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용 게임기에 미래는 있는가?

 

 


 


 




 


가끔 가 보는 천하귀남님의 블로그( http://brainage.egloos.com/5763899 )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일어났다.


 


주인장인 천하귀남님이 스마트폰 게임 매출이 휴대용 게임기용 게임 매출의 4배에 달했다는 기사를 인용하며 스마트폰 때문에 휴대용 게임기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고 포스팅한 게 발단이었다. 그 글을 읽은 방문객 중 일부가 매출 통계 자료를 제시하며 스마트폰 출시 이후에도 휴대용 게임기는 꾸준히 잘 팔렸고, 스마트폰으로 인해 휴대용 게임기가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논쟁에 불이 붙은 것이다.


 


음, 확실히 통계 자료의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숲에 들어가면 나무만 보이듯이, 한 분야의 숫자만 들여다보면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된다.




현재 휴대용 게임기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닌텐도의 3DS만 해도 그렇다. 2011년 2월에 출시된 이후 3DS의 누적 판매량은 2013년 7월 31일 현재, 전세계적으로 3248만대에 달한다( http://bylines.news.yahoo.co.jp/fuwaraizo/20130805-00026970/ ). 3천만대? 엄청나잖아!


 


그렇다면 스마트폰의 판매량은 어떨까. 흠, 가트너 발표에 따르면 2013년 1분기 스마트폰 시장 규모는 2억 1천만대 수준 …… ( http://www.connectinglab.net/wordpress/?p=5664 ) 잠깐만, 1분기 시장 규모만 해도 벌써 3DS 누적 판매량의 7배네? 뭐야, 이거!


 


물론 스마트폰 사용자가 전부 다 게임을 하는 건 아니다. 일부는 전화기로만 쓸 테고,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SNS로 수다 떠는 데만 이용할 테니까. 최대한 보수적으로 계산하면 아마 10% 내외가 꾸준히 게임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고 쳐도 이미 2013년 1분기 기준으로 2천 100만 명의 스마트폰 게임 유저가 늘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당연히 이 숫자는 매 분기마다 가파르게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위 기사에 나오는 그래프를 보면 닌텐도 3DS의 2013년도 1분기, 2분기 판매량은 전년대비 약 30% 정도 감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2년 1분기 : 208만대 / 2013년 1분기 : 125만대


– 2012년 2분기 : 186만대 / 2013년 2분기 : 140만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게임기는 판매량이 최대치에 달한 뒤에는 조금씩 판매량이 줄어든다. 보통은 이럴 때 타이밍 좋게 약간의 개량을 가한 신제품을 발표해 사람들의 관심을 되돌려야 하는데, 정작 닌텐도가 내놓은 건 …… 3D 기능을 삭제한 염가판 게임기 2DS다!


 


더군다나 기사 본문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일본 내에서조차 대학생 이상의 청년층에게는 스마트폰이 “가장 잘 쓰는 게임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소년층에게까지 확대되는 건 그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닌텐도 3DS의 2013년도 판매 목표량은 1800만대라고 한다. 그게 가능할지 어떨진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2013년도 스마트폰 판매량은 그 10배 이상 될 거란 사실이다. 즉, 전체 모바일 기기 시장에서 휴대용 게임기는 이미 틈새 시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 개발사 사장이라면 어느 쪽 게임을 만들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뻔히 보이는 걸 결정하는 데 고등수학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일반인에겐 휴대용 게임기의 미래 따위는 별 상관없는 얘기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모두의 마블>을 즐기는 걸로 만족하고 있으니까.


 


휴대용 게임기의 영속성을 확신하는 건 하드코어 게이머뿐이리라. 업계 관계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닌텐도만 해도 그렇다. 휴대용 게임기의 미래를 장밋빛이라고 믿는 이들이라면 오직 원가 절감에만 집착한 제품인 2DS 따위를 내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 줄 결론 : 아무래도 어려울 거 같은데, 끗.


 


 


영진공 DJ Han


 


 


 


 


 


 


 


 


 


 


 


 


 


 


 


 


 


 


 


 


 


 

난독증 치료를 위한 액션 비디오게임이 있다고?

