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해서 문제라고?

몇년 전에 우리나라에 온 하버드대 교육학과 교수인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의 영어 열풍은 미국의 다이어트 열풍이랑 비슷하다.
미국에서 다이어트 산업은 갈수록 커지고 다이어트에 쏟아붓는 비용도 갈수록 늘어남에도
오히려 비만인구 숫자는 더 늘어나는 것 처럼, 한국에서 영어교육에 열광하는데도 정작 영어 실력은 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간단히 말해서 영어를 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제 주변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몇년 지내면 서서히 영어 듣기 말하기가 약해진다고 말하더군요.
왜? 이유는 뻔하죠. 평소에 영어를 쓸 일이 없으니까요.

영어를 쓸 일이 생기려면 자꾸 외국인들을 만나야 하고 같이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원치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외국 사람들과 같이 일하려면 지금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우리가 익숙한 시스템은 폐쇄적인 학연 시스템입니다.
서울대학교의 세계 랭킹은 좋게 봐줘서 1백위 내외지만,
외국에서 훨씬 랭킹이 높은 대학에서 그만큼 더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이
국내에서는 서울대 출신에게 밀릴 수 있습니다. 실력만 있고 학연이 없다면 말입니다.

서울대의 저력은 대학 자체의 우수함이 아니라 서울대 졸업생들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의 힘에서 나옵니다.
이런 네트워크는 원래 폐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들끼리의 기준을 사용하기에 기본적으로 외부와의 교류를 하면 그 내부기준들이 흔들립니다. 혼란이 생길 뿐이죠.

외국엔 이런 네트워크가 없냐고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심하진 않습니다.
일단 외국의 학계는 단 하나의 우수한 대학과 그 이하 대학으로 줄세우기가 쉽지 않죠.
그러니까 네트워크가 있어도 그 네트워크 자체가 다원적이라 폐쇄성이 어느 정도 상쇄됩니다.
물론 미국도 유럽도 어디쯤 부터는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지만, 우리나라는 그 리그가 거의 대부분을 점유한다는게 문제죠.
이런 시스템에서는 네트워크에 편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편입한 이후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합니다.
서울대 망국론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도 그겁니다.
네트워크에 의존하다보면 결국 우물안 개구리 그 자체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폐쇄 네트워크 안에서만 최고인 인간들” 이 바로 그 우물 안 개구리죠.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 영어에 목을 맬까요?
어차피 그 영어 잘하는 직원들 뽑아놓고 1년에 한 두번 외국과 전화통화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왜?

지금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국제화 시대에 외국과 교류하기 위한 언어로서의 가치 보다는 일종의 거름망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토플이나 토익은 21세기의 과거시험이 아닙니까.  그걸 가지고 사람들을 줄세우는 거죠.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교육 열풍, 조기유학 열풍은
국내 학교에서 영어를 잘 가르치면(물론 잘 가르친다는 보장도 없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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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무슨 용가리 통뼈가 있어서 국내 공립학교에서 영어교육을 100% 확실하게 실시했다고 치죠.
그러면 정말 큰일나버립니다. 모두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영어를 하고 비슷비슷한 수준의 토익 토플 점수를 받으면
차별성 지표로서 영어의 가치가 사라지거든요.
그럼 사교육과 학부모는 합심해서 다른 차별성 지표를 찾아나서야 됩니다.

수능을 갈수록 쉽게 내서 수능 상위권 점수자들의 비율이 갈수록 높아질수록 과외 열풍이 부는 이유랑 똑같습니다.  수능으로 차별을 못하니까 다른 차별 지표를 억지로 찾아내려다 보니 사교육이 커진거죠.

그럼 왜 차별을 해야 하나고요?
왜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너무 비슷비슷한데, 그 원하는 것은 얼마 없거든요.
그것은 바로 괜찮은 직업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괜찮은 직업을 놓고 벌이는 제로섬 게임장입니다.

백명의 사람이 열개의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경쟁을 하면 결국 그 백명중 열명을 골라낼 방법이 필요해집니다.
지금 영어가 바로 그 기능을 하고 있죠. 영어가 아니라면 뭐든 상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은 괜찮은 직업이 열개로 고정되어 있는 한 계속 될 겁니다.

결국 미친 조기교육, 비대해진 사교육, 무너져내리는 공교육, 영어 열풍의 원인은
모두가 원하는 괜찮은 직업이 너무 적다는 절대적인 상황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업이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 고용을 늘리고,
하청에 재하청에 재재하청을 줘가면서
정작 일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 보다는 중간에서 떼어먹는 몫이 더 큰 상황을 개선하고
대학이나 영어로 취득할 수 있는 괜찮은 직업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로로 괜찮은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열리면
미쳤다고 누가 영어 열풍에 동참하겠습니까.

