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무협영화, 그 화려했던 역사의 겉을 핥아보자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80년도에 하나 챙겨볼 만한 작품은 홍금보의 “인자무적”이다. 성룡에겐 대사형급 선배이고 영화계에도 더 오래 몸 담고 있었지만 좀 늦게야 빛을 보게된 그인데 이 작품 역시 취권스타일의 영화로 여기에서 홍금보는  그 나름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그래도 어쨌든 성룡의 역사는 계속된다. 매년 대표작들이 나오고 더불어 홍콩영화도 번성해 간다. 82년에 “용소야” 83년에 “프로젝트 A”가 나오는데 이 작품은 홍콩 액션영화의 역량이 모두 합쳐진 영화로 성룡, 홍금보, 원표 트리오가 나오고, 그 규모가 당시까지 최대 최고 수준이라고 하겠다. 영화의 완성도가 높고, 한장면 한장면 버릴게 없다.



사실 저 트리오가 합으로 맞춘 복성시리즈가 있지만 거기서는 비중이 대사형 홍금보가 중심이었다면 “프로젝트 A”나 이어지는 “쾌찬차”는 성룡이 중심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챙겨볼 배우는 역시 해적대장 롤을 맡았던 적위다. 액션 그자체로만 본다면 견자단이란 배우가 나오기전까지는 당연히 적위가 최고였다. 이 영화에서는 트리오를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여유있게 제압하기도 한다.


 


 





 


이 배우가 확실히 각인된 건 2년 뒤에 나오는 양자경의 “예스마담”에서 악당사장의 보디가드로 나와서 멋진 발차기를 보여줄 때이다. 검은 교복스타일의 의상을 입고 내지르던 그 발차기. 냉혹한 인상으로 악역으로만 다수의 배역을 맡지만 그 존재감은 대단했다.


 


82년에는 최강의 콤비라는 뜻의 영화 “최가박당”도 나오는데, 미스터부 시리즈 허관문의 동생인 허관걸이 나오고 영화 자체는 전형적인 홍콩 액션 모험인데,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를 다 좋아한다. 물론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데이비드 주커나 웨이언스 형제들의 영화보다 이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패러디의 당혹스러움과 여유있는 비꼼이 훨씬 더 매력있다. 또 82년에는 이연걸의 “소림사”가 나오고, 83년에는 저주받은 걸작인 무협환타지 “서극의 촉산”이 탄생한다.


 


좋은 액션 배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사람 더 이야기하자면 84년작 “쾌찬차”의 베니 유키테즈가 있다. 킥복싱 챔피온이였던 배우 베니 유키테즈는 이 영화와 “비룡맹장”에서 성룡의 카운터파트로 나오는데 격투장면만 따지고 본다면 성룡과 가장 합이 잘 어울리고 파이팅으로 화려한 상대역이였고 본다.


 


85년으로 넘어가면 성룡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폴리스 스토리”가 나온다. 성룡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성룡의 개성이랄수도 있는 건 바로 ‘올바름과 책임감’인데 영화 속의 성룡은 언제나 선하고 착하고 남에게 최선을 다해 배려한다. 악당조차 쉽게 용서하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고 다른이들에게 민폐없이 혼자 해결하려고 한다. 그야말로 고군분투 스타일이다.



그리더가 배신이 끝에 닿을 때가 되어서야 더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한다. 바로 그런 성격에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경찰이겠다. 물론 올바른 의미에서의 경찰인지라 그는 승진이나 권력이나 재물에 관심이 없다. 가족을 사랑하고 여자친구나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 가난한 서민이나 어린이, 여성들에게 더 없이 친절하다.


 


 




 



그런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 “폴리스 스토리”이고 작품자체의 품위도 높다. 또한 다대일 격투씬의 정수를 보여준 쇼핑몰 장면이나, 폴리스 스토리2에서 어린이 놀이터 장면은 성룡의 열정과 투쟁심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최고의 격투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세번째 걸작으로 추천한다.


 


86년에는 성룡의 행보를 주춤하게 만든 무협걸작이 또 하나 나오는데, 바로 하늘도 총애한다는 주윤발의 “영웅본색”이다. 흘러간 스타 적룡 그리고 차세대 스타 장국영과 함께 주윤발이 타이틀롤을 맡은 “영웅본색”은 다시 설명이 필요없는 20세기 신무협의 총아다.



칼과 창 대신 권총과 기관총을 들고 나타난 이 영웅은, 무협 영웅들이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을 그리고 협객이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오우삼의 연출테크닉은 홍콩 영화의 연출제작 스타일을 일거에 변혁시켰고, 총격신들의 장면은 이전 영화들이 사람의 몸동작을 넓게 그대로 담아낸 것과는 달리 카메라 앵글과 방향, 움직임에서 무협적 박진감과 극적 긴장감이 현대적 무기를 사용함에 있어서 어떻게 어우러 지는가를 결정지어 버렸다.



사실 물량과 화력이 아닌 총격장면의 구성 그 자체만으로는 난 아직도 서구영화들이 홍콩영화들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본다. 바바리코트와 권총, 그리고 성냥개비로 기억하는 이 영화의 잔영은 80년 후반을 살던 남성들의 혼을 흔들어 버렸다.



