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불구경하기 영화에서 감동은 어디에 있는 건가

 


 

 


 


 



 


 


 


재난영화를 만들떄에는 반드시 지켜야할 덕목이 있다.


영화로서의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도 절대 구경거리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사람이 죽고 다쳐나가는데 그걸 보면서 ‘우와’ ‘대박’ 뭐 이런 탄성이 나오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지 방법은 그 재난이 그저 우연하거나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가 아닌, 구조적 결점이나 인간의 탐욕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재난의 영화화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바른 삶을 살아야하며, 애꿎은 선량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나가게 만든 나쁜 놈들은 반드시 응징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재난은 …… 그냥 사고다.


구조적 병폐나 인간의 탐욕이 주원인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보니 운 나쁘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거다. 물론 헬기가 비행한 상황이나 건물주의 행동이나 소방국장이 벌이는 뻘짓이 있긴 하지만, 이것들이 그토록 큰 재난을 일으킨 주범들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잘못을 저지른 놈도 없고 그렇게 만든 사회 시스템도 없다. 그냥 사고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 나가는 대형사고를 그런 스펙타클한 화면으로 왜 봐야하는가. 그나마 찌질한 나쁜 놈들에 대해서도 단 한 번의 응징도 가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봐야할 게 뭐고 어디에서 감동해야 하는 걸까. 실감나는 장면 연출? 불구경? CG감상? … 설마 그럴리야 없겠지.


 


 


 




 


 


 


요즘 나의 고민은, 내 과거의 가난했던 경험을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것이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부분이다. 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나의 가난에 대한 경험이 타인에게는 화두로 삼기에 불편한 소재가 되고 있어서이다.


 



우리나라 영화에 꼭 등장하는 ‘가난한 어머니와 고생하는 아들’의 모습이 영락없이 불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작위적인 설정(요즘 세상에 청소용역직에게 누가 3개월치나 월급을 가불해주나? 게다가 용역직 월급 120만원이라 가정하고, 석달치 360만원에 세금 때면 330만원이 한 학기 등록금이라 하면, 그 가족은 3개월을 손가락 빨고 사나?) 때문만은 아니리라.


 



영화 한 편에 9,000원을 내고 보러올 정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현대의 가난’이란 소재가 외면하고 싶은 소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타워”에 등장하는 청소 아주머니는 감동을 위한 소재로서는 불편한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정치인은 소방공무원 욕을 해대면서 VIP랍시고 안전하게 도망가고, 쓸데없이 고집부려 재난의 단초를 제공한 놈은 상황실에서 방방 뛰고, 애꿎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쳐나가고 …… 그 와중에도 가난한 청소 아주머니는 그저 짐만 되는 사람으로 표현될 뿐, 이렇다 할 역할은 없다.


 



우리에게 가난이란 그런 것일 듯 하다. 그저 불편한 짐.


사회 구성원으로서 경제적 약자가 표현되는 수준. 복지 예산으로 먹여살리기 아까운데 그렇다고 마냥 버릴 수도 없는. 딱 그 수준. 그게 우리의 투표 결과고, 현 영화가 보여주는 우리 사회 계층의 모습이라 생각해본다.


 


 


 



 


 


 





그래도 이 영화의 미덕을 하나 꼽으라면 설경구의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한다. 영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처럼 순교의 길을 걷는 다는 느낌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온갖 회한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평소의 강인한 모습을 잊고 눈물을 터트리는 …… 그저 평범한 영.웅.


 



그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장면이 가슴에 남는다. ㅆㅂ, 죽기 싫은데. 누군가는 해야 하고. 영화 보는 내내 자기 욕심들만 채우려는 캐릭터를 보다가, 그나마 ‘양심’을 가진 캐릭터를 보니 살짝 숨통이 트였다고 할까? 영화에 대한 불만이 확 치밀어 올라왔다가 그 장면 하나에 그냥 용서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슈퍼히어로를 만들지 않아서.