근데, 새 정부는 이 문제를 아주 순진하고 아마추어 스럽게 접근하는군요.
(물론 사실은 사교육업체와의 결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악의적 해석은 한동안 참겠습니다.
아무나 지들 맘에 안들면 빨갱이라 주절대며 온갖 곡해를 일삼던 인간들과는 달라지고 싶거든요)

지금 인수위가 내놓은 아이디어의 골자는 우리나라 공교육 환경을 미국 학교처럼 바꾸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학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거죠.

일단 우리나라 교사들이 영어 수업을 제대로 한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했듯 혹시 만에 하나 성공한다고 해도 그게 문제 해결은 아닙니다.
다른 사교육의 탄생을 가져올 뿐이겠죠.


영진공 짱가

<영화야 미안해> – “혜리씨, 고마워”

소위 ‘디 워 사태’가 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영화 평론가의 존재 이유가 뭐가 있냐고 성토를 했었다. 니들이 뭔데 우리가 재밌다는 영화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는 거였다.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져 그네들이 쓰는 영화평이 전문가 뺨치는 시대가 된 건 분명하지만, 여전히 난 영화 평론가들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영화를 보면서 “건졌다”고 즐거워한 게 여러번이며, 내가 본 영화를 재발견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적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 고마운 평론가 중 하나가 바로 김혜리다. “스물 무렵, 영화보다 영화에 관한 글에 먼저 이끌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김혜리를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평론가로 꼽는 이유는 시네21에 연재되는 메신저 토크를 감탄하며 읽어서이기도 하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외국 감독과 인터뷰를 할 때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들에 혀를 내두른 기억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부수적인 이유로 김혜리는 여자다! 그리고 왠지 미녀일 것 같다!). 그가 <영화야 미안해>라는 책을 냈다.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책에서 소개된 영화 중 내가 본 것은 30%에 불과하다. 책과 달리 영화라는 건 한번 지나가면 다시 보기 힘든 장르인지라 내가 나머지 영화들을 볼 확률은 지극히 낮다. 하지만 꼭 그 영화를 찾아보지 않는다 해도 김혜리의 글은 그 영화들의 엑기스와 더불어 풍부한 상식을 내게 전달해 줘,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예컨대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연기에 대한 영국배우와 할리우드 배우의 차이점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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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인 측면을 제외하더라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표현할 줄 아는 단어가 ‘너무’ 뿐이어서 ‘너무 맛있어’나 ‘너무너무 맛있어’란 말밖에 못하는 사람들만 질리게 봐온 터라 김혜리의 책에 나온 표현들에 가슴이 시려오기 때문이다. 그가 다코타 패닝에 대해 “이 아이는 눈물 한 방울로 세상에서 제일 큰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할 때 난 영화에서 본 패닝을 떠올리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고 그가 “알츠하이머병의 가장 깊은 슬픔은 오랫동안 알고 사랑해온 사람이 곁에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간다는 사실에 있다. 그 슬픔은 망각의 강을 건너는 자가 아니라 이 편 기슭에 남는 사람의 몫이다”라고 말할 때 난 집에 계시는 할머니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한다.
 
김혜리는 “영화의 밀도와 미덕에 합당한 대접을 하지 못하는 비례를 범하기도 했”다면서 그 영화들에 사과의 마음을 담아서 <영화야 미안해>를 부친다고 했다. 평소 영화를 좋아했다면, 그리고 영화에 빠져서 열시간 정도를 허우적대고픈 마음이 든다면 <영화야 미안해>를 골라보길 권한다. 김혜리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다 읽고 나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혜리씨, 고마워.


