 벌이는 파괴는 <헐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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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와 에밀 블론스키(어보미네이션), 두 번째 대결 (<인크레더블 헐크>)


나는 이안의 <헐크>를 매우 좋아하지만(나중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DVD를 비싼 값을 주고 샀을 정도다), <인크레더블 헐크>는 <헐크> 식의 장중하고 품위있는 이야기의 무게를 뺀 대신 <헐크>에서 약했던 쾌감을 주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유머와 타격감이다. 우리가 ‘헐크’라는 녹색괴물을 둘러싸고 종종 킬킬대며 주고받는 농담이 <인크레더블 헐크>에서 아주 유효적절하게 들어가 있다. 아무리 해도 찢어지지 않는 헐크의 바지는 <헐크>에서도 농담거리이긴 했지만,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좀더 노골적인 농담으로 여러 번 드러난다. 브루스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허리가 늘어나는 바지를 선호하며 심지어 뚱뚱한 아주머니의 널찍한 엉덩이에 바지를 대보기까지 한다. 고무줄 몬뻬 ‘보라색’ 바지에 대한 농담은 또 어떤가. 심지어 헐크를 둘러싸고 차마 대놓고 하지 못했던 성적인 농담마저도 영화에서 유머로 등장한다. 그토록 사랑하지만 베티와 브루스가 섹스할 수 없는 이유를 대놓고 묘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게다가 타격감. 헐크가 어보미네이션과 싸우는 장면뿐만이 아니라, 그가 경찰차를 둘러 찢어 무기처럼 사용한달지 하는 장면에서 주는 타격감과 파괴감의 쾌감이 아주 크다. 건물을 부수고 도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장면들이 <헐크>에선 다소 만화처럼 가벼운 무게감으로 묘사된 반면, <인크레더블 헐크>에선 육중한 무게감과 둔한 타격감을 자랑하며 파괴의 쾌감이 더 크게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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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역시 ‘그림’스럽다. (이안의 <헐크>)


무엇보다도 <인크레더블 헐크>가 <헐크>보다 뒤에 나왔기에 유리한 점은 바로 그 사이에도 눈부시게 발전한 CG의 덕을 톡톡히 봤다는 것. <인크레더블 헐크>에서는 브루스 배너가 헐크로 변하는 그 과정, 혹은 헐크에서 브루스 배너로 돌아오는 과정의 신체적 변화를 바로 눈앞에서 재현시켜 준다. 이는 스턴스 박사를 찾아간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소영, 정우성이 주연했던 <구미호>에서 “앞으로 CG 기술이 발전하면 묘사될 수 있는 장면”이라 상상되었던 바로 그 몰핑 기법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근육 하나하나, 힘줄 하나하나가 변화는 그 과정을 보는 건 매우 경이롭다. 대낮의 컬버대학 교정에서 장갑차와 헐크가 싸우는 장면은 어떤가. 비록 피부 표현에서 여전히 CG 티가 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빛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명암의 변화가 아주 자신만만하게 눈앞에 표현된다. 정점은 바로 <킹콩>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밤에 번개가 치고 비가 퍼붓는 장면에서의 헐크가 묘사된 것이다. 비록 여기에서 킹콩의 피부는 시종일관 회색으로 표현되어 역시 그림같다는 느낌을 여전히 주는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피부결이나 번개가 칠 때마다 근육질이 움직이는 방향이 매우 세심하게 표현된다.


역시 이야기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인크레더블 헐크>보다 <헐크>에서 좀더 은근하고 깊은 재미를 느끼는 게 사실이지만, <인크레더블 헐크>가 주는 말초적인 감각의 쾌락 역시 쉽게 폄하하지 못할 요소이다. <헐크>와는 다른 노튼 식의 유머 역시 점수를 높게 줄 수 있는 부분. 노튼 옵빠가 블록버스터에서 낭비될까 봐 조마조마했었는데, 브루스 배너에 이 정도의 멋진 숨결과 개성을 불어넣은 건 역시 노튼이기에 가능한 부분이다. 물론 나는 에릭 바나의 브루스 배너 역시 좋아하지만, 역시 노튼의 브루스 배너가 한 수 위였음은 부정할 수가 없겠다. 문제는 역시 연출인 게지. (이안 만세!)


