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진실과 사실의 차이

<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실화가 특기할만한 역사적 소재임에도 영화속에서 그 역사적 소재는 단지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래서 역사는 우리네 평범한 보통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고 있다는 철학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또한 그 철학적 근거 때문인지, 한두명의 주연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비교적 다양한 인간군상들에 의해-비록 만족스러울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하지만- 영화가 완성되어지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화려한 휴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나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화려한 휴가>를 보는 내내 나는 연신 불편한 자리를 고쳐 앉고 지루하고 따분한 나머지 잠시 딴생각에 빠져드는가 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의 생뚱맞은 대사에 어이없음의 실소를 픽픽거리고 마침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시민군과 공수부대의 도청전투씬에 이르러서는 깜박 졸기까지 한 반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서 나는 유쾌하게 박장대소하다가 불현듯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는가 하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도 하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가슴속에서 공명하는 감동의 여운을 남김없이 즐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려한 휴가>의 가장 큰 패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 광주를, 비록 제작진은 정반대로 의도하였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어디 먼나라 과거의 가슴아픈 비극쯤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여졌다는 점이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5.18 광주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속이 뻔히 들여다 뵈는 짓거리이긴 하지만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5.18묘역을 방문하고, 사람들은 5.18 광주가 독재에 의해 짓밟힌 민주화의 정신이며 우리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18 광주의 진실은 아직도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아직도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 희생과 고통은 온전히 피해자들이 짐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때의 가해자들이 그 희생과 고통을 똑같이 짊어지라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을 지고 그에 따르는 진심어린 사죄와 경우에 따라서는 응당 치러야 할 법적, 사회적, 도덕적 처분을 달게 받음으로써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수많은 피해자들의 눈물과 한숨 생까기의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듯, 우리는 5.18 광주의 진실을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5.18 광주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5.18 광주를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진실에 어떤 시각으로든 접근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화려한 휴가>는 5.18 광주의 ‘진실’을 말하려 하기 보다는 5.18 광주의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진실’이 실종된 영화는, 사람의 두피를 도끼로 벗겨내는 게 취미인 절대악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표현이 더 올바르겠지만-들과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 수 밖에 없는 절대선 백인들 간의 서부 활극처럼, 명백한 선악의 대립구도속에서 액숑과 써수펜수와 총격전이 난무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차라리 액숑영화의 본분을 지켜 살떨리는 써수펜수를 쭈-욱 유지시켰으면 그나마 봐줄만 하련만, 어줍잖은 유머와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최루성 신파멜로까지 우걱우걱 낑궈놓았으니 어느새 영화는 황량하고 거친 산 위에 올라 종잡을 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린다.


“감동적이지?”


거금 8천원이 아까와서 무거워진 눈꺼풀을 필사적으로 치켜뜨며 저항했지만, 어느새 깜박 졸고 말았던 나는 퍼뜩 놀라 얼결에 대답한다.


“딸꾹-“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감동적인 건 삶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감독 임순례가 자신의 전작들에서 끊임없이 천착했던 것 처럼, 삶이란 피폐하고 남루하며 고역스럽고 불가항력적으로 악순환되는 것이고, 감당키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는 그 속에서 울고 웃고 침묵하다가도 바락바락 악도 쓰며 아무래도 헤어날 길이 없을 것 같은 수렁 속에서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그 삶의 어딘가에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희망이, 지금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도록 우리를 지탱해 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임순례는 그 ‘진실’을 전작들에서 보다는 훨씬 더 경쾌하고 알기 쉬운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비록 상업성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후퇴했을 것이라 의심되는 부분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듣자니 경제적으로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비흥행감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은 그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자신의 색깔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라 짐작되는 부분 역시 도드라져 보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역전에 동점, 재역전에 다시 동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2차 연장전까지 치렀으나 결국 승부 던지기로 은메달에 머물렀던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이라는 드라마틱한 소재로 재구성되었기에 스포츠영화가 빠지기 쉬운 함정인 승리만이 감동을 준다는 승리지상주의를 교묘하게 벗어나면서도, 중요한 것은 승부나 그 승부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승부에 임하기까지의 역경과 고난, 그리고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세라는 전형적이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준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전형적이지만 감동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건, 고단하고 짜증스러우며 도대체가 내일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삶 속에서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우리에게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


영진공 백운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왠지 그녀들이 전부 나 같다.