영진공 서민

맷 리브스, <클로버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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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9.11의 여파는 계속된다.
85분간의 이 현기증나는 영화는 기존의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과 전제를 뒤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페이크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는 <클로버필드>는 가정용 캠코더와 핸드폰 동영상, UCC 등이 일반화된 시대의 새로운 영화 형식을 시도한다. 승진해 외국지사로 떠나는 로버트 홉킨스(마이클 스탈-데이빗)의 송별파티에서 친구들의 인사말을 담기 위해 가정용 카메라를 든 허드(T.J. 밀러)의 1인칭 카메라 시점으로 영화가 끝까지 가는 것이다. 아마추어가 가정용 캠코더로 기록한 영상(이라는 설정)인 만큼 해상도는 형편없고, 카메라도 무지하게 흔들리며, 앵글과 편집도 어리숙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 모두는 의도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답답해지는 것은 단순히 해상도 때문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라 부르던 영상들은 카메라 뒤의 마치 신적인 존재 – 감독 – 가 전제돼 있는 만큼, 인물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제3자의 전지적 관점에서 보여주는 이른바 ‘마스터 숏’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인물 중 한 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있(다고 설정돼 있)는 만큼,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이 알고 있는 것 외에 전지적 신 혹은 감독의 입장에서 전달해 주는 다른 정보들을 가질 수 없다. 즉, 관객은 등장인물들이 아는 것만큼만 알며, 그들이 모르는 것은 알지 못한다. 정보는 철저하게 통제돼 있고,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거리를 갖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조망해볼 수 없다. 모든 것은 ‘너무 가까이에서’ 1인칭 시점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는 감독과 촬영감독의 존재가 의도적으로 지워진다, 혹은 저 커튼 뒤로 더욱 깊숙이 숨겨진다. (이 영화에 엄연히 감독이 존재함에도 제작자인 J.J. 에이브럼스의 이름만이 그토록 회자되는 건 단순히 그가 인기 TV 시리즈의 제작자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극중 인물들은 맨해튼을 공격해 온 저 괴물의 존재가 과연 어디에서 온 건지, 어떻게 맨해튼 지상 위에 오게 된 건지, 과연 인간들을 물리적으로 공격해오는 것 외에 어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지, 물리적인 타격만 위험한 건지 접촉만으로도 모종의 감염이 일어나는지 아닌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괴물의 형체 자체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며, 그 괴물의 종류도 몇 가지나 있는지 알지 못 한다. 맨해튼만 당한 건지 미국 전체가 공격받고 있는지, 아니면 전세계가 동시에 공격을 받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저 위험이 닥쳐왔고, 그것을 피해 도망갈 수 있을 뿐이다.


85분 내내 허드의 카메라를 통해 움직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정체모를 괴물이 엄청난 힘으로 맨해튼을 쓸고 있다는 것, 정부군이 이에 대응하고 있으나 속수무책이라는 점 정도다. 일단 놀라 길로 뛰쳐나왔던 허드와 로버트, 제이슨, 제이슨의 여자친구 루카스, 그리고 파티 손님이자 허드가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인 말레나 등은 괴물의 공격을 피해 무작정 도망을 치지만 먼저 제이슨이 당하고, 지하도로 들어갔다가 터널 안에 있던 또다른 괴물에 의해 말레나까지 잃는다. 오랜 친구인 베스와 얼마 전 썸씽이 있었던 로버트는 베스와 통화를 시도했다가 그녀가 집에서 아파트 벽에 깔려있음을 알게 되고 일행들과 함께 구하러 가는데, 물론 이 길이 순탄할 리 없으며, 관객들이 허드의 카메라를 통해 보게 되는 것 역시 그저 파괴의 현장, 그리고 계속되는 공격과 위험, 이에 대한 공포일 뿐이다.


