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다 죽어야 사는 이상한 신세계

 

 


 


 



 


 


스포일러가 가득하니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은


즉시 뒷칸으로 돌아가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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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 대해서 좋다는 얘기, 싫다는 얘기, 뭔 소린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얘기 등을 다 듣고 난 뒤에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이 영화가 최근 몇 년새 본 영화 중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을만하다고 평가하게 되었다.


 


허나 이런 나의 평가는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감독이 심어놓은 철학에 대한 것이어서, 소위 영화적 완성도라든가 관객과의 소통방식이라든가의 요소에 있어서는 최고가 아니라 지적해도 그닥 반박할 생각은 없다.


 


영화가 좋다고는 평가를 하지만 사실 관객이 왜 이렇게 많이들 보러 오시는지는 아리송하다. 캐릭터가 뜬금없기도 하고 전개의 개연성이 없는 장면도 많고 무엇보다 결론에 대한 모호함이 관객 동원력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리송하든 대단하든 일단 “설국열차”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자.


 


 


 



영화 보신 분들은 이해할 수 있는 ‘나르는 신발짝’


2008년 이라크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에게,


이라크 출신 기자가 저항의 의미로 신발을 집어 던진 적이 있다.


 


 


 


1. 다 죽어야 산다


 


영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다 죽는다. 왜 그래야 했을까?


 


편의상 열차 안에서 업악받고 있는 꼬리칸 쪽을 좋은 편이라고 하고 체제를 장악하여 조정하는 쪽을 나쁜 편이라고 하자.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느 쪽에 있는 누가 좋고 누가 나쁜 건지 무척 헷갈리게 된다. 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인 거다.  결국 중간에 희생당한 사람들만 불쌍한 거다.


 


그리고 좋은 편이 죽어서 더 애틋하다거나 나쁜 편이 죽는다고 해서 통쾌하다거나 하질 않는다. 영웅도 없고 악당도 없다. 그냥 주어진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한 거창한 명분이나 맥락도 없이 뜸들이지도 않고 그냥 죽임을 당한다.


 


그간 많이 보아온 영화처럼 하자면 … 거대한 악의 세력과 이에 맞서는 정당하지만 나약한 이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무언가 짜릿한 죽음과 숭고한 죽음이 대비되면서 관객이 관람하기 편하게 해 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엔 좋은 편이 승리하여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든지 아니면 처절하게 패배하면서 관객들에게 의문점과 고민을 안겨주든지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거 없다. 그냥 다 죽는다. 그리고 그게 옳다.


 


영웅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이나 악당이 되어야 할 등장인물 모두 다 이미 체제 안에서 순이든 역이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주어진 에너지와 윤리 한계치를 다 지나치게 오버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전개에 적합한 긍정의 힘이 아니라 부정의 힘 퇴행의 힘으로 작용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대단히 수고하셨지만 이제 그만 안녕~


 


 


 



미안하다 … 다 안녕이다 … 한 명만 빼고


 


 


 


커티스가 메이슨을 잡기 위해 에드가를 포기하는 장면을 보자. 아무리 반란의 목적을 위해 절실했다 하여도 커티스는 에드가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거다.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란의 선봉장으로 다시 날 수 있었던 동기가 바로 에드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커티스는 대의를 위해 사람을 버린 죄를 저지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라면, 커티스는 에드가를 구하러 달려 갔을 것이다. 그래도 에드가는 죽었을 것이고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가 오히려 커티스를 더 달구어내 결국엔 어떻게든 메이슨을 잡고 복수의 행보를 가열차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저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모두들 커티스에게 전자를 요구할 것이다. 겉으로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메이슨을 잡기를 바랄 것이다. 후에 비인간적이지만 대의를 이끄는 냉철한 지도자로서 어쩔수 없었노라고 합리화 될 터이고.


 


후자의 커티스는 어떨까? 인간적이고 이해할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결국엔 모두의 운명을 짊어져야 할 리더가 될 수는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이다.


