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보는 쾌감 뒤에 남는 미미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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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훨씬 맘에 듭니다.
널따란 벌판에서 말 달리며 총질만 해대면 다 서부영화 혹은 웨스턴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차피 존 포드와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정통 서부극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건 미국도 아닌 이탈리아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가 만든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이 아니었던가. ‘정의로운’ 주인공들이 땅과 여자와 집과 마을을 지키는 정통 웨스턴에서 적은 소위 ‘미개하고 야만적인 인디언’이라 불리던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나 텍사스 저쪽에서 넘어온 뮬라토나 히스패닉, 혹은 더럽고 비열한 수를 쓰는 다른 백인 무법자들이었고, 이들은 우리의 정의로운 주인공들의 집과 땅과 여자와 가축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침략자였다. 이들의 정의는 백인의 정의였으며 이것은 ‘보안관 뱃지’로 보증되었고 이들이 정의를 관철하는 방식은 결국 ‘총’이었다. 그러나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대로 오면 정의로운 자와 무작정 악인의 구별이 그렇게까지 또렷해지지 않는다. 물론 정의로운 주인공도 악인도 나오지만, 여기에서의 정의는 백인의 정의라기보다는 보다 개인화된 정의에 가깝고, 이 공간을 실질적으로 하게 지배하는 것은 돈의 힘, 돈의 룰이다. 이 공간은 오히려 법이 법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가장 훌륭한 총질솜씨로 서열이 매겨지는 공간이며, 온갖 무법자들이 자신의 유명세를 각인시키고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다투는 무국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미국인), 무법천지의 공간이다. 주인공은 여전히 백인들이지만 이들의 혈통이 앵글로 색슨계인지 아일랜드계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인디언에게서 이미 뺏은 땅을 자기들끼리 누가 더 많이 갖는가를 두고 다투고,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가방 하나만 둘러맨 채 벌판을 떠돈다.


전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것이 마카로니 웨스턴이었기에 변종 웨스턴으로는 그토록 마카로니 웨스턴만이 언급되지만, 사실 전 세계적으로 저 서부영화의 틀을 변형한 각종 로컬화된 웨스턴들은 지역마다 나왔다. 한국에서도, 홍콩에서도 유명 감독들이 웨스턴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신상옥도, 이만희도 포함돼 있다. 타란티노보다 훨씬 많은 홍콩 무협영화 및 (국적불문의) 아류들을 보고 자라며 영화의 자양분을 얻었을 류승완 감독이, 타란티노가 <킬빌>을 내놓고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후에야 용기를 내어 소위 퓨전/로컬화된 현대무협극 <짝패>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 혹은 그럼에도 홍콩 무협의 현대적 변용의 대표명사는 여전히 타란티노인 것. 그것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미국에서 미국인 배우와 유럽인 배우를 섞어 영화를 만들고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뒤에야 세계 각지에서 로컬화된 변종 웨스턴들이 쏟아져나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이렇게 웨스턴이 다종다양한 방향으로 변형, 지역화된 역사가 이미 존재한다면, 그럼에도 웨스턴의 어떤 특징들이 보인다면, 그 영화를 웨스턴이 아니라 칭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더이상 웨스턴처럼 보이지 않음에도 그럼에도 웨스턴처럼 보이게 만드는 어떤 특징들, 그것을 뭘로 꼽을 것인가. 즉, 나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을 한국식 웨스턴이라기보다 홍콩누아르의 변형에 웨스턴의 향을 슬쩍 덧입혔다고 무비스트에서 단평을 내린 바 있는데, 그럼에도 <놈놈놈>을 이런 식의 변종 웨스턴이 아니라고는 또 말을 못 하게 할 요소들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근대화된 법과 국가의 힘보다 물리력과 생존기술이 더 우위에 있는 공간, 특히 흙먼지가 날리는 너른 벌판에서 총을 무기로 치러지는 투쟁”이 아닌가 한다. 이런 공간에서는 당연히 국적도 출신도 중요하지 않으며, 법과 근대적 제도가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지는 못 하는 아나키 상태가 주를 이룬다. 성문화된 법보다는 소위 ‘선수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형성돼온 관습법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서부와 마찬가지로, 만주는 너무나 훌륭한 웨스턴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어딜 가나 산이 솟아있고 남쪽은 바다로, 북쪽은 휴전선으로 막혀있는 좁디좁은 남한땅에서는 불가능한 ‘벌판을 떠도는 유랑인’의 존재가 만주에서는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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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쾌감, 한국관객들에겐 드물게 맛보는 것. 아울러 정우성은 그림도 된다.