 


 


 


영진공 Red Submarine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보는 쾌감 뒤에 남는 미미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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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훨씬 맘에 듭니다.
널따란 벌판에서 말 달리며 총질만 해대면 다 서부영화 혹은 웨스턴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차피 존 포드와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정통 서부극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건 미국도 아닌 이탈리아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가 만든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이 아니었던가. ‘정의로운’ 주인공들이 땅과 여자와 집과 마을을 지키는 정통 웨스턴에서 적은 소위 ‘미개하고 야만적인 인디언’이라 불리던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나 텍사스 저쪽에서 넘어온 뮬라토나 히스패닉, 혹은 더럽고 비열한 수를 쓰는 다른 백인 무법자들이었고, 이들은 우리의 정의로운 주인공들의 집과 땅과 여자와 가축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침략자였다. 이들의 정의는 백인의 정의였으며 이것은 ‘보안관 뱃지’로 보증되었고 이들이 정의를 관철하는 방식은 결국 ‘총’이었다. 그러나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대로 오면 정의로운 자와 무작정 악인의 구별이 그렇게까지 또렷해지지 않는다. 물론 정의로운 주인공도 악인도 나오지만, 여기에서의 정의는 백인의 정의라기보다는 보다 개인화된 정의에 가깝고, 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하게 지배하는 것은 돈의 힘, 돈의 룰이다. 이 공간은 오히려 법이 법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가장 훌륭한 총질솜씨로 서열이 매겨지는 공간이며, 온갖 무법자들이 자신의 유명세를 각인시키고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다투는 무국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미국인), 무법천지의 공간이다. 주인공은 여전히 백인들이지만 이들의 혈통이 앵글로 색슨계인지 아일랜드계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인디언에게서 이미 뺏은 땅을 자기들끼리 누가 더 많이 갖는가를 두고 다투고,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가방 하나만 둘러맨 채 벌판을 떠돈다.


전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것이 마카로니 웨스턴이었기에 변종 웨스턴으로는 그토록 마카로니 웨스턴만이 언급되지만, 사실 전 세계적으로 저 서부영화의 틀을 변형한 각종 로컬화된 웨스턴들은 지역마다 나왔다. 한국에서도, 홍콩에서도 유명 감독들이 웨스턴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신상옥도, 이만희도 포함돼 있다. 타란티노보다 훨씬 많은 홍콩 무협영화 및 (국적불문의) 아류들을 보고 자라며 영화의 자양분을 얻었을 류승완 감독이, 타란티노가 <킬빌>을 내놓고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후에야 용기를 내어 소위 퓨전/로컬화된 현대무협극 <짝패>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 혹은 그럼에도 홍콩 무협의 현대적 변용의 대표명사는 여전히 타란티노인 것. 그것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미국에서 미국인 배우와 유럽인 배우를 섞어 영화를 만들고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뒤에야 세계 각지에서 로컬화된 변종 웨스턴들이 쏟아져나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렇게 웨스턴이 다종다양한 방향으로 변형, 지역화된 역사가 이미 존재한다면, 그럼에도 웨스턴의 어떤 특징들이 보인다면, 그 영화를 웨스턴이 아니라 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더이상 웨스턴처럼 보이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웨스턴처럼 보이게 만드는 어떤 특징들, 그것을 뭘로 꼽을 것인가. 즉, 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을 한국식 웨스턴이라기보다 홍콩누아르의 변형에 웨스턴의 향을 슬쩍 덧입혔다고 무비스트에서 단평을 내린 바 있는데, 그럼에도 <놈놈놈>을 이런 식의 변종 웨스턴이 아니라고는 또 말을 못 하게 할 요소들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근대화된 법과 국가의 힘보다 물리력과 생존기술이 더 우위에 있는 공간, 특히 흙먼지가 날리는 너른 벌판에서 총을 무기로 치러지는 투쟁”이 아닌가 한다. 이런 공간에서는 당연히 국적도 출신도 중요하지 않으며, 법과 근대적 제도가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 하는 아나키 상태가 주를 이룬다. 성문화된 법보다는 소위 ‘선수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형성돼온 관습법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서부와 마찬가지로, 만주는 너무나 훌륭한 웨스턴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어딜 가나 산이 솟아있고 남쪽은 바다로,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혀있는 좁디좁은 남한땅에서는 불가능한 ‘벌판을 떠도는 유랑인’의 존재가 만주에서는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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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쾌감, 한국관객들에겐 드물게 맛보는 것. 아울러 정우성은 그림도 된다.


