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전달과 공유




기업체와 프로젝트를 할 때 종종 듣는 조언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 사람들은 설명하는 걸 싫어한다는 거다. 왜 그런 결론을 얻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지 말고 결론만 얘기해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거다. 사실 나도 별로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왔지만, 기업 사람들 앞에서 설명을 하다가 “그래서 결론이 뭐냐?” 는 반응을 받아보면서 느끼는 건 역시 나도 설명에 의존하는 쪽이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안 그래도 여러 가지 일로 바쁜 사람들이니 일일이 설명을 듣기 보다는 간단히 정리된 결론을 듣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기업은 빠른 의사결정을 생명으로 하는 곳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후에 여기저기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런 분위기는 우리나라 기업들에게서 특히 심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외국에서 컨설팅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설명을 줄이는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결론이 타당한지 판단하려면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떻게 딱 결론만 듣고 그걸 쓸지 말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애초부터 컨설팅 같은 건 맡길 필요가 없는 수준의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이런 기업 문화는 ‘커뮤니케이션’ 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서 나온다.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은 의사소통 이상의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때 말하는 의사소통은 ‘정보의 교환’이다. 내가 가진 정보를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이 가진 정보를 내가 받는 과정이 의사소통인 거다. 우리나라 기업체들이 기대하는 의사소통도 그런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정보를 기업체에게 주고, 기업체는 그 대가로 우리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보를 교환하는 게 목적이라면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전달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교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걸 공유하는 과정 전체를 말한다. 이해하려면 설명을 들어야 한다.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상대방의 결론뿐만 아니라 그런 결론을 도출한 사고의 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이해’다. 그리고 사고의 틀을 이해하게 되면 나중에는 주어진 결론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전혀 다른 문제해결방식을 찾아낼 수도 있게 된다. 결론보다는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훨씬 영양가가 높다는 거다.

결론만 듣다 보면 계속 누군가를 시켜서 결론을 내오게 하는 수준에 머문다. 하지만 틀을 이해하다 보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뭐 그래도 시간은 없고 돈은 많으니 계속 결론만 내려달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좋다. 하지만 결론만을 원하는 정보 교환적 의사소통의 문제는 단순히 사고력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부작용도 있다는 점이다.

보통 우리는 남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 먼저 내 생각을 ‘전달’하려고 한다. 이게 바로 일상적인 정보교환식 의사소통이다. 그런데 아무리 전달을 잘 해도 상대방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전달은 소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전달도 메시지가 오가는 것이므로 전달받는 사람과 전달하는 사람 사이에 뭔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그건 힘에 의한 강제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보통 전달이라고 말하는 의사소통은 실제로는 ‘지시’와 ‘결과보고’다. 물론 가끔씩 ‘현황보고’도 있고 ‘불평’ 이나 ‘요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시와 복종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수직적인 구조에서 벗어나서 팀 단위의 협업을 추구한다면 문제다. 팀 단위에서는 이전에 비해서 명확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없다. 팀장도 결국 팀원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권력이 주어지지 않은 자가 이런 일방적인 전달을 시도하자면 문제가 생긴다.

연산의 유일한 소통대상 녹수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이 신하들의 직언에 오히려 폭군이 되는 것으로 반응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때까지 연산이 경험한 것은 일방적인 전달이었다. 선왕은 그에게 왕의 풍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신하들은 그에게 선왕을 본받으라는 메시지만을 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권력이 신하가 아니라 왕에게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신하들의 ‘충언’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 연산에게 열려진 유일한 소통의 창구는 장녹수 뿐이었다. 녹수와 연산은 최소한 서로의 욕구를 교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연산은 녹수에게 억눌린 감정을 해소할 출구를 찾았고 그 대신에 녹수에겐 지위를 선사했다. 녹수는 연산이 필요로 했지만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응석을 받아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제공했고 그 대신 확고한 위치를 얻었다.

그러니 의사소통의 관점에서 보자면 연산군과 장녹수의 연대는 팀원들이 그나마 팀장보다는 같은 동료들끼리 친해지는 거나 마찬가지의 결과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정보의 교환 혹은 가치의 교환에 머무르는 의사소통이었다.

사람을 더 즐겁게 하는 소통은 교환이 아니라 공유에서 나온다.

광대패는 청중과 놀이판을
공유한다. 그들은 상대에게 어떤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당연히 설교나 교훈도 없다. 그저 같이 느끼고 같이 즐길 뿐이다. 청중이 공연자들의 마음에 반응하고 공연을 함께 공유할 때, 그 공연의 힘은 점점 더 커진다.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마술이 그렇지 않던가. 공연장에서 서로 주고 받는 대사와 역할은 실제로는 서로가 공유하는 대본을 전제로 한다.


광대놀이 같은 즉흥극에도 어떤 대본이 있다. 그 대본은 글이라기 보다는 관객들이 마음 속 깊이 담고 있었지만 서로 공유하지 못했던 어떤 심정에 가깝다. 성공하는 공연은 그 정서적인 대본, 그 관객들의 공통된 심정을 건드리는 공연이다. 이럴 때 관객들은 공연에 함께 섞여 들어가서 서로의 마음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맨날 풍악을 울리며 춤을 추는 그저 보여주는 공연만을 경험했던 연산은 즉흥적으로 서로의 합을 맞추는 광대들의 공연을 통해서 생전 처음으로 ‘공유하는 경험’을 한다. 그게 얼마나 즐거웠던지 체통도 잊고 파안대소하고 만다.

파안 대소하더니 ...

