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 린다 린다 (リンダ リンダ リン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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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성장의 고통, 아니면 기성 세대와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은 십대 청소년기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 <린다 린다 린다>는 그런 극적인 갈등 요소들을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억될 만한 멋진 영화 한편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드러내놓고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고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결국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 3일 남은 시간 동안 학교 축제에서 공연할 노래를 밤 새워 연습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별 의미는 없어”라고 대답한다. 인내심이 많은 카메라는 시종일관 주인공들을 따라다니며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공연.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모든 것을 기다렸다는 듯 강렬한 전기 충격이 전달된다. 그 사이 카메라는 비 내리는 축제 마지막날의 학교 구석구석을 필름 위에 기록한다.

야구치 시노부의 <스윙 걸즈>가 한 잔의 청량음료 같이 개운한 영화였다면 <린다 린다 린다>는 비 오는 날 오후 잘 우려낸 ‘녹차의 맛’ 같은 작품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한번쯤을 있었을 나의 십대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건 뭐하러 하나 싶은 일들로 가득했던 지루한 시간들이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면 누구나 그때 만큼 좋았던 시절도 없었다고들 하지 않나. 오히려 좀 더 열심히 하고 싶었던 일을 많이 하면서 보내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이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시선에는 바로 그런 속 깊은 성찰과 애정이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함부로 개입하려 들지 않는 자세는 <린다 린다 린다>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플란다스의 개>,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이후 주춤했던 배두나의 필모그래피에도 멋진 작품이 하나 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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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콘스탄트 가드너 (The Constant Gardener, 2005), “정치 스릴러냐? 러브 스토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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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서 랄프 파인즈의 모습은 언듯 톰 클랜시 원작 영화에서의 해리슨 포드를 연상시키지만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그의 실제 캐릭터는 “성난 폭도들에게 머핀 한 조각씩을 권할 법한” 유순한 성격의 하급 외교관일 뿐이다. 화초 기르기가 취미인 그는 다국적 제약/유통 회사들의 반인륜적인 음모로부터 사실상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뿐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여행 중 비참하게 살해 당한 이후부터 비로소 사건의 중심부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영국 외무부와 다국적 기업들 간의 결탁을 파헤치는 영웅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때문이다. 이것이 <콘스탄트 가드너>를 정치 스릴러 액션이기 이전에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먼저 기억되게 만드는 이유다.

<시티 오브 갓>에서 입증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역동적인 연출 감각이 유감 없이 발휘되는 가운데 전작에서부터 함께 해온 세자르 샬론의 카메라 역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릴 만한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영화 속에 가득 담아냈다. 여기에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의 음악까지 더해지면서 <콘스탄트 가드너>는 시청각적인 풍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다. 배경음악을 자제하고 보다 건조한 영상이 어울릴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콘스탄트 가드너>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감을 잃지 않는 잘 연출된 풍성함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랄프 파인즈의 대표 캐릭터는 여전히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다혈질 러버보이지만 <쉰들러 리스트>의 독일군 장교나 <퀴즈쇼>의 대학교수도 있었고 <스파이더>의 정신분열증 환자와 <레드 드레곤>의 연쇄 살인마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춘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콘스탄트 가드너>에서는 좀 더 일상적인 인물로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손쉽게 하여 마침내 영화의 중심적인 정서를 성공적으로 전달한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레이첼 와이즈는 단독 주연작은 드물지만 <미아라>나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콘스탄틴>과 같은 액션물과 <어바웃 어 보이>와 <엔비> 같은 코미디까지 비중 높은 조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해온 배우인데 <콘스탄트 가드너>에서 그녀의 헌신적인 연기는 이번 수상이 그저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외에도 <콘스탄트 가드너>에는 빌 나이, 피트 포슬스웨이트, 제라드 맥솔비 등 낯익은 영국계 조연들이 함께 출연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이름 없는 아프리카의 단역 배우들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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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마이애미 바이스 (Miami Vice, 2006), “몹씨나 액쑌적인 멜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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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는 그 이름만으로 품질 보증수표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다. <라스트 모히칸>을 시작으로 <히트>, <인사이더>, <알리>, 첫번째 HD 영화였던 <콜래트럴>까지 일관된 스타일과 완성도를 보여준다. 스케일이 큰 액션 영화에 강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리들리 & 토니 스콧 감독과 유사하지만 <인사이더>와 <알리>는 마이클 만 감독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차별성을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TV 연출자 시절 자신의 히트작의 영화 버전인 <마이애미 바이스>는 그러나 TV 시리즈물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전히 마이애미가 중심이긴 하지만 사실상 ‘월드 와이드 바이스’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로케이션 스케일이 방대하면서도 돈 존슨의 하얀색 여름 양복과 여유 있는 미소 같은 건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한마디로 ‘마이클 만 감독이 정색을 하고 만든 ‘몹씨 액쑌 영화’가 <마이애미 바이스>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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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액션 이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콜린 패럴과 공리의 멜러 부분이었는데, 이로 인해 마이클 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마이애미 바이스>와 가장 유사한 영화로 <라스트 모히칸>과 <히트>를 꼽아야지 싶다. 