제가 이렇게 펑펑 울다니요. 아줌마가 되어서 설움이 많아졌는지, 눈물이 많아졌는지. 암튼 펑펑 울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어서 내 설움에 울고, 너무 안 되었어서 연민에 울고 그랬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바로 보여지는 핸드볼 경기. 예닐곱살 쯤 된 아이가 경기장으로 달려들어오고, 골키퍼를 보던 수희(조은지)가 당황을 합니다. 미숙(문소리)이 손짓해 아이더러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동료 중 하나가 아이를 데리고 나갑니다. ㅎㅎㅎ 저 이 장면부터 울었어요.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경기해야 하는 문소리 처지에 울고, 중요한 경기 중에 뛰어드는데도 배려해 주는 동료들 배려에 울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 ‘핸드볼 큰잔치’라는 현수막 위로 텅빈 객석과 터지는 분수불꽃. 울던 참에 더 울었습니다.


‘아줌마’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저도 어느새 저를 ‘아줌마’라고 표현하고 있구요. 가끔 ‘제3의 성’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하고,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억척스러운’, ‘앞뒤 분별이 없는’, ‘무식한’, ‘세상물정 어두운’ 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지요. 저의 스무살 시절.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을 가지고 처음으로 전자기타와 앰프를 사러 낙원상가에 간 날. 부족한 예산에 앰프 값 때문에 고민할 때 악기상 청년이 권한 것이 ‘아줌마 앰프’라는 것입니다. 일정한 상표도 없고, 베이스 건 기타 건 아무 거나 꽂아도 되는 앰프. 그것이 ‘아줌마 앰프’라니 참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기가막히게 잘 어울리는 조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바로 아줌마거든요. 이름도 무엇도 없고, 뭐든지 다 하긴 해야 하는 존재.


결혼해서 애를 낳고 나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줌마’라는 계급이 됩니다. 경제적 여유가 조금 있건, 없건, 남편에게 사랑을 받건, 못 받건, 대학을 나왔건, 말았건, 직업이 있건, 없건, 그냥 ‘아줌마’가 됩니다. ‘사모님’이라는 약간의 예외들이 있긴 하지만. ‘아줌마’는 그 자체로 계급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약간 있는 혜경이나, 빚과 생활고에 쪄든 미숙이나, 불임 때문에 고생하는 정란이나.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십시오. 세계적인 선수이건 말건, 유명팀의 감독이건 말건, 남편의 사랑을 진하게 받는 국밥집 사모님이건 말건, 다, 그냥, 아줌마입니다. 나도 아줌마가 되어서 그런지 왜 어느 아줌마 하나 짠하지 않은 아줌마가 없습니다. 그들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아줌마가 되고 나니 오지랖이 넓어지나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 분야에서 최고에 올랐건, 금메달리스트이건 간에 그들은 '아줌마'입니다.


미숙. 아이고. 경기 끝나고 어떻게 했을지. 화면 속이라도 들어가서 남편 파산 신청하고, 이혼하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만. 그 또한 쉽지 않겠지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혜경의 처지도 그만그만 이라는 것을 보면요. 전 혜경이 아이와 일본어로 소통하며 안아주는 장면에서도 울었습니다. 아무리 경제력이 있어도, 또 미숙과 달리 챙겨주는 친정엄마가 있어도, 그저 혼자 몸으로 힘들게 애를 키우는 이혼녀일뿐인걸요. 돈 벌겠다고 타지까지 가서 -애 아빠가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애를 맡기고 키우느라 자신의 아이와의 소통마저 일본어로 해야하는 그녀의 삶은요. 에효. 구질 구질 애들 키우느라 고생 바가지를 해도, 또 애 안생기는 정란은 이들이 부럽겠지요. 그래도 그들은 정란이 못해본 국가대표 생활을 지겹도록 해 본 이들이고, 그녀가 못 낳은 아이를 하나씩 꿰찬 여자들이니까요. 에효. 대관절 애가 뭣이관데.


