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그리고 문제적 인간 프린스


 

 


 


 


 



 


 


 


팀 버튼의 배트맨은 현대적 의미의 히어로 무비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전에 슈퍼맨이 있었죠. 슈퍼맨은 1979년 리차드 도너 감독의 “슈퍼맨: 더 무비”에서 인간적(?) 혹은 크립톤 행성인과 지구인 사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긴 하지만, 그러나 슈퍼맨은 슈퍼맨스럽게도 그 모든 고민을 초인적으로 헤쳐나갑니다. 그런데 팀 버튼의 배트맨은 그러질 않습니다. 그는 분노와 복수와 불안감이 마구 뒤섞인 감정 상태를 간직한채 끝까지 찜찜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그 찜찜함은 사실 팀 버튼 영화에서 자주 다뤄지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찜찜함은 오히려 동화적 상상력이 되어주죠. 조커와 맞서는 배트맨의 유치하리만치 치사한 공격, 죽은 척하다가 공격한다던가, 한 방에 죽일 수 있지만 비행기를 맞춰 더 아프게 만든다던지. 그런데, 이런 장면들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에서 있었다면 바로 공분을 샀을 겁니다. 그런데, 팀 버튼의 배트맨은 그런 짓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죠.


 


그 까닭은 영화 속 장면들의 꾸밈새가 진지한 극영화이기보다는 환상과 전투를 오가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또 하나, 음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화 “비틀 주스”에서부터 지금까지도 단짝인 스코어의 마법사 대니 앨프먼이 있습니다.


 


대니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록 밴드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었죠. 미국 출신이지만 주로 유럽서 활동을 했었고요. “Oingo Boingo”의 기타리스트 겸 리드 보컬이었던 대니는 함께 밴드를 하던 형이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나름 유럽서 성공을 거두고 있던 밴드를 걍 때려치고 형과 함께 돌아옵니다.


 


그에게 영화음악을 처음 부탁한 감독이 팀 버튼입니다. “비틀 주스”나 “크리스마스의 악몽”의 배배꼬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 “가위손”의 아련함도 모두 팀 버튼과 대니 앨프먼의 합작입니다.


 


대니 앨프먼 음악의 특징은 무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리는 정서의 변화입니다. 확실히 그는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었고, 록 밴드 출신답게 이를 클래식적인 방식의 배치보다 “꼴리는대로” 마구 끌어다 붙이길 잘 하죠. 바로 이 무규칙성이 대니의 음악을 동화적이라 부르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대니 앨프먼의 음악이 배트맨의 동화적이면서도 껄끄럽고, 우유부단하면서도 폭력적인 모습을 잘 뒷받침합니다. 박진감 넘치는 곡조에서 급작스런 현악 일색의 부드러운 곡조로 떨어지는 모습은 기-승-전-결을 따지는 클래식 작곡가들에겐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지점이죠. 그런데 대니보다 팀 버튼 버전 배트맨을 귀로 규정해주는 데 더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바로 “프린스”예요.


 


 


 



 


 


 


프린스는 1980년대 마이클 잭슨과 맞짱 뜰 수 있는 유일한 아티스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최고의 기타리스트였고, 송라이터, 프로듀서, 싱어, 댄서 였죠. 완벽하게 계산된 무대 매너는 1980년대 마이클 잭슨과 그 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죠. 배트맨은 스코어에서도 왈츠에서 광기 넘치는 타악, 웅장한 배트맨 테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프린스는 이보다 한 발 더 나갑니다.


 


프린스가 이 음악을 원해서 만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습니다. 워너 브로스 뮤직과 프린스의 사이는 나쁘기로 유명했고, 음반사는 그런 프린스를 고깝게 봐서 계약 이행을 내세워 앨범 발매를 종용하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무시무시한 창작욕을 자랑하는 프린스답게 이 앨범 역시 정말 빠른 시간 안에 만든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음악이 후진 건 아니죠. 클럽튠에 가까운 댄스 음악 ‘Partyman’과 ‘Batdance’ 그리고 가성을 사용한 감미로운 알앤비 발라드 ‘Scandalous’, 시나 이스턴을 데려와 팝 발라드의 전형을 보여주는 듀엣 곡 ‘The Arms of Orion’, 가성으로 중성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Vicki Waiting’까지.


