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클레망, <태양은 가득히>,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영진공 67호>

과거사진상규명위
2007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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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감각에는 좀 난감한...
알랭 들롱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이 1960년작은, 확실히 알랭 들롱의 위험천만한 매력 – 야심많고, 비틀려있고,
아름답고, 불안하고, 그래서 더 잔인한 – 을 한껏 빛나게 해줍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소설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원작에 가까운지, 하이스미스의 원작 소설이 원래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맷 데이먼이 톰
리플리로 나왔던 <리플리>와 비교해 본다면 캐릭터간 감정의 흐름이 정반대인 것이 꽤 재미있습니다.
<리플리>에서의 리플리는 보통 디키를 ‘선망’할 뿐아니라 동경에서 비롯한 ‘애정’도 갖습니다. 자아도 참 약하지요.
하지만 <태양은 가득히>에서는 오히려, 오만하고 난봉꾼인 필립 그린리프(<수영장>에서도 알랭 들롱과 함께
공연했던 모리스 로네가 맡았습니다.)가 알랭 들롱의 리플리에게 압도되어 있는 것같습니다. 물론 워낙 돈 많은 귀족청년이신지라
리플리에게 못되게 굴지만, 특히 요트에서 (톰의 가방에서 자신의 은행내역을 발견한 뒤로) 자신을 죽이고 나면 어떻게 할 건지
꼬치꼬치 묻는 대화씬에서 그런 분위기가 확 살아요. 물론 ‘애정’같은 감정은 없지만, 뭐랄까, 두려움과 함께 경외감도 갖고있는
듯하고, 위협감을 느끼면서도 그걸 은근히 즐기는 듯한 분위기도 함께 있습니다. 육지에서야 돈과 지위로 허세를 부리며 자신의
겉모습을 부풀렸지만, 돈도 자신의 신분도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망망대해 위의 요트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강하고 단단한 존재
앞에 너무나 쉽게 자신의 연약함을 대비시킵니다. 당당하고 오만한 디키 앞에서 연약한 감정선을 드러내는 톰이 나오는
<리플리>와 반대라고 할 수 있겠죠.

겉으로는 그저 돈많은 친구 뒤를 따라다니며 뒷수발을 하는 하인친구를 하는 듯보이지만 본질적으로 강하고 단단하고 위험한,
그리고 내면의 불안함을 이러한 강함으로 충분히 상쇄시켜버릴 수 있고 때가 됐을 때 그 마각을 드러내 버리는, 그런 톰 리플리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알랭 들롱의 완벽한 육체입니다. 눈을 치켜뜨고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의 알랭 들롱, 결코
두껍지 않지만 아주 단단해 뵈는 근육투성이인 상체를 드러내고 짧은 바지를 입은 알랭 들롱이 새파란 바다 위에서 요트를 몰고 있는
그 한 컷이, 바로 톰 리플리의 성격과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가 끝난 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이 표현한 대로 “바다 위에 상체를 벗은 알랭 들롱만으로 영화 한 편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죠.

사실 ‘사회적’ 결과물로 얻은 힘으로 가련하게 허세를 부리는 나약한 귀족/부르주아/왕족이, 단단하고 굳은 육체를 가진
노동계급/하층계급의 인물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설정은 그리 낯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다부진 육체를 가진 남자배우에게 끌리는
건 이것과 아주 비슷한 종류의 감정의 메커니즘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실제 신분이 어떻건 누군가를 훔쳐보는 데에서 기인하는
우리 시선의 우월한 위치가 저런 두려움의 매혹을 비슷하게 재현시켜 준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알랭 들롱이 귀족의 자제로 출연한다
했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드는 건 바로 저런 강한 육체성이 주는 매력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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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컷...
그러고보면, 앞에 <지하실의 멜로디>에서 제가 느꼈던 알랭 들롱의 매력, 즉, 어느 순간 연약함이 드러나긴
하지만 곧 능숙하고 숙련된 프로페셔널의 솜씨로 정확하고 날카롭게 뒷마무리를 하며 그 연약함을 솜씨좋게 감추어버리는 선 굵은 남자
알랭 들롱의 매력은, 바로 이 영화에서 좀더 젊은 매력의 버전으로 이미 나타났던 것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이번 알랭 들롱
회고전에서 처음으로 본 영화인 <수영장>에서도 이 매력이 드러나네요. 나타나는 순서는 조금 꼬여있지만요.