이 영화는 우정과 의리라는, 박물관에나 있을 것같은 인간의 죽어버린 감성에 다시한번 성냥불을 붙혔다. 그리고 그 작은 불은 진정 멋졌다. 그런 의미에서 “영웅본색”을 네번째 걸작으로 추천한다.


 


 



19금 폭력장면 주의

 


 


그러면 우리 성룡은 놀고 있었나? 당연히 아니다.


그해 성룡은 “용형호제”를 내놓는다. 그야말로 글로벌 프로젝트 “용형호제”는 대규모 로케이션과 지나칠 정도의 위험한 스턴트 장면들로 가득한데, 성룡이 이 영화에서 죽을뻔 했던 사고 내용은 유명한 일화이고 “프로젝트 A”에서의 부상과 이 영화의 부상 충격으로 이후 성룡의 영화 제작현장에서는 큰소리로 떠들거나 소음을 내지 않는다고 한다. 옆에서 큰소리로 떠들어도 성룡이 심한 두통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세계의 보물을 Get하러 다니는 모험가라는 영화 소재가 매우 좋아서 이후 수많은 시리즈 프로젝트 계획안들이 나왔는데 천하의 성룡도 용형호제 시리즈 연작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2편은 한참 뒤인 90년에야 제작이 됐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역시나 성룡은 시작 전에는 조심스러워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미쳐버리는 구나
라는 점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해 또 재밌는 영화 한 편이 나오는데 홍금보의 “부귀열차”다. 내용은 부자들을 태운 기차를, 자기 고향의 발전을 위해 철로를 폭발시켜 멈추게 하고 그 부자들이 며칠동안 고향마을에 머물게 하려는 홍금보와 마을사람, 기차승객 그리고 그 열차의 부자들의 재물을 노리는 떼강도들이 어우러져 버리는 해프닝인데,


 


재미도 재미지만, 성룡과 성가반을 제외한 당대의 기라성같은 액션배우들과 코믹배우들이 거의 모두 다 나온다. 홍금보, 원표는 물론이고 전설의 스타 왕우가 황비홍의 아버지 황기영으로 나오는 걸 비롯해,


 


 




 


 


적위나 “강시선생”의 임정영, “천녀유혼”의 우마, 한국 출신의 황정리씨, 쿠라타 야스아키 (창천보소), 오오시마 유카리 (대도유가리) , 신시아 로즈록 (나부락), 수많은 악역 고수를 맡았던 종발, 원화 (용쟁호투 격투디자인), 고비, 양사, 맹해 등이 나오고 증지위나 오요한같은 한가락 하는 코미디 배우도 쏟아져 나온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금보의 영향력과 역량을 고스란히 볼 수 있기도 하다.


 


 




 


 


* 3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버디


 


 


 


 


 


 


 


 


 


 


 


 


 


 


 


 


 


 


 


 


 


 


 


 


 


 


 


 


 


 

홍콩무협영화, 그 화려했던 역사의 겉을 핥아보자 [1부]


 

 


 


 



 


 



70년대를 기점으로 9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한국은 경제적 대격변기였고 폭발적 성장기였다. 88올릭픽과 OECD 가입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성장은 소위 “경이로운”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뒤안길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저임금 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구조속에서 우리 아버지,어머니, 형님, 언니들에게 필요했던건 실현 불가능한 커다란 보상이 아니라 오히려 작은 위로가 되는 즐길거리가 아니었을까.




명절을 맞아 어렵사리 마련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시골집에 가면 어린 조카들이 삼촌과 이모에게 들러 붙었고, 명절 차례 후에는 그놈들을 몰고 읍내 영화관을 찾곤 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알현할 수 있었던 짜짱면 한 그릇과 식후의 사이다 한 잔은 어찌나 맛이 있던지.


 


먹고 살기 바빠 이번에는 못 내려간다고 전화통에 대고 울먹이던 작은 형들도 명절 오후에는 삼삼오오 모여 단성사 대한극장을 향하곤 했다. 대지나 화양극장도 좋았고, 부산의 태화극장도 좋았다.



 


그 시절의 명절에는 특히나 홍콩영화가 대세 중 대세였다. 그리고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의 명절을 관통한 홍콩영화의 역사에서 정수리에 우뚝 선 영화는 역시 “취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취권”을 통한 성룡의 출현은 이소룡이라는 전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이소룡 역시 50 ~ 60년대 쇼브라더스의 무협영웅들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팔이”시리즈의 왕우, “금영자”의 정패패, “돌아온 외팔이”와 “13인의 무사”의 적룡 등의 역사를 이야기 하자면 몇날 몇밤이 지나도 모자랄터이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간을 내어 그들의 진면목을 찬찬히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시간에는 그저 그 시절의 작품들을 한 번 훑어, 아니 핥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름 핵심이랄 수 있는 무협무비를 골라보도록 하자.


 


 


 



 



 


 



70-90년대를 관통하는 대명사는 역시 성룡이다. “성룡이영화”라는 말로 대별되는 홍콩 영화의 최대 번성기는 그 이전 쇼브라더스시대의 왕우,정패패,강대위,적룡에서 시작되어 이소룡으로 이어진다.



