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개화석 (2/2)

 



 


 


 


 


* 1부를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레스터 사본]은 주로 물의 성질, 모양, 그 쓰임에 대한 보고서이다. 그리고 화석의 성질과 일부 해양생물로 보이는 화석들이 높은 산의 지층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물과 화석의 무엇이 그렇게 궁금했던 것일까?


 




16세기 화석에 대한 생각은 오래된 생물의 사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암석 안에서 어떤 힘(형성력plastic forces)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지거나 작은 입자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이런 특별한 모양의 돌맹이들이 별에서 왔으며, 자연의 여러 영역들인 동물, 식물, 광물 사이의 상징적 조화를 보여줄 목적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를 정확히 모사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높은 산에서 발견되는 해양 생물 모양의 화석들은 모두 높은 곳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운반되었거나 또는 노아의 홍수 같은 거센 물살을 따라 산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돌맹이일 뿐인 화석이 산꼭대기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굳이 연구할 가치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생각이 맘에 들지 않았다. 화석이 광물이며 암석 안에서 자라난 것이라면 모든 지층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옛날에 바다였을 법한 여러 증거가 있는 곳에서만 화석이라는 돌맹이가 자라는 걸까? 그리고 화석이 돌맹이라면 왜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조개 껍질더미나 부스러기들 속에서 또는 호수나 연못의 침전된 층에서만 그렇게 자주 자라는걸까? 또한 조개껍질의 성장무늬가 드러나 있는 화석은 암석 안에서 자랐다는 것인데 어떻게 암석을 파손하지 않고서 그 안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일까?


 




레오나르도는 이처럼 당시의 화석에 관한 아리까리한 생각들을 논파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지구 이론을 지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화석을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그럼 레오나르도가 화석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그 지구이론은 어떤 것이었을까? 레오나르도는 지구 순환의 메커니즘을 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고자 하였다. [레스터 사본]과 그 밖의 다른 문서들에서 이러한 그의 집념을 볼 수 있다.


 



16세기 유럽은 아랍에서 찾아낸 천 년도 넘게 묵어있던 그리스의 고전들을 붙잡고 해석하고 연구하던 것이 학문의 전부이던 시기였다. 레오나르도 또한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을 토대로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론을 믿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지구는 흙, 물, 공기, 불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흙, 그 위에는 물, 맨 꼭대기에는 공기, 그 주변에는 불로 각각 분리된 4가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흙과 물은 무거운 원소이기 때문에 아래쪽으로 운동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지구 가운데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구가 원래 각 원소들의 성향에 따라 요렇게 생겼지만,
태양의 열이 원소들을 휘저어서 지금처럼 원소들이 뒤죽박죽 된 것이라고 하였다.





 


 


레오나르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체도 이와 상응하는 4가지 요소(4체액설)들로 순환하며 유지되고 있음을 알았고 그렇다면 인체와 지구가 같은 순환 메커니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멋진 생각을 남들 앞에서 주장하려면 이러한 메커니즘이 실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를 눈앞에 들이댈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이 멋진 생각을 말이 되게 설명하기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변을 보면 4원소들 중 가장 무거운 흙이 보다 가벼운 물 위로 솟아올라와 산이 되어 있다. 그리고 산 정상에서는 샘물이 솟아 나온다. 이것은 곧 흙과 물이 아래쪽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경향에 반하는 위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마치 혈액(물)이 다리에서 머리끝으로 순환하며 몸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메커니즘을 찾기 위한 레오나르도의 절박한 노력이 [레스터 사본] 전체를 통해 중심 주제로 등장한다.


 



우리 체내에 있는 혈액이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처럼 지구 내부에서도 인체의 혈관에 해당하는 땅속 지류를 따라 물이 아래뿐만 아니라 위족으로도 움직인다. 높은 산 정상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은 바로 그와 같은 순환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 내부에 있는 어떤 힘이 아래로 흘러가려는 자연스런 경향을 막아 물이 육지를 통하여 위로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 둘의 작용이 합쳐져 물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레오나르도는 이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발견한다면 인체와 지구 사이의 비유는 상당히 그럴듯한 이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체 저 물은 어떻게 산 정상까지 올라간 걸까? 