영화가 아주 솜씨가 좋아요. 전 사실 르네 클레망의 영화를 제대로 본 건 이 영화가 처음이라, 그의 원래의 연출 스타일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드러난 걸로만 본다면, 차갑고 날카로운 맺고 끊기의 미학이 잘 살아있지 싶어요.
정확하게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올리는 집념의 연출솜씨라 해야 할까. 그러다가 영화 맨 마지막에, 마르쥬 호에 연결된 줄 끝으로
시체가 육지로 올라올 때 쾅! 하는 느낌은, 이제껏 제 템포를 유지하며 쌓아온 냉정하고 정확한 벽돌탑을 그 스스로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뜨리는 듯한 느낌을 주며 정서적 충격을 가하지요. 하지만 스크린 밖에서 이어지는 마르쥬의 비명소리는, 이 무너뜨림이
그저 ‘흩어짐’이 아니라 역시 ‘잘 계산된 무너뜨리기’라는 느낌을 주며 순식간에 깔끔하게 정리를 해버립니다. 이후 에필로그처럼
붙는 마무리, 즉 경찰들이 체포하러 오는 것도 모른 채 해변가에서 고급 술을 즐기던 리플리가 전화 왔다는 이야기에 카메라 쪽으로
걸어오다가 스크린 밖으로 빠지고, 카메라가 그대로 바다를 보여준 채 ‘끝’을 맺는 방식은, 그의 범죄가 완전범죄가 되길
바라면서도 들통나기를 바라고, 그에게 역시 매혹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관객에게 어떤 서정적인 허망감을 선사해
줍니다. 아주 멋진 솜씨였어요.

유명한 그 영화음악 테마가 니노 로타의 것인지는 몰랐네요. 오프닝 타이틀에서 니노
로타의 이름을 보는 순간 아주 아련한 향수에 젖는 것같았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만 해도 라디오의 영화음악실에서는 ‘고전적인’
영화음악 테마가 꽤 자주 흘러나왔고, 니노 로타 역시 단골 아이템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니노 로타는 이미 ‘옛날 영화의 곡들을
만든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는데도요. (그럴 수밖에요, IMDB를 찾아보니 니노 로타가 죽은 게 1979년이었는데요.) 요즘은
다들 한스 짐머나 하워드 쇼어, 제임스 뉴튼 하워드를(엔니오 모리코네마저도 옛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아니 이병우와
조영욱을 얘기하고, 니노 로타를 잊어버린 것만 같아요. 하지만 이 글을 읽는 그 누구나 니노 로타의 음악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제피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코폴라의 <대부> 시리즈도, <길 – 라 스트라다>를
비롯한 펠리니의 일련의 영화들과 비스콘티의 영화 몇 편도 다들 니노 로타의 음악이 덧씌워진 작품들이었으니까요.

과거사진상규명위 상임간사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

한강 다리 위에서 노을을 보다. <재외공관소식>, <영진공 67호>

재외공관소식
2007년 1월 24일

첫 외박을 나가던 날.

포항에 집이 있는 영복이와 나는 꿈에나 그리던 라면을 두그릇째 비우고 있었다. 물론 자장면 한그릇을 비운지 10분도 되지 않아서다.

여름의 하늘은 맑았고 우린 아직도 20대 초반이었다.

두 그릇째의 라면이 비워지고 부대 바로 앞에 있는 치킨집에서 닭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신지 두시간. 시간은 어느덧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포항까지 점프해야 하는 영복이를 더이상 잡고 술을 마실 수는 없었다.

삼송리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까지 나가 헌병이 없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기위해 버스를 갈아탔다.

생각보다 버스는 막혔다. 반포대교를 올라탄지 10분째 아직 1/3도 오지 못한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영복이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붉게 물든 노을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영복이는 어디가 무척 아픈듯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영복아. 어디 아프냐?”
“아니, 아까 기름 많은걸 먹었더니 설사가 나올거 같아”

영복이는 버스 손잡이를 꽉 쥐며 다시한번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그 의지가 오래 갈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정체모를 휘득, 푹, 푸득튁 한 소리가 들렸고
다리에는

고무링에 걸린 정체모를 물체가 툭, 투둑~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영복이의 꽉잡은 손잡이의 손이 힘없이 풀린 것도 그 즈음이다.