근데, 아줌마한테만 그렇게 공감이 가는 게 아닙니다. 어린 선수들부터 낀 세대 수희까지. 그들 안에 제가 있고, 또 저 안에 그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낀 세대 수희. 롤모델도 동기도 없는 그녀가 안 쓰럽습니다.
일단 수희요. 수희는 ‘낀 세대’입니다. 기라성 같은 핸드볼 선수들로 호령하던 왕년의 혜경과 미숙과 같은 세대는 아닙니다. 그들과 같이 뛰어본 경험이 있고, 그들로 부터 배운 세대지요. 그리고 자신과는 전혀 다른 문법을 가진 장보람과 같은 아랫세대와 뛰어야 하는 세대입니다. ‘대안 없는 골키퍼’라는 수희의 포지션도 참 상징적입니다. 수희는 낀세대라는 것만으로도 ‘롤 모델도 없고, 자신이 롤 모델도 될 수 없는’데, 골키퍼라는 포지션은 그 위상을 더욱 강화합니다. 동기는 필드에 없고, 그렇다고 자기가 일인자인 것도 아니고. 참으로 막막한 세대입니다.

제가 입사할 때 저희 부문 공채입사자 중 여자는 저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참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는데, 회사 생활 하면서 느꼈던 그 적적함이 수희를 보면서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윗 선배들한테 참 싹싹하게 하면서 진심으로 대하고, 배려심 많은 수희를 보며. ‘그래 니가 나보단 백배 낫다. 수희 화이팅!’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보람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물론 착각이었습니다마는) 입사 초 저는 제가 대단한 인재일 거라는 생각을 했었고, ‘월급쟁이로 시작을 했으면 별을 따야지’라는 성공할 수 있다는 야심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갖고 있었습니다. 헌데, 입사하고 보니 현실은 좀 이상했습니다. 제가 입사한 직후, 첫번째 여자 임원이 탄생을 했습니다.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하지만 얼마 후 녹취록을 작성하러 들어간 임원회의에서 제 우상이 남자임원들에게 완전 밥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새 애들은 근성이 없어 vs 선배처럼 살기는 싫어요

으로 밟히는 것을 보고는 거의 절망을 했지요. 그녀의 평소의 고군분투는 내가 꿈꾸는 임원의 모습과 달리 전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도 알아버렸구요. 왁왁대는 김혜경과 애나 끌고 다니는 한심한 미숙을 보았을 때의 그녀의 심정을 알것만 같습니다. “요새 누가 맞으면서 운동해요?”라는 보람의 말도 저는 가슴 절절히 이해가 됩니다. 회사에서 꽤 자리잡고, 높은 자리에 오른 여선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찬찬히 보면 ‘여성성을 완전히 버린 선배’ ,’아첨과 아부가 남자들보다 더 완벽하게 자리잡은 선배’, ‘나 몸하나 망가지는 것 쯤은 신경쓰지 않는 완전 희생형 선배’, ‘후배들 등쳐서 치고 빠지는 선배’들이어서 그 누구도 롤모델로 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진정 나를 아끼는 마음으로 불러서 밥을 사주며,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라’라며 코치해 줄 때, 저는 마음 속으로 ‘아니오 선배. 저는 그렇게 까지 해서 성공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라고 외쳤었습니다. 비주류로 마이너로 취급받으면서도 잡초같은 생명력으로 살아남은 그 선배들에 비해, 그래도 ‘표면적으로는’ 주류로 인정해 주는 가운데 사회생활을 시작한 저를 ‘요샛것들은 근성이 없어.’라고 생각했을 것은 당연하고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배세대 보다 못한 불안한 뒷세대

