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는 진정 불편한 영화, 나쁜 영화인가?

 

 


 


 



<바람이 분다>를 보러 가는 길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설정만으로도 이미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상영관을 검색할 때 함께 검색된 감상문들은 하나같이 “역사 왜곡” “불편한” 등의 어구들을 제목에 달고 있었다.


 


하야오 월드를 잘 알지 못해도 불과 몇 작품만으로 이미 ‘존경하는 거장’인 사람인데, 우리 하야오 영감이 그럴 리 없다는 굳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그간 받았던 감동이나 위안이 이 (세 번째) 은퇴작 한 편으로 모두 망가질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식의 비판에 대한 반박과 변명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점에서는 고민거리와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이 글 역시 지나치게 편향된, 하야오 영감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글이 될 듯하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꿈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소년 지로가 곧 위협적인 ‘폭격기’ 무리에 격추당해 추락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그저 ‘아름다운 비행기’에 대한 지로의 꿈과 열정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참혹해지는지 분명하게 전제하고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어릴 적부터 군수공장 근처에 살면서 전투기와 탱크 등에 평생 매혹돼 있었으나 그 매혹 자체에 죄책감을 갖고 일종의 ‘길티 플레져’로서 그 매혹을 다뤄오던 감독 개인사와 겹친다.


 


지로의 멘토라 할 만한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비행기는 아름다운 물체고 나는 이 비행기에 폭탄 대신 사람을 싣고 싶다”는 소망과, “비행기는 살육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라는 통찰을 동시에 들려준다. 침략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이 이 전쟁이 모두의 파멸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필생의 꿈을 쫓기 위해 전쟁의 부역자가 되는 아이러니의 길을 지로는 꾸역꾸역 간다.


 


시대가 좀 더 좋았다면, 혹은 침략국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경제적 곤궁을 동반할지언정 모험과 발명의 영광의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로는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아이들에게 카스텔라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뒤 친구인 혼조에게 이를 얘기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가식과 위선’의 함정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혼조와의 대화씬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넘치는데도 침략전쟁에 골몰하느라 전투기 기술을 사들이는 당시 침략전쟁의 양상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지는데, 이는 주인공 지로가 아니라 지로와 함께 전투기를 만드는 동료 혼조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이 역시, 하야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위선의 함정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결과라 믿고 싶다.


 


 


 



 


 





더욱이 지로가 선택한 이 길은, 나오코와의 사랑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초반 관동대지진의 처참한 풍경에 대해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을 생략한 대신 고작 ‘로맨스의 공간’으로 써먹는다며, 나아가 이 영화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라 비판하는 듯하다. 이 입장은 임근준 미술평론가와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대담(프레시안, “’나쁜 땅’ 일본은 ‘꿈꾸는 소시민’의 책임 아니다?!”)에서 임근준 평론가도 일정 부분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랑의 낭만성’이, 물론 영화의 로맨스를 강조하거나 그 시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오히려 “지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병든 연인-아내를 “별채에 눕혀놓고 자기는 일하러 나가는” 지로에 대한 비판과 원망은 그 여동생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화된다.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심지어 이를 위해 연인의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그의 이기심은, 애초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오코가 치료를 포기하고 달려오도록 요청하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결핵 환자인 그녀 옆에서 (아무리 그녀의 허락이 있었다고는 하나) 담배를 피우는 짧은 장면으로도 드러난다.


 


그렇게 아내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완성된 것이 바로 제로센 전투기,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들이 타고 나갔던 –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 전투기이다. 나오코는 이 전투기가 시험비행을 하는 날 지로의 곁을 떠나는데, 우리는 마지막 꿈 씬에서 그에게 “’당신은’ 살아야 해요”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낭만적인 비극의 사랑을 완성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은 지로에게 그 상실과 죄책감의 무게를 끝까지 지고 가라는 무시무시한 요구이기도 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오코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써 지로의 비행기 완성에 지지기반이 되는데, 그 사랑의 파멸,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부역에 대한 ‘처벌’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몇 년이 지나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그녀가 환자임에도 사랑을 고백하며 약혼을, 그리고 백년가약을 맺는 이 ‘운명적 사랑’을 처음 만난 배경이 바로 관동대지진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이들의 운명적 첫 만남을 비극적으로 치장해주는 기능, 혹은 지로의 선량한 품성을 드러내는 기능으로만 해석하기엔 그 재앙의 끔찍함을 묘사하는 수위가 높다.