 

 


 


 


* 카툰을 누르면 커집니다 *


 


 


 


 



[ 참고 논문 및 기사 ]


 


* 논문


 http://www.cell.com/current-biology/abstract/S0960-9822(13)00079-1


* 사이언스 뉴스


 http://www.sciencenews.org/view/generic/id/348659/description/


Video_games_take_aim_at_dyslexia


* 뉴욕 타임즈


 http://well.blogs.nytimes.com/2013/03/05/video-games-may-


aid-children-with-dyslexia/  


 


 


 


 


영진공 self_fish


 


 


 


 


 


 


 


 


 


 


 


 


 


 


 


 


 


 


 


 


 


 


 


 


 


 


 


 


 


 


 


 


 

게임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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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좋은 기술을 과학과 의약품에 낭비할 셈인가?!


확실히, 21세기에 기성세대가 보는 대중문화의 주적은 컴퓨터 게임이다. 거의 모든 청소년문제, 사회문제의 원흉으로 게임이 지목되더니 마침내 정부에서 청소년들의 심야시간 게임이용 규제법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다중사용자온라인게임(MMOG)에 국한된 조치라지만 만약 이 법이 시행된다면 또 하나의 세계 최초를 달성하게 된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는 과정엔 학부모 단체의 압력이나 게임업계의 막연한 대응도 한 몫을 했고, 실제 사회 현상도 큰 역할을 했다. 실제로 많은 사건들에 게임이 이래저래 엮여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죄다 게임 탓이라고 하는 건 부당하다. 컴퓨터게임에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오락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가치들이 담겨있다. 그게 뭐냐고?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이제부터 갈켜줄께 …

첫째,
컴퓨터 게임은 가장 안전하면서도 가장 짜릿하고 경제적인 놀이다.

컴퓨터 게임처럼 안전한 놀이가 또 있던가? 물론 게임을 너무 오래하면 혈전이 혈관을 막아서 죽음에 이를 가능성이 약간 높아진다. 하지만 그래봤자 여객기의 비즈니스좌석에 오래 앉아 있다가 같은 증상으로 죽을 확률보다 높지 않다.

컴퓨터 게임과 다른 놀이들을 비교해보라.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종목은 공에 맞아서 안경이 부러지거나(내가 두 번 그랬다), 팔꿈치에 맞아 입술을 꿰매거나(버락 오바마가 최근에 그랬다), 발이나 손 부상을 입거나(축구하다 다친 엄지발톱은 두 달째 퍼렇다), 심지어 밖으로 튀어나간 공으로 인해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몇번 그런 사례가 보도된 적이 있다).

게다가 격렬한 운동 중에 심장이 멎는 경우도 가끔 있다. 자전거나 킥보드 같은 탈것들은 넘어져서 뼈가 부러지거나 교통사고로 죽을 가능성이 꽤 높다. 등산은? 2007년에만 등산 중 사망자가 112명, 부상자는 2923명 이었다. 10대와 20대의 사망원인 1위가 바로 사고사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대개의 사고는 집 밖으로 기어나갔을 때 터진다.


사람잡는 스포츠, 등산 / 애들 잡는 도구, 킥보드


(컴퓨터 게임을 안하고) 농구를 하다가 입술이 찢어져 병원 가는 오바마

하지만 컴퓨터게임은 방안에 틀어박혀서 키보드나 게임패드만 두들긴다. 다칠 일이 없다. 그렇게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컴퓨터게임은 무지무지 짜릿하다. 컴퓨터 게임이 아니라면 당신이 언제 루프기동을 하며 적 전투기와 공중전을 펼칠 기회가 있겠나? 브라질 빈민가를 뛰어다니며 총격전을 펼칠 일은? 던전을 탐험하며 거대한 몬스터와 혈투를 벌일 가능성은? 빈사상태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장엄하게 목숨을 잃을 기회는? (그리고는 언제든 다시 부활할 기회는?) 모두 컴퓨터 게임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은 인류 역사상 최초다. 원래 짜릿함과 위험함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짜릿한 놀이는 그만큼 위험해야 했고, 위험하지 않으면 짜릿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컴퓨터게임은 좋은 것만 쏙 빼다가 당신 앞에 대령한다. 게다가 비용도 가장 적게 든다. 컴퓨터게임에는 축구화도, 공도, 운동복도 필요 없다. 그저 듀얼코어 이상의 PC와 키보드와 마우스와 고속통신망 만 있으면 된다.





현실? 바보들이나 거기서 놀라고 그래!!

둘째,
컴퓨터 게임은 지혜를 알려준다.

