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We Two Parted (1)




김씨는 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박기호 기자는 김씨의 이야기를 ‘정보 보고’ 했다.


 


<16일 오후 서대문구 파출소에서 김모씨(남,34) 난동 피움. 무단으로 경찰 업무용 컴퓨터를 사용하려다가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구타함. 한 달 전 애인이 사라졌는데 주변 사람 누구도 자신의 애인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여자를 사귀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사라진 애인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이 같은 일을 저지렀다는 경찰 설명. “나는 귀신과 사귄 게 아니다”라며 소리쳤다 함. 현재 공무집행 방해로 조사 중.> 



 


하지만 데스크는 관심이 없었다. 김씨의 이야기에 사실 박기호는 첫사랑을 생각했다. 박기호는 첫사랑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이별하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굳이 기억하려 한다면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냥 바래지게 놔두고 살았다. 바래지자 첫사랑인지 뭔지도 희미해졌다. 그저 기억의 느낌만 남았다. 5월의 햇살이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거리 위에 벚꽃잎 몇 장이 나뒹굴었다. 분홍빛으로 만발해 지천을 물들이던 꽃이 이젠 얼룩처럼 몇 점 보도블럭 위에서 부대꼈다. 박기호에게 남은 첫사랑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박기호에게는 김씨의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다. 김씨는 감성이 짙은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했다.


 


여자는 외국에서 공부했어요. 영어 뿐 아니라 불어, 독어도 능통했어요. 하얀 팔뚝은 달빛 내린 뒷산마냥 눈부셨는데 그 팔에 들린 책들의 저자는 벤야민이나 들뤼즈 혹은 이정우였어요. 물론 저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죠. 술을 먹고 돌아오는 새벽 길에서는 영어로 된 시를 읊어주기도 했어요. When we two parted in silence and tears, Half broken-hearted to sever for years. 물론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이 사랑에 관한 시라는 사실은 단박에 알 수 있었어요. 술 기운이 도는 여자의 입술은 그녀의 속살처럼 부끄러워 했고,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싯구는 인적 드문 거리에 안개 젖은 강을 펼쳤으니까요. 저는 그 강을 군 시절에 봤어요. 강 건너편은 키 큰 억새가 넘실대고 그 위로 별들이 쏟아졌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 위에 쌓였던 별들이 사방으로 튕기며 복작거렸죠. 적은 그곳에서 온다고 중대장은 항상 말했어요. 그 억새가 소리를 내며 휘청일 때마다 적들의 발자국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이라고 중대장은 항상 말했어요. 별을 뿜어대는 억새밭을 바라보며 적의 모습을 찾는 것이 저의 임무였지요. 그래서 저는 별이 쏟아지지 않는 흐린 날과 강 너머가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날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여자의 시가 우리가 걷는 길 앞에 바로 그 강을, 안개 낀 그 강을 펼치곤 했지요. 저는 편안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싯구의 뜻을 알고, 그 안개를 걷어내면 멀리 다시 별을 뿜어대는 억새가 찬란하게 넘실댈 것 같았지요.
 




그래서 영어를 공부했어요. 아침 일곱시 반에 현장에 나가면 오야지는 공구리 판넬 좀 옮기라고 말했어요. 밤새 영어책을 들췄던 제가 판넬이 아니라 패널이라고 대답하면 오야지는 데모도 자리도 못 구해서 데마찌 하고 싶냐고 되물었어요. 기리빠리와 사보로꾸와 시하찌와 각종 세끼다를 옮기다 보면 전날 공부한 영어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흩어지곤 했지요. 저는 데마찡으로 먹고사는 하루살이 노가다였어요. 일을 끝내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죠. 허름한 다세대 주택의 페인트 떨어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늦은 저녁을 혼자 차려 먹고, 아무렇게나 설거지를 팽개치고, TV를 켠 채로 담배를 피우다, 무거운 엉덩이를 떼 욕실에 들어, 땀에 절은 몸을 씻고, 벌써 서너 번은 썼을 법한 수건을 빨래통에 던지고, 느릿느릿 방에 들어오면 여자는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을 받으며 창가 의자에 앉아 있곤 했어요. 봉지 커피를 나눠 마시며 오늘 하루 일을 이야기하고, 어제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지난 달 일을 재차 이야기하고, 이번 달 여자의 벌이와 저의 벌이를 합쳐 생활비를 계산하다 보면 여자는 갓 따온 복숭아처럼 붉어졌지요. 여자의 솜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입 안에서는 향기가 났어요. 목울대 너머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마다 여자의 눈동자 아래로 깊은 우물이 생겼어요. 그 어떤 빛도 탈출하지 못할 만큼 우물은 안으로 안으로 어둠이었고, 그 어둠의 끝은 알 수도 없지만 알아도 제가 이해하지 못할 수많은 것들로 고요했어요. 여자의 울대 안에서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와 여자의 눈동자 안으로 가라앉는 고요에 안겨 저는 매일 잠들었어요. 그때 여자는 또 시를 읊곤 했지요. A shudder comes o’er me, Why wert thou so dear? They know not I knew thee, Who knew thee too well. Long, long shall I rue thee, Too deeply to tell. 물론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육 개월을 들었으면 외울 만하잖아요. 