 


 



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씀에 힌트를 얻어 뜨거운 공기가 상승하는 것처럼 태양열에 의해 뜨거워진 물이 땅속 지류를 따라 위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알았다. 태양과 가까운 산 정상에 있는 물이 오히려 얼음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주장대로라면 가장 뜨거운 한여름에는 산위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의 양이 가장 많아야 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가장 양이 적었다.


 
그래서 지구 내부에 있는 열로 눈을 돌렸다. 지구 내부의 열로 인해 땅속 동굴에 있던 물이 끓어 증기의 형태로 변해 산 내부를 뚫고 위로 올라와서 산 정상에서 액화하여 샘물이 되어 분출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주장 또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증기가 발생한다면 동굴의 천정은 젖어 있어야 하지만 동굴 천정은 종종 바짝 마른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산을 스펀지에 비유했다. 산의 내부가 포화상태에 이르도록 물을 흡수한 뒤 꼭대기부터 찔끔찔끔 물이 흘러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기술적인 용어로 차곡차곡 설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짜내야만 물이 지표에서 빠져나와 흘러 나올텐데 산 정상에서는 아무도 산을 쥐어짜지 않는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물이 위로 움직이며 순환하는 메커니즘을 찾을 수 없었다. 물론 레오나르도가 물이 증발될 때 위로 올라가고 이후 비의 형태로 변하여 산꼭대기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지구의 물이 인간의 몸에 있는 혈액처럼 땅속 지류를 따라 아래뿐만 아니라 위로도 물이 움직이는 원리가 필요했다. 혈액은 증발하지도 않으며, 우리 머리에서 비처럼 쏟아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비록 위로 솟아오르는 물에 관한 메커니즘을 찾을 수 없었지만 흙이 위로 솟아오르는 것에 관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액체인 물은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완벽한 공모양을 형성할 것이며 따라서 대양의 표면은 어느 곳에서나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을 것이다. 흙 역시 균일하게 분포해 있다면 지구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를 유지하는 부드러운 공모양일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내부는 균일하지 않다. 지구는 딱딱한 흙, 부드러운 흙, 암석, 동굴, 지류를 따라 흐르는 물 등 아주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흙이 균일하지 않게 분포하기 때문에 지구를 반으로 나누면 한쪽 반구는 다른 쪽 반구보다 무거울 것이다.그래서 지구는 기하학의 중심과는 질량의 중심이 다르다. 한쪽이 다른 쪽보다 무겁기 때문에 질량의 중심이 무거운 쪽의 반구로 치우쳐 기하 중심보다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지구는 살아 있는 몸과 같기 때문에 균형을 찾기 위해 중력의 중심을 기하학의 중심 쪽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 틀림없다.



 





레스터 사본에 그려져 있는 시소타는 사람의 그림.
시소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선 무거운 사람이 받침대 가운데 쪽으로 움직여야 하고,
가벼운 사람은 더 뒤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지구는 시소를 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균형을 잡기 위해 지구의 무거운 반구 쪽에 있는 딱딱한 덩어리들은 세계의 중심을 향해 침전해 내려가고, 반면 가벼운 반구 쪽의 암석들은 위로 올라와야 한다. 이렇게 해서 바다로부터 산이 융기되어 올라오게 된다. 따라서 해양 화석이 높은 언덕에 위치하는 것은 지구의 가벼운 쪽 반구가 융기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선 땅이 실제로 융기했다는 관찰 증거가 필요했다. 이것을 확증할 수 있는 최적의 증거들이 이미 고대 그리스 과학 이래 잘 알려져 있었으며 엄청난 논쟁을 촉발했던 높은 산의 지층에서 발견되는 해양생물의 화석이었던 것이다.


 



[레스터 사본]에서 보이는 고생물학적 관찰들은 이러한 이유에서 레오나르도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흔히 생각하듯 화석이 물 속에서 살던 것이기 때문에 물에 대해 다각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던 레오나르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 아니었다. 물의 운동을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과 달리 화석들은 흙의 운동을 증명해줄 수 있으며, 지구가 인체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자활 가능한 살아있는 유기체임을 주장하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화석을 연구한 것이다.