이러한 형식의 시도는 관객들에게 단순히 공포와 경악을 좀 더 현실감있게,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100여 년의 영화 역사 동안 축적되고 구조화된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형식, 그리고 관습과 문법은 이 영화 앞에서 박살이 난다. 가정용 캠코더와 핸드폰 동영상, 그리고 요즘의 디지털 카메라들이 손쉽게 제공하는 동영상 기능을 통해 모두가 감독이 될 수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 의하면 그 사실 때문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감독의 존재와 촬영감독의 자리는 지워질 수밖에 없다. 카메라 뒤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그 자체가 신이 되는 것이다. (밧데리가 끊기지 않는 한, 심지어 주인공이 죽는다 해도 카메라 저 혼자 어떤 영상들을 기록해 버릴 수 있다.) 관객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기 위한 씬들과 마스터 숏은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이로 인해 관객들은 기존의 영화들에서 감독이 제공하던 유사-신의 위치에서, 주인공들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이른바 ‘1인칭 시점을 공유하는 유령’의 위치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주인공의 한계는 곧 관객의 한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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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없다, 그저 도망만 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닌 것이,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저 1인칭 카메라 시점을 고수하는 것은 국내에서도 비디오로 출시된 바 있는 오래 전 영화 <찰리 모픽>에서도 이미 시도된 바 있다. 그러나 전쟁터를 배경으로 현장 기록을 전문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스트(로 설정된 인물)의 손에 카메라가 쥐어졌던 것과 달리, <클로버필드>는 평화로운 맨해튼의 일상을 배경으로 하며 여기에서 카메라를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정된 인물)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반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페이크 다큐멘터리’라 칭하는 것 역시 그리 정확한 장르 구분이 될 수 없으며, ‘페이크 리얼 동영상’ 정도의 말 역시 좀더 가깝긴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묘사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역시 리얼 동영상이 아니라 사전에 짠 ‘영화’라는 점은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가장 눈에 띄는 증거는 등장하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미녀들이라는 것. 게다가 일견 어리숙해 보이는 컷과 앵글 역시 고도로 계산된 티가 난다. 심지어 카메라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도 그 각도 자체는 안정돼 있으며, 카메를 들고 뛰고 있다고 설정된 씬에서도 카메라의 위치가 매우 의심스러운(즉 따로 촬영감독이 들고 찍고 있다고 여겨지는 제2의 카메라의) 앵글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과연 이러한 형식 파괴의 실험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짜를 진짜처럼 느끼는,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만 유효한 리얼한 공포와 경악 외에 우리가 진정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얻으려 했던 그 무수한 지향과 꿈과 대리경험이라는 것, 그리고 미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이 영화가 제공한 그러한 실제감보다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하며 풍성한 것이지 않는가? 나아가, 영화라는 건 아무리 관객이 그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동의했다 해도 그 본질 자체가 한 시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어두운 극장에 꼼짝없이 관객들을 붙잡아 놓고 눈앞에 창작자들이 의도한 영상을 일방적으로 틀어대는 매우 폭력적인 매체가 아닌가? (당신은 옆좌석 관객의 불편함과 뒷자리 무수한 관객들에 대한 방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영화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와 뻔뻔함을 가지고 있는가?) <클로버필드>는 영화라는 매체의 이 폭력적인 본질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극한까지 밀고 나감과 동시에, 이 본질을 이용해 영화가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폭력의 가능성을 눈앞에 제시한다. 이 폭력에 기꺼이 환호하며 피학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사전에 충분히 정보를 습득하고 ‘각오’를 하고 간다 해도, 이 영화가 제공하는 도를 지나친 고통의 폭력은 새삼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폭력성과 이에 대한 회의를 배가시킬 가능성이 더욱 커 보인다. 이 영화의 형식 파괴의 실험은 분명 누군가에겐 한 번 해볼 만한 신선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고, 과연 애초에 이 영화가 의도한 목적은 모두 이룬 것처럼 보이며, 그 점에서 내 개인적인 불쾌감과 상관없이 영화 자체에 대한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실험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이 영화가 영화라는 매체의 확장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영진공 노바리


ps. 괴물이 휩쓸고 지나간 건 맨해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시신경과 머릿속, 나아가 영화에 대한 애정까지도. <클로버필드> 때문에 생긴 두통이 심지어 다음 날 다른 영화 시사회를 본 뒤까지 계속되더군요.

보존개념과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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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재단에서 발행하는 <Green Report>에 연재했던 만화입니다.
제가 워낙 환경의식이 없어놔서, 몇번 연재 못하고 스스로 포기했습니다만…;;;
여튼 늘 삐아제의 ‘보존개념’ 공부할 때마다 떠오르던 이야기를 한번 그려본 겁니다.


영진공 짱가

<택시 블루스>, 가려진 다른 한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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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얘기하자면 <택시 블루스>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최하동하 감독이 운전하는 택시 안에서 6미리 디지털 캠에 포착된 생생한 삶의 편린들과 함께 영화 속에는 재연된 장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연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캠코더 렌즈 앞에서의 모습이 정말 ‘사실 그 자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습니다. 택시 안에 카메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간을 못하는 완전히 만취한 경우는 예외가 되겠지만, 자신이 하는 말와 표정이 기록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한 피사체가 된 인물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와는 약간이나마 달리 반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에서도 카메라 앞에서의 인터뷰는 흔히 등장합니다. 작가는 기록된 영상물을 취사선택하여 자신의 의도에 맞게 편집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이란 건 애초부터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끝도 한도 없는 부분입니다. <택시 블루스>는 완전한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 없는 작품이지만, 어떤 장면이 재연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 자체가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란 얘깁니다.