만약 <놈놈놈>이 이 공간의 특징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면, 나는 별다른 아쉬움 없이 <놈놈놈>을 현대식, 한국식으로 변용되고 로컬화된 변종 웨스턴으로서 아무 거리낌없이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온갖 패거리가 몰려들어와 맨앞에 가는 한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이고 죽이는, 다양한 집단이 얽히고 꼬이는 플롯이 ‘도입되다가 말고’, 그 와중에 모두가 각자 오해를 하고 이 오해를 향해 달려가며 벌어지는 코미디 플롯이 ‘도입되다가 말고’, 한다. 넣으려면 제대로 넣고 말려면 말던가,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하는 설정들 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아쉬움만 잔뜩 커졌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까지의 꼬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예컨대 온갖 집단들이 윤태구(송강호)를 쫓아가는 벌판 육박씬을 보자. 사실 서부영화에서 그토록 폭탄들이 뻥뻥 터지고 그토록 스피디하게 질주하는 것도 좀 낯설긴 했지만 어쨌건 박력은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병춘(윤제문)이 속한 마적단과 박창이(이병헌)가 이끄는 마적단, 일본제국군, 만주국 군인,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까지 얽힌 이 추격전에서는 오로지 물량과 속도만이 강조된다. 과연 이 씬의 엄청난 속도감과 박력, 그리고 물량을 때려박으며 뻥뻥 터뜨려 만든 폭발력은 시각적, 청각적 쾌감이 상당한 편이다. 그렇게 대규모의 박력있는 말발굽 소리를 한국영화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 씬이야말로 그 ‘다양한 집단의 꼬임’이 폭발해야 하고, 각자 오해로 인한 동상이몽들이 맞부닥치며 벌어지는 코미디가 작렬해야 하는 씬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런 것들을 ‘하려다 말고’ 버려둔 뒤, 영화의 코미디는 그저 송강호의 개인기와 캐릭터 유머에만 의존하고 있다. 나아가 저 만주라는 공간이 그 국적불문 무법천지의 혼란스러운 아나키의 느낌을 살리고 있던가. 별로 그런 것같지는 않다. 사실 이것도 ‘하려다 만’ 느낌이 더 강하다. 그리고선 기어코 세 주인공의 총싸움씬을 집어넣는다. 결국 이 영화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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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웨스턴’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이 캐릭터뿐이다.


아니, 이 정도라도 좋다. 사실 <놈놈놈>은 굳이 간지럼을 태워놓고 긁어주지는 않아 계속 미미하게 남는 아쉬움을 제외하면 그래도 썩 보는 쾌감이 있는 한국식 블록버스터다. 기럭지와 폼으로만 버티기엔 이제 나이를 먹어버린 정우성이 아무리 국어책을 읽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가 달리는 말에서 엉덩이를 뗀 채 양 다리로만 말 옆구리에 딱 붙인 채 몸을 지탱하며 라이플을 쏜달지, 가끔 힘에 부치는 티가 나기는 해도 한손으로 멋지게 라이플을 돌려가며 장전하고 밧줄을 타고 날아다니며 쏘는 장면도 그림이 어느 정도 나온다. 이병헌이 고풍스러운 양복으로 멋을 부리는 무법자라기보다는 역시 홍콩누아르의 조직 두목처럼 보이기는 해도, 한류팬들을 위한 팬서비스용으로 잘 단련된 전신 근육을 까서 보여준 건 한류팬이 아니라도 분명 효과가 있었다. 골목과 지붕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총격씬, 벌판 질주씬도 분명 쾌감이 있었고. 카메라가 가끔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 걸 빼면,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돈 들인 티’가 난다. 100억을 들이고도 ‘100억원짜리 저예산’ 운운의 소리를 듣고 있는 모 영화를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가 화면에 확실히 드러낸 돈발은 과연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만주. 만주는 과연 저렇게 묘사돼도 좋은 것일까.


미국의 웨스턴들은, 그 영화가 불러낸 시기가 ‘서부개척사’라 불리는 데에서 드러나듯, 실질적으론 침략의 땅따먹기를 ‘개척’으로 표현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은둔고수가 숨어들기에 좋은, ‘너무나 넒기에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기도 하며, 모든 것을 잃고 정착의 의지마저 잃어버린, 그리하여 결코 제도화된 근대 국가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들이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떠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가 만주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굳이 정통 웨스턴에서 안 가져와도 될 그 제국적 속성을 가져온 게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다. 물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만주에 왔다는 태구의 말에서 익명과 유랑의 공간으로서 만주의 성격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벌판 질주씬에서 이 느낌은 다른 것에 완전히 압도된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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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누아르의 중간보스가 타임머신을 잘못 탄 듯한. 비주얼은 멋지다만.