 


그는 상세한 관찰력으로 이론의 증거를 수집했고 이 과정에서 고생태학에서 이루어지는 기본 규칙의 근간을 제공하였다. <끝>


* 참고 및 발췌:


   스티븐 제이 굴드,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 세종서적


영진공 self_fish

 


 


 


 


 


 


 


 


 


 


 


 


 


 


 


 


 


 


 


 


 


 


 


 


 


 


 


 


 


 


 


 


 


 


 

수학만 잘하면 장땡일까?


호모 사이언스- 수학이 당신의 손발을 평안케하리니 ……

에라토스테네스는 인공위성은 커녕 호랑이가 담배를 피고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던 시절, 기하학을 이용하여 지구의 둘레를 재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 계산과정을 들여다 보면 에라토스테네스가 단지 기하학만을 잘했기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귀신도 울고 갈 포토샵 실력을 가졌더라도 일류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에라토스테네스는 뛰어난 기하학 실력과 더불어 그에 걸맞는 높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구가 구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1400년대 말 콜럼버스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배를 몰고 수평선 너머로 가는 촌극을 벌이기 훨씬 이전,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구가 둥글고 우주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크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구가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작고 둥근 물체라면 우주의 다른 물체들, 가령 태양은 지구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고, 거리가 멀기 때문에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빛은 언제나 서로 평행할 것이라 가정했다.



더불어 운도 따라줬다. 나일강의 잦은 범람은 이집트 정부로 하여금 매번 왕립 측량대를 파견하여 지형을 측량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는 거의 같은 자오선 상에 놓여 있다는 것과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의 저서 [천체에 관하여]에서,
지구가 구형이어야 하는 이유를
다양한 방법으로 증명했다.
예를 들어 월식 때 지구가 달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모양이 언제나 굽어 있다거나,
여행자들이 북쪽을 여행할 때 보이는 별과,
남쪽을
여행할 때 보이는 별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지구가
둥글어야만 가능한 현상이다.


이렇듯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는 실험에는 우주를 바라보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정확한 통찰이 없었다면 그가 아무리 기하학 대마왕이라 하더라도 그림자 길이를 잼으로써 지구 둘레를 계산하려는 시도 따위는 애초에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 예로 고대 중국에서 지도 제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회남자]라는 책을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한 시점에 두 장소(북쪽과 남쪽)에 동일한 높이의 해시계 바늘을 세우면 그림자의 길이가 서로 다르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에라토스테네스와는 달리 지구가 틀림없이 편평하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바늘의 그림자가 짧은 쪽은 태양에 보다 가깝게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러므로 그림자 길이의 차이를 통해 하늘의 높이를 계산할 수 있다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 참고 및 발췌:
   로버트 P. 크리즈 저, 김명남 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지호, 2006


영진공 self_fish

“아고라(Agora, 2009)”, 히파티아는 과연 꽃처녀였을까?


옛날 옛적에 호랑이가 담배 좀 피던 시절 그리스에서 등장했던 자연철학은 인류문명사에 있어 매우 이례적인 문화였다. 실용적인 목적이나 돈, 명예와 같은 잿밥에 관심을 갖지 않고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했다는 점, 국가나 단체의 지원없이 사적인 모임이나 동아리에 가까운 모임만이 존재했다는 점, 이전까지 다른 모든 문명에서 과학자가 익명이었던데 비해 일종의 개인의 지적 재산인 듯이 과학자의 이름이 등장했다는 점 등은 이전 문명에선 볼 수 없었던 문화였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이후 알렉산더 대왕님이 등장해 세계를 한번 크게 휘저어 버리면서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 꽃을 피우게 되지만 곧 대왕님이 요절하시고 로마가 패권을 쥐면서 결국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과학적 활동은 전반적으로 줄어들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학적 독창성의 수준도 낮아졌다. 새로운 지식의 발견보다는 옛 지식의 보존 쪽으로 점점 기울어갔다.

이렇게 그리스의 자연철학의 끝물에 등장한 것이 히파티아였다.



당영화는 영화사가 광고했던 ‘스펙타클’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영화 자체는 수작이다.





영화[아고라]는 400년대 초 알렉산드리아의 자연철학자 히파티아가 기독교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던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건은 잔다르크 만큼이나 영화화하기에 매우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이다.