“어떤 개새끼가 버스에서 똥을 싸”

승객중 누군가가 외친 한마디에 버스내부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뒷문이 열리고 버스기사 아저씨의 외침이 이어졌다.

“똥싼 사람 빨리 내려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영복이가 내렸고 난 좀 머뭇거렸다.
잠시 전우애보다 쪽팔림이 더 무서웠다. 논개가 왜장을 끼고 절벽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내렸다.

노을은 어느덧 63빌딩 너머로 뉘엇뉘엇 지고 있었고 영복이는 하염없이 노을만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붉고 굵게 흐르고 있었다.

“영복아, 잠시만 기다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바지좀 사올게.”


결코 영복이와 같이 있는게 쪽팔려서 터미널로 달린게 아니었다. 혹시나 영복이가 반포대교로 뛰어내릴 때 어디를 잡아야 똥을
안뭍히고 잡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바지를 사올 때 까지 영복이는 붉은 노을에 자신을 온전히 적시고
있었다.

모든 군바리가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 돈이 많을리 없었다. 신발은 못샀고 바지는 터미널 화장실에 버렸으며 전투화는 헹궜다.

난 화장실 앞에서 망을 봤다. 세면대 물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 막혔을 것이다.

수습이 끝나고 전투복 상의에 기장이 조금 짧은 흰색 면바지를 입은 영복이는 조금 어색해 보였다.

버스표를 끊고 포항행 고속버스를 타는 영복이의 뒷통수에 버스 운전기사가 낮게 중얼거렸다.

“어떤 새끼가 방구를 꼈나?”

88년 올림픽 벤존슨의 속도로 나는 고속버스터미널을 도망치듯 빠져 나오고 있었다…

추억은 몽글몽글 툭툭
그럴껄(titop@naver.com)

한젬마, 그리고 포털, <공연윤리위원회>, <영진공 67호>

공연윤리위원회
2007년 1월 23일

<그림 읽어주는 여자>로 스타가 된 한젬마의 대필 의혹은 정지영
아나운서의 마시멜로 파문을 닮았다. 본인이 강력하게 부인을 하고, 그럴수록 의혹이 더 커져만 갔다는 사실이. 출판사에서 내놓은
한젬마의 초고를 읽어보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투박할지언정 묶어놓으면 그래도 책 한권을 만들 수 있는 게 초고일진대,
한젬마의 그것은 거의 메모 수준으로,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제시한 기획안 정도에 불과했다. 서둘러 닫아버린 한젬마의 홈페이지를
가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별반 글쓰기에 소질이 없다는 걸 대번에 알아차렸을 거다. 정지영 파문이 출판사의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한젬마 사건은 저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더 큰 배신감을 준다. 물론 초고 자체를 아예 내놓지
못한 정지영에게 더 큰 죄를 물을 수도 있지만, 마시멜로가 번역서라 누가 해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데 비해 한젬마의 책은
저자가 자신의 지식과 감성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라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쁘다고 할 것이다.

비록 제대로 된 사과는 하지 않았지만, 정지영 아나운서는 자신이 맡고 있던 프로그램에서 물러남으로써 간접적이나마 잘못을
시인했다. 하지만 한젬마에게 그런 일을 기대하는 건 어려울 듯하다. 언론에서 더 이상 파문이 확산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언론의 시대며, 아무리 큰 사건도 언론에서 보도를 해주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예전의 종이신문이 갖고
있던 의제 설정권이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로 넘어온 건 이미 오래 전의 일, 한젬마 사건을 나같은 사람이 알게 된 것도 그게
24일 밤 네이버의 주요 기사란에 떴기 때문이다.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는 걸 보면서 “이거 문제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었는데, 그 다음날 아침 한젬마의 대필 의혹은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일제히 사라져 버렸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했고
네티즌의 댓글에 일일이 답을 해주며 의욕을 보였던 한국일보 기자 역시 ‘초고비교’ 이후 후속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댓글을 달고
싶어도 기사가 없는데 어떡하나? 나를 비롯한 네티즌들은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으로 나무 위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정지영 사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의혹이 확산되자 네이버에서 댓글을 차단해 버린 것. 그뿐이 아니었다. 정지영 아나운서는 2005년 12월, 한경 비즈니스와의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했었다.