이소룡의 역사적 출현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광란과 흥분의 도가니탕으로 몰아넣었고, 심지어 인종적 자부심마저 심어주기도 했다 -.-


 


1971년, 영국의 식민지 홍콩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아직 서양제국의 힘에 눌려 제대로 기도 못 펴고 살 때, 삼국지의 관우나 조자룡에 비유할 수 있을 진짜 영웅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이소룡”이었다.



용쟁호투의 첫장면에서 이소룡에 쥐어 터지는 대련 상대자로 나온 홍금보나 단역 엑스트라로 출연해 나가 떨어지던 성룡에게 이소룡은 거대한 영웅이었고 이상향이었다. 그는 패배를 몰랐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그의 기세를 꺽을 수는 없었다.


 


촌동네의 허름한 공장을 배경으로 당산출신의 이 멋진 형님이 악당들을 모두 제압해 버리는 장면을 통해 그를 처음 만난 관객들에게 이소룡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인간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동작이 나오고 어찌 저리도 아름답게 힘과 에너지를 표현낼 수 있는지, 보는 이들 모두에게 그건 황홀경이였고 예술이었다.


 


단역이나 tv시리즈를 제외한다면 그가 남긴 단 4편의 전설적 작품 중에서 딱 한 작품만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단연 “정무문”이어야 할 것이다. 화면 땟깔 좋고, 스토리텔링의 완성도 높고, 액션 촬영이 튀지않고 안정적인 편이라 액션을 못 따라가는 분들에게도
보기좋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 비장미 …… 영화 말미의 그, 영화 역사상 최강의 비장미. 그래서 이 72년도 작품을 우선 강추하는 바이다.


 


73년 이소룡 사망후 홍콩영화계는 아노미와 패닉 그 자체를 보인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영화판은 이소룡의 후계자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서 거룡, 당룡,소룡, 대룡 등등 용용용브라더스를 쏟아낸다.


 


 


 



 


 


 


허나 무수히 나섰던 그의 후배들과 아류작들은 그의 그림자조차 흉내내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였다. 그런 시절이 어언 지나고 70년대 말이 되었을 때 하나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한다. 비어진채로 주인을 기다리던 왕좌에 다가섰던 건 바로 78년 “취권”과 “사형도수”의 성룡이었다.


 


79년 추석 서울바닥을 비롯한 전국은 코 큰 중국청년에게 홀랑 빠져든다. 영화 “취권”은 당시 아시아 전체 모든 흥행기록을 다 깼고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92만 명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는데 당시의 단일 개봉관 체제에서 한 극장에서만 90여만 명을 동원했던 것이니 이건 그냥 계산상으로봐도 6개월이 넘게 내리 매일 매진행진을 벌인 것이리라. 게다가 지방극장의 기록은 남아있지도 않으니 그 흥행의 역사만으로도 그냥 전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록상으로는 “사형도수” 또는 “사형조수”가 먼저 홍콩현지에서 개봉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쨌든 78년에 제작된 두 영화는 상호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성장드라마란 점, 코믹한 설정과 액션을 감미했다는 점, 그리고 두 작품의 내용적 규모가 기존의 비장미 가득한 그런 대의명분보다는 작은 정의, 한사람으로서의 바른 삶 등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마도 제작과정상 서로 보완하고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사형도수”의 경우, 그 나름의 진지한 의미는 바로 강자의 영화가 아니라, 가난한 자, 약자, 서민의 영화라는 거다. 주인공 자체가 그런 배경과 계급을 가지고 수모도 받고 서러움도 받는데, 기존의 강인한 무협 주인공들에 비해 성룡은 그런 연기를 소화해 낼 수 있엇따. 따지고보면 취권에 비해서도 사형도수는 그런 의미에서 더 높은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하여간 그래도 성룡 대역사의 시작은 취권으로 봐야하고, 그래서 이 작품을 두번째로 강추하는 바이다.


 



 





 


 



“성룡영화”가 새롭게 기초해내고 그래서 수많은 영화들이 다시 모방한 스토리 라인과 특징들은 철없지만 선량한 주인공, 그에게 무술을 전수하는 노숙자풍의 신비로운 사부, 그리고 그런 주인공이 실현해내는 작은 정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룡의 작품들은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였다. 이전의 홍콩영화 작품들이 엄청난 대의명분과 역사적 승부, 부모님의 복수등 무거운 소재들을 다루었지만 성룡의 영화들은 다소 가벼웠고 내용도 코믹하고 액션도 전통적인 무술들이 아니라 변형되고 가볍고 코믹한 것들이다.


 


사실 무협 액션들은 당연하게도 폭력이 미화되고, 심지어 공공의 동의 없이 자력구제로 악당을 처단한다. 이건 모두 불법이고 이런 면에서 거의 모든 무협물들은 환타지다. 그래서 무협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은 이 환타지를 현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룡의 무협과 액션은 전통적인 무협의 강하고 빠른 액션보다 기기묘묘하고 신기한 동작과 자세들을 선보였고, 혹자는 아크로바틱 쿵후라고도 부르는 그런 가볍고 경쾌한 무술들은 오히려 나름 신체단련과 자기방어라는 무술 본연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도 성룡 본인이 그런 무술경향을 체계화할 욕심을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당시 이런 무술과 무술영화는 일대의 혁신이었는데 사실 성룡이란 불세출의 천재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룡은 이어서 79년에 “소권괴초”, 1980년에 “사제출마”들을 줄줄이 발표하며 계속 이전 기록들을 갈아치우는 대히트를 연속시킨다. 그리고 그 무렵 미국에서 “배틀 크리크”, “캐논볼”에 출연하였다.