 


킴 베이싱거 누님이 맡은 비키 베일의 이미지를 끈적하게 만들어놓는 ‘Vicki Waiting’의 그루브감은 확실히 프린스의 전매특허죠. 그러고보니 킴 누님과 염문도 있었네요. 전반적으로 1980년대 록 음악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훵키 비트와 효과음이 경쾌한 멋진 앨범입니다.


 


 





프린스의 대표곡, “When Doves Cry” 

 


 


157cm의 단신인 프린스는 재즈 보컬리스트인 어머니와 재즈 피아니스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무렵 별거하던 아버지의 새 애인을 집에서 마주하는 경험을 하는 등 그닥 좋은 환경 출신은 아니었다네요. 물론 엄마, 아빠를 오가며 다양한 음악을 들었고, 자신의 밴드에 대해 평가를 부탁하는 등 음악에 대한 욕심은 부모 모두에게서 받았고, 또 부모를 이용하기도 했죠.


 


여튼 소속사 워너와 계약 문제로 끝장 법정 싸움이 불거지자 자기 뺨에 “Slave”라고 문신을 새기기도 했던 거 보면 보통의 인물은 아니죠. 남성과 여성의 심볼을 합친 자신만의 문양을 만들고, 그 문양을 이용한 기타를 연주하는 이 양반은 확실히 문제적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배트맨의 양면성을 그대로 대변하죠.


 


프린스의 음악도 그래요. 흔히 훵크 가수로 분류하지만, 프린스의 음악에는 록의 요소가 짙죠. 고교 시절 첫 밴드에서 그는 지미 헨드릭스가 환생한 듯한 연주를 들려줬다고 하네요. 댄스와 퍼포먼스의 대가로 마이클 잭슨과 쌍벽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프린스의 퍼포먼스는 거의 레이디 가가를 방불케 합니다. 누군가 레이디 가가의 등장을 보고 “여자 프린스”라고 했는데,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세대에겐 프린스가 1980년대에 레이디 가가처럼 기행을 일삼았던 남자 가수였다고 해야 이해할 지도 모르지만.


 


그런 프린스가 만든 영화 “Batman” 사운드 트랙은 영화를 떠나 음반 그 자체로도 높이 평가할만한 명반입니다. 대니 앨프먼의 스코어 못지 않게 영화에 이 음반 수록곡들이 슬금슬금 등장해서 영화의 분위기를 딱 잡아줍니다. 조커가 돈 뿌릴 때 흘러나오는 ‘Partyman’은 아주 대표적이죠.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Batdance’도 정말 매력적이고요. ‘Lemon Crush’는 록, 훵크, 소울이 뒤죽박죽 믹스된 정말 프린스다운 명곡입니다. 비키 베일 역을 맡은 킴 누님에게 딱 맞는 분위기의 곡이었죠. 그런데, 영화에서 비키 누님은 이런 끈적한 분위기를 낼 듯 하다가 맙니다. 그걸 프린스가 아쉬워 했을까요? 킴 누님에게 딱 맞는 곡을 만들어 영화에 넣었네요.


 


그럼 ‘Batdance’ 들으시면서 포스팅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Prince – Batdance (Batman Soundtrack) 작성자: Leroidukitch

 


 


 


영진공 헤비죠


 


 


 


 


 


 


 


 


 


 


 


 


 


 


 


 


 


 


 


 


 


 


 


 


 


 


 


 


 


 


 


 


 


 


 

“찰리와 초콜렛 공장”, 어디 착한 것만 갖구 신분상승 하겠어?


영화보면서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자꾸 서브 텍스트를 읽으려고 하는 것 참 나쁜 버릇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타고난 criticism이 타고난 creativity보다 많은 걸 …… 범재의 한계지.