“(번역하는 동안) 몸은 고단했지만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번역을 하면서 몇 번이나 읽었고 지금도 틈나는 대로
다시 읽지만 그때마다 새로운 가르침을 주는 책이에요. 방송에서도 여러 번 읽어 준 적이 있는데 청취자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이제는 어떤 이야기가 몇 페이지에 있는지 알 정도가 됐어요.”

이 인터뷰는 “자기 번역본과 다른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는 물음에 정지영 옹호자들이 했던 “바빠서 책을 안읽어봤을
것”란 변명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지영 의혹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 중엔 이 기사가 실린 사이트를 링크시킨 게 몇 개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네이버 측에서 원 기사를 삭제해버려, 해당 주소로 들어가도 기사를 찾을 수가 없게 된 것. 그래서
난 네이버는 왜 정지영을 이렇게 감싸는지 의아했었는데, 한젬마 대필의혹을 보니 할말을 잃게 된다. 댓글차단이 네티즌의 공분을
사서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유치한 전략이라면, 기사 자체를 빼는 건 아예 사건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고도의
전략이 아닌가.

그 결과 정지영은 갔지만, 한젬마는 살아남을 것이다. 한젬마가 TV에 나올 때마다, 혹은 책을 새로 낼 때마다 일부
네티즌들은 “저거저거 대필이래”라며 볼멘소리를 하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즐거운 마음으로 한젬마의 지식과 미모를 감상할 것이다.
한젬마의 대필의혹을 신경쓰기엔 사람들이 너무도 바쁘고, 대필과는 비교도 안되는 사건사고는 날이면 날마다 일어난다. 한젬마 사건을
계기로 출판계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던 대필이 자취를 감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다 해도 뭐가 문제인가? 당장 내 밥먹고 사는
데 하등 영향을 주지 않는데 말이다. 포털에 모든 것을 빼앗긴 나라, 그 나라에도 새해가 왔다. 새해라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겠지만.

공연윤리위원회 부국장
서민(bbbenji@freechal.com)

진정한 우리말 해침꾼, <공연윤리위원회>, <영진공 67호>

공연윤리위원회
2007년 1월 22일

한굴문화연대가 19일에 발표한 “우리말 해침꾼”의 명단에는
국정홍보처와 철도공사(KORAIL), 가스공사(KOGAS)등의 만든 놈을 빼 놓고는 도대체 그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 참으로 그것이 알고싶은 콩글리쉬 이름의 공기업들과
함께 앙드레 김 선생님의 존함이 올라 있었다.  

“각종 매체를 통해 불필요한 외국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임으로서 시청자들의 언어생활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인 듯 한데…

뭐,
앙선생님이 워낙에 “채널 세븐, 채널 나인, 채널… 십일번.” 식의 크로스오버적인 언어생활을 즐기시기로 유명하시지만. 그래도
이 냥반 하신 일도 있고 인제 나이도 지긋하신데 굳이 이렇게 몰아대야 하나 싶다.  이 분의 언어생활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확대
생산되며 많은 국민들에게 웃음을 줬으며, 이 분 덕에 어설픈 외국어의 사용은 타인에게 비웃음거리만을 제공한다는 사실 또한 덤으로
전파되었는데 말야.

뭐 그건 그거고.

수상자들을 면면을 보니 대~충 감이 오는 것이,
“우리말 해침꾼”이란 ‘우리말로도 얼마든지 수용이 가능한 표현들까지 굳이 외국어를 사용함으로서 보는 이의 언어생활에까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개인 혹은 단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갑자기 사소한 딴지가 하나 걸고 싶어졌다.

가능하면 우리말을 ‘많이’쓰는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말을’올바르게’쓰는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진정한 우리말의 해침꾼, 그러니까 “우리의 말을 해치는 것덜”의 선정기준은
외국어를 얼마나 많이 혼용하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말을 얼마나 X같이 사용하느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버럭 든 것이다. (평소같았으면 “조깥이”라고 썼겠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흠흠.)
그것이 더 명확한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말이지 수상의 영광을 받아 마땅한 주인공은 따로 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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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니겠는가

사실, 본인은 당 드라마를 전혀 시청하지 않을뿐 아니라 대강의 줄거리조차 모른다.
그러나 본인의 모친이 당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라는 슬픈 사실 덕분에, 본의아니게 시청한 적이 꽤 있음이다. 