특히 “배틀 크리크”는 미국식 제작시스템을 통해서도 상당히 완성도 높고 재밌는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국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액션도 훨씬 쉽고 간단하지만 선이 분명하게 짜여져 세계를 무대로 하는 액션배우로서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여담이지만 “배틀 크리크”의 극 중 주인공은 1930년대 미국에 온 한국인으로 설정되어있기도 하다. 특히 종반부에 칼잽이 상대역과의 대결장면은 서양액션배우들과의 합을 어떻게 보여줄 지에 대한 완성된 답이라고 평가하고싶다.


 


 


 





배틀 크리크



* 2부에서 계속됩니다 *

 


 



영진공 버디


 


 


 


 


 


 


 


 


 


 


 


 


 


 


 


 


 


 


 


 


 


 


 


 


 


 


 


 


 


 


 

“퍼시픽 림”, 덕후가 아니어도 충분히 흥분을 만끽 할 수 있는 영화

 

 


 


 


이거 조으다 ^.^


<퍼시픽 림> (Pacific Rim, 2013)을 처음 보고 온 뒤에 트위터 계정에 이렇게 올렸다. “저는 덕이 아닌데 왜 <퍼시픽 림>이 재밌는 거죠?”


 


이후 3D 아이맥스로 한 번, 그리고 다시 2D로 한 번, 이렇게 총 세 번을 보았다. 그중 가장 만족감이 컸던 건 베켓 형제가 집시 데인저를 타고 첫 출격하는 장면을 3D 아이맥스로 봤을 때다.


 


거대한 집시 데인저의 각 근육 부분과 이 기계 덩어리의 각 부분이 연결돼 있는 데크들, 심지어 베켓 형제가 입은 수트까지도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기스와 흉터가 나 있다. 너무 반짝반짝 화려한 새 것이 아닌, 사용감과 시간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카이주가 처음 등장한 지 이미 십 년은 훨씬 넘었고, 예거 프로그램이 가동된 지도 몇 년은 지난 때니 당연한 거지만, 영화를 보기 위해 앉아있는 내게 그 흠집들과 상처,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들이 이유 모를 감동을 주기 시작했다.


 


 


 


* 스포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


 


 


 


그 와중 라민 자와디의 테마음악이 울리며 긴장감과 흥분을 점점 고조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물살을 가르며 발걸음을 떼는 집시 데인저의 모습은, 2D에서보다 3D에서 훨씬 더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락스타처럼 영광을 누리던’ 초기의 중후한 파일럿들이 이미 은퇴를 하고 베켓 형제처럼 혈기 넘치는 젊은(…이라기보다 ‘어린’) 파일럿들이 투입되었던 때. 내레이션에서 “승리감에 도취돼 있었다”라는 서술은 “피로와 매너리즘이 쌓이고 있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는 건 바로 그 시점이고, 첫 4등급 카이주가 등장했던 이들의 첫 전투는 처절한 패배로 기록된다.


 


그리고 영화는 5년 뒤로 건너뛴다. 예거 프로그램의 잠정 폐지를 앞두고 알래스카 기지가 폐쇄되는 날이다. 주요 기지가 홍콩의 섀터돔으로 옮겨지고, 5년간 공사장을 전전하며 마음을 닫아걸었던 우리의 주인공 롤리가 돌아오고, 여주인공이 비로소 등장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현재’ 시점이란, 이제 예거 프로그램이 이미 ‘민영화’된 후의 일이다. 서른 대도 넘던 예거는 이제 네 대가 남았을 뿐이고, 이들의 자금책 중 가장 큰 돈줄은 카이주 장기 밀매시장의 일인자이다. 대장인 스태커가 “우리는 레지스탕스”라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계 정부들은 ‘장벽’을 세우는 것으로 이미 전략을 전환한 후이다.


 


무수한 이들이 지적하듯 <월드워 Z>뿐 아니라 이 영화에서도 ‘장벽’이 등장하되 주인공이 5년간 방황한 정처 정도로만 언급된다. 장벽은 방어막이자 ‘보호’를 위한 것이되, 한편으로 ‘고립’을 뜻하기도 한다. <월드워 Z>나 <퍼시픽 림> 모두 이러한 고립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러한 고립이 현대사회에선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혹은 가능할 리 없다는 믿음에 대한 공포가 어렴풋하게나마 동시에 읽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럼에도 이러한 고립이 어느 정도 얼개를 갖추고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 있다면 바로 <설국열차>의 기차 안이다.)


 


 


 



장벽이라고? 풉!