당시 쇠락해 가던 그리스 자연철학의 마지막 보루이자 이성의 상징이 종교에 의해 숨이 끊어졌다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순결한 꽃처자가 거지 깽깽이 같은 광신도들의 손에 잔혹하게 죽임을 당함으로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감성적 부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분을 충족시킨다. 게다가 영화는 히파티아를 짝사랑하는 노예 ‘노부스’를 등장시키고 코페르니쿠스보다 먼저 지동설 스포일러를 발설할 뻔 했다는 가상의 이야기까지 끼워 넣어 로맨스와 인문학적 재미까지 손에 거머쥔다.

히파티아 역으로는 레이첼 와이즈 여신님을 등장함으로써 이 비극적 사건의 현장으로 관객들을 300% 몰입시키니 마지막 결말에서 많은 관객들을 더욱 분기탱천하게 만드는 영화적 완성도마저 이뤄낸다.

하지만 이 역사적 사건을 영화로 옮기면서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재구성 하기위해 이것저것 넣고 빼고 가공했을 것은 뻔할 터이다. 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 사료들로 추정해보건데 히파티아가 죽임을 당할 즈음의 나이가 50대였을 거라고 한다. 아아 …… 현기증이 일어난다.



그래도 우리의 마음 속 히파티아는 레이첼 와이즈닷!


그럼 영화는 어디 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 까지가 가공된 것일까?


히파티아가 문학작품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근대유럽에서였다. 이후 예술적으로 승화되면서 엄친딸처럼 언제나 아름답고 젊고 똑똑한 철학자로 그려졌지만 정작 그녀를 이야기해주는 사료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의 [교회사]나 10세기 비잔틴 사전인 [수다suda], 그녀의 강의를 들었으며 애제자였던 시네시우스의 편지등과 같은 극히 제한적인 사료만이 있을 뿐이었다.



히파티아의 애제자였던 키레네의 주교 시네시우스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그녀를
배신(?)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정과 존경을 표한다.
오히려 그가 히파티아와 제자들에게
보냈던 편지는 현재 히파티아를 밝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무엇보다 히파티아가 죽임을 당할 당시 시네시우스는 이미 요단강을
건너 예수님과 면담 중이었다.




그녀는 흔히 주장하듯 370년경이 아니라 355년경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테온으로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이며 국립 연구소라 할 수 있는 뮤세이온의 회원이었다. 그 아비의 그 딸답게 수학과 천문학과 더불어 철학에 이르기까지 히파티아는 팔방미인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동아리’에서 이러한 학문들을 강의했다.

그녀의 강의에는 지배계층과 부유한 자제들이 많았으며 적잖은 기독교 신자들 역시 그녀의 강의를 들었다. 그녀는 지배계층의 존경을 받았고 제국과 도시의 고관들과 부유하고 좋은 혈통, 세력있는 학생들에 둘러 싸여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문화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385년이 되자 그다지 평판이 좋지 않았던 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직을 맡게 된다. 영화는 이즈음을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테오필루스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교도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고 결국 이교도의 신전인 세라페움을 공격하여 교회의 손아귀에 넣는다. 


옛부터 행해져온 기독교의 남의 신전 땅밟기.
이 사건으로 신전 내 세라피스 동상은 물론 수많은 동상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사실 히파티아는 이 싸움에서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기독교인이 많았던 알렉산드리아에서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이교 숭배에 무관심했고 종교적 분쟁이나 논쟁에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녀와 그녀의 제자들이 당시 세라페움에 있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한 사건 후에도 그녀의 활동은 교회로부터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테오필루스의 조카 키릴루스가 그의 계승자로 선출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기독교에서 키릴루스는 성인으로 그려지지만 동시대 사료에서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게 권위를 추구한, 충동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는 영화에서처럼 안식일을 핑계로 유태인을 공격했고, 유태인들은 교회에 불이 났다는 거짓 경보를 발해 기독교인을 공격했다. 격분한 키릴루스는 대규모 군중을 이끌고 도시에서 수많은 유태인을 쫒아낸다.

일련의 사건에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관리였던 오레스테스는 분노했고 키릴루스는 그와 화해를 요청하지만 오레스테스는 거절한다. 키릴루스는 오레스테스를 압박하기 위해 오백명의 수사들을 도시로 불러모았고 그 중 암모니우스가 오레스테스의 머리를 돌로 내리치는 테러까지 일어난다.