 


대의를 좇아 사람을 버린 커티스든, 대의를 저버리고 사람의 정을 좇은 커티스든 자신의 역할이 마무리되면 어떻게든 속죄를 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다 사라져야 새 세상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봉감독의 의도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나의 오역으로 인한 자뻑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메시지가 있든 없든 옳든 그르든 그걸 결정하는 건 매우 당연하게도 순전히 관객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자,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2. 플랜 같은 거 있기? 없기?


 


따지고보면 이 영화에서 가장 무모하고 생각 없는 인물은 주인공 커티스다.


 


그에게는 계획도 없고 정보도 없고 플랜B도 없다. 눈 앞에 보이는 한 가지 장애물 제거에만 온 신경을 쓸 뿐 애시당초 정체모를 소스가 보내주는 쪽지에 모든 상황판단을 의지하고, 물론 길리엄이 부추겼지만, 앞으로 가서 뭘 어떡해야 겠다는 목표도 없다.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 일단 가는 거다. 가서 뭘해야 할지 생각하는 거다. 거기에는 여기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을 테니 거기가서 … 아 잠깐만 … 그 다음엔 뭘 해야지? … 그래! 그거야! 윌포드를 처단하고 엔진을 점령하고 그리고 … 그리고 …


 


아예 플랜이 없다. 있다면 그저 길리엄을 지도자로 옹립한다는 거. 그외엔 어디에 가서 무엇을 얻고 그걸 어떻게 활용하고 그리고 일정 지점에서 협상을 시작할지 더 나갈지 판단하고 뭐 이런 거 없는 거다 … 오로지 진격이다 … 나를 따르라!


 


어 그런데 또 잠깐 … 진격을 계속 하려면 앞칸의 체제를 구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보안 전문가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 그러니 그에게 가자  우르르 … 이게 뭐하자는 건가 지금 ….


 


 


 



여기 송강호씨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 계신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빼앗긴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 나서서 싸우는 거는 너무도 당연하고 옳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무 이견이 없다. 그런데 왜 계획을 안 세우냐고? 최소한의 준비는 왜 안 하는 건데, 분노만 쌓아 올릴뿐 … 뒤를 따르는 많은 이들 모두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거사를 하면서 왜 배수의 진으로 덤비는 건데, 안되면 다 죽자는 거야? 무슨 불사파야?


 


그래, 너무도 힘이 열세이고 전혀 자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계획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겠냐 하겠지. 그렇다면 단계적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해도 되지 않을까. 여건의 변화를 유도해내면서 말이야. 한 칸 앞으로 가서 버티고 협상하고 또 한 칸 앞으로 더 나가서 협상하고 이렇게 말이다.


 


뭘 하더라도 사전에 최소한의 마스터플랜과 로드맵은 가지고 가야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밀려 일단 일을 저질렀다 해도 언젠가는 이기고 성공하려면 그 시점에서 주어진 조건을 살펴보고 계획을 세우는 정도는 해야 한다 … 이보시오 커티스씨,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문부터 따기 전에 일단 의견수렴과 대책강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


 


 


 


3.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다.


 


윌포드와 길리엄에게는 계획이 있다.


 


균형에 집착할 수 밖에 없는 이 둘은 열차 내에 주기적으로 축적되는 역기능의 여분을 처리하기 위해 마스터 플랜을 세웠다. 간단하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74%에 맞춰 죽여 없애는 것이다.


 


그러려면 꼬리칸이 도발토록 해야 한다. 그리고 도발을 용인할 수 있는 한도와 도발이 닿아서는 안되는 칸을 정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자, 이제 거사의 날이 왔다. 덤벼라.


감옥칸, OK … 식량배급칸, 괜찮아 … 윌포드는 이때까지는 실탄이 없는 경찰력으로 대처를 하며 밀리는 척한다.


 


최악의 경우에 용인할 수 있는 한도는 용수칸까지 이다. 그래 용케 여기까지 왔군 … 이제 윌포드는 새로운 폭력을 동원하여 애초의 목적을 실현하려 한다.