 


 


그리고 좀비나 카이주 모두 ‘난공불락’이라던 장벽을 너무 쉽게 뚫는다. <퍼시픽 림>에서 형을 잃고 마음을 닫은 롤리가 하필이면 장벽 건설현장으로만 돌았던 것으로 설정된 건, 하루 벌어 하루를 살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노가다 일감이 주로 장벽 건설현장에 제일 많았기 때문이지 설마 방어태세 속에 고립을 자처하는 롤리의 심적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벽이 뚫린 바로 그 시점, 롤리가 예거로의 복귀를 결심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장벽을 포기하고 예거로 돌아왔으니 또 너무 쉽게 마코에게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도, 어쩌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예거들은 주로 저 머나먼 바다 한가운데를 프론트라인으로 잡고 괴수들을 상대하지만, 이놈의 괴수들은 툭하면 도시로 난입해 도로며 건물이며 전선들을 부순다. 체르노 알파와 크림슨 타이푼이 안타깝게 사망한 홍콩 앞바다에서의 전투씬에서도, 두 녀석이 나타나서는 한 녀석이 힘겹게 예거들을 상대하는 틈을 타서 다른 한 놈은 기를 쓰고 도심을 향해 간다.


 


물론 영화에서는 지구상 ‘인간’이라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서, 혹은 겁 없이 드리프트를 해온 인간 녀석을 찾기 위해서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또한 우리는 스토리 밖에서, 그것이 ‘괴수가 도시를 때려부수는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예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도시로, 시내 중심부로 향하는 괴수들의 몸짓에는, 그러한 장르 자체의 혹은 스토리 내외적 설정 외에도 내게는 어떤 기묘한 절박함이 보인다.


 


이 괴수들은 자신들을 조종하고 명령하는 식민주의자들의 명령과는 별개로, 그것이 설사 극단적인 ‘폭력’과 ‘파괴’라는 수단일지언정 어떻게든 인간들에게 말을 걸고 접촉하려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들은 인간이 방어를 위해 쌓았으나 결과적으로 고립을 자초하게 될 ‘장벽’을 그렇게 손쉽게 뚫어버리는 것인가 … 는 개소리.


 


 


 



기운 센 천하장사아~ 무쇠로 만든 사라암~


 



 


하지만 이런 얘기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퍼시픽 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의 상처와 흔적이 가득했던 예거들이 새단장과 중무기 보강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그 육중한 철골의 무게감을 자랑하며 괴수들과 싸우는 장면들 자체의 쾌감이다.


 


바위 재질처럼 단단하고 그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괴수의 피부를, 저 육중한 ‘무쇠팔 무쇠다리’가 주먹질하고 찢고 박살낸다. 괴수영화를 본 게 별로 없음에도 우주에서 나타난 괴수의 피부는 바로 저렇게 표현되는 게 정석일 것 같고, 메카닉물에 대해 거의 모르지만 저 타격감과 무게감은 메카닉물이 응당 갖추어야 할 미덕처럼 보인다.


 


아무리 로봇영화나 로봇만화에 별 흥미나 향수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마징가제트와 태권브이를 보고 자랐고 그 주제가가 유전자에 박혀있으며,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각종 로봇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지나왔으며, 이제 인간이 기계를 조종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과 기계의 공명과 동기화를 전제한 에반게리온을 보며 20대를 보냈다. 그러니 <퍼시픽 림>에 스스로도 납득 못 할 흥분을 느끼며 어쩐지 “고맙습니다”를 읊조리게 되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박해천 교수가 말하는 대로 70년대에 태어나 시간과 경제의 여유를 누린 중산층에서 자라 소년잡지를 보며 자랐기 때문에 갖는 마지막 판타지인지 어쩐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것이 출산과 양육의 포기와 부동산 하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더더욱.)


 


 


 



ps1. OST 쩐다! 음악 맡은 라민 자와디가 한스 짐머 사단 출신이라더만, 청출어람인듯.


 


ps2. 극장에서 3번밖에 못 봤는데 다 내리다니 덕 횽아들 좀 실망이었다능?! 내가, 어?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를, 어? 극장서 7번을 봤는데, 7번까지는 무리라도 5번 볼 동안 정도는 버텨줘야 하는 거 아니었냐능?!?!


 


ps3. 덕 중의 덕들은 역시 체르노 알파에 열광하는 게 내가 봐도 당연해 보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집시 데인저… 체인 소 달고 원자로 몸에 단 아날로그 구형에 제일 마징가 제트랑 닮았다. (흥, 체르노 알파는 깡통로봇 닮았다!)


 


ps4. 기쿠치 린코의 모리 마코는 볼수록 싫어지는 게, 일본 만화/애니에서 익히 봐왔던 소녀들, 그러니까 공부도 잘하고 명랑하고 뭐도 잘하고 막 그런데 좋아하는 오빠 앞에만 서면 얼굴 새빨개져서 들지도 못하고 어리버리하다 실수하고 당황하고 도망가는 그런 귀여운 캐릭터를 연기한답시고 연기하는 거 같은데 언니, 얼굴이 그런 귀여운 척하기에는 스스로 삭았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좋게 말하면, 포스 있게 생겼는데 귀여운 척을 해서 계속 당황스러웠음요.


 


ps5. 난 이드리스 엘바의 스태커 펜테코스트 대장님의 그 ‘연극하는 듯한’ 말투가 매우 좋은데 그거 거슬려하는 사람 많구나. 아주 정갈하신 발음과 인토네이션의 영어로 셰익스피어 고전극의 독백대사 읊듯 대사하시는 게 대장님 캐릭터에 너무 잘 어울렸음요.