현자나 진주의 아줌마 선수들을 무시하는 싸가지 없는 모습도 저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돌 갓지난 아이를 데리고 혼자 기차를 타고 시댁에 간 적이 있습니다. 기차안에서 아이가 빽빽 울어대고 내가 어쩔 줄 몰라 당황을 하면, 안쓰러워 도와주는 것은 같은 처지의 애엄마들이고, 무관심한 것은 남자들이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것은 곱고 예쁜 처자들입니다. 애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을 때, ‘애 있으면 다니지 말지’라며 싸가지 없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사람들은 여고생, 여대생, 젊은 20대 초반 여성들입니다.
저는 속으로 “너는 아줌마 안 될줄 아냐?” 하고 욕했지만, 나중엔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나는 저렇게 되기 싫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애기 단속시키는데 애초의 자기의 일이 아닌 남자들이야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약간 불쾌해도 참고 마는 것을 거구요. 간신히 엔트리에 들어와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현자와 진주 앞에 나타난 아줌마 트리오가 반가울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건재한데, 사는 모습을 보자니 형편없고, 그런데 자신들은 그들보다 실력조차 못하니까요. 그들을 볼 때마다 그들 보다 더 암담한 자신의 미래가 떠오지 않았을까요. 한번도 일인자였던 적이 없는 저는 왠지 현자와 진주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 싶습니다.


모든 여자가 다 나 같습니다. 다 이해를 할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제겐 너무 완벽한 영화입니다. 미장센이건, 스포츠 장면의 박진감이 부족하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저에겐 모든 여성의 삶이 박진감 넘치게 보여진 영화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신... 한번만 힘빼고 좀 울어주지...울어도 괜찮아.

다만, 저도 엔딩장면 하나만큼은 이렇게 되었었더라면… 하고 욕심을 내 봅니다. 저는 ‘지더라도 울지 않는 거다’라고 말했던 안승필이, 그 잘난척 하던 면상을 가지고 오히려 여자 선수들보다 더 펑펑 우는 것으로 엔딩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미숙을, 혜경을, 보람을, 현자를 끌어안고 더 서럽게 무릎꿇고 엉엉 울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제가 원하는 남자들과의 화해와 소통의 방식입니다. ‘우리 울지 않기로 했잖아요’라며 잘난 척을 떠는 것이 본래 못난 남자들의 속성이라 해도 말입니다.


열라 어렵게 영화 보고 몇자 썼네요.
원래는 TV나 보는 아줌마
영진공 라이

임순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베낀 제목, 그러나 어울리는.


작년 초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시나리오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시나리오 상의 영화는 지금 완성된 영화와는 아주 약간 뉘앙스가 달랐습니다. 내용도 거의 다르지 않고 현재 홍보 역시 ‘아줌마’를 키워드로 잡고 있긴 하지만, 뭐랄까, 시나리오로 읽었던 영화는 좀더 ‘막장 인생의 마지막 비상의 화려함’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승부와 상관없이, 나도 가치있는 인간이며 스스로 존엄한 존재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였달까요. 완성된 영화 역시 이것을 강조합니다만, 그보다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승부차기 골에 실패하고 승부가 결정된 순간 아쉬워하며 주저앉고 울음을 터뜨리는 선수들의 모습 때문인지, 죽도록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하는 비장미 쪽이 더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실 시나리오 상으로는, 미숙(문소리)이 승부차기를 막 던지고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은 채 막바로 무지화면에 “이 날 핸드볼 팀은 결국 은메달을 땄다”는 자막이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 돼 있었습니다. 그 시나리오에 그토록 흥분하며 눈물을 쏟았던 것도 바로 그 엔딩 때문이었는데, 전 지금도 이 엔딩이 지금의 엔딩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반 대중영화로서 그리 친절한 엔딩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미 <델마와 루이스> 같은 지극히 상업적인 영화에서도 영화사에 길이 남는 특별한 엔딩을 본 적이 있는걸요. 이 영화가 그 앞에서 계속 고양시켜 왔던 흥분은 이기느냐 지느냐, 전세계 최고가 되느냐, 금메달을 따느냐를 이미 초월한 것이었고, 안승필(엄태웅)도 힘주어 말하듯 이기든 지든 그 순간은 그들에게 ‘최고의 순간’이라 붙여도 될 만큼 가장 아름다운 투혼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지요.