윤태구의 지도를 뺏으려고 국경 근처에 진을 친 아편굴의 아편장사치(손병호)가 “만주와 간도는 원래 발해 땅” 운운하는 건, 영화 속 무수한 캐릭터 중 한 명의 대사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 영화가 그토록 벌판에서 ‘지축을 울리는 어마어마한 말발굽들의 질주’를 강조한 것에서, 조갑제 씨가 한사코 우리 본성이라며 강조하는 ‘만주벌판 말 달리는’ 기마민족의 꿈을 내가 떠올려 버린 것은 나의 과민함 때문만은 아니다. 기자시사회가 끝난 뒤 상영장에서 있었던 기자간담회장에서 김지운 감독이 분명 그런 식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 땅이었던 만주땅을 시원하게 내달리는 느낌. 김지운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였다고 한다. 170억의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한국만이 아닌 일본과 동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대규모의 이런 블록버스터가 결국 꿈꾸고 있는 것은 제국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현재 지구상 그 어느 국가보다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가장 진취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밀어부치며 미국에게 오히려 한미FTA의 조속 비준을 요구하는 한국이 꿈꾸고 있는 ‘제국의 꿈’, ‘제국을 향한 욕망’과 닮아있지 않은가.


영진공 노바리


ps1. 사실 내가 남자배우였으면… 무조건 한다고 덤볐을 거다. 세상에 한국에서 말타고 총쏘며 폼잡을 수 있는 영화란 게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이건 완전 남자의 로망 아닌가. (나같은 여자의 로망이기도 한데, 실은, 쩝.)

ps2. 고생은 정말 많이 했겠더라. 그러고보면 또 서부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열차’, 흔한 소재가 되는 ‘열차강도 씬’도 있다…

ps3. 사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에 대한 내 판단은 저 버디님 글과 정확히 똑같다. 표절도 오마쥬도 아닌데 어디서 많이 본 그림들로 온통 짜깁기 돼 있는 듯한 이 느낌은 참… 영화를 만들고 나면 크게는 아니어도 항상 표절 운운 얘기(그것도 항상 일본영화)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 아닐까. 100년이 넘은 현대 영화란 게 따지고 보면 다 어디서 본 장면들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영화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얼마나 자기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느냐, 그리고 한 영화 내에서 어떻게 톤의 일관성을 유지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아이언 맨 (Iron Man)], 존 파브로 –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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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직접 영웅되다.
<아이언맨>이 처음 기자시사회를 갖고나서 프레시안무비에서 최광희 선배(여기, 혹은 여기)는 “정치적으론 별로, 블록버스터로서는 재미있다”라고 평했는데, 어째 나는 정반대였다. “정치적으로 진일보, 블록버스터로는 별로.” (세 번째 보러 갔을 땐 힘들더라, 결국 30분 가량 잤다.) 이후 나오는 대부분의 평에서도 아이언맨이 각성하는 척하지만 결국 미국식의 위선적인 영웅이라며 비판하는 글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이건 원작이 있을 뿐 아니라, ‘블록버스터’다. 대체 블록버스터, 그것도 원작이 있는 블록버스터에서 신랄하고 예민한 정치적 감성을 기대하는 건 좀 과하지 않나? 게다가 실은 이 영화, 굉장히 신랄하고 예민한 정치적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게 한국 관객들이 바라는 측면에선 좀더 ‘은근하게’ 표현돼 있을 뿐.

물론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자신을 도와줬던 잉센의 고향 굴미라가 바로 자신이 개발한 무기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걸 보고 분개하지만 그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라곤 자신이 개발한 미사일인 제리코를 폭파시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오버다이어(제프 브리지스)가 지적한 대로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 사람이 하고 다니는 건 정말 영웅적 각성이라기보다 어째 ‘영웅놀이’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자신이 만든 무기들을 제거하고 다니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얘가 헛스러운 영웅놀이를 한다기보다 정말 뭔가에 책임지려는 태도로 보이지 않나? 게다가 아이언 맨 수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는 그 누구도 아닌 미국 공군에 의해 쫓기고 공격을 당하며 적으로 규정된다. 오버다이어와 토니 스타크가 대결한 다음 토니 스타크의 군수공장 건물 지붕이 날아가 버리기까지 한다. 최종적으로 폭파되는 건 결국 차례대로 토니 스타크가 만든 무기들, 그리고 그 원자로와 건물이다. 이건 매우 상징적인 파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미국 군수산업에 대해 이렇게까지 공격을 들이대는 영화가 과연 있었던가. 더더욱 중요한 것. 이 영화가 줄곧 취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빈정대는 태도. 이게 정말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