 


ps6. 뉴트가 한니발 차우네 본부 가서 “으악 여기가 천국일세! 여기 장기! 여기 뇌! 여기 기생충!”하며 꺅꺅거리는 장면에서 좀 웃었음. 아, 어쩜 덕의 마음을 저리도 잘 표현하는 씬인가.


 


 


 


영진공 노바리


 


 


 


 


 


 


 


 


 


 


 


 


 


 


 


 


 


 


 


 


 


 


 


 


 


 


 


 


 


 


 


 


 


 

“배트맨”, 그리고 문제적 인간 프린스


 

 


 


 


 



 


 


 


팀 버튼의 배트맨은 현대적 의미의 히어로 무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전에 슈퍼맨이 있었죠. 슈퍼맨은 1979년 리차드 도너 감독의 “슈퍼맨: 더 무비”에서 인간적(?) 혹은 크립톤 행성인과 지구인 사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긴 하지만, 그러나 슈퍼맨은 슈퍼맨스럽게도 그 모든 고민을 초인적으로 헤쳐나갑니다. 그런데 팀 버튼의 배트맨은 그러질 않습니다. 그는 분노와 복수와 불안감이 마구 뒤섞인 감정 상태를 간직한채 끝까지 찜찜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 찜찜함은 사실 팀 버튼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찜찜함은 오히려 동화적 상상력이 되어주죠. 조커와 맞서는 배트맨의 유치하리만치 치사한 공격, 죽은 척하다가 공격한다던가, 한 방에 죽일 수 있지만 비행기를 맞춰 더 아프게 만든다던지. 그런데, 이런 장면들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에서 있었다면 바로 공분을 샀을 겁니다. 그런데, 팀 버튼의 배트맨은 그런 짓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죠.


 


그 까닭은 영화 속 장면들의 꾸밈새가 진지한 극영화이기보다는 환상과 전투를 오가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또 하나, 음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화 “비틀 주스”에서부터 지금까지도 단짝인 스코어의 마법사 대니 앨프먼이 있습니다.


 


대니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록 밴드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었죠. 미국 출신이지만 주로 유럽서 활동을 했었고요. “Oingo Boingo”의 기타리스트 겸 리드 보컬이었던 대니는 함께 밴드를 하던 형이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나름 유럽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밴드를 걍 때려치고 형과 함께 돌아옵니다.


 


그에게 영화음악을 처음 부탁한 감독이 팀 버튼입니다. “비틀 주스”나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배배꼬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 “가위손”의 아련함도 모두 팀 버튼과 대니 앨프먼의 합작입니다.


 


대니 앨프먼 음악의 특징은 무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리는 정서의 변화입니다. 확실히 그는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었고, 록 밴드 출신답게 이를 클래식적인 방식의 배치보다 “꼴리는대로” 마구 끌어다 붙이길 잘 하죠. 바로 이 무규칙성이 대니의 음악을 동화적이라 부르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대니 앨프먼의 음악이 배트맨의 동화적이면서도 껄끄럽고, 우유부단하면서도 폭력적인 모습을 잘 뒷받침합니다. 박진감 넘치는 곡조에서 급작스런 현악 일색의 부드러운 곡조로 떨어지는 모습은 기-승-전-결을 따지는 클래식 작곡가들에겐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지점이죠. 그런데 대니보다 팀 버튼 버전 배트맨을 귀로 규정해주는 데 더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바로 “프린스”예요.


 


 


 



 


 


 


프린스는 1980년대 마이클 잭슨과 맞짱 뜰 수 있는 유일한 아티스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최고의 기타리스트였고, 송라이터, 프로듀서, 싱어, 댄서 였죠. 완벽하게 계산된 무대 매너는 1980년대 마이클 잭슨과 그 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죠. 배트맨은 스코어에서도 왈츠에서 광기 넘치는 타악, 웅장한 배트맨 테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프린스는 이보다 한 발 더 나갑니다.


 


프린스가 이 음악을 원해서 만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습니다. 워너 브로스 뮤직과 프린스의 사이는 나쁘기로 유명했고, 음반사는 그런 프린스를 고깝게 봐서 계약 이행을 내세워 앨범 발매를 종용하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무시무시한 창작욕을 자랑하는 프린스답게 이 앨범 역시 정말 빠른 시간 안에 만든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음악이 후진 건 아니죠. 클럽튠에 가까운 댄스 음악 ‘Partyman’과 ‘Batdance’ 그리고 가성을 사용한 감미로운 알앤비 발라드 ‘Scandalous’, 시나 이스턴을 데려와 팝 발라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듀엣 곡 ‘The Arms of Orion’, 가성으로 중성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Vicki Waiting’까지.


 


킴 베이싱거 누님이 맡은 비키 베일의 이미지를 끈적하게 만들어놓는 ‘Vicki Waiting’의 그루브감은 확실히 프린스의 전매특허죠. 그러고보니 킴 누님과 염문도 있었네요. 전반적으로 1980년대 록 음악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훵키 비트와 효과음이 경쾌한 멋진 앨범입니다.