 


왜 하필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는 것은, 그저 달리는 기차에서의 짧은 눈인사만이 아니라, 2D의 화면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전달하는 지진, 그리고 온 동네가 불타고 있는 대재앙의 현장인가. 끔찍한 이 자연재해가 역사적으로는 조선인을 비롯한 비-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고, 이때 일본인들은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싹튼 사랑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야오 영감은 스크린 밖에서는 확고한 과거 일본의 전범으로서의 이력에 대해 확실하게 인정하며 책임을, 스크린 안에서는 전쟁 반대와 생태주의적 입장을 확연하게 드러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전쟁을 계기로 발전했던, 그리고 직접 전쟁의 도구로 사용됐던 비행기체에 대한 열망을 평생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딜레마와 비극은 하야오 감독이 언젠가는 스스로 직면하게 될, 아니 직면해야만 하는 주제였을 거라 생각한다.


 


위에 링크를 붙인 대담에서 유운성 평론가가 지적하듯,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비행’에 대한 로망이 등장했었지 않은가.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하야오 자신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은퇴작으로 이 주제를 꺼내들었고, 에둘러 피하는 대신 ‘돌직구’로, 바로 그 시대에 전투기, 심지어 가미카제 공격에 사용됐던 전투기를 만들던 남자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가 그가 평생 품어온 딜레마에 대한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마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고백이 너무 수줍고도 담백한 나머지, ‘비겁하다’ 판단할 만한 여지(유운성 평론가, 위의 대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백이 오히려, 자신의 죄책감 어린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며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자신의 부족한 상태와 한계를 솔직하고 겸허하게 드러내며 시인하는 ‘용기’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그렇게 삐딱할 필요가 있을까. 나오코가 지로를 향해 “살아야 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꼭 지로를, 혹은 3.11 이후 일본인만을 위한 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부여된다. 이는 면죄부 혹은 희망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아 슬픔과 죄책감과 책임을 견뎌야 하는 자들 모두와, 상처와 피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삶을 이어가야 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이 부는 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그 바람이 부는 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소년의 순박한 꿈’이 그냥 ‘순박’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잖아요 ……


 


 


 


영진공 노바리


 


 


 


 


 


 


 


 


 


 


 


 


 


 


 


 


 


 


 


 


 


 


 


 


 


 


 


 


 


 


 


 


 


 

<문라이트>와 뱀파이어물의 진화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앤 라이스


 


 




3. 앤 라이스와 버피와 엔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뱀파이어물’이 어제 오늘 갑자기 튀어나온 것으로 얘기하긴 힘들다. 분명 과거의 뱀파이어물과 오늘의 뱀파이어물은 성격이 상당히 다르지만, 그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작품들로 한편으로는 앤 라이스의 전설적인 뱀파이어 연대기(와 이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들)를, 또 한편으로는 무려 7시즌까지 갔던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이는 5시즌짜리 스핀오프 <엔젤>을 낳기도 했다.)를 언급해야만 한다.


 


사악한 공포의 존재로만 여겨졌던 뱀파이어가 매혹적일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한 게 바로 앤 라이스 연대기에 등장하는 레스타드일 것이다. 그러나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들은 매혹적이고 유혹적인 악으로서 고딕세계에 갇혀있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기보다는 이전의 시기의 마지막 뱀파이어물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람들이 레스타드에게 열광한 것은 그의 ‘귀족적인’ 자태, 그러니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유산처럼 간직해온 그의 귀족의 분위기와 전통 때문이다. 지금의 뱀파이어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리즈는 결국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된다. 여전히 <버피와 뱀파이어> 시리즈가 뱀파이어를 과거의 사악한 악마로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예외적 존재로 설정된 엔젤을 통해 ‘유혹적인 악’으로보다는 ‘공존이 가능한 존재’로서의 매혹적인 뱀파이어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친구가 전직 엔젤, 현직 FBI 요원


 


 


 


그 스핀오프 시리즈인 <엔젤>은 그런 뱀파이어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사람들을 돕는, 그러니까 도시의 밤에 더없이 잘 섞여 살아가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뱀파이어 탐정물의 시작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뱀파이어의 세계와 인간 세계에 그어주는 구분선으로 <버피와 뱀파이어>가 제시한 깜찍한 트릭이 의외로 긴 수명으로 다른 시리즈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뱀파이어가 보통 인간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집의 거주자가 공식적으로 ‘초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