만약 <놈놈놈>이 이 공간의 특징을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면, 나는 별다른 아쉬움 없이 <놈놈놈>을 현대식, 한국식으로 변용되고 로컬화된 변종 웨스턴으로서 아무 거리낌없이 즐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온갖 패거리가 몰려들어와 맨앞에 가는 한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죽이고 죽이는, 다양한 집단이 얽히고 꼬이는 플롯이 ‘도입되다가 말고’, 그 와중에 모두가 각자 오해를 하고 이 오해를 향해 달려가며 벌어지는 코미디 플롯이 ‘도입되다가 말고’, 한다. 넣으려면 제대로 넣고 말려면 말던가,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고 하는 설정들 때문에 오히려 영화에 아쉬움만 잔뜩 커졌다.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까지의 꼬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예컨대 온갖 집단들이 윤태구(송강호)를 쫓아가는 벌판 육박씬을 보자. 사실 서부영화에서 그토록 폭탄들이 뻥뻥 터지고 그토록 스피디하게 질주하는 것도 좀 낯설긴 했지만 어쨌건 박력은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병춘(윤제문)이 속한 마적단과 박창이(이병헌)가 이끄는 마적단, 일본제국군, 만주국 군인,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까지 얽힌 이 추격전에서는 오로지 물량과 속도만이 강조된다. 과연 이 씬의 엄청난 속도감과 박력, 그리고 물량을 때려박으며 뻥뻥 터뜨려 만든 폭발력은 시각적, 청각적 쾌감이 상당한 편이다. 그렇게 대규모의 박력있는 말발굽 소리를 한국영화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이 씬이야말로 그 ‘다양한 집단의 꼬임’이 폭발해야 하고, 각자 오해로 인한 동상이몽들이 맞부닥치며 벌어지는 코미디가 작렬해야 하는 씬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런 것들을 ‘하려다 말고’ 버려둔 뒤, 영화의 코미디는 그저 송강호의 개인기와 캐릭터 유머에만 의존하고 있다. 나아가 저 만주라는 공간이 그 국적불문 무법천지의 혼란스러운 아나키의 느낌을 살리고 있던가. 별로 그런 것같지는 않다. 사실 이것도 ‘하려다 만’ 느낌이 더 강하다. 그리고선 기어코 세 주인공의 총싸움씬을 집어넣는다. 결국 이 영화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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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웨스턴’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이 캐릭터뿐이다.


아니, 이 정도라도 좋다. 사실 <놈놈놈>은 굳이 간지럼을 태워놓고 긁어주지는 않아 계속 미미하게 남는 아쉬움을 제외하면 그래도 썩 보는 쾌감이 있는 한국식 블록버스터다. 기럭지와 폼으로만 버티기엔 이제 나이를 먹어버린 정우성이 아무리 국어책을 읽는다고 해도, 적어도 그가 달리는 말에서 엉덩이를 뗀 채 양 다리로만 말 옆구리에 딱 붙인 채 몸을 지탱하며 라이플을 쏜달지, 가끔 힘에 부치는 티가 나기는 해도 한손으로 멋지게 라이플을 돌려가며 장전하고 밧줄을 타고 날아다니며 쏘는 장면도 그림이 어느 정도 나온다. 이병헌이 고풍스러운 양복으로 멋을 부리는 무법자라기보다는 역시 홍콩누아르의 조직 두목처럼 보이기는 해도, 한류팬들을 위한 팬서비스용으로 잘 단련된 전신 근육을 까서 보여준 건 한류팬이 아니라도 분명 효과가 있었다. 골목과 지붕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총격씬, 벌판 질주씬도 분명 쾌감이 있었고. 카메라가 가끔 너무 심하게 흔들리는 걸 빼면,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돈 들인 티’가 난다. 100억을 들이고도 ‘100억원짜리 저예산’ 운운의 소리를 듣고 있는 모 영화를 생각해 본다면, 이 영화가 화면에 확실히 드러낸 돈발은 과연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 만주. 만주는 과연 저렇게 묘사돼도 좋은 것일까.