 


 





프린스의 대표곡, “When Doves Cry” 

 


 


157cm의 단신인 프린스는 재즈 보컬리스트인 어머니와 재즈 피아니스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무렵 별거하던 아버지의 새 애인을 집에서 마주하는 경험을 하는 등 그닥 좋은 환경 출신은 아니었다네요. 물론 엄마, 아빠를 오가며 다양한 음악을 들었고, 자신의 밴드에 대해 평가를 부탁하는 등 음악에 대한 욕심은 부모 모두에게서 받았고, 또 부모를 이용하기도 했죠.


 


여튼 소속사 워너와 계약 문제로 끝장 법정 싸움이 불거지자 자기 뺨에 “Slave”라고 문신을 새기기도 했던 거 보면 보통의 인물은 아니죠. 남성과 여성의 심볼을 합친 자신만의 문양을 만들고, 그 문양을 이용한 기타를 연주하는 이 양반은 확실히 문제적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배트맨의 양면성을 그대로 대변하죠.


 


프린스의 음악도 그래요. 흔히 훵크 가수로 분류하지만, 프린스의 음악에는 록의 요소가 짙죠. 고교 시절 첫 밴드에서 그는 지미 헨드릭스가 환생한 듯한 연주를 들려줬다고 하네요. 댄스와 퍼포먼스의 대가로 마이클 잭슨과 쌍벽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프린스의 퍼포먼스는 거의 레이디 가가를 방불케 합니다. 누군가 레이디 가가의 등장을 보고 “여자 프린스”라고 했는데,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세대에겐 프린스가 1980년대에 레이디 가가처럼 기행을 일삼았던 남자 가수였다고 해야 이해할 지도 모르지만.


 


그런 프린스가 만든 영화 “Batman” 사운드 트랙은 영화를 떠나 음반 그 자체로도 높이 평가할만한 명반입니다. 대니 앨프먼의 스코어 못지 않게 영화에 이 음반 수록곡들이 슬금슬금 등장해서 영화의 분위기를 딱 잡아줍니다. 조커가 돈 뿌릴 때 흘러나오는 ‘Partyman’은 아주 대표적이죠.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Batdance’도 정말 매력적이고요. ‘Lemon Crush’는 록, 훵크, 소울이 뒤죽박죽 믹스된 정말 프린스다운 명곡입니다. 비키 베일 역을 맡은 킴 누님에게 딱 맞는 분위기의 곡이었죠. 그런데, 영화에서 비키 누님은 이런 끈적한 분위기를 낼 듯 하다가 맙니다. 그걸 프린스가 아쉬워 했을까요? 킴 누님에게 딱 맞는 곡을 만들어 영화에 넣었네요.


 


그럼 ‘Batdance’ 들으시면서 포스팅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Prince – Batdance (Batman Soundtrack) 작성자: Leroidukitch

 


 


 


영진공 헤비죠


 


 


 


 


 


 


 


 


 


 


 


 


 


 


 


 


 


 


 


 


 


 


 


 


 


 


 


 


 


 


 


 


 


 


 

“바람이 분다”는 진정 불편한 영화, 나쁜 영화인가?

 

 


 


 



<바람이 분다>를 보러 가는 길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 설정만으로도 이미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었고, 실제로 상영관을 검색할 때 함께 검색된 감상문들은 하나같이 “역사 왜곡” “불편한” 등의 어구들을 제목에 달고 있었다.


 


하야오 월드를 잘 알지 못해도 불과 몇 작품만으로 이미 ‘존경하는 거장’인 사람인데, 우리 하야오 영감이 그럴 리 없다는 굳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그간 받았던 감동이나 위안이 이 (세 번째) 은퇴작 한 편으로 모두 망가질까 두려웠던 게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식의 비판에 대한 반박과 변명거리를 열심히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점에서는 고민거리와 의문이 남는다. 아마도 이 글 역시 지나치게 편향된, 하야오 영감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글이 될 듯하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평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꿈에서 비행기를 조종하던 소년 지로가 곧 위협적인 ‘폭격기’ 무리에 격추당해 추락하는 오프닝으로 시작한다. 이 오프닝은, 그저 ‘아름다운 비행기’에 대한 지로의 꿈과 열정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참혹해지는지 분명하게 전제하고 보여주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하듯, 어릴 적부터 군수공장 근처에 살면서 전투기와 탱크 등에 평생 매혹돼 있었으나 그 매혹 자체에 죄책감을 갖고 일종의 ‘길티 플레져’로서 그 매혹을 다뤄오던 감독 개인사와 겹친다.


 


지로의 멘토라 할 만한 카프로니 백작은 지로에게 “비행기는 아름다운 물체고 나는 이 비행기에 폭탄 대신 사람을 싣고 싶다”는 소망과, “비행기는 살육과 파괴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라는 통찰을 동시에 들려준다. 침략전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이 이 전쟁이 모두의 파멸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필생의 꿈을 쫓기 위해 전쟁의 부역자가 되는 아이러니의 길을 지로는 꾸역꾸역 간다.


 


시대가 좀 더 좋았다면, 혹은 침략국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경제적 곤궁을 동반할지언정 모험과 발명의 영광의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로는 이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아이들에게 카스텔라를 건네려다 거절당한 뒤 친구인 혼조에게 이를 얘기하는 장면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가식과 위선’의 함정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는 듯 보인다.