영진공 노바리

ps1. 마지막 장면에서 녹색눈으로 씨익 웃는 노튼 오빠의 압도적인 표정. 꺄악~!

ps2.
팀 로스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아저씨가 서른 아홉이란 건 좀 사기…

ps3.
컬버대학 교정에서 싸울 때 헬기에서 박격포를 쏘자 헐크가 자신의 온몸으로 베티를 화염으로부터 막아내는 장면, 이 장면은 두 번째 볼 때도 참 짠하면서 애절하더라.

ps4.
대놓고 레슬링 흉내라니. “Hulk Smashhhhhhh~!!”에서는 정말 눈앞에 만화 말풍선이 튀어나오는 듯했다. 게다가 역시 헐크는 미녀 앞에서 무지하고 순진한 바보 머슬이었… (귀여워!!)

ps5.
마지막에 깜짝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어쩐지 <아이언맨> 때보다 더 사악한 악당으로 보인다.

<색, 계>,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린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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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스타 워즈> 시리즈를 꼽고 싶습니다. 외세에 저항하는 반군들의 이야기이고 특히 홍콩 대학 출신의 젊은 스파이들이 목표물로 삼고 있는 매국노 이(양조위)가 다스 베이더의 포스를 뿜어대고 있기 때문이죠.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에서 부자 관계로 전환되는 부분과(정확히는 부자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지만요) <색, 계>에서 왕 치아즈(탕웨이)와 이의 관계가 단순한 남녀 관계 이상으로 발전한다는 점이 내러티브 구조 상의 유사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색, 계>와 <스타 워즈>를 비교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으십니까? 속 알맹이가 아니라 이야기의 골격이 그렇다는 얘깁니다.1)