“황금 티켓”이라는 건 나에게 “신분 상승을 위한 기회”의 메타포로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서고금, 애어른을 막론하고 겨우 초코렛 공장 한번 견학해 보자고 그 생난리를 치지는 않을 것 아닌가. 버루카 솔트의 공장에서 일하다가 황금티켓을 찾은 종업원이 스윽 그 티켓을 감추려다가 감독관에게 빼앗기는 장면은, 더욱 더 “황금 티켓”은 “신분상승”의 티켓이라는 혐의를 확실시 하게 한다.

영화는 신분상승의 황금티켓을 잡는 방법에 대해서 한가지 한가지 친절하게 예를 들어준다.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는 방법이란, 자본사회에 철저히 순응하며, 악착같이 재화를 소비하거나 (독일 뚱보 아우구스투스 사례), 자본력을 동원하거나 (땅콩공장 딸 버루카), 지독한 승부의식에 불타올라 끊임 없이 노력하거나 (챔피언쉽을 수십개 가진 바이올렛), 아니면 대단한 I.Q와 권모술수의 대가가 되는 일이다 (해킹으로 티켓을 얻은 마이크 티비).

이에 비하면 우리의 주인공 찰리 버켓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 티켓을 얻게된다. 근데, 이게 정당한 건가?

초콜렛 공장의 경우도 산업사회 역사를 압축한 혐의가 짙다. 윌리 웡카는 성공한 자본가이고 (물론 자본만 가지고 성공한 것은 아니고, 본인의 아이디어가 있으며, 사업가로써의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의 Enterpreneurship은 존경할 만하다), 찰리의 할아버지는 1차 Sabotage 세대, 찰리의 아버지는 2차 Sabotage세대다. 움파룸파족은 제 3세계의 노동자이며, 자본가인 윌리 웡카는 단순히 코코아빈을 움파룸파족에게 제공하는 저렴한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심지어 자신이 불쌍한 움파룸파족을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움파룸파 족은 공장에 갖혀서 지내고 있다!)

자그맣고 충성스러운 움파룸파 족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제 3세계 노동자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심지어 지하 수로에서의 노젓는 장면에서 윌리 웡카는 ‘저들은 앞을 볼 수 없지, 그저 명령하는 대로 저을 뿐’이라는 말까지 한다.) ‘후계자를 찾기 위해 아이들을 초콜렛 공장으로 초대했다’는 윌리 웡카는 왜!! 움파룸파 족에게는 공장을 물려주지 않는 걸까.

결국, 시키는 대로만 잘 하고, 매뉴얼대로만 살아가는 FM guy 찰리는 윌리 웡카에게 ‘초콜렛 공장 공동 경영권 및 상속권’을 손에 넣음으로써 신분상승에 성공한다. 자신을 해고한 자본가에게 끝까지 존경심과 경외심을 잃지 않았던 그의 할아버지는 건강을 다시 되찾고, 그의 착한 아버지는 자동화 설비와 함께 해고되었다가, 그 기계를 유지/보수하는 일로 재 취업됨으로써 ‘신기술로 인한 노동 소외는 다시 다른 노동의 필요로 채워진다’는 요지의 보수적 경제관념을 철저하게 증명까지 시켜준다.

정말? 정말 착하기만 하고, Creativity만 온 몸에 충만하면 신분 상승 할까? 정말? 그 사실 여부를 떠나서라도, 어차피 우리는 끝없는 승부의식으로 자신을 세상에 던지는 바이올렛이기도 했다가 , 때로는 자신의 보잘것 없는 지력(知力)을 이용해 보려고 하는 마이크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하릴없이 자본이 쏟아 놓은 소비재들만을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해내며 자괴감에 빠져버리는 아우구스투수였다가 하지 않는가? (버루카 솔트는 예외니까 그냥 두자) 왜 이 아이들이 비난을 받아야하는가?

아이들을 벌 주는 방법자체도 상당히 아동학대적이기도 하지만, 왜 신분상승을 위해 악을 악을 쓰는 불쌍한 우리 중생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이 영화의 전체적 태도도 참 학대적이다. 난 내가 바이올렛이라는 것이, 마이크라는 것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다.