 


혼조와의 대화씬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넘치는데도 침략전쟁에 골몰하느라 전투기 기술을 사들이는 당시 침략전쟁의 양상에 대한 비판도 곁들여지는데, 이는 주인공 지로가 아니라 지로와 함께 전투기를 만드는 동료 혼조의 입을 통해 이뤄진다. 이 역시, 하야오가 스스로의 입장을 변명하거나 위선의 함정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결과라 믿고 싶다.


 


 


 



 


 





더욱이 지로가 선택한 이 길은, 나오코와의 사랑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초반 관동대지진의 처참한 풍경에 대해 조선인들에 대한 학살을 생략한 대신 고작 ‘로맨스의 공간’으로 써먹는다며, 나아가 이 영화가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이상적이라 비판하는 듯하다. 이 입장은 임근준 미술평론가와 유운성 영화평론가의 대담(프레시안, “’나쁜 땅’ 일본은 ‘꿈꾸는 소시민’의 책임 아니다?!”)에서 임근준 평론가도 일정 부분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사랑의 낭만성’이, 물론 영화의 로맨스를 강조하거나 그 시대에 대한 낭만적 회고를 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볼 때 오히려 “지로의 선택에 대한 대가가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병든 연인-아내를 “별채에 눕혀놓고 자기는 일하러 나가는” 지로에 대한 비판과 원망은 그 여동생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화된다. 꿈도 사랑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심지어 이를 위해 연인의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는 그의 이기심은, 애초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오코가 치료를 포기하고 달려오도록 요청하는 데에서도, 단적으로 결핵 환자인 그녀 옆에서 (아무리 그녀의 허락이 있었다고는 하나) 담배를 피우는 짧은 장면으로도 드러난다.


 


그렇게 아내의 목숨까지 담보로 잡고 완성된 것이 바로 제로센 전투기, 바로 가미카제 특공대들이 타고 나갔던 –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 전투기이다. 나오코는 이 전투기가 시험비행을 하는 날 지로의 곁을 떠나는데, 우리는 마지막 꿈 씬에서 그에게 “’당신은’ 살아야 해요”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낭만적인 비극의 사랑을 완성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실은 지로에게 그 상실과 죄책감의 무게를 끝까지 지고 가라는 무시무시한 요구이기도 하지 않을까? 더욱이 나오코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써 지로의 비행기 완성에 지지기반이 되는데, 그 사랑의 파멸,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결국 이 부역에 대한 ‘처벌’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몇 년이 지나서도 다시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그녀가 환자임에도 사랑을 고백하며 약혼을, 그리고 백년가약을 맺는 이 ‘운명적 사랑’을 처음 만난 배경이 바로 관동대지진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이들의 운명적 첫 만남을 비극적으로 치장해주는 기능, 혹은 지로의 선량한 품성을 드러내는 기능으로만 해석하기엔 그 재앙의 끔찍함을 묘사하는 수위가 높다.


 


왜 하필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는 것은, 그저 달리는 기차에서의 짧은 눈인사만이 아니라, 2D의 화면으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전달하는 지진, 그리고 온 동네가 불타고 있는 대재앙의 현장인가. 끔찍한 이 자연재해가 역사적으로는 조선인을 비롯한 비-일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로 이어졌고, 이때 일본인들은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학살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싹튼 사랑은 당연히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야오 영감은 스크린 밖에서는 확고한 과거 일본의 전범으로서의 이력에 대해 확실하게 인정하며 책임을, 스크린 안에서는 전쟁 반대와 생태주의적 입장을 확연하게 드러내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전쟁을 계기로 발전했던, 그리고 직접 전쟁의 도구로 사용됐던 비행기체에 대한 열망을 평생 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 딜레마와 비극은 하야오 감독이 언젠가는 스스로 직면하게 될, 아니 직면해야만 하는 주제였을 거라 생각한다.


 


위에 링크를 붙인 대담에서 유운성 평론가가 지적하듯,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비행’에 대한 로망이 등장했었지 않은가. “군국주의를 미화한다”는 오해를 사기 쉽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하야오 자신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은퇴작으로 이 주제를 꺼내들었고, 에둘러 피하는 대신 ‘돌직구’로, 바로 그 시대에 전투기, 심지어 가미카제 공격에 사용됐던 전투기를 만들던 남자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 영화가 그가 평생 품어온 딜레마에 대한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는 아마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고백이 너무 수줍고도 담백한 나머지, ‘비겁하다’ 판단할 만한 여지(유운성 평론가, 위의 대담)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고백이 오히려, 자신의 죄책감 어린 욕망과 신념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며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 못한 자신의 부족한 상태와 한계를 솔직하고 겸허하게 드러내며 시인하는 ‘용기’로 이해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그렇게 삐딱할 필요가 있을까. 나오코가 지로를 향해 “살아야 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꼭 지로를, 혹은 3.11 이후 일본인만을 위한 건 아니라고 느꼈다. 오히려 세계의 종말을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향한 위로라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침략전쟁에 부역했던 이에게도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부여된다. 이는 면죄부 혹은 희망의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아 슬픔과 죄책감과 책임을 견뎌야 하는 자들 모두와, 상처와 피해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삶을 이어가야 하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람’이 부는 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뭇잎의 흔들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그 바람이 부는 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소년의 순박한 꿈’이 그냥 ‘순박’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세상은 그리 쉽지 않잖아요 ……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