 


그건 바로 도끼와 칼을 든 용역깡패의 투입이다. 영혼이 없는 맹목적인 이 놈들은 눈마저 가리워져 있다. 무자비하게 살육을 시작한다. 길리엄과 윌포드의 계획은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런데 의외의 동력이 나타난다. 횃불이다! 꼬리칸에서부터 피워올려진 횃불의 엄청난 포스에 힘입어 커티스는 용수칸을 장악하고 거물급 인물을 포획하게 된다. 물론 커다란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이쯤에서 계획이 틀어지게 된 길리엄은 말린다. 커티스는 가려고 한다. 그러자 길리엄은 뒤로 빠진다. 윌포드를 만나거든 입도 열기 전에 즉시 없애달라고 당부하면서.


 


당황한 윌포드는 밀리기 시작한다. 화원, 과수원, 수족관, 스시집까지 내주고 마침내는 절대 내주지 말아야 할 칸까지 커티스의 진입을 허용하고 만다.


 


학교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체제의 우월성과 충성심을 주입하고 체제에 거역하면 보복당하고 체제에 순종하면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가르쳐 체제를 온존케하는 핵심기능을 수행하는 학교인 것이다.


 


 


 



선생님, 이러시면 안됩니다른이름으로 저장 …


 


 


 


윌포드는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에 최후의 보루인 가장 강력한 무력을 투입한다. 군대다. 최후의 저지선을 지키기위해서 학교선생님까지 직접 손에 총을 들고 갈겨댄다.


 


결국 꼬리칸은 속절없이 밀리고 밀려 장악되고 선두는 고립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지도부는 내쳐 달릴 수 밖에 없다. 이제는 반란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엔진룸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윌포드가 애초에 꾀했던 ‘균형유지’는 실행이 되고 …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의외로 준비가 잘 되어있으며 단계적 플랜이 있다. 그들이 원래 똑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을 내주지 않으려는 절실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다 우연히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런 불의한 체제를 고쳐보겠다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다고 하여도 적어도 그들의 시나리오와 단계 설정 정도는 카피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 만사 다 단계가 있는 법인데 그걸 점프 한 방으로 다 뛰어 넘으려는게 과연 현명한 접근일까.


 


 


 


4.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순환고리를 …


 


꼬리칸은 버려진, 쓸모없는 잉여 공간이 아니다. 꼬리칸이 필요 없었으면 아예 만들지 않았거나 예전에 벌써 처치해 버렸을 터이다.


 


사실 이 열차 안에서 꼬리칸은 앞칸의 특권층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꼬리칸이 없으면 앞칸은 그들의 속성상 그 안에서 다시 지배와 피지배를 만들어 내게 돼있다. 그렇게 반복이 되면 결국의 그들의 앙상레짐은 자멸하고 말 것이고 그러기에 윌포드는 꼬리칸이 멸망방지장치라는 걸 잘 알고있다.


 


그리고 길리엄도 그걸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둘은 손을 잡게 되는 것이다. 윌포드도 길리엄도 다 이유가 있고 자기 변호가 가능하다.


 


꼬리칸은 원래 가진 게 없어서 무임승차한 사람들이거든, 그렇다면 쾌적한 열차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희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 … 그렇다고 아예 기회가 없지도 않잖아, 재능이 있으면 언제라도 얼마든지 앞칸으로 갈 수가 있어, 그런데 뭔 불만이 그리 많아, 쯧쯧쯧 …


 


앞칸은 가진게 많아서 그걸 다 쓰지도 못하고 죽어, 그런데 절대 남과 나누려고는 하지 않아 … 그게 인간의 본성인가봐, 우리 꼬리칸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우리는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필요한 만큼만 가지자고 … 저 더러운 권력따위 필요하지 않아 … 팔, 다리가 잘리더라도 숭고하고 의롭게 살면 거기가 나만의 낙원인 거지, 허허허 …


 


 


 



윌포드가 어린 시절 즐겨 읽으며 미래의 꿈을 키웠다는 만화


 


 


 


커티스여도 좋고 커티스가 아니여도 좋다. 엔진룸에 가서 윌포드를 처단하고 나서는 어차피 자신이 그의 자리를 대체하여야 한다. 그리고 정의롭고 자애로운 지도자가 되어보자. 권력을 다 나누어주고 자원을 다 공유하고 뭐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자.