<계속>



영진공 철구


도박 -1,2

1. 

 

돈을 갚을 수 있는 사람과 갚을 수 없는 사람을 구별하는 일은 책에서 글자와 종이를 구별하는 일처럼 간단하다. 척 보면 안다. 그는 돈을 갚지 못할 사람이다. 그의 표정은 아물거리는 안개처럼 떠다니고 그의 동선은 차에 치인 유기견처럼 기신댄다. 그래도 나는 그에게 돈을 빌려줄 것이다. 금세 빚은 원금에 이자에 이자에 이자가 붙어 결코 그가 갚을 수 없는 크기로 불어날 터이고, 나는 그 빚의 사십 프로를 할인해서 오거리 김사장에게 양도하면 끝이다. 그것만으로도 빌려준 원금에 은행 이자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을 챙길 수 있다. 그 후 오거리 김 사장은 원금에 이자에 이자에 이자가 붙어 늘어난 빚에 다시 이자에 이자에 이자를 붙인 금액을 동생들을 시켜 받아낼 것이다. 더 이상 그를 짜낼 수 없다면 산간마을에서 가난한 소작을 치고 있을 부모, 형제, 친척들을 찾아가 협박할 것이고, 그의 이름으로 가능한 거의 모든 대출과 깡을 받아낼 것이고, 신체포기각서를 쓰게 할 것이고, 고깃배에 넘겨버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반전시킬 수 있으리라 믿으며 내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을 테지만 나는 안다. 그의 운명은 이미 끝났다.  

표준약관을 준수할 것을 확약하며 이외의 것은 일반 관례로 해결하며 분쟁시 채권자의 결정에 따른다. 그는 조악한 법률 용어로 포장한 사악한 대부 계약서를 읽는다. 계약서를 읽는다고 돈을 안 쓰는 사람은 없었고, 그도 여느 사람처럼 담배를 한 대 물더니 채무자 이름 옆에 힘차게 도장을 찍는다. 이천오백만 원. 고철구. 이제 그가 자신의 남은 인생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 사채빚 이천오백만 원을 어디다 쓰느냐, 어디다 쓰고 삶으로부터 지워져 가느냐이다. 


2. 

 

고철구는 은하장 여관 305호에 장기를 끊고 살았다. 처음에는 월 삼십만 원을 내고 405호에 살았는데 육 개월이 넘어 진짜 장기가 되자 여주인은 월 숙박비를 이십칠만 원으로 낮춰주면서 말했다.  


“대신 305호로 옮기쇼. 욕조에 물 받아 놓고 빨래하면 수도세를 감당 못하요. 305호는 욕조가 없응께.” 


여주인은 카운터 쪽유리 너머에서 화투점을 떼고 있었다. 흑싸리에 오동을 잡았으니 여관바리 손님이 꽤 들 운세였다. 옮긴 방 또한 십 리터 냉장고, 십사 인치 TV, 나일론 이불이 전부였고 옆 건물이 하필 삼층이어서 창을 열면 벽만 보였다. 발돋움을 한 채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야 건물 틈 사이로 풍경이랄 게 걸렸다. 그 풍경 또한 어지럽게 연결된 전봇대 하나와 가끔 지나가는 자전거뿐이었다.  