토니 스타크의 외모가 참 비열하고 뻔뻔한 특유의 그 악당 수염을 고수하는 것도 그렇고(이는 심지어 수트를 입고 출동하는 토니의 얼굴을 극클로즈업하면서 함께 확대된다), 심지어 토니의 컴퓨터들마저 토니에 대해 사정없이 사카스틱한 비아냥을 날려댄다(예컨대 수트에 정열적인 빨간색을 칠하라고 하자 “주인님의 ‘은둔자적’ 성격을 잘 반영해 드리죠.”라며 대꾸하는 등.). 폼잡고 싸우던 토니 스타크의 ‘가오가 무너지는’ 유머 장면은 또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단순히 토니 스타크를 놀려먹는 것뿐 아니라, 영화 전체가 키들거리는 사카스틱한 농담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면서 스스로 자조하는 듯한 유머가 무수히 많이 깔려있다. 나는 이것이, 블록버스터로서 정치적 감각이란 걸 대단히 제한된 형태로 가질 수밖에 없는 이 영화가 스스로의 처지와 한계에 대해 빈정거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이 영화 스스로가, 그런 미국식 위선적인 영웅심 자체를 비아냥대고 있다는 얘기다. 혹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힘과 능력과 재력이 있긴 있는데 토니 스타크 같은 막돼먹은(?) 인간이라며 자조하고 있거나. 이 정도까지 간다면, 이 영화의 정치적 감수성이란 실은 대단히 예민하고 신랄하며 유머감각까지 갖춘 것으로 인정해 줘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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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뻔뻔하고 웃긴 남자, 매력적이다.


사실 이 영화는 토니 스타크의 영웅적인 행적과 그의 놀라운 아이언 맨의 수트와 같은 전형적인 슈퍼히어로의 활동상보다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호감과 관심으로 지탱되는 영화다. 일단 스타크 인더스트리가 당대 최고의 첨단 기술로 당대 최고의 무기를 만들어내 엄청난 수의 인명을 살상하고 이것을 직접 개발한 것이 토니 스타크이건 말건, 우리는 토니 스타크에게 직접 죄를 묻기가 힘들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그가 경영자가 아니라 그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과학자이자 엔지니어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가 책임감있고 성숙한 성인 남자라기보다 몸은 어른인지 몰라도 정신세계와 하는 짓은 딱 ‘철딱서니 없는 어린 남자애’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이런 토니 스타크의 캐릭터를 그려낼 배우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캐스팅한 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는데, 그는 매우 놀라운 균형 감각으로 토니 스타크를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자조하는 한편, 그럼에도 (주인공인 만큼) 엄청난 매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다. 나이도 있고 돈도 많으며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성인남자의 매력과, 그럼에도 부잣집 도련님 출신으로 어쩔 수 없이 철없는 ‘애’의 모습을 가진 남자의 매력을 복합적으로 매우 잘 살려냈다.


먼저 이 영화는 맨하탄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오펜하이머와 그에 관한 세간의 논쟁을 노골적으로 가져오면서 이를 슬쩍 비틀어 토니와 그의 아버지에게 투사시킨다. 과연 과학자는 혹은 엔지니어의 윤리는 지금 눈앞의 신기술이 전세계에 미치는 복잡다단하기 그지없는 (정치, 외교적) 영향들을 고려하는 것까지 포함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는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던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참가 제안을 받았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으며 종전 후 보다 폭넓은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하게 논쟁됐던 주제 중 하나다.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이들 과학자들에게도 윤리와 책임을 물으며 비판하지만, 세간의 우리들은 대체로 실험실 안에만 갇혀 연구만 일삼는 ‘순진한 천재들’이 정치적으로 무지할 수 있고 오히려 그들이 이용당한 면이 크다며 손쉽게 이해와 용서를 하는 편이다. 이는 ‘순진한 천재’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이 종종 천재들이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는 오히려 바보처럼 행동했다는 여러 우스개 에피소드들과 함께 퍼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니 스타크의 ‘천진난만하고 철없는 어린애다운’ 모습도 바로 이런 환상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 크다. 안 씻고 외모에 전혀 신경 안 쓰고 하는 것보다야 여자들과 노는 걸 좋아하는 게 훨씬 이해받기 쉽고 호감으로 전화되기 쉬우니까. 굴미라 마을을 공격한 용병들에게 무기를 제공해줬다는 오버다이어에게 쫓아가 ‘무력한 표정으로’ 항의하는 토니 스타크의 모습이 바로 이런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결정적인 알리바이 장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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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거나 말거나, 전 여자보다도 뚝딱거리는 조립놀이가 더 좋답니다.