게임을 하면 바보가 된다고? 바보가 하면 더 바보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놀이를 통해서 학습을 시켜왔다. 학습의 기본은 반복 숙달이고 시행착오다.

“Practice makes perfect!” 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게임 속에서는 그 두 가지가 일상이다. <갤러그>를 생각해보라. 당신은 똥파리들의 이동경로와 그것들이 뿌리는 폭탄의 궤적을 습득하기 위해서 수십, 수백번을 반복 플레이했을 것이다. 지루한 반복 끝에 마침내 당신 머릿속에는 <갤러그>의 구조가 그대로 들어서고 당신은 그 게임을 마스터한다.

사실 노인들의 지혜도 반복에서 나왔다. 농경시대에는 단지 춘하추동의 순환을 한번 더 경험했다는 것이 바로 지혜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반복 경험의 기회에 한계가 있다. 춘하추동의 반복경험도 많아봤자 100회 이내다. 일부 카사노바를 제외하고는 연애 경험이 100회를 넘기진 않는다. 하지만 컴퓨터게임은 거의 무제한으로 반복이 가능하다. 그것도 안전하게.





가상역사게임, 문명

미군은 요즘 컴퓨터 게임을 신병훈련에 활용한다. 가장 싸고 안전하게 실전에 필요한 훈련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첨단장비 개발업체에서는 게임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장비의 설계를 보완한다. 교육학자들은 인간이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주변 환경을 탐색하고 실험해볼 기회가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제 게임 속에서는 가능하다. 게다가 게임 속 세계는 갈수록 세상의 진리를 담아간다.

폭력성으로 유명한 ‘GTA (Grand Theft Auto)’를 해본 나는 그 속에 담긴 범죄사회학적 고찰의 깊이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게임은 한 인간이 어떻게 범죄자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지를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나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겠더라.

최근 타임머신 게임으로 유명한 <문명>은 인류 문명 발전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다. 왜 독재로는 어느 수준이상 발전할 수 없는지, 왜 교육을 제대로 시키면 시민들이 반항적이 되는지를 깨닫는데 이만한 교보재가 더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어릴 적에 <심시티>나 <문명>을 좀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마, 가지고 있다.


미군의 모병게임, 아메리카’s 아미



범죄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GTA 시리즈

셋째,
컴퓨터 게임은 사회생활의 훈련장이다.

온라인 게임들을 생각해보라. <스타크래프트>를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마우스 클릭과 단축키를 쓰는 기술 뿐일까? 아니다. 모든 멀티플레이 게임의 기본은 전략적 사고, 상대방의 수 읽기다.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고 그보다 한발 앞서는 것이다. 예측과 대응이 정확할수록 당신이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수 읽기를 하려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조망수용(perspective taking)’이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그리고 이 입장 바꿔 생각하기는 모든 사회생활의 근간이다. 매너나 규칙의 가치도 멀티플레이 게임을 해봐야 이해한다. 한 놈이 반칙을 하면 게임 전체가 어그러지니까. 스포츠맨쉽이 그래서 나오는 거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속담도 그렇다. 여기서 말하는 ‘일’은 혼자서 하는 공부다. 그리고 ‘놀이’는 여럿이 같이 노는 멀티플레이 게임이다.


디지털 세대의 바둑이자 체스, 스타크래프트

고문관이 왜 탄생하나? 멀티플레이 게임을 안했기 때문이다. 그걸 안했으니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치가 없고, 앞뒤가 꽉 막히게 되는 거다. 예전에는 동네 골목이나 공터에서 멀티플레이 게임을 했지만 지금 아이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그것을 배운다. 그러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원칙들을 배운다.

사실 애들이 보고 배울까 무서운 세상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 밖의 우리 사회다. 나는 국회에서 이종격투기를 벌이는 국회의원이나, 수 조 원을 탈세하고 사면받아 나온 주제에 국민들에게 뭘 고쳐야 한다고 주절대는 인간을 보느니 차라리 게임을 하는 게 더 낫다는 입장이다. 컴퓨터 게임 속에서는 최소한 모두에게 공평하게 규칙이 적용되니까.

넷째,
컴퓨터 게임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첨단 IT 기술이다.