오레스테스는 히파티아의 오랜 제자도 아니었고 그녀를 짝사랑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부임하자마자 히파티아와 친해진 것은 예전부터
그녀의 명성을 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암모니우스는 오레스테스의 머리에 돌침(?)을 놨다가 당연히
오레스테스의 손에 죽게 된다.

돌침을 맞긴 했지만 오레스테스가 키릴루스와 대립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에 부임하자마자 돈독하게 지냈던 히파티아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파티아는 주교의 권위가 제국과 도시의 행정영역까지 확대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그녀의 지지에 힘입어 오레스테스는 정당을 만들기에 이른다.

키릴루스는 오레스테스의 당파와 더불어 그 뒤에 있는 히파티아와 그녀의 지지기반을 두려워한다. 오레스테스 역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기독교 세력이 있었고 히파티아의 제자들은 제국과 교회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키릴루스는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며 그녀를 마녀로 몰아갔다. 특히 그녀의 지지기반은 부유층이었고 대부분의 빈민들은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 키릴루스는 이런 빈민들을 부추겼고 페테르(Prter)라는 행정관리가 폭도들을 이끌고 마차를 타고 있던 히파티아를 잡아 캐사리온 교회에서 옷을 벗기고 깨어진 도자기 조각들로 죽인다. 시체는 도시 밖으로 끌고가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오레스테스는 이 사건에 식겁했는지 이후 종적을 감추게 된다.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 노예 다보스는 히파티아를 짝사랑했다가
파라볼란이 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파라볼란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에
고용된 건장한 젊은이들의 단체인데 그들의 임무는 병든 사람이나 불구자
또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병원이나 교회의 구빈원에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의 군인으로 활동했으며
여러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서 대주교의 적들을 공격했다.







키릴루스가 히파티아의 살인을 계획했는지 사료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 일에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상당 부분을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히파티아를 비방하는 소문을 부추긴 장본인이며 그녀에 대한 편견과 악의를 조장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료에서도 키릴루스는 질투심에 사로잡혀있는 위험한 인물로 히파티아의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문학과 예술작품에서 그녀는 항상 아름답게 그려진다.
찰스 윌리엄 미첼의 그림. 히파티아


히파티아는 412~415년에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그녀가 죽었을 당시의 나이는2,30대의 꽃처녀가 아닌 약 60세 가량이었다. 이는 그동안 시네시우스의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던 점, 수학과 천문학 철학까지 모두 능통했다는 점, 지배계층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에서 미루어 결코 젊은 나이는 아니었을거라는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윤리적 용기나 공정함, 정직함, 시민적 헌신, 그리고 지적 용기에 있어서 모범적 인물이었다는데 모든 사료들이 일치한다.


히파티아의 사건은 영화나 많은 문학작품들에서 그려지는 종교적 암살 보다는 정치적 암살이었다. 히파티아는 이교도 관습에 관심이 없었고 종교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기독교도인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고 기독교도 제자들을 보호했다. 때문에 키릴루스는 이교도라는 핑계로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키릴루스 자신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교도를 핍박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의 적들은 기독교 내의 다른 정파들과 이단자들, 유태인들이었다. 히파티아는 그녀가 행했던 이교도의 지식 때문이 아니라 키릴루스의 정치적 행보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적인 이유로 그녀를 죽인 것으로 보긴 힘들다. 또한 히파티아가 죽음으로써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행하였고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기 까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여러 학자들이 계속해서 그리스의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히파티아의 ‘광장’에서 이교도와 기독교는 함께 공부하며 진리를 탐구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말하는 천국이 아니었을까?


 

영진공 self_fish




뽀나스~ 그녀는 지동설을 알았을까?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 of Samos, BC 310~230)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였으며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의 연구원이었다.




영화에서 히파티아는 아리스타르코스가 주장했던 이론에 주목한다.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을 중심에 놓고 지구는 자신의 축을 도는 일일 운동과 1년 동안 태양 주위를 도는 운동을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고대에 대단한 반말을 불러일으켰다. 왜냐면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면 지구 위의 모든 것들은 날아가 버려야 할 것이다. 즉 감각적 증거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히파티아는 이러한 점 때문에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정면으로 위반하기 때문에 고대 천문학자들 중 누구도 그 가설을 수용하지 않았다.