영진공 라이

<언브레이커블>, 슬픈 수퍼히어로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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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식스 센스>(1999)가 흥행과 비평 모든 면에서 알찬 성공을 거두었던 탓에 M. 나이트 샤말란(본명 Manoj Nelliyattu Shyamalan, 1970년생) 감독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은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습니다. 더우기 <식스 센스>에서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과 특히 주연이었던 브루스 윌리스까지 다시 캐스팅해 빚어낸 연작이다 보니 전작의 성공에 너무 기대려 한 인상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경우 비평가들부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뿐만 아니라 극장가에서도 대부분 ‘기대에 못미친다’는 얘기가 나오기 쉽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영화를 만든 사람 자신이 앞에 써먹은 이야기틀에서 금세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식스 센스>와 <언브레이커블>의 관계를 팀 버튼 감독의 두 작품 <배트맨>(1989)과 <배트맨 리턴스>(1992)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배트맨에 대한 팀 버튼 감독의 탁월한 재해석과 독특한 미술 감각은 <배트맨>을 당대 최고의 영화로 만들었었죠. 뒤이어 만들어진 <배트맨 리턴스>는 팽귄맨이라는 인물을 통해 팀 버튼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게 되면서 전작에 비해 좀 더 어두침침한 느낌을 주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이 두 번째 작품을 더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가 하면 저를 비롯한 더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처음 팀 버튼 식 배트맨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더 좋게 간직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경우가 있죠.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과 <강원도의 힘>(1998) 말입니다. 이 경우에도 저는 <강원도의 힘>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더 좋게 기억합니다. 두 작품이 다 훌륭하지만 첫 작품에서 받은 충격의 강렬함으로 인해 두 번째 작품을 보게 될 때에는 좀 면역이 되어서 아무래도 약간 만만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닐까요. 첫 작품을 보았을 때에만 해도 ‘아,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화가 나오다니!’하며 영화의 높은 완성도 자체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워 했지만 다음 영화를 보게 될 땐 잘 만드는 건 어느새 기본이 되어 버리고 좀 더 새롭고 좀 더 충격적인 뭔가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 관객의 자연스런 욕심이자 속성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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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줄거리에 관한 한 가급적 언급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또 어떤 방식이든 영화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미리 갖게 하는 리뷰도 정말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영화를 보게 될 관객 입장에서는 이 모두가 무척 해로울 뿐이라는 걸 저 역시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언브레커블>의 경우 <식스 센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막판 뒤집기라는게 있어서 배급사 입장에선 요즘 그 흔한 관객시사회조차 안가졌던 것이 잘 이해가 됩니다. <식스 센스>만 해도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야!’ 한마디만 듣고 영화를 보게 되면 이 영화를 통해 즐길 수 있는 것의 반 이상은 날아가 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이 영화 만큼은 대부분 보셨으리라 믿고 썼습니다.^^;)

매체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언브레이커블>의 내용에 대한 홍보자료는 ‘대학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던 한 남자(브루스 윌리스)가 열차사고를 당하는데 함께 탑승했던 다른 사람들은 다 죽는 와중에 자신만 털끝 하나 안다치고 멀쩡히 살아 났더라’는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물론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심지어 사무엘 L. 잭슨까지도 소근소근 거리는 이 조용한 영화에서 특출한 카메라 워크와 배경음악을 사용해 관객들을 숨 죽이고 따라오게 만드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재능은 정말 대단합니다.

물론 영화에 대한 평가는 영화를 본 관객들 개인이 직접 하게 되는 것이죠. <식스 센스>의 경우 같은 초현실적인 소재라 하더라도 보기에도 끔찍한 유령들이 출몰하여 관객들을 끊임없는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에 몰아넣기 쉬웠던 반면 <언브레이커블>은 보다 지적인 재해석을 요구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전작과 비슷한 수준의 서스펜스와 반전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극장을 나설 때의 표정이 과히 유쾌하지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언브레이커블>도 참 재미있게 봤구요, 생각할 수록 더 깊은 인상이 남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그렇게 슬픈 수퍼히어로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