컴퓨터의 발전은 이미 불필요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글을 쓰는 워드프로세서는 셀러론 컴퓨터에서도 충분히 작동한다. 파워포인트도 웹서핑도 그 정도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듀얼코어나 쿼드코어 PC를 원한다. 최첨단 게임을 하기 위해서이다. 컴퓨터 게임이야말로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상용화된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다.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컴퓨터 게임을 잘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수준 낮은 다른 기술은 더 쉽게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니까. 초딩이나 중딩들이 어떻게 컴퓨터를 그리도 잘 쓰는지 아직도 모르시겠나? 걔네들은 게임을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배우고, 게임을 통해서 IT를 마스터한다.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배우는 거의 유일한 기술이 바로 컴퓨터와 인터넷이다.

사실 이 사이버 공간의 근본 정신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 구현된다. 반면에 어른들은 게임을 모르니 컴퓨터와 인터넷이 어렵기만 한거다. 기껏해야 XX양 비디오를 보기 위해서 인터넷에 달려드는 수준의 인간들이 게임을 어찌 이해하겠나.


다시 한번, 첨단기술을 게임에 쓰지않으면 어디에 쓰겠나?

마지막으로,
세상은 점점 컴퓨터 게임과 구분할 수 없게 되어간다.

스마트폰의 증강현실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어디까지가 사이버공간이고 어디까지가 현실공간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게임도 마찬가지다. 임요환을 보라. 게임속의 황제는 실제로도 영웅이 된다. 게임을 통해서 배운 원리는 실제로도 적용가능하다. 그러니 게임만 하다가 실생활에 적응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갈수록 무의미해진다.

영화 <소셜네트워크>를 보라. 주인공은 실생활에서는 젬병이다. 이 친구는 자기 애인을 마치 게임의 스탯찍듯 대하다가 찌질이 취급만 당한다. 그런데 그 찌질이가 세계최대의 SNS를 만들어서 억만장자가 된다. 그가 성공한 비결은 실제 세상을 게임처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게임은 수량화할 수 있으며 몇몇 조건을 바꿔서 조작이 가능하다. 이런 게임의 논리를 대인관계에 적용하기, SNS의 기본이 그것 아닌가.


현실세계는 게임과 다르다고? 그럼 난 뭐야?

요약하면,
컴퓨터 게임은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술과 예술과 지식의 종합체이다.

장담하건대, 앞으로 5년 내에 자기 자녀가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걱정이 아니라 게임을 하지 않아서 걱정인 부모가 등장할 거다. 게임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이고, 세상은 점점 게임을 닮아가게 될 테니까. 게임을 안한다는 건 미래에 적응하기를 포기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게임만 잘하면 된다는 건 아니다. 게임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에겐 게임 말고는 다른 중요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삶의 균형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할 것이고,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진리도 변함없을 것이다.

올해에는 새 컴퓨터를 구입해서 <문명>과 <콜옵: 블랙옵스>를 최고해상도로 즐길 꿈에 부푼 인간이 하는 말이니 분명히 편파적인 해석이 담겨있겠으나, 적어도 모든 주장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란다.

영진공 짱가

 

게임 셧다운제와 청소년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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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게임이용시간을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제한하자는 소위 “게임셧다운제” 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밤 12시 이후에는 청소년 이용자들의 게임접속을 차단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자는 것이다. 비록 지난번에는 소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이 안건은 조만간 실제로 구현될 기세다.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70903264532134&linkid=4&newssetid=1352 ]

어떤 사람들은 이 방법이야말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과연 이런 법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떤 결과가 기대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던가. 뭐든 실제로 저지르기 전에 생각을 해보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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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에 시작되어 1848년에 비로소 마무리된 프랑스 혁명의 근본 이념이 자유ㆍ평등ㆍ박애임은 다들 아실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이후 ‘선택의 자유’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마무리되는데 60년이 걸린 프랑스 혁명처럼, 이 자유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삶과 사고방식에 뿌리내리는 데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심리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Freud는 인간의 성장에 대한 이론적인 틀을 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온전한 인간 즉, 성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유의 수유, 배변훈련, 도덕성의 습득,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습득이었다. 다시 말해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자기위생을 관리하고, 양심이 있고 어른 구실하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성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년쯤 후에 태어난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Erikson은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추가했다. 바로 자기정체성identity이 그것이다. 정체성이란 내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주체적으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에릭슨은 우리가 진정한 성인이 되려면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1856년에 태어난 프로이트와 1902년에 태어난 에릭슨 사이에는 근대와 전근대의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을 중시하지 않았다. 무의식의 힘을 중시한 그에게 자유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더구나 봉건사회에서는 주어진 도덕률에 순응하며 주어진 삶에 충실하게 사는 인간이면 충분했다.