옆방, 그러니까 304호에선 이틀에 한 번 꼴로 여자 신음소리가 새나왔다. 처음에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벽에 귀를 대고 수음을 했다. 상상의 밑천조차 곤고해서 주로 이혼한 아내, 전주 대명동 미스 송, 여관 여주인을 떠올렸다. 여자의 교성은 그의 수음보다 오래 갔다. 바지를 추스르고 담배를 피울 때면 그 교성은 멀리 닿지 못하는 오지의 풍문처럼 허름한 여관방을 떠다녔다. 풍문처럼, 그 소리를 귀에 담아도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얼마 후 그는 그 교성이 같은 여자의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리에 묻어나는 흥분과 열기가 진심일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지만 소리의 주인은 한 여자였다. 낮이면 그 여자는 크게 볼륨을 올려놓고 TV, 주로 드라마를 보다가 TV 소리를 밀치며 씨펄이라고 외쳤고, TV 소리에 숨어 끅끅 울었다. 누워 있다가도 그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고장에 흘러 들어온 것처럼 다른 곳으로 다시 흘러 들어갈 수도, 이곳에 고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가진 돈은 말라가고 있었다. TV 소리에 숨은 옆방의 울음소리를 추려내 듣고 있노라면 그의 방에 노을이 내리고 썰물이 들고 안개가 찼다. 변 부장의 전화는 일주일 전부터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라는 응답만 지려댔다. 


그날. 옆방이 소란스러웠다. 또 여자의 달뜬 교성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들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씨발 뭐하자는 플레인데요?” 

여자의 목소리는 앳되었다.  

“괜찮아. 내 친구들이야.” 

“그냥 하던 거 해.” 

“우린 옆에서 얌전히 술 먹고 있을게.” 

여자의 목소리가 자르랑 흔들렸다. 

“돌리려고?” 

“왜? 안돼?” 

“너 칠수 친구들하고도 강강술래 탔다며?” 

“그럼 두당 오만 원씩 더 얹으세요.” 

“쑈 까네. 씨발년.” 


그날 밤 더 이상 여자의 교성은 들리지 않았다. 가는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묵힌 곰팡내가 여자의 교성을 대신해 텅 빈 그의 방을 흘러 다녔다. 남자들의 삿된 숨소리와 웃음이 종종 이어졌고 다시 문 여닫는 소리가 그 뒤를 잇더니 정적이 찾아왔다. 정적은 무겁고 가무레해서 가여웠다. 도시는 높은 인구밀도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 간 경계선 거리를 지키지 않고 덩굴처럼 뒤엉켜 땅 위에 솟아나 있었지만 해괴하게도 사람이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백만의 인구는 행정 문서에만 존재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정적에 들어앉아 나오지 않았는데 그 정적은 사람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 정적 속에서 빗물이 들이치도록 창을 열어놓은 채 잠들었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을 때는 새벽 네 시가 넘어 있었다.  

“담배 세 가치만 빌려줘요.” 

옆방, 304호의 목소리로 여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목소리처럼 앳된 얼굴이었다. 여관 복도 야간등의 짙은 명암이 여자의 얼굴에 닿자 이마의 여드름이 더 돋아나 보였고 웨이브가 풀린 단발이 부산스러웠다. 외국 배우 사진이 천격스럽게 프린팅 된 하얀 라운드 티는 길게 늘어져 적벽돌 색깔의 반바지를 다 덮고 내려왔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앞 터진 슬리퍼 사이로 나온 자신의 발톱만 내려다봤는데 발톱에는 까만 매니큐어가 덮여 있었다. 여자의 차림은 확실히 여자의 질감과 겉돌았다. 여자의 나이가 궁금했고, 왜 하필 세 개비인지가 궁금했지만 잠자코 웨죽웨죽 담배를 꺼내줬다.  


그는 문을 닫고 들어와 담배를 피웠다. 여자도 벽 너머 옆방에서 그가 건네준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이었다. 헤어진 아내가 데리고 간 딸이 지금 열여섯인지 열일곱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의 교성을 들으며 수음을 하던 지난밤들의 욕정이 문득 무기력했다. 딸과 아내가 떠난 뒤 제초제를 들고 찾아간 목포 갓바위에는 멀리 물러난 바다만큼 검은 개펄이 드러나 있었다. 개펄 위를 펄떡이는 망둥이가 빙렬처럼 땅거미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는데 석양에 반사돼 반짝이는 망둥이의 등허리가 어찌나 많고 찬란한지 그는 제초제를 마실 수 없었다. 철썩철썩. 철썩철썩. 망둥이가 짧은 앞지느러미를 튕기며 은하장의 낡은 벽을 타고 삼층까지 기어올라 빗물처럼 그의 방 유리창으로 밀려들었다. 여자는 세 명을 받았을 것이다. 이 망둥이들이 여자의 방도 방문했을까 궁금해하며 그는 담배를 비벼 껐다.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