다시 말하자면 <마이애미 바이스>는 마이클 만의 가장 성공한 장르 영화의 컨벤션을 최대한 답습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매우 환영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콜래트럴>과 마찬가지로 필름이 아닌 HD 영화라는 부분이다. HD 촬영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이클 만 영화의 전작들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시각적 충일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마이애미 바이스>를 보는 동안 여러 장면에서 ‘저게 그림이 필름이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을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들,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는 일일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훌륭하다. 일부 대중적인 장르 영화의 컨벤션은 충분히 눈감아줄만 한 수준인데 딱 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와 콜린 패럴을 바라보는 ‘질투의 눈물 글썽임’과 그것으로 뭔가를 설명하려 했던 부분은 좀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공리는 <2046>에서 장즈이의 열연을 무색케 했던 그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생각된다. <마이애미 바이스>는 공리와 콜린 패럴의 케미스트리가 뿜는 설득력으로 인해 ‘몹씨 액쑌 멜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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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 “좋은 만듬새 … 허전한 뒷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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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최근작 <폭력의 역사>는 우선 제가 본 크로넨버그 영화들 가운데 가장 만듬새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나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상당히 허전한 뒷마무리를 보여주면서 끝을 맺습니다.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만 보면 미셸 푸코의 책 제목 마냥 ‘폭력’의 본질을 다룬 거대 담론 수준의 영화인 것 같습니다만 실제 내용에 비추어보면 ‘한 남자의 매우 폭력적이었던 과거’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폭력의 역사성이나 대물림과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많은 영화들이 있을텐데, 저는 유독 원신연 감독의 <구타유발자들>(2006)이 떠오르는군요. 그에 비하면 <폭력의 역사>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폭력의 의미를 지극히 개인의 수준, 관객에게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스크린 속 타인의 입장으로만 다루는데 그치고 맙니다. 더스틴 호프먼 주연, 샘 페킨파 감독의 <어둠의 표적>(Straw Dogs, 1971)처럼 전개되면서 관객들과 진실 게임을 벌이는 영화를 예상했지만 역시나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들과 두뇌 싸움을 즐기는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답게 노출 수위가 꽤 높은 편입니다만 관객을 작정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두번의 정사 장면 가운데 속칭 69라고 불리우는, 대중 영화에서는 거의 금기시되는 체위가 나오고 계단에서의 장면(이럴 땐 계단씬이라고 해야 하나요?)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선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계단 장면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서로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적인 몸부림인 동시에 정서적인 탈출구로서의 강렬한 느낌을 전달해주는데요,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서 <크래쉬>의 주인공들을 떠올린 게 혹시 저 뿐인지 궁금하네요) 그외 크로넨버그가 좋아라하는 신체 훼손 장면들이 몇 차례 여과 없이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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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가 누구랄 것 없이 하나 같이 훌륭하다는 점이 <폭력의 역사>를 봐야할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순박한 식당 주인과 스티븐 시걸의 모습을 오가는 비고 모텐슨을 중심으로 전반부에는 에드 해리스가, 후반부에는 윌리엄 허트가 주요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두 명배우의 악역 연기, 이채롭고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에드 해리스의 분장과 캐릭터는 왜 저 배우가 여지껏 제대로된 악역을 맡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제대로더군요. 하지만 윌리엄 허트에게 주어진 배역은 약간 덜 떨어진 캐릭터로 설정이 되면서 엄청난 비장감이 감돌아야 맞을 것 같은 영화 후반부의 긴장을 오히려 이완시켜버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외의 주요 배역을 꼽으라면 당연히 주인공의 부인으로 등장한 마리아 벨로(<코요테 어글리>에서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의 열연을 꼽아야 할테구요, 저는 아들 역으로 나온 에쉬톤 홈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섬세한 시선 처리를 비롯해서 특출난 데가 있는 타고난 배우더군요. 제작자들 보다는 감독님들이 좋아할만한 타입의 젊은 배우의 탄생입니다. 그리고 인상적인 배우는 영화 초반을 장식하는 낯선 두 남자인데요, 배우 보다는 그 캐릭터가 아주 가관입니다. 나른한 한 여름 아침에 모텔 체크아웃을 하면서 태연한 표정으로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잔인함이라니. 이들은 드라마의 시작점인 동시에 한없이 선량해보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해보게 해주는 거울 같은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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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얘기해야 할 배우는 역시 비고 모텐슨이네요. 제가 갖고 있는 비고 모텐슨의 이미지는 이 배우의 얼굴을 처음 익힌 <퍼펙트 머더>에서의 비열함과 <반지의 제왕> 3부작에서의 영웅, 두 가지입니다. 사실 첫 인상을 좀 오래 남기는 편이라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도 별로 믿음이 안가더라구요. 그가 연기한 <폭력의 역사>에서의 톰 스톨과 조이 쿠색이라는 한 인물의 두 가지 면모는 마치 제가 알고 있는 비고 모텐스의 이미지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와의 두번째 영화인 매개봉작 <Eastern Promises>(2007)의 예고편과 스틸컷을 보면 나오미 왓츠를 주인공으로 그 주변을 맴도는 듯한 미스테릭한 악인처럼 나오고 있는데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전반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작 같은 느낌도 주는 웨스턴 풍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까지는 나아가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역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필견, 비고 모텐슨 좋아하시는 분들도 필견, 그리고 잘 만들어진 영화라면 가리지 않고 봐주시는 분들까지도 충분히 만족하실만한 영화입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