전 정말로 이 영화가, 우석훈 박사의 논의를 빌면 누릴 기회가 아직 남아있었던 X세대에 속하면서도 ‘여성’이기에 혹은 대졸이 아니기에 이미 88만원 세대보다 일찍부터 88만원 세대로 살 수밖에 없었던 지금의 30대 초중반 여성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또 그들을 위한 영화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술자리에서 뵌 심재명 대표에게 흥분해서 ‘이 영화의 존재가 너무 고맙다’고까지 말을 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오히려 패배감을 더 부채질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게 현실이지 않냐고요? 하지만 같은 패배라도 장엄하고 숭고한 패배가 있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패배가 있는 법입니다. 패배의 역사를 오히려 승리로 전화시켰던 <판의 미로>의 결말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노동계급을 위한 판타지’라는 건 그저 우울하고 절망적인 패배도, 손쉽고 ‘우기기’에 불과한 승리도 아닌, 이렇게 당당하게 근거를 가진 아름다운 패배의 승리로 수놓아져야 마땅합니다. 가장 모범적인 예가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저 하늘 높이 비상하고, 형과 아버지가 객석에서 눈물어린 박수를 치는 마지막 장면이며, 위에서도 언급했듯 <델마와 루이스>의 아름다운 우정의 승리의 장면입니다. 하지만 뭐, 시나리오 상의 설정은 실제 영화를 찍으면서 바뀌기 마련인 거고, ‘책’ 상태를 가지고 지금의 영화가 어때야 했다 저때야 했다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명확한 캐릭터들의 대립과 갈등과 화합입니다. 우리는 크게 미숙(문소리)과 혜경(김정은)의 갈등, 혜경과 승필의 갈등, 그리고 노땅그룹과 신진그룹의 갈등을 목격하며, 비인기 종목이다가 올림픽 때만 되면 당연히 메달 따와야 하는 종목인 핸드볼을 하는 이들과 이들을 둘러싼 환경의 갈등을 봅니다. 미숙과 혜경, 혜경과 승필을 잡는 카메라는 매우 고집스럽게도 각 인물들을 각각의 프레임에 가둡니다. 바닥을 닦고 있던 혜경과, 승필로부터 혜경이 돈을 마련해준 것이란 사실을 듣고 혜경에게 온 미숙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데 두 사람을 한 프레임으로 잡는 컷이 없습니다. 한 컷에 한 인물씩 장면을 반복할 뿐입니다. 이들이 비로소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잡히는 건, ‘가출했던’ 미숙이 다시 선수촌에 돌아와 혜경과 훈련을 같이 하는 장면부터입니다. 혜경과 승필의 경우도 마찬가지. 선수촌을 나가는 혜경을 잡기 위해 왔으면서도 잡는 말을 못 하는 승필과 혜경을 차 안에서 함께 잡는 씬이, 비로소 처음으로 두 인물을 한 화면에 잡는 장면입니다. 이런 식의 구성 방식은 분명 각 인물의 고립감과 고독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만, 컷과 컷이 매우 단조롭다는 느낌, 그리고 화면 안이 상당히 비어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문소리와 김정은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이런 단독 컷들을 다 채울 만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의 각자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이런 프레임이 과연 좋은 프레임인지, 의심이 듭니다. 사실 이 씬 구성에 굉장히 놀랐어요. 너무 어설퍼 보여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임순례 감독은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추락하는 인물들을 통해 더없이 절망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들을 풀어냈지만, 그가 정말로 재능이 있는 분야는 코미디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애초 그를 주목받게 해주었던 단편 <우중산책>에서도,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 만든 단편 <그녀의 무게>(인권영화인 <여섯 개의 시선>에 수록돼 있습니다)에서도 드러납니다.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남자였고, <우중산책>과 <그녀의 무게>의 주인공들이 여자라는 건 단순히 성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성별이 가지는 섬세함과 디테일함의 표현 문제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애초 장르 자체가 코미디인 건 아니지만 영화 내내 굉장히 자연스럽고도 솔직한 웃음을 안겨주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그가 그리는 캐릭터들의 그 생동감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화합의 드라마에 대한 낙천적인 시선의 디테일 묘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임순례 감독은, 여성을 묘사하는 데에 더 생생한 캐릭터를 부여한다는 얘기지요. 