 


<버피와 뱀파이어>에서 처음 선보인 이 설정은 <트루 블러드>에서는 물론 북구에서 날아온 영화 <렛미인>에도 고스란히 사용된다. 과거 뱀파이어물이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조차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괴물로 변할 수 있다’ 혹은 ‘원치 않음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집중했던 시기에 이런 설정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상조차 못할 설정이었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인간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다는 보다 잠재되고 은밀한 공포를 다루거나, 이존재와의 소통과 교감을 다루는 보다 로맨틱한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일종의 ‘안전지대’를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그 결과 ‘초대’와 관련한 새로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중 속 고독’으로 대표되는 소외현상을 심화시키는 도시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과거에는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을 공동체에 속해있는 구성원으로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지금 도시의 성원들은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여기는 것이 더 일반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 괴물이나 이존재 중에서도 뱀파이어는 가장 감정이입하기 쉽거나 매혹을 주는 대상으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True Blood

<트루 블러드>에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이후 만들어진 뱀파이어 시리즈들, 그러니까 <블레이드> 시리즈나 <언더월드> 시리즈 같은 것은 버피가 제시한 혁명적 전환의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변화를 작게든 크게든 반영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인다.


 


<블레이드> 시리즈는 반인 반뱀파이어의 존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는 하지만, 이 역시 뱀파이어는 죽어 마땅한 사악한 존재로 전제한다. 당장 주인공의 직업부터가 뱀파이어 슬레이어다. 다만 뱀파이어보다 더 악한 리퍼들이 등장할 때 일시적으로 휴전과 동맹의 대상이 되기는 한다.


 


<블레이드> 시리즈보다는 <언더월드> 시리즈가 좀더 새로운 뱀파이어물에 한 발 가까이 가있다. 이 시리즈는 적어도 도시 속에 인간들 모르게 살고 있는 뱀파이어의 존재라는 사실을 잘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더월드>의 세계는 21세기에 여전히 살아 존재하는 뱀파이어를 다루며 주인공 역시 뱀파이어인 여전사로 설정돼 있긴 하되, 일반 인간들의 세계와는 유리된, 자신들만의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물론 이 시리즈가 <트와일라잇>에 미친 영향을 언급할 수 있다. 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전쟁이라는 테마야말로, <트와일라잇>의 속편 <뉴 문>이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뱀파이어들’의 출현은 2000년대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뱀파이어물들은, 말하자면 과도기의 것이었다. 2000년에 나온 <드라큐라 2000>과 2002년에 나온 <퀸 오브 뱀파이어>가, 그리고 2004년에 나온 <반 헬싱>이 일견 촌스러워 보이는 것도, 뱀파이어 장르에 밀어닥치고 있는 일련의 변화를 별로 반영하지 못한 탓일 게다.


 


하긴 <퀸 오브 뱀파이어>는 앤 라이스의 원작을 뒤늦게 영화한 버전이었고, <반 헬싱>은 본격적으로 뱀파이어를 다룬다기보다 유니버설이 판권을 갖고 있던 온갖 괴물류를 한 화면에 등장시킨다는 야심이 더 컸던 영화이긴 했다.


 


그보다 살짝 이전, 1998년에 나온 <슬레이어>는 정통적인 뱀파이어 슬레이어물로서 사악한 뱀파이어들을 다 때려잡는 화끈한 슬래셔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새로이 보이는 지점이 있다.


 


 


 


4. 다시, <문라이트>로


 


다시 <문라이트>로 돌아와서,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이 특별한 것은, 저 엔젤을 적통으로 이은 거의 유일한 존재라는 것.


 


캐나다산 시리즈인 <블러드타이즈>만 해도 뱀파이어인 헨리 피츠로이를 매개하는 여자주인공으로 비키가 등장한다. 시리즈의 진짜 주인공 역시 비키라는, 시력을 잃어가는 형사 출신 탐정이고, 헨리는 관객에게 그녀의 유혹자로서, 그녀의 타자로서 비키의 매개를 통해서 제시되는 것.


 


<트루 블러드> 역시 ‘수키’라는 여주인공을 통해 뱀파이어 존이 제시되며, <트와일라잇> 역시 여주인공 벨라를 통해 컬렌 가문의 뱀파이어들이 비로소 소개된다. 뱀파이어에게 매혹된 여성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서만이 타자로서 뱀파이어 주인공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다.