미국의 웨스턴들은, 그 영화가 불러낸 시기가 ‘서부개척사’라 불리는 데에서 드러나듯, 실질적으론 침략의 땅따먹기를 ‘개척’으로 표현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은둔고수가 숨어들기에 좋은, ‘너무나 넒기에 익명성이 보장되는’ 공간이기도 하며, 모든 것을 잃고 정착의 의지마저 잃어버린, 그리하여 결코 제도화된 근대 국가 안으로 포섭될 수 없는 소위 ‘자유로운 영혼’들이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떠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가 만주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굳이 정통 웨스턴에서 안 가져와도 될 그 제국적 속성을 가져온 게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다. 물론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만주에 왔다는 태구의 말에서 익명과 유랑의 공간으로서 만주의 성격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벌판 질주씬에서 이 느낌은 다른 것에 완전히 압도된다. 그 다른 것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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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누아르의 중간보스가 타임머신을 잘못 탄 듯한. 비주얼은 멋지다만.


윤태구의 지도를 뺏으려고 국경 근처에 진을 친 아편굴의 아편장사치(손병호)가 “만주와 간도는 원래 발해 땅” 운운하는 건, 영화 속 무수한 캐릭터 중 한 명의 대사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 영화가 그토록 벌판에서 ‘지축을 울리는 어마어마한 말발굽들의 질주’를 강조한 것에서, 조갑제 씨가 한사코 우리 본성이라며 강조하는 ‘만주벌판 말 달리는’ 기마민족의 꿈을 내가 떠올려 버린 것은 나의 과민함 때문만은 아니다. 기자시사회가 끝난 뒤 상영장에서 있었던 기자간담회장에서 김지운 감독이 분명 그런 식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 땅이었던 만주땅을 시원하게 내달리는 느낌. 김지운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였다고 한다. 170억의 어마어마한 제작비에 한국만이 아닌 일본과 동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대규모의 이런 블록버스터가 결국 꿈꾸고 있는 것은 제국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현재 지구상 그 어느 국가보다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가장 진취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밀어부치며 미국에게 오히려 한미FTA의 조속 비준을 요구하는 한국이 꿈꾸고 있는 ‘제국의 꿈’, ‘제국을 향한 욕망’과 닮아있지 않은가.


영진공 노바리


ps1. 사실 내가 남자배우였으면… 무조건 한다고 덤볐을 거다. 세상에 한국에서 말타고 총쏘며 폼잡을 수 있는 영화란 게 평생에 한 번 올까말까… 이건 완전 남자의 로망 아닌가. (나같은 여자의 로망이기도 한데, 실은, 쩝.)

ps2. 고생은 정말 많이 했겠더라. 그러고보면 또 서부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열차’, 흔한 소재가 되는 ‘열차강도 씬’도 있다…

ps3. 사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에 대한 내 판단은 저 버디님 글과 정확히 똑같다. 표절도 오마쥬도 아닌데 어디서 많이 본 그림들로 온통 짜깁기 돼 있는 듯한 이 느낌은 참… 영화를 만들고 나면 크게는 아니어도 항상 표절 운운 얘기(그것도 항상 일본영화)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 아닐까. 100년이 넘은 현대 영화란 게 따지고 보면 다 어디서 본 장면들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영화들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얼마나 자기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느냐, 그리고 한 영화 내에서 어떻게 톤의 일관성을 유지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