심지어 연산은 무대로 들어와 놀랍게도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을 내놓으며 공연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연산에겐 일방적인 전달만이 오가는 임금 자리 보다는 느낌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광대패의 공연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춤도 같이 추고

북도 같이 치고 ...

왕이 공길을 불러 계속 졸라대던 ‘놀자’도 그 뒤엔 동성애적 의미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또 한번 공유해보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공유는 상대를 설득시키는데도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연산이 자신의 외로움을 공길에게 전한 방식도 그림자놀이라는 공연이었고, 공길이 연산에게 장생의 무고함을 전달한 방식도 인형극이었다.

공길을 불러서도, 우리 놀자!!!


공유란 실제로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소통방법이다. 성공하는 회사는 직원들이 회사의 비전을 공유하며, 화목한 커플은 연인과 서로의 생각과 각자의 역할을 공유한다. 이심전심은 상대방을 명확하게 파악해서 가능하다기 보다는 자기들이 어떤 판에서 놀고 있는지, 그 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뭐고 각자의 역할이 어떤 건지를 그 대본을 이해하고 공유하는데서 나온다. 

영화의 성공도 결국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공유에 더 크게 좌우된다. 이전에 영화인들이 헐리우드 영화에 경쟁이 안되는 이유로 내건 것들은 대체로 그 정보에 관한 변명이었다. 엄청난 물량, 놀라운 특수효과를 담은 헐리우드 영화의 정보량이 우리나라 영화의 그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딸린다는 거였다. 그래서 고작 내놓은 대안이 안으로는 출연배우의 숫자를 늘리거나 선정적인 장면의 수위를 높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공유의 관점에서 보자면 바다건너 미국에서 만든 영화보다는 같은 땅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가 훨씬 유리하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나라 영화가 죽을 쑨 이유는 물량이 뒤져서라기보다는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예전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동시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놓지 못했던 데에 있었다. 동시대의 이야기를 동시대의 감성으로 담아내는 영화가 연이어 나오게 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 영화가 ‘잘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진공 짱가

“전우치”, 도술의 정신을 살리다

최동훈 감독이 새로 내놓은 영화 <전우치>에 대해 실망이라거나 혼란스럽다는 평이 많던데 … 물론 영화가 좀 늘어지는 부분이 있고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 지점도 있다.

감독의 전작인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의 대사빨과 치밀한 구성을 기대한 이들이
그래서 실망을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실은 <전우치>도 대사빨 좀 살리는 영화다.
이번에는 시대극 대사빨을 시도한 건데 … 일단 관객들이 적응하는데 버퍼링이 필요하지만 뭐 그럭저럭 먹히는 농담들 있다.
그 중 몇 개는 관객들이 자지러지기도 하던데 … 특히 유해진의 역할이 컸다.

“턱주가리”, “장사치들에게 나라를 맡긴다니, 우환이…” 등등의 대사는 어긋나는 두 시대를 관통하는 대사빨이 아니던가. 물론 그것이 대사빨로 끝난 것이 좀 아쉽지만.

그러나!
이 영화에는 대사빨이나 구성과는 다른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도술의 기본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컨셉으로 비교되는  <아라한 장풍대작전>보다 낫다. <아라한>은 도의 한 부분인 마음을 비우고 꾸준히 수련한 자의 경지를 슬쩍 보여주긴 했지만, 도의 나머지 부분은 아쉽게도 놓쳤다.

그것이 뭐냐하면 … “세상 뭐 있어?” 정신이다.
도술은 기본적으로 해킹이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한 것도 바로 도술이다.
세상에 대한 고정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 세상을 주어진 대로 보지 않고 관점을 바꾸는 것.

그렇기에 그림 속으로 도망칠 수도 있고,
그림 속에 암자를 지어놓고 살 수도 있으며,
그림 속에 갇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술은 진지함 보다는 경쾌함의 미학이다.
<전우치>는 휘적휘적 액션을 펼치는 강동원을 내세워 이 경쾌한 도술의 분위기를 살려냈다.

그리고 하나 더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복선이다.
역시 이 영화와 비교되는 <화산고>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바로 이거다.
화산고에는 액션만 있고 이해가 없었다. 관객들은 그냥 끝없이 커져가는 액션의 자가폭주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전우치>에는 미친 무당의 예언과 스승님(백윤식)의 예언 같은
몇가지 복선이 이야기의 맥을 잡아준다.

그 결과, 관객들이 “아하! 그렇구나” 하는 경험을 얻을 수 있다.

배우들은 물론 좋다.
영화에 대해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배우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오히려 배우들이 낭비되었다고 투덜거리는 경우는 있지만.

강동원은 무엇보다도 “기럭지!”의 힘이 좋다.(미안하다. 대사는 좀 약했다.)
그 기럭지만으로도 꽤 그럴듯한 화면빨을 발휘하는 배우는 정우성 이후 첨봤다.

임수정은 예쁘고 엉뚱하면서도 생생하고 … 도사들, 특히 김윤석의 카리스마가 좋다.

그래도 아쉬운 것 하나는 조금 더 동시대성을 살렸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점이다.
동시대성이 사라지다보니, 요괴들이 불쌍하더라. 걔네들 그냥 내비뒀으면 환자들 치료하며 잘 지냈을 애들 아닌가.

게다가 “쥐 요괴” !!!
걔는 사실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는 거 많은 분들이 알고 있지 않던가?
만약 그렇게만 만들었다면 진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을 터인데 …
그게 가장 아쉽다.

물론 그랬다면 아예 개봉을 못했을 것이고 영화사와 감독은 세무조사 받았으리란 상상을 해보면 지금 이거라도 어디냐 싶다.

하 수상한 시절에 이 정도면 감동이지 뭘 더 바라느냔 생각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