 


 


 



Moonlight

<문라이트>의 주요 출연진.


나쁘지 않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1시즌 15화로 종방된 비운의 시리즈.


 


 


 


그러나 <문라이트>의 믹 세인트 존은 엄연히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등장해 보통 인간인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건넨다. 인간이던 시절을 잊고싶지 않고, 어떻게든 방법만 있다면 다시 인간이 되기를 소망하는 그는 그럼에도 뱀파이어로서 자신의 능력과 성격을 최대한 활용하며, 괴물/야수로서의 성격도 서슴없이 드러낸다. (다소 ‘불쌍하게’ 생긴 알렉스 오로린이 가장 섹시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뱀파이어로서 난폭하게 날뛰는 장면들에서다.)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믹 세인트 존은 뱀파이어로서의 욕망에 충실한 다른 뱀파이어들(그를 뱀파이어로 만든 코럴린(섀넌 소서몬)과 조셉(제임스 도어링))과, 그에게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는 일반 인간 베스(소피아 마일즈) 사이를 잇는 중간자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 사랑에 빠지는 베스보다 오히려 더욱, 뱀파이어에 대한 매혹과 공포의 상반된 이중감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도 바로 믹 세인트 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믹 세인트 존은 코럴린을 통해 임시방편적이기는 하지만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얻고, 단 며칠 인간으로 살며 베스와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베스가 다른 뱀파이어 조직에 납치돼 위기에 닥친 순간, 그는 조셉의 도움을 빌어 다시 뱀파이어로 돌아간다. 뱀파이어들과 싸워 베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가 뱀파이어 시절에 가졌던 괴력과 초능력이 필요했던 탓이다.


 


시리즈의 외형상, 이는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로맨틱한 희생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뱀파이어 시절 그가 가지고 누렸던 뱀파이어의 초능력은, 그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던 또 다른 형태의 일종의 기득권이라 말할 수도 있으리라.


 


 


 



 



 


5. 덧붙여


 


앞으로 뱀파이어물이 어떤 형태로 더 진화해갈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만 당장 앞으로 나올 뱀파이어물들은 지금 제시된 이 다양한 버전의 ‘보다 느슨해진’ 신화들과 탐미적이고 로맨틱한 특징들을 철저히 우려먹을 것으로 보인다.


 


<원더월드 3 : 라이칸의 반란>은 여전히 그 세계에서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의 전투를 계속하고 <뉴 문>과 이후 만들어질 <이클립스(월식)>, <브레이킹 던(여명의 새벽)>이야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터인데, 1편에서 제시된 쇼킹한 설정에서 새로운 것이 나올 거란 기대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벨라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약간의 파장을 가져온다면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음습한 암흑과 음모의 세계로 들어갈 것 같은 <트루 블러드>의 경우 조금 기대가 크다. 원작의 나이브한 한계가 있고 앨런 볼의 시도가 아직은 위태로워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 불안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현재 앨런 볼이 시도하고 있는 보이는 복잡한 문화지도 그리기가 성공할 경우 새로운 전환을 제시해주는 걸작으로 남게될 가능성도 크다.


 


다만 이야기를 사정없이 벌리고 수습하지 못할 경우, 거기에 원작의 원래의 허술한 기둥이 이런 서브텍스트와 잘 어우러지지 못한 경우 오히려 거대한 재난이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사실 1시즌 피날레가 참… 거시기 했다.) 이 시리즈가 제발 제대로 풍성한 서브텍스트를 발전시키며 나아갈 수 있기를.


 


또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문라이트>에서 제시된 가능성을 어떤 시리즈든 어떤 식으로든 이어줬으면 하는 것. 異존재가 매혹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했음에도, 이 쇼가 삼각관계 연애놀음에서 지지부진했던 것, 나아가 좀 엄한 이유로 중단된 것은 여러 모로 아쉽기 그지 없다.


