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 러브”, 외화내빈의 독립 멜로 영화

최근에 새로 개봉한 세 편의 한국영화들 가운데에서 그나마 의외의 수확을 기대해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관람했습니다. 예전에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이나 되는 독립영화가 만들어져서 호평을 얻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었는데 그게 바로 신연식 감독의 <좋은 배우>(2005)였더군요. 포스터에서 보이는 안성기와 이하나의 멜러가 특별히 궁금할 이유는 없었지만 새로운 연출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페어 러브>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안성기와 이하나의 관계는 대놓고 연애를 할 수도 있고 포스터와 제목에서 암시되는 것과는 달리 연애가 아닌 좋은 관계만 유지하는 관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반대로 매우 드라이한 설정과 전개의 영화일 수도 있었겠지만 실제 영화의 내용이 어찌되었건 제가 기대했던 것은 엇비슷한 이야기도 아주 맛깔스럽게 가공해내는 신인 감독의 연출 솜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무엇을 기대했었는지를 우선 정리하게 되는 이유는 물론 영화가 기대했던 바를 전혀 만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페어 러브>는 카메라 수리 전문가인 50대의 독신남이 죽은 친구의 20대 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어쩌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 분에게서 먼저 사랑을 느끼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시작하고야 맙니다. 주인공 형만(안성기)이 얼토당토 않게 럭셔리한 스튜디오를 차려놓은 미중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관계에 서툴고 그나마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인물로 설정된 것은 참 다행한 출발이었습니다.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친구의 딸을 떠맡아 돌보려고 하다가 난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진다는 상황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편의 멜러 영화로 보았을 때 <페어 러브>는 정체성이 아주 애매모호한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담백한 러브 스토리의 세계로 관객들을 데려가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득한 성찰의 편린을 남겨주는 것도 아닙니다. <페어 러브>에서 본격적인 연애의 시간은 뮤직비디오처럼 흘러가고 이별 후의 희망 찾기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느껴지기만 할 뿐입니다. 뜬금없이 시작되었다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깨져버리는 것은 – 사랑이 그렇게 왔다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은 –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사랑에 관한 영화가 그렇게 뜬금없이 느껴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었던 2시간으로 기억될 뿐입니다. 감독은 분명 자신의 연애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구상해서 각본으로 완성하고 마침내 한 편의 영화로 완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애 경험에 비해 연애 영화에 대한 분석, 특히 만드는 이로서 갖춰야 할 화법에 대한 분석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페어 러브>를 정체성이 애매모호한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인공들의 캐릭터에 있습니다. 안성기를 배우로서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입장입니다만 <페어 러브>에서 안성기는 무난한 수준 이상의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50대가 되도록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본 가난한 카메라 수리공으로서는 잘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캐스팅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 그러나 이 영화는 안성기의 캐스팅을 통해 투자와 제작 여부가 결정된 경우였을 겁니다 – 곰곰히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보아온 안성기는 50대 노총각의 추레함을 연기해내지 못할 이유가 없는 배우입니다.

결국 50대 노총각이어야할 형만을 인스턴트 커피 광고를 통해 보던 CF 모델 안성기로 보이도록 만든 것은 그런 캐릭터를 요구한 감독의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안성기가 연기한 이런 ‘설정과 어울리지 않는 애매모호한’ 캐릭터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데에 오히려 도움이 되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제 경우에는 사실성도 없고 그래서 몰입도 안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하나의 경우 그야말로 발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역시 이하나의 능력 부족이라기 보다는 배우에게서 제대로된 연기를 이끌어내지 못한 연출가의 능력 부족 때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 설정이 모호하고 배우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대로된 연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때론 연출가의 천재적인 재능이 배우의 발연기를 오히려 새로운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페어 러브>는 그런 작품에 해당되지는 않는 쪽입니다. 형만과 남은(이하나)의 대화는 때론 불필요하게 긴 시간 동안 주절대기만 한다는 느낌을 주고 특히 마지막 엔딩은 한 편의 영화를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해야 좋을지 몰라 허둥대는 신인 감독의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입니다.

저에게 <페어 러브>는 마치 형만에게 자신의 연애담을 늘어놓으며 3년 동안 짜증이 나게 만들던 조카 녀석 같은 영화입니다. 간간히 웃게 만드는 대목도 없진 않았습니다만 전반적으로는 자기 감정에만 빠져 대화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속 형만은 뒤늦은 연애로 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인지상정의 세계에 진입했음을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페어 러브>에 담긴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관객이 사랑의 아픔 중에 있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무릇 제대로된 멜러 영화란 – 사랑을 소재로 한 예술 영화가 아니라 기왕에 일반적인 기준의 대중 영화이기로 했던 거라면 – 없던 사랑의 감정까지 마구 불러일으키는 묘약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예쁘게만 보이려다 사랑과 연애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면 결국 외화내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잘 알려진 배우들과 저예산 독립영화의 접목은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애매한 작품들만 양산하다가 끝날 소지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