그렇다면 한 편의 드라마로서 본 <택시 블루스>는 어떻습니까? <택시 블루스>는 픽션과 사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며 삶의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 상황극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실체는 하이! 서울 페스티벌의 축하 폭죽이나 청계천 루미나리에의 밝은 조명 아래에 놓여있지 않습니다. 그런 화려함은 어두운 부분을 가리고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정책적 기만에 가깝습니다.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벌이는 환영의 축제일 뿐이죠. 그렇다고 <택시 블루스>가 특정한 이슈에 대한 시사 고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화려한 불빛이 강할 수록 더 어두워질 수 밖에 없는 체제의 그림자 속을 피곤한 눈 비비며 들여다 보는 영화입니다. 엔딩 크리딧이 끝난 이후에 마치 관객과의 대화를 대신해 넣은 듯한 에필로그는 ‘왜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냐’는 질문에 대한 감독의 답변을 대신합니다.1) 고양이 한 마리의 주검 앞에서 감독을 태운 택시와 카메라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합니다.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결국 그 곁을 떠나야 하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들을 향한 감독의 마음은 결국 한 편의 장편 영화를 탄생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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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얘기지만 <택스 블루스>가 다큐멘터리냐 아니면 모큐멘터리냐는 장르적 정의는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설령 완전한 픽션이었다 할지라도 <택시 블루스>가 담고 있는 진정성과 작가적 성과에는 어떠한 상처도 낼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영화에도 작가의 살과 피로 쓴 작품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아마도 이 작품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할 것입니다. 카메라는 감독의 택시 안에서 목격되는 승객들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열악한 생존의 현장을 함께 기록합니다. 영화 중반까지 관객과 함께 관찰자의 모습으로 남아 있던 감독은 어느새 대도시의 그늘 속으로 잠식되어 가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이제는 일부 헐리웃의 블럭버스터까지도 스스로 반성하기 시작한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의 폭압성은 그 변방 대도시 안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어느 독립영화 감독의 삶 마저도 저 한쪽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고 말았음을 고백합니다.

<택시 블루스>가 전달하는 정서적 충격은 각양각색의 군상들을 나열하는 데에서가 아니라 감독 자신이 제 3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스스로 발가벗는 위치에까지 나섬으로써 완성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었든 설령 픽션이었든, 작가로서의 흔히 갖게 되는 자기 보호본능을 던져버림으로써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의 정서적 방탄막을 함께 걷어내는 괴력을 발휘합니다. 영화의 소재에 접근하는 진정성은 단순한 선택이나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관객들의 손을 잡고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택시 블루스>는 다시 한번 입증합니다. 6미리 캠코더로 찍어 극장 상영용으로 변환된 화면은 비록 어둡고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진심과 자기 고백은 <택시 블루스>가 단순히 관객들의 관음증에만 호소하다 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삶의 질곡을 관통하며 관객들을 그 안으로 이끌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택시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실체가 이토록 어두운 것들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니겠지만 그것은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취사선택입니다. 작가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제 3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태도도 좋은 작법이지만 <택시 블루스>와 같이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 역시 훌륭한 접근 방식입니다. 더군다나 실체의 어느 한 측면만 부각되고 알려져 있는 세상이라면 다른 쪽 측면도 누군가는 들여다보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취사선택의 과정에서 너무 극적인 장면들만 모아놓았다거나 심지어 재연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얼마간의 허구를 통해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모든 예술이 본래 지향하려던 바가 아니던가요. <택시 블루스>는 기승전결 구조와 같은 기본적인 구성이 완결성 있게 제시되는 영화는 아닙니다.2) 여건의 한계 탓도 있었겠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날 것 그대로의 힘이 희석되는 일 없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생각난다고들 하시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2003)에 빗대어 “라이프 액츄얼리”라고 씌여진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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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사회가 끝나고 최하동하 감독의 GV가 있을 것으로 알았는데 그런 거 하나 없이 썰렁하게 끝나더군요. 솔직히 그래, 이게 맞는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GV라고 해봐야 이거 진짜냐, 아까 그 장면 다큐냐 재연이냐 라는 질문만 받아야 했을테니 차라리 피하고 싶었을테고, 무엇보다 감독은 오직 영화를 통해서만 자기 할 이야기를 다 하고 또 그걸로 끝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케팅 차원에서, 그리고 일부 관객들이 원하는 바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이루어지는 것을 이해는 합니다만 모든 상영관에서 모든 상영이 끝날 때마다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나서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완성되어 관객 앞에 던져진 영화, 거기에 작가가 직접 나서서 이 얘기 저 얘기하고 돌아다니는 건 작품과 관객 사이를 훼방하는 미학적 불순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일부 젊은 감독들이 자기 작품 마케팅에 일조할 겸, 고생한 만큼 재미도 좀 볼 겸, 겸사겸사 돌아다니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 같으면 가급적 GV가 없는 시간을 택해 작품과 저와의 대화를 최대한 방해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 장현수 감독이 택시 운전사들의 삶을 소재로 <라이방>(2001)을 만든 바 있는데, 일반적인 극영화의 작법과 모큐멘터리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앞으로 좋은 비교가 될 듯 합니다. 두 작품만 놓고 본다면 저는 당연히 <택시 블루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