역시나, 치아즈와 이의 격렬한 전쟁과도 같은 정사씬은 과감한 노출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러쉬>(1991)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2) 영화 보다는 주제곡으로 사용된 에릭 클립튼의 Tears In Heaven이 큰 인기를 얻었더랬죠. 마약반 형사들이 범죄자들을 잡기 위해 스스로 마약 중독자가 되어간다는 얘기였는데요, 후반에 남자 형사(제이슨 패트릭)가 죽고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여자 형사(제니퍼 제이슨 리)가 홀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조깅을 할 때에야 기다리던 주제곡이 나오더군요. 영화의 장면 중에 두 남녀 형사가 코카인에 취해 사경을 헤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사 장면도 있구요. 치아즈와 이의 정사씬을 보다가 <러쉬>에서 마약에 취한 두 남녀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습니다. 양조위와 탕웨이의 그 표정은 배우들의 연기, 그 이상이더군요. 두고두고 생각나게 될 명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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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정사를 치르는 치아즈는 부모와 이성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젊은 여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치아즈가 연기하고 있는 막 부인이라는 가상 인물이기도 하지요. <색, 계>를 보는 방법3) 중에 하나는 치아즈가 막 부인을 연기하는 영화 속의 영화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치아즈의 아버지는 혼자 영국으로 가 재혼을 해버립니다. 이때 버림받은 치아즈를 위로해주고 그녀의 눈물을 지켜봐준 존재는 룸메이트가 아닌 영화였습니다.4) 왕치아즈가 학생 극단에 참여하고 치기어린 아마추어 암살단 활동에 동참하는 이유도 자기 삶 속의 커다란 결손을 메우기 위함입니다. 치아즈는 자기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여인들을 따라 막 부인을 연기합니다. 완벽한 막 부인을 연기하기 위해서라면 처녀성을 버리는 일 조차 능히 해낼 수가 있습니다. 홍콩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끝난 이후 치아즈의 3년은 아무런 배역도 맡지 못한 신인 여배우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생활의 고단함은 배우에게 독기를 품을 수 있게 해줍니다. 죽느니만 못한 삶에 대한 자기 인식은 이제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용기로 쉽게 치환되지요. 상해에서 새로운 작전의 개시. 다시 막 부인으로 캐스팅된 치아즈는 마침내 이와의 에로틱 멜러를 연기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치아즈와 이의 첫번째 정사 장면은 상당히 놀랍습니다. 그런 식으로 첫 정사가 이루어지리라 예상한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이의 캐릭터가 구체화되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멜러 장르의 컨벤션을 무너뜨리는 츠아즈와 이의 첫 정사는 다름아닌 두 개의 색(色)이 계(戒)를 두른채 맞부딪치는 첫 합입니다. <색, 계>는 계가 해체되고 각자의 색을 드러내게 되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다스 베이더의 갑옷과 루크 스카이워커의 광선검 같았던 각자의 계를 손에서 놓치는 순간, 속살 보다 여린 치아즈와 이의 색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맙니다.5) 하나는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생명으로서의 색이죠. 둘이 바뀌었다 한들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똑같습니다. 두 남녀가 계를 두른채 시작해서 마침내 색을 드러내고, 그 색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만다는 이야기는 인간 보편의 경험담이기도 합니다. <색, 계>가 강한 호소력을 지닌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멜러의 보편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전달하는 연출과 배우들의 역량이 관객들의 계를 해체시키고 색을 건드릴 만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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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는 정말 오랫동안 좋아해온 배우이지만 <색, 계>에서는 정말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놀랐습니다. 오죽하면 다스 베이더를 떠올렸겠습니까. 강아지 같았던 그 검은 눈망울이 짙은 회색 연기를 뿜어대는 광경이라니. 이가 상해의 관청 건물 내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그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런 이에게 접근해가는 치아즈는 처음부터 계를 앞세우지 않았더라면 이에게 그런 농염한 눈빛을 보낼 일이 없었겠죠. 그리고 막 부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황홀한 표정이 나올 수가 없었을 겁니다. 살을 맞대면 마음이 저절로 따라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건 치아즈의 막 부인 베드씬 연습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의 계를 풀고 색을 열어젖히기 위해서 치아즈는 막 부인으로이긴 하지만 자신이 가진 색을 전부 쏟아 붓습니다. “내가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그는 절정에 이르지 않아요.” 너무 많이 쏟은 색은 결국 막 부인이 아닌 왕치아즈를 움직이고, 이 영화에서도 다시 한번 모사는 새로운 실재로 전환됩니다.

완벽한 치아즈와 막 부인을 보여준 탕웨이는 신인이긴 하지만 확실히 그 이상의 역량을 가진 배우입니다. 하지만 연기력이 공인된 배우들조차 어떤 영화에서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 것을 보면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는 역시 연출자의 몫이 큽니다. 말 그대로 디렉팅을 하든 배우가 스스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도록 도와만 주든, 아니면 니 맘대로 한번 해보세요 완전히 풀어놓든, 배우의 캐스팅과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를 만들어내는 건 배우 스스로와 함께 감독이 하는 일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재능이 박한 연기자라 하더라도 명장을 만나면 뛰어난 연기를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고 아무리 뛰어난 명배우라 하더라도 배우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지 못한 감독을 만나면 형편 없는 보릿자루 연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감독은 배우가 캐릭터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그리고 그의 연기가 최대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연기 지도 뿐만 아니라 조명이나 세트와 의상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영향을 미치는 조물주입니다. 양조위도 마찬가지지만 치아즈의 뛰어난 연기는 곧 이 안 감독의 연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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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즈와 이의 색이 그 속살을 드러내는 부분은 침대 위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치아즈가 모국어로 노래를 할 때, 이의 계는 완전히 해체되고 색만 남게 됩니다. 남녀의 색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의 색까지 점령당하고 맙니다. 시대는 두 사람을 적으로 만나게 했지만 인간의 색은 그렇게 만나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가 사랑의 증표를 치아즈에게 선물할 때, 치아즈의 계도 크게 흔들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치아즈는 막 부인으로서의 연기를 포기할 수 없었죠. 막 부인이 맡은 역할은 이의 계를 해체하고 색을 완전하게 빼앗는 일이었지 자신의 색 때문에 계를 놓치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6캐럿 원석에 흔들렸던 왕치아즈를 완성된 ‘색’ 있는 다이아 반지가 다시 한번 뒤흔드는데, 이때에도 치아즈는 마음의 부담감 때문에 손에 끼었던 반지를 서둘러 빼내려 합니다. 손에 끼고 다니다가 도둑 맞을까 겁난다는 핑’계’를 대면서요. 그런 치아즈를 완전히 무너뜨린 건 이의 말 한 마디였습니다.