반면에 에릭슨에겐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고 그 인식에 근거해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했다. 그것이 근대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성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프로이트와 에릭슨, 둘 사이에는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가 있다.

청소년 게임이용시간 제한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펼쳐놓는 이유는, 이 문제에는 우리가 청소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컴퓨터 게임 중독을 ‘영혼을 파괴하는 병’이라고까지 부른다. 물론 게임 중독에 빠져서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사례들을 보자면 이런 표현이 지나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게임이 청소년들의 영혼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것이라 단정하기 전에 그 영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영혼’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봉건시대에는 신이 부여한 인간의 기본 속성인 양심이나 죄책감 혹은 신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인간을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근대사회에서 영혼은 무엇보다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주체의식을 의미한다.


물론 도덕성도 중요하고 양심도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행동할 수 없다면, 그는 로봇이나 컴퓨터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한다. 이는 청소년에 대한 태도에서도 차이를 만든다. 전근대적인 청소년 육성은 엄격한 훈육을 통해 도덕관과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둔다. 반면에 근대 시민사회의 청소년 육성은 자유의지를 인식하고 다룰 수 있는 성인으로 키우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의 인권, 특히 참여권이 중시되는 이유는 청소년에게 자율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자유로운 인간으로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를 경험해본 이들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대부분의 규제들이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형태에서 점차 자율규제 방식으로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에도 반영되어 있다. 청소년정책은 초기에는 신체적인 육성이나 청소년 보호 중심의 정책이었으나 1989년에 제정된 『청소년육성법』을 계기로 청소년활동을 강조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청소년 중심적인 정책으로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이는 청소년들의 권리를 강조한 『청소년기본법』을 통해 좀 더 선진적인 태도로 발전되어왔다. 즉, 우리나라의 청소년 정책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훈육 중심의 청소년 육성에서 청소년의 자율권을 인정하고 강화함으로써 시민의식과 민주의식을 가진 성인으로 키워내는 방향으로 변화해온 것이다.

 




이 달의 우수게임 시상식 -.-;;;

이제 이 글의 주제로 돌아가자.

청소년 게임이용시간 제한 제도의 핵심은 청소년들의 활동에 강제적인 시간규제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즉, 게임을 언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국가가 부분적으로 청소년 대신 선택을 해주는 것이 이 제도의 기본 목적이다.


물론 청소년들의 수면시간을 보장하고 과도한 게임이용으로 인한 폐해를 막고자 하는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청소년 게임이용에 관한 여러 가지 법적ㆍ제도적 규제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이렇게 과격한 규제를 시도하려는 데는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이 자유의지를 가진 청소년 육성이라는 취지에 부합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역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8년에 셧다운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게임들

만약 이런 법안이 발효된다면 청소년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남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권을 박탈당한 상태로 12시 이후에는 잠을 자거나 혹은 시험공부를 하는 방법이 첫 번째 선택이다. 아마도 잠을 못자고 공부를 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어쨌든 게임은 못한다.


두 번째 선택은 법적 규제를 무시하고 12시 넘어서까지 하고 싶은 게임을 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미성년자불가 게임에 자기 부모의 주민번호로 접속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이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두 가지 모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첫 번째 선택은 자유의지를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결과가 될 것이고, 두 번째 선택은 범법을 배우는 결과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우리 청소년들이 짜투리 시간에 마땅히 다른 할 거리가 없어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짜릿하고 즐거운 활동들을 하다가 가끔씩 게임도 할 수 있는 삶을 누리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임 시간 규제가 아니라 다양한 청소년활동프로그램의 제도화와 함께 지나친 입시경쟁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물론 나 역시도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12시가 아니라 10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강제가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길 바란다.


혹은 최소한 부모와 자녀간의 약속이나 부모의 권위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우리는 모두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유로운 시민이다. 자신이 혹은 자기 자녀가 몇시까지 게임을 할지 조차 국가의 규제에 맡기겠다는 생각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의사표현과 동일하다.


우리가 청소년들의 ‘영혼’을 걱정한다면 특히 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영혼이 파괴된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인데, 그것은 게임 중독에 빠지지 않더라도 그저 강제를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 게임셧다운제를 실시하는 국가는 태국과 중국이다.
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아시나… 중국은 아실테지?
지금 우리가 태국하고 중국 따라하잔 얘긴가?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