놀기 좋아하는 어린애스러운 면이 있는 남자는 보통 바람둥이 남자를 매력적인 존재로 그리는 데에 가장 자주 동원되는 수법이다. 사실, 그렇게 천진난만한 어린애이기 때문에 ‘어른의 관계’에 대한 기대 없이 (여자들도 자발적으로 동의하며) 여러 여자를 전전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여자들에게 매력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뭐든 하나씩 흘리고 다치고 하는 저 남자를 챙겨주고 싶다는 식의 모성본능 포함). 첫 시작부터 영화는 토니 스타크를 여자와 술과 파티를 좋아하는 한량으로 그려내는데, 사실 토니 스타크가 여자보다도 좋아하는 건 ‘조립 놀이’이다. 다만 그가 워낙 돈이 많고 기계천재다 보니 뚝딱뚝딱 갖고 노는 게 첨단기술을 응용한 무기가 되는 것일 뿐. 사실 그가 갖춰놓은 지하의 ‘작업실’은 어릴 적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무선라디오를 만든 경험이 있는 거의 모든 남자아이들에겐 궁극의 로망일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토니 스타크의 ‘철없는 애스러운’ 성격을 보여주는 정점이다. 보통의 다른 슈퍼히어로와 달리 자신이 바로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이 영화의 마지막은, 사실 “나 이렇게 대단해, 봐줘 봐줘” 하는 어린애들의 과시욕과 별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것이 토니 스타크의 매력이며, <아이언 맨>의 매력의 98%는 바로 토니 스타크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고, 이런 캐릭터를 ‘진상’이 아닌 ‘매력적인 남주’로 승화시킨 건 결국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라 하겠다. 사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솔직함은 그 결과가 설사 어처구니 없는 것이라 해도 일단 호감을 가지게 되기 십상이다. 게다가 재력과 매력을 능력을 갖춘 남자라면, 웬만한 여자들의 눈에는 그런 애스러운 철딱서니없음도 또 하나의 매력이자 다른 매력들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곤 하니까. 하지만 <인크레더블 헐크> 말미에 잠깐 등장하는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 맨>의 토니 스타크와 달리 어딘가 악당 포스가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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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고철덩이로 둘러싸인 이런 랩에서 이런 옷을 입고 있어도 섹시하다.



나는 이 영화가 블록버스터로서 별로라고 했는데, 이건 보통 슈퍼히어로를 다룬 블록버스터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거는 기대와, 이 영화가 방점을 찍고 있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무슨무슨 맨 시리즈라 하면 당연하게도 화려한 액션과 활약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그 이전, 즉 아이언맨이 탄생하는 과정, 특히 그 수트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의 활약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영화 전체가 다음 편을 위한 예고편 정도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테렌스 하워드나 기네스 펠트로 같은 배우들을 캐스팅해놓고도 그들이 연기하는 제임스 로드나 페퍼 포츠를 그런 식의 철저히 들러리로만 설정한 것도 이 영화가 실은 속편을 위한 거대한 떡밥에 불과하다는 인상과 실망감을 느끼는 것도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다만 이 영화가 철저히 ‘아이언맨의 탄생’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해 버리고 나면, 뚝딱거리며 아이언맨 수트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거기에 토니 스타크라는 좀 철없으면서도 매력적인 왕자님이 보여주는 캐릭터 유머에서 잔재미들을 꽤 찾을 수 있고, 고백하자면 그 잔재미들은 꽤 흥미롭고 재미있다. 다만 속편을 너무 기대하게 만드는 게 문제라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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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매력적인 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영진공 노바리

ps1. 각종 마약사건 때문에 재능에 비해 너무 묻혀있던 다우니 씨, 이제 제발 활활 날개를 펴삼.

ps2. 사실 다우니는 이런 블록버스터 주인공도 잘 하지만, 예컨대 <구름 저편에>에서 그 맑은 눈을 깜박이며 소녀에게 대쉬하던 역 같은 섬세한 연기가 정말 짱… 게다가 난 이 사람 목소리도, 발음도 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