“내가 지켜줄께.”


그리고는, 우다다다. 대반전과 긴장의 풀림. 아무 것도 안들리는 멍한 순간. 이제 내 색은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처연하게 돌아가는 바람개비. 의미 없이 달아나려 해보지만 이미 갇혀버린 구역. 영혼의 바리케이트. 나도 저녁 밥을 짓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를 수 있는 저 아낙네처럼 살고 싶었건만… 어느 작은 구석 하나도 서투르게 배치하는 법이 없는 대가의 솜씨 그대로입니다. 이 안 감독의 <색, 계>는 그렇게 관객들의 계를 열어젖히고 각자의 색을 드러내놓게 만들고 있습니다.

1) 그럼 다스 베이더와 루크 스카이워커가 부자 관계도 아니면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하는 새로운 버전의 <스타 워즈>는 어떠십니까? 쿠~ 쿠~ 내가 지켜줄께. 가요, 어서요. 두 연인은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광선검을 휘두르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며 불멸의 사랑이 되는 겁니다.

2) <슬리퍼스>(1996)에서 일약 주연을 맡기 전의 제이슨 패트릭과 제니퍼 제이슨 리가 공연했고 여성 영화제작자인 릴리 피니 자누크의 유일한 영화 연출작이기도 합니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직접 연출까지 해볼 기회를 잡았던 모양입니다. 형사 액션물의 외양을 가진 영화를 그렇게 잔잔한 드라마로 바꿔버렸으니 쫄딱 망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무척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영화입니다.

3) 양조위가 연기한 이의 관점에서 설명해보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긴 합니다만, <색, 계>는 치아즈의 입장에서 따라가는 편이 훨씬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더 많이 나오잖아요) 치아즈의 성장 영화, 치아즈의 사랑과 야망, 그외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는 영화는 볼 때에도 좋지만 보고난 후에도 즐겁습니다.

4)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음을 단단하게 잘 묶어놓고 있다가 영화를 보면서 바보 같은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 걸까요. 삶 속에서 존재하는 또 하나의 계와 색입니다. 영화는 색이다!

5) 이 부분에서는 치아즈 보다 이의 상처가 더 커보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그 황량한 표정이란. 치아즈는 자신의 계를 손에서 떨어뜨릴 수 밖에 없을 만큼 이에 대한 색이 마치 댐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물줄기처럼 쏟아져나왔던 거죠. 치아즈는 색이 상처를 받았다기 보다 색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쪽이라고 하겠습니다. 색이나 생명이나 그 근본은 같은 것이겠지만요.

6) 왜 여자에게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색, 계>를 보면서 평생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심순애에 대한 김중배의 사랑도 여자의 마음을 사기 위한 돈 지랄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도요. 이제 심순애에 대한 김중배의 사랑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합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