재밌는건 이 이론을 반대했던 이유 중 하나가 시차문제였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운동을 한다면 항성들의 시차가 관측되어야 하지만 그러한 위치 변화는 관측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리스타르코스는 항성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위치 변화가 관찰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코페르티쿠스와 케플러도 같은 대답을 하였다.




지구와 항성과의 거리는 무지무지 멀기 때문에
그림에서와 같은 시차의 변화는 눈으로 관찰할 수 없다규~




이후 1세기에 활동했던 알렉산드리아 과학자이자 원추곡선을 연구했던 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는 지구 중심론을 유지하면서 대안적인 모형을 만들었다. 그게 주전원과 이심원이다. 그리고 히파티아는 이 아폴로니우스의 주석서를 썼다. 주석이라 하면 대단찮게 들리겠지만 근대 이전에는 창작의 수단으로 쓰였다. 주장을 펼치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기 시작한 것은 근대로 접어든 뒤의 일이었고 그 전까지는 옛 대가들의 책에 주석을 달면서 자신의 의견과 사상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아폴로니우스의 주전원과 이심원은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 발전한다. 

 


즉, 그러한 이유로 아폴로니우스의 주석서를 썼던 그녀가 설령 아리스타르코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이론에 동의했을거라 보기는 힘들다.



-참고 및 발췌-


마르자 드스지엘스카 저, 이미애 역, [히파티아], 우물이 있는 집, 2002
기태호 저,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루시드], 김영사, 2007
제임스 E. 맥클렌란 3세, 해럴드 도른 공저, 전대호 역,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모티브, 2006 
버트런트 러셀 저, 서상복 역,[서양 철학사], 을유문화사, 2009



 


 


 



 


 


피사의 사탑은 마(魔)의 지대일까?


 
 

굳이 과학에 관심이 있는 과학 꿈나무가 아니었더라도 어린 시절 한번쯤은 갈릴레이의 피사의 사탑 실험을 들어봤을 것이다.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무거운 물체일수록 속도가 빠르다고 설레발 친 것을 16세기에 갈릴레이가 ‘그게 아닐텐데!’ 하며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 냅다 올라가 무거운 추와 가벼운 추(어떤 책에는 쇠공과 깃털이라고도 적혀있다!)를 동시에 놓자 지면에 동시에 떨어져 ‘모든 물체는 무게와 상관없이 동시에 떨어진다’라고 일갈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뻑큐 한 방 먹였다는 이 훈훈한 이야기는 갈릴레이만 나오면 볶음밥에 딸려 나오는 계란 후라이 마냥 어김없이 따라 나온다.

하지만 쥐똥만큼의 호기심이라도 있었던 사람이라면 이 주장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피사의 사탑이 무슨 버뮤다 삼각지대도 아니고 어떤 어둠의 힘이 깃들여 있길래 무겁든 가볍든 동시에 떨어진단 말인가! 궁금증으로 삼일 밤낮을 고민하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피사의 사탑으로 날아가봤자 그 동네라고 우리 동네랑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각대로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 실험해 본들 동시에 떨어지지 않는다. 당 이야기는 갈릴레이의 제자이자 전기작가인 비비아니가 구라친 이야기가 지금까지 내려오며 정설이 된 것이다. 서로 다른 무게의 물체가 동시에 떨어지는 것은 진공 상태에서만 가능한 실험이다. 대기 중에서는 공기의 저항으로 인해 질량이 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지게 된다.




그럼 왜 이런 거짓부렁이 아직도 버젓이 책에 실려 호기심 충만한 아이들의 원형탈모를 유발시고 가뜩이나 관광수지 적자인 나라에 부담을 주는 것일까? 진정 관광산업을 노린 이탈리아 정부의 음모일까?!




사실 단지 갈릴레이가 낙하 실험만 하지 않았을 뿐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체의 낙하 운동’에 대한 갈릴레이의 반박은 실제 있었고 과학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습관처럼 쓰여진, 팔다리 다 잘라내고 몸통만 갖다 붙여 놓은, ‘동시에 떨어진다’로 끝나는 피사의 사탑 이야기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도 아니고 수박밭 거름 씹어먹으며 수박 먹었다고 기지개 하는 꼴이라 볼 수 있다. 그럼 제대로 수박을 먹으며 이야기의 내막을 알아보자.