사실 같은 영화 안에서도 승필에 대한 묘사는 좀 상투적인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신진그룹 선수 중 하나가 “지들끼리 다 해먹으라 그래”라는 대사를 하는데, 저는 이게 무척 마음에 걸렸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미숙과 혜경이니 만큼, 우리는 ‘노장의 나이에도 열심히 뛰며 심지어 젊은 선수들을 압도해버리는’ 그녀들에게 손쉽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지만, 미숙과 혜경의 존재는 한편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야 할 선수들의 앞길을 막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미숙과 혜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생활을, 경력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하는 암울한 현실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체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노련함과 연륜으로 젊은 선수들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신진 선수들을 휘어잡는 것을 무턱대고 응원만 하기엔 마음 한 구석이 어두운 것도 사실이네요. 저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미숙과 혜경의 사정 역시 매우 절박합니다만, 이것이 젊은 선수들의 앞길을 막고 뺏으면서까지 해결돼야 하고 응원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88만원 세대]를 읽으면서, 오히려 내가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를 화두로 잡게 된 저로서는, 특히 감독대행에서 곧장 선수로 다시 위치를 바꾸는 혜경의 선택이 탐탁지 않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손이 맞닿은’ 게 진짜 뽀인트. 핸드볼은 단체경기라니깐요.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마지막 결승전이네요. 전 당황스러웠던 게, 이 영화가 본경기가 끝났고, 동점 상태에서 첫 번째 연장전,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두 번째 연장전, 그리고 또다시 동점 상태에서 승부차기로 가는 그 긴박감과 박진감이 완전히 지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이 전반전인지 후반전인지, 첫 번째 연장전인지 두 번째 연장전인지, 아나운서의 해설 멘트를 통해 정보를 주는 건 매우 진부한 수법이긴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긴장감을 계속 고조시켜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영화는 코트 안에서 선수들을 따라잡는 데에 바빠서 그런 식의 정보를 그리 명확히 주고 있지 못하고, 응당 필요한 긴박감 조성에도 실패합니다. 아무리 결과가 예정돼 있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경기라 해도 마찬가지예요. 설마 영화를 보러 온 모든 사람들이 그 경기를 모두 TV로 보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승패와 화려한 경기보다 각 캐릭터들의 감정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싶었다고는 하지만, 그 감정의 스펙터클 역시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들 하나하나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응원을 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역시 장면 구성에 있어 실패한 씬이 아닌가,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제발 ‘흥행감독 임감독’ 되셨으면 좋겠다”라고 빌었는데, 그 소원은 이루어진 듯합니다만, 뭐랄까, 임순례 감독의 굉장한 강점과 매력을, 한계와 함께 봐버린 듯해서 기분이 좀 그렇습니다. 그래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근간에 나온 한국영화들 중 가장 응원과 지지를 받아야 할 영화라는 사실은 여전합니다. 이 영화가 시도한 새로운 도전들과 그 도전들을 감내한 용기들(여러 모로 ‘장사 안 될’ 소재들을 갖고 보편적인 감동이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은 분명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지금 한국영화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이 영화는 선취해 내고 있습니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