같은 본의아닌 시청은, 당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대가 주말저녁 8~9시로 온 가족이 TV앞에 모이는 시간대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나처럼, 연장방영 덕분에 길이마저 오지게 늘어난 당 드라마의 본의아닌 시청으로 괴로웠던 기억을
가진 사람이 꽤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렇다고 식사 후에 과일 한조각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버릴수도 없고 말야..

당 드라마가 끼친 해악이야 어디 하나둘이겠냐만. (아마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형편없는 연속극이 또 있을까 싶다. 진심이다.) 귀가 번쩍 뜨일만한 수준의 각종 하드코어 액션적 언어구사 또한 수준급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당 드라마는 온가족이 TV앞에 모이기 가장 적합한 시간에 방영되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파급력은 앙드레 선생님같은 인물 100명보다 크다고 할 것이다. 시청률 또한 매주 1~2위를 다툴 정도로 높지 않았나.


사화되기도 했던 “사위자식 개자식” “남의집(시댁)찬치에 내가 왜 가서 기분을 잡치냐.” 등등의 사회윤리 정면공격성 대사들과,
거의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의 대화를 듣는 듯 하는 주옥같은 욕설들과 불필요한 군바리성 군대용어 사용, 별 개연성없는 과격단어
사용은 그야말로 명불허전, 천의무봉급이었더랜다.
그뿐인가? 비슷한 연령의 부부사이에서 남편이 부인에게 “~했느냐.”체를
사용한다든지, 나이많은 형제에게 전형적인 반말과 욕설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든지, 군인 아버지에게 요즘엔 군대에서도 쓰지 않는
다나까체를 사용한다든지의, 상식을 벗어난 언어생활 또한 다체롭게도 포함되어 있었다.

굳이 다시한번 말할 필요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욕이 무조건 나쁜것만은 아니며, 모든 상황에서 꼭 사회적 합의에 따른 언어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투하된 한방의 욕설은 인간의 언어가 줄 수 있는 최고치의 통쾌함을 선사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욕설이 단순히 시선을 끌기위한, 소위 ‘낚는’도구나 불필요한 자극을 위한 과다첨가 조미료처럼 사용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말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모욕이다.
그깟 외국어 몇마디 섞여들어간 것보다 말이다.

공연윤리위원회 아직도 비정규직 간사
거의 없다(1000j100j@hanmail.net)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 <상벌위원회>, <영진공 67호>

상벌위원회
2007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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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한국말로 옮기니 어째 좀 딱딱하죠?
<휴먼 네이처>와 <이터널 선샤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정말 엉겁결에 <수면의 과학>을
봤네요. 극장 안에서 너무 자주 퍼져나가는 웃음소리가 조금 강박적으로 들려 불편했지만, 영화는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 아아 너무 귀여운 / 즐거운 영화였어 – 하며 자리를 일어설 것같은 그 타임에, 저는 한 방울 눈물이 나오더군요. 아마도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의 처절한 몸부림 뒤에 있는 좌절, 그것이 곧 감독의 좌절과 냉소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소통은 이토록이나 힘들고, 사랑 역시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그건 꿈에서나 가능한 거라는 그 좌절과 암울한 비관을 조용히 읊조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스테판의 꿈일 뿐이잖아요. 꿈에서야 스테판과 스테파니(샤를로트 갱스부르)는 함께
골든포니보이를 타고 달리지만, 현실에서 그는 모처럼 어렵게 잡은 데이트 약속도 지키지 못합니다. 꿈과 현실이 마구 뒤섞이는
증상을 겪고있는 스테판, 이라는 건 좋게 표현한 거고, 그러니까 결국, “나는 미쳐가고 있어”잖아요. 내 인식이 창조해내는
대상과 실제 대상이 다르다는 건 오래된 철학적 명제고 누구나 아는 거지만, 꿈과 현실이 뒤섞인 미친 사람의 인식이 만들어내는
대상, 그 인식이 실제 인물과 너무 동떨어져 저 혼자 폭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 안에서 나의 사랑은 저쪽에 가 닿을 수도
없고, 소통은 결국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내 꿈과 연결됐어! 우리가 서로 연결된 거야!”라는 스테판의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입니다. 그는 꿈결에 자기가 정말로 쪽지를 써서 밀어넣었단 걸 꿈에서 깨어나 분명히 확인했고 되찾아왔어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그 편지의 글귀를 그녀가 읊었을 때 그녀가 봤구나! 라고 추측하지 그녀가 내 두뇌와 연결됐어!라고 추측하진 않습니다.
나아가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쪽지를 읽었다!라고 우기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건 스테판의 이상형에 스테파니를, 현실을
끼워맞추는 짓이에요. 자신을 속이는 짓인 걸 알기에 결국은 데이트장 바로 앞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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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 다 아주 귀엽습니다... 하하