 

일찍이 고대 그리스에서 잘나가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색과 관찰을 통해 수많은 업적을 이뤄냈다. 그가 제시한 대표적 이론 중에는 세상은 물, 불, 흙, 공기 이렇게 4가지 원소로 이루어졌다는 4원소설이 있다. 원소들은 적당한 성질을 더하거나 빼면 다른 것으로 전환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물질은 이 4가지 원소의 비율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에서 보면 굉장히 환타지한 이론이긴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명성에 힘입어 4원소설은 연금술과 플로지스톤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며 오래도록 과학계의 발목을 제대로 잡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4원소설을 바탕으로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해서도 썰을 풀어놓는다. 


1. 물체의 자연적 운동은 그 내부에 존재하는 네 가지의 기본 원소의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흙으로 구성된 물체는 불의 원소의 비율이 큰 물체보다 더 큰 자유낙하 속력을 갖으며 흙 본연의 장소인 지구와 우주의 중심으로 가면 갈수록 더 빠르게 움직인다.




2.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 


 

낙하속도는 매질의 두께나 저항에 반비례한다. 진공은 저항이 0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의 물체의 낙하속도는 무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진공은 존재할 수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명성에서 후달렸던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원자가 빈 공간에서 영구적 운동을 한다)은 물먹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의 전제는 물체의 낙하속도를 무게의 측정값으로 생각했다는 거다. 즉 A, B의 물체 중 B의 낙하속도가 더 빠르다면 이는 B의 무게가 A의 무게보다 무겁다라는 뜻이다. 또한 그가 말하는 낙하 속도는 평균 속도에 가까운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이론은 이후 계속적으로 문제들이 제기되긴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값 앞에서 무시되었고 오래도록 보편적 진리로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16세기에 이르자 새로운 생각들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기계주의 철학이라 일컫는 이 패밀리들은 아르키메데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과학적 유추와 실험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그 패밀리의 대표 타자 중 한 명이 바로 갈릴레오이다.




그는 과학적 유추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 운동을 반박한다.




① A는 v의 속도로 B는 v’의 속도로 떨어지려고 하기 때문에 A는 B를 더빨리 떨어지게 하려하고 B는 A를 더 늦게 떨어지게 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A+B)는 A보다 낙하속도가 느리다. v’ < V < v 

② (A+B)는 A와 B의 무게가 합쳐졌기 때문에 A보다 더 빨리 떨어져야 한다. v’ < v < V


==> 모순된 결과가 나오게 된다.

결국 v = v’ = V 이 되어야만 이 모순을 없앨 수 있다. 즉 모든 물체는 같은 비율로 낙하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가정의 전제는 물체는 모양과 속력에 독립적이며 오로지 무게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즉 100g의 물체가 100m에서 떨어지는 시간은 10g의 물체가 10m에서 떨어지는 시간과 같다처럼 말이다.)


이를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서로 다른 물체는 서로 다른 (일정한) 값의 속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뿐이지 모든 물체가 같은 (일정한) 속력으로 떨어진다는 말과 같지 않다.




이와 같이 과학적 추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 ‘낙하실험’ 에피소드에서 추론과정은 엿 바꿔먹고 결론만(그마저도 틀린) 이야기 하는건 뭐 웃기지도 않고 남는 것도 없는 기껏해야 피사의 사탑 관광지 소개만 해주는 꼴인 거다. 

그러니 이제 없는 돈에 기껏 피사의 사탑에 놀러가서 저기가 모든 물체들이 동시에 떨어진다는 마의 지대인가 라며 증명사진이나 찍지말고 주위를 둘러보고 갈릴레이 낙하실험 운운하는 외국인들이 있으면 그 중에 참한 이를 골라 가까운 까페에 가서 차분히 위와 같이 이야기 해줘라. 바로 이때가 비로소 영어가 빛을 발하며(?) 진정한 글로벌 작업..아니 인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글로벌한 작업질의 일 순위는 지식이지 영어가 아니다. (이거 결론이 왜이래..)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