 


 


 


영진공 노바리


 


 


 


 


 


 


 


 


 


 


 


 


 


 


 


 


 


 


 


 


 


 


 


 


 


 


 


 


 


 


 


 


 


 


 


 

특별한 여행을 꿈꾸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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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체게바라와 알베르토가 함께 달리는 장면


나는 언젠가 이런 여행을 하고 싶다. 체게바라의 뒤를 쫓는(?) 여행. 그가 걸어간 발자욱을 따라 한없이 걸어보고 싶다. 그게 가능하겠냐고 비웃어도 괜찮다. 꿈으로 그칠 것이라고 말해도 상관 없다. 그런 여행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

아래 글은 한창 체게바라 열풍이 서점가를 강타(?) 했던 시절에 썼던 것인데, 다시 한 번 나의 특별한 꿈도 곱씹을 겸, 일상에 지쳐 있는 나에게 힘을 주는 선물도 줄 겸 해서 저 깊숙히에서 애써 꺼내 보았다.  영원히 꿈 꾸는 자, 영원히 행복하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누구나 여행을 꿈꾼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달리 특별하기를 바란다. 당신 역시 예외가 아니라면, ‘체 게바라’의 발자국을 따라 여행해 보는 것을 어떨까?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던 의학도였다. 그러다,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두 번에 걸친 남미여행을 하게 되는데, 제국주의에 의해 수탈 당하는 인디오 원주민 등, 가난에 찌들어 있는 민중들의 삶을 목격하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혁명은 오직 무장봉기로만 가능하다는 신념을 얻었다. 이후, 멕시코에서 망명한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본격적으로 혁명의 길을 가게 된다. 인간의 질병이 아닌, 그들의 삶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기로 한 것이다.

혁명군을 모아 훈련시키고, 한걸음씩 부딪히던 끝에 쿠바혁명은 성공하게 되고 ‘체’ 는 쿠바은행 총재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다시 쿠바를 떠나 혁명가로서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을 찾아 떠난다.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에 이른 ‘체’는 쿠바에서와 마찬가지로 ‘혁명’을 위해 힘쓰지만, 결국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움을 받은 정부군에 의해 체포되고, 39세 라는 나이에 처형당한다.



39년이라는 짧은 시간. 그러나, 누구보다 촘촘히 살다간 ‘체’의 농축된 삶을 기록한 평전은, 이념 논쟁을 저만치 미룰 수 있을 만큼 ‘인간적인’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말로는 무엇을 못하고, 머리 속으로는 더더욱 무얼 못할까. 한참이나 날아온 이 시대에도 ‘체’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의 신념이 말과 생각 속에 그친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투철한 평등주의자이기도 했던 ‘체’는 자신이 지도자라는 이유로 대접 받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게릴라들의 지도자로서, 부상병과 농민을 돌보는 의사로서, 글을 가르치고 필요한 교육을 실천하는 교육자로서, ‘실천하는’ 그의 몸짓에 매료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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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스스로를 쌓아갔던 ‘체’. 그리고, 그것을 몸 밖으로 발산했던 ‘체’. 파이프 담배를 물고, 책에 몰두하고 있는 그의 사진은,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이끄는 것이 아닐까? 날이 밝으면 ‘체’ 는 다시 또 움직일 테니까..




정직하고 성실한 혁명가였던 ‘체’는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였던 소련을 향해,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날리기도 하고, 사회주의의 오류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다. ‘체’가 가지고 있던 굳은 신념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정직한 신념 때문에 그 누구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미국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라틴 아메리카를 실현하려는 꿈을 평생 가지고 살았던 ‘체 게바라’. 힘든 게릴라 생활을 쿠바혁명의 성공의 자리에서 접고, 그 성과를 즐길 수 있었겠지만, 그는 다시 군화를 신고 혁명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체’가 네 자녀에게 남긴 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너희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특별한 여행을 꿈꾸는 당신.  ‘체 게바라’의 뒤를 따라 떠나 보자. 아주 특별한 여행이 될 것이다.