 


그러면 모든 이들이 스스로 현명하게 나누고 절제하며 동참하여 열차를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게 될까.


 


주어진 공간, 한정된 자원에 비추어 분명히 열차는 관리가 필요하다. 집단지도부를 형성하면 그게 될까. 그렇다고해도 역기능의 여분은 어떻게든 조치가 필요하다. 도대체 누가 그걸 정하고 누가 조치되어져야 하나. 제비를 뽑을 수도 없고.


 


결국 다시 이전 체제가 돌아올 것이다. 거기에 속하는 사람은 바뀌겠지만 꼬리칸은 다시 생길 거고 특권층 또한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또 제2, 제3의 윌포드와 커티스, 그리고 길리엄이 나오고 반란이 일어나고 실패를 거듭하다 성공하기도 하고 그럴 것이다.


 


아, 이를 어째야 하나, 어차피 똑같아질 거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하나, 아니 그럴 순 없지, 좋은 방향으로 바꿔야지, 그렇다면 지도자라는 걸 아예 세우지 말자 … 어 그런데 Occupy Wall Street 도 그렇게 해보려다가 결국 권한을 가진 대표자가 없어서 흐지부지 된 거잖아 …  아 어쩌나 …


 


결국 영화는 아예 체제를 폭파시켜버린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파괴라고나 할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인 건지 아니면 순전히 나의 지나친 상상력에 의한 오독인 건지는 중요치 않다. 그걸 결정하는 건 또 여전히 관객의 몫이니까.


 


 


 


5. 요나와 백곰


 


열차가 폭파되고나서 살아 남은 이는 요나와 꼬마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는 놀랍게도 빙하기를 견딘 백곰이 살아 있다.


 


새로운 세상은,


옛 체제를 유지하는데 좋든 싫든 관여한 이들이나 체제의 단물을 빨며 타락에 빠졌던 이들이 만들어 나가면 안된다는 건 당연할 터. 쾌락에 빠져 아무 생각없이 살던 이들도 결국에는 자신의 신분이 변하게되는 체제의 변동에는 본능적으로 저항한다는 건 영화 말미에 표현이 되어 있기도 하고.


 


그렇다면 그나마 순수함을 간직하고 나름 혜안의 단초를 가지고 있는 이와 아직 때묻지 않은 어린이가 새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상징 정도로 해석해보면 어떨까싶다. 


 


 


 



지구온난화로 거주지인 빙산이 위협받고 있는 북극곰


 


 


 


북극곰의 경우는, 지구온난화가 거론될때마다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동물이다. 빙산이 녹아내려 살 곳을 잃어가는 백곰의 모습을 비추며 사태의 심각성과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상이나 이미지가 아주 많다.


 


그래서 그 백곰은 빙하기가 풀리면서 생물이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지구가 다시 북극곰이 살아나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상징이라고 보여진다.


 


 


 


6. 마무리


 


간만에 뭐라도 생각할 거리가 있는 우리 영화를 감상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영어로 진행이 돼서 그런지 송강호 특유의 맛깔나는 보이스톤과 대사처리가 묻히면서 존재감이 예전같지 않아서 아쉽다.


 


북미 버전은 20분 가량이 잘려 나간다 한다. 캐릭터 설정과 스토리 전개에서 날린다는데, 126분이 106분으로 준다니 한국에서 영화 본 우리가 원본을 보게 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한 셈이다.


 


 




 


 


영진공 이규훈


 


 


 


 


 


     


 


 


 


 


 


 


 


 


 


 


 


 


 


 


 

 


 


 


 


 


 


 

““설국열차”, 다 죽어야 사는 이상한 신세계”의 2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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