안타깝게도 스테판은 자기 세계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그게 그의 본질인데요. 원래 에고가 강한 사람들은 ‘꿈과 현실이
섞인다’가 됐건 ‘내가 살짝 미쳐있다’가 됐건, 아니면 ‘내가 좀 싸이코다’가 됐건, 자신이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그럴
듯해 보이는 이유들을 하나씩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소통의, 사랑의 실패를 그 이유로 돌리지요. 실은 자기 세계
바깥의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것인데도요. 그 누군가조차도 자신의 세계의 질서를 철저히 따라야 하죠.
스테판의 꿈 속에서 스테파니가 완벽하게 존재했던 것처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타인과의 관계, 특히 연애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열고 상대를 들여 일부를 파괴하고 재정립하면서, 또한 상대의 세계에 들어가 일부를 고리로 연결하면서 유지되는
관계입니다. 솔밤님도 지적하셨지만
현실에서 스테판은 스테파니와 연인관계를 시작해 보지도 못해요. 스테파니가 다른 사람과 춤을 춘 것만으로, 스테파니에겐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를 발전시키면서 자신을 배신당한 가련한 연인으로 위치짓지요. 스테판은 누군가와 그렇게 연애관계를 맺는다는 게 힘든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방법, 그러나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방법엔 스테판이 써먹은 것도 꽤 좋은
스킬이긴 합니다. 먼저 폭주하고 자신이 배신당하는 포지션을 취하는 것. 그래서 질려서 스스로 떨어져나가게 만드는 것. 아마
스테파니가 안경 쓴 모습이 좋다는 말도 그냥 농담이 아닐 겁니다. 안녕은 세상을 좀더 또렷하게 보여주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나와
상대 사이에 놓인 장벽의 상징을 갖고 있기도 하죠. 그 안경은, 자신이 아니라 스테파니가 쓴 것이어야 할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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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샤바가 직장상사 '기'로 출연해 호연을 보여줍니다

스테판은 몸만 큰 어린아이입니다. 하지만 그가 밉지 않은 건, 자신의 어린아이적 특성을 굳이 부정하지도, 감추지도, 어른
흉내를 내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겠죠. 대부분 우리가 현실에서 ‘찌질남’들을 경멸하는 건, 그 사람의 어린아이가 너무 또렷이
보이는데도 그 자신은 어른의 가면으로 상대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오만을 부리고, 상대를 속이기 위해 그 어른의 가면을 더욱
두텁게 쓰고 권위를 내세우면서 막상 책임을 져야 할 때엔 자신이 원래 어린아이라고 무기로 내세우며 되도않을 언어적, 감정적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니까요. 그리고 현대사회는, 굳이 성인 남자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자의
경우는… 이쁘거나 원체 돈 많은 집 딸래미여야 가능하죠. ㅎㅎ

빠른 시일 내에 <이터널 선샤인>을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미셸 공드리 이 사람, 솜씨가 정말 대단하군요.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세상에, 너무 예쁘고 너무 귀엽습니다! 이 녀석은 진정한 옴므파탈(Homme Fatal)이라니까요. 샤를로트
갱스부르는… 언제 봐도 얼굴이 참 우울합니다. 마치 자살시도 하고 정신과 치료 받은지 3개월 정도 된 사람같은 표정. 뭐,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어서 한번씩 다시 보게 되긴 하지만요.

상벌위 선도부 위원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