영진공 슈테른

<다즐링 주식회사> – 인생,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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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 감독의 다섯번째 장편 <다즐링 주식회사>는 2001년작 <로얄 테넌바움>에 이어 국내에서는 두번째로 정식 개봉된 작품입니다. 2004년작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은 빌 머레이가 주연을 맡으며 적잖은 기대를 모았었지만 결국 정식 개봉을 하지 못하고 DVD로만 출시된 바가 있습니다. 낯익은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스 앤더슨의 작품들은 지극히 소수 취향의 영화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번 <다즐링 주식회사>도 오웬 윌슨, 애드리안 브로디와 같이 잘 알려진 배우들을 앞세운 작품임에도 모 멀티플렉스의 인디영화 전용관 3군데에서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상영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웨스 앤더슨의 영화가 난해한 내용을 다루거나 지나치게 독특한 표현 방식을 사용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선호도에 따라 다소 지루한 감을 줄 수는 있으나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는 일이 없는 것이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입니다. 가족의 발견과 성장을 주제로 세련된 유머 감각을 구사하면서도 6 ~ 70년대 포크 음악과 슬로 모션을 적절히 사용하며 인상적인 ‘영화적 순간’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단순한 코미디 영화 그 이상의 뭔가가 더 있지 않겠냐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대중적인 감각으로부터 다소 거리가 먼 작품들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 웨스 앤더슨 영화의 딜레마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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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즐링 주식회사>은 Part 1으로 명명된 13분짜리 단편 <호텔 슈발리에>로 시작됩니다. 파리의 호텔방에 처박혀 한달째 머물고 있는 잭(제이슨 슈왈츠먼)이 헤어진 애인(나탈리 포트먼)과 재회하는 이야기입니다. 짧은 단편이지만 일찌기 <로얄 테넌바움>에서 선보였던 디테일과 극적인 감수성을 다시 한번 응축해서 보여주는 작품이 <호텔 슈발리에>라고 생각됩니다.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등장해 남자 여럿 잡아먹을 듯한 도발적인 매력을 선보이는 나탈리 포트먼도 이채롭지만 그 앞에서 자궁 회귀본능을 달래는 콧수염 기른 제이슨 슈왈츠먼은 <로얄 테넌바움>에서 얼굴의 털을 다 밀어버린 채 손목을 긋고 말았던 리치 테넌바움(루크 윌슨)의 모습을 다시 보는 듯 합니다. 인도 출신의 영국 가수 피터 사르쉬테트(Peter Sarstedt)의 69년 히트곡 Where Do You Go To (My Lovely)를 들으며 호텔의 발코니로 이동하는 두 사람의 마지막 슬로 모션은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전형적인 ‘영화적 순간’의 재현입니다.

<다즐링 주식회사>의 본편은 아버지가 죽은 후 1년만에 만난 세 형제가 수녀가 된 어머니(안젤리카 휴스턴)를 찾아 인도를 여행하는 로드 무비입니다. 고용인이나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나 여성들과 자기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세 형제는 아직 미성숙한 소년들에 불과합니다. 이런 남자 주인공들의 면모는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줄기차게 대물림되고 있는 공통 유전인자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작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노년이 되어서도 유소년의 내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아버지들이 부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유사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빌 머레이의 출연이 첫 장면에서 다즐링행 열차에 탑승하지 못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으로 처리됨으로써 <다즐링 주식회사>의 내러티브는 동세대의 인물들만을 남겨놓는 한층 축약적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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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세 남자의 인도 여행은 어찌보면 세상살이의 진짜 쓴 맛이라곤 한번도 경험해본 일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법한 부잣집 철부지들의 성장담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명품 여행가방 풀세트를 들고 기차를 향해 뛰고 또 올라타는 우아한 슬로 모션의 반복이라니요. 거의 홍상수 영화 속 인물들에 가깝던 주인공들이 열차 밖에서 극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과거의 공유된 기억을 떠올리며 관계를 복원하는 모습은 대부분의 로드 무비와 성장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장르적 컨벤션에 가깝습니다. 자신들을 버리고 왜 떠났느냐,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왜 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대사가 아닌 보여주기1)를 통해 세 아들과 관객들에게 화답합니다. <다즐링 주식회사>는 웨스 앤더슨 영화의 기존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친숙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주제를 앞뒤 딱 맞게 요약 정리하는 상당히 대중적인 화법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다지 새로울 건 없지만 불변의 가치를 지닌 보편적 깨우침을 전달하는 영화가 <다즐링 주식회사>입니다. 주연급 배우들이 조연으로서 대거 참여해왔던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는 애드리안 브로디만이 새로 참여해 오웬 윌슨이나 기타 단골 배우들과의 순도 높은 케미스트리를 선보입니다. 주요 등장 인물들의 숫자가 적절하고 내러티브 또한 전형적이라 할 만큼 기승전결이 맞아 떨어지는 대중친화적인 작품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이제껏 보여줘왔던 웨스 앤더슨 영화의 스타일 상의 개성은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참에 <다즐링 주식회사>를 출발점 삼아 웨스 앤더슨 영화들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썩 괜찮은 ‘웨스 앤더슨 월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복잡한 분석과 인용을 필요로 하는 소수 취향의 영화가 아니라 누구나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요소들에 좀 더 집중해보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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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소 장황할 수가 있는 대답을, 그리하여 작품 전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는 부분을 하나의 초현실적인 롱테이크로 펼쳐보이는 수법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침묵하라”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의 통찰을 떠올리게 합니다. 논리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은 언어적 표현 대신 ‘보여주기’의 방법을 통해 전달이 가능하다고 했던 바, <다즐링 주식회사>의 이 장면이야 말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친절한 설명문이라 하겠습니다. 누구나 각자의 객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지만 삶이란 결국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나’가 되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란 깨달음을 웨스 앤더슨은 이 한 장면으로 통해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논리적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대중적인 소통의 한 방식이 아니던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영진공 신어지

미네아폴리스에서 어느 창녀가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Christmascard From A Hooker In Minneapolis
By Tom Waits (1978)
fk39.mp3

Charlie I’m pregnant
And living on the 9th street
Right above a dirty bookstore
Of Euclid avenue
And I stopped taking dope
And I quit drinking whiskey
And my old man plays the trombone
And works out at the track

챨리, 나 임신했어.
그리고 지금은 9번가 유클리드 거리의
지저분한 서점 위층에서 살고 있어.
나 마약 끊었어,
그리고 술도 안 마시고,
우리 영감은 트럼본을 연주 해,
철로 변에서 돈 벌이를 하고 있지,

And he says that he loves me
Even though it’s not his baby
And he says that he’ll raise him up
Like he would his own son
And he gave me a ring
That was worn by his mother
And he takes me out dancin
Every saturday night.

그이는 날 사랑한대,
그리고 내 배속의 아이가 비록 자기 애는 아니지만,
자기 친 아들에게 하듯이,
잘 키워 볼 거래,
그이는 내게 반지도 주었어,
자기 엄마가 끼던 거래,
그리고
매 주 토요일 밤이면,
날 데리고 춤추러 가곤 해,

And hey charlie I think about you
Everytime I pass a filling station
On account of all the grease
You used to wear in your hair
And I still have that record
Of little anthony & the imperials
But someone stole my record player
Now how do you like that?

챨리, 난 네 생각을 하곤 해,
주유소에 들릴 때 마다,
거기에 있는 그리스를 보면,
머리에 잔뜩 기름 먹이던 네 모습이 떠 올라,
아 참, 나 아직도 그 레코드 가지고 있어,
“리틀 앤쏘니와 임페리얼즈” 말이야,
근데 실은 누가 내 턴테이블을 훔쳐가 버렸어,
기도 안차는 거 있지,

Hey charlie I almost went crazy
After mario got busted
So I went back to omaha to
Live with my folks
But everyone I used to know
Was either dead or in prison
So I came back to minneapolis
This time I think I’m gonna stay.

마리오가 잡혀 갔을 때,
거의 돌아 버릴 것 같았어,
그래서 오마하에 있는,
식구들한테 돌아갔었는데,
근데 내가 알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거나 빵에 가있는 것 있지,
그래서 다시 미네아폴리스로 돌아와야 했어,
아마 이젠 여기 정착해야 할 까봐,

Hey charlie I think I’m happy
For the first time since my accident
And I wish I had all the money
That we used to spend on dope
I’d buy me a used car lot
And I wouldn’t sell any of em
I’d just drive a different car
Every day, depending on how I feel

챨리, 나 지금 행복한 것 같아,
그때 사건 이후로 처음,
옛날에 우리가 약 사느라고 썼던 돈,
지금 그걸 다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중고차 거래소를 사서는,
차는 한 대도 팔지 않고,
매일 다른 차를 몰고 다닐 거야,
그날그날의 기분에 맞춰서,

Hey charlie for chrissakes
Do you want to know the
Truth of it?
I don’t have a husband
He don’t play the trombone
And I need to borrow money
To pay this lawyer
And charlie, hey
I’ll be eligible for parole
Come valentines day

챨리야, 씨발
사실은 말이야 ……
남편 있다는 거, 그 사람이 트럼본 분다는 거,
다 거짓말이야,
실은 나 돈을 좀 빌려야 돼,
변호사 살 돈 말이야,
챨리,
나, 다음 발렌타인데이에는,
가석방 신청 자격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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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