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위에 서다>: “정병길” 감독 온라인 특별전 1

문예창작위
2006년 3월 20일

영진공 수카라 극장에서 선보이는 2006년 첫 상영작은 정병길 감독의 <칼날 위에 서다>.

독자 제위에게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 정병길 감독은 현재 27세 청년. 영화 관람에 앞선 그에 대한 소개는 아래의 인터뷰 내용으로 대신한다. 영화판에 뛰어든 사람치고 사연 없고 눈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범상치 않은 길을 걸어온 그를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원래는 미술을 전공했다던데?
 -사실 어릴 적 꿈은 극장 간판 그리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공짜로 마음껏 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림 그리는 능력은 타고났으니(그의 형은 만화가 정병식이다) 그 점을 활용해 극장 간판 그리는 사람이 되면 밥벌이가 되니 처자식도 먹여 살리고 영화도 많이 볼 수 있고,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극장 간판 그림이 사라져 가더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직업이 거의 소멸되어 있는 게 아닌가! (웃음) 그렇다면 이제 간판 대신 필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 때 동양화를 전공했는데, 미대에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와중에 4년이나 미대에 다녀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20대 초반에 홍대 앞 놀이터를 전전하다가, 군 제대 후 서울액션스쿨에 8기로 입학, 수료했다. 멋진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칼날 위에 서다>에서 주연, 각본, 미술, 편집, 콘티, 의상, 특수효과 등을 혼자 다 해먹었다.
 -그랬다. 내가 영화에 대한 욕심이 많고 의욕이 너무 강한 나머지, 작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하고 직접 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고,(웃음) 전문 스태프를 쓸 돈도 없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 혼자 작업했다. 다른 영화 열심히 보면서 특수효과 공부도 하고…

 -그렇군;; 하지만 그런 식으로 제작비를 아낀다 해도 기본적으로 소요되는 제작비가 있을 텐데?
 -그렇다. 사실은 <칼날 위에 서다> 크랭크인 며칠 만에 갖고 있던 돈이 똑 떨어졌다. 영화는 완성해야 하는데 환장하겠더라.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스태프들과 차를 타고 가던 길에 교통사고가 났다. 덕분에 영화를 마저 찍을 수 있었다.

 -교통사고가 난 덕분에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니, 그게 무슨 나방 아이큐로 수능시험 보다 트림하는 소린가?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사랑을 나누던 불륜 커플의 차를 시속 100km로 들이받았다. 당시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데, 매고 있던 안전벨트가 살을 파고든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벨트를 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안전벨트를 반드시 매는 습관을 들이자. 내가 왜 안전벨트를 반드시 매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냐면…

 -딴소리 하지 마라.
 -아 맞다. 아무튼 피투성이가 되어 엠뷸런스로 실려가면서 영화고 뭐고 이제 다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니 보험회사 직원이 방문하는 거라. 뛸 듯이 기뻤다. 사고를 냈는데 돈을 준다니! (웃음) 스태프 세 명의 보험금을 합치니 150만원이더라. 의사가 더 입원해야 한다고 했는데 12시간 만에 퇴원해서 그 돈으로 영화 나머지 부분을 마저 찍었다. 잠시 자해공갈단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지만.(웃음)

 -<칼날 위에 서다> 이후에 찍어 후반 작업중인 <가난해서 죄송합니다>는 어떤 영화인가?
 -돈을 좇는 사람들 각자의 명분들이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그린 블랙 코미디다. 만화가인 형의 원작을 보고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찍었다. 원로 배우 장미자 선생님이 주연을 맡아 주셨는데, 처음에 모시고 싶다고 찾아갔을 때 퇴짜를 맞고, 두 번째 찾아뵈었을 때 겨우 승낙을 얻어냈다. 사실 두 번째 만나는 자리에 장미자 선생님은 확실히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나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님을 뵙기로 한 커피숍에서 생각이 바뀌셨다고 한다.

 -어떻게 설득했길래?
 -대학로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선생님과 우리 쪽 스태프 다섯 명이 마주 앉았다. 한참을 말씀드리고 있으려니 선생님이 “저기, 그런데 우리 커피라도 한 잔씩 시켜놓고 계속 말하면 안 될까?” 라고 하셨다. 우리는 그 때도 돈이 없었다. 그래서 다섯이서 음료수 두 잔만 시켰다. 세 명이 “안 마셔도 됩니다” 라고 당당하게 말했는데도 돈 없는 티가 난 모양이다. (웃음) 너무 불쌍했다고 선생님이 나중에 그러시더라. 그 날 커피 값도 내 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영화를 찍으며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돈 걱정 없이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스태프들에게 보수도 제대로 못 주는데 끼니까지 김밥으로 때우게 하고, 김밥마저 촬영시간에 쫓겨 다 못 먹은 날이 많아 미안했다. 잘 성장해서, 내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스태프들에게만큼은 제대로 돈 쥐어주고 제대로 된 밥 먹여주며 일하고 싶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시각적인 재미를 줄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또 관객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주성치 영화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실제로 주성치처럼 살고 싶다고 늘 생각한다.


필모그라피
단편 <노을로 달려갈 테야>(2000) 주연배우
단편 <태석 씨는 왜?> (2003) 감독/주연배우
단편 <칼날 위에 서다>(2005) 감독/주연배우
   부천국제영화제 본선진출, 거리미술전 초청상영
단편 <가난해서 죄송합니다>(2006) 감독 (현재 작업중)
현 중앙대학교 영화과 재학 중

수카라 극장 – <칼날 위에 서다>: “정병길” 감독 온라인 특별전 1 (38m56s)

영진공 산하 독립영화 위원회
임시위원장 도대체

<우익청년 윤성호>: “윤성호” 감독 온라인 특별전 1

문예창작위
2005년 12월 20일

2005년이 다해가고 있다.
이제까지 ‘영화진흥공화국’이 기존의 상업영화에 촛점을 맞춘게 사실이다. 왜냐면 그래도 접하기 쉽고, 수많은 영화평들과 논쟁들을 끌어오기 쉽기도 하고, 땡전과 관련이 되면, 덩달아 달아오르는 부가 효과를 가십거리 하기도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다.

허나 ‘영진공’은 상영업화 반대측에 있는 독립영화계에도 관심을 끊지 않았다. 왜냐면, 한 국가단위의 독립영화의 수준이 그 국가의 전체 영화산업 역량의 리트머스이기 때문이다. 그래 다른 영화 찌라시들과 발맞춰 올 한 해를 평가하길, 누구 맘대로? 영진공 맘대로!
2005년은 특히나 독립영화의 진전이 돋보이는 해라 단언하겠다.

<안녕, 사요나라>,<다섯은 너무 많아>,<동백꽃>,<빛나는 거짓>,<눈부신 하루>등등의 극장 개봉과 같이 지하에서 맨홀뚜껑을 열지 않고 기존의 영화제만 기웃했던 장편 독립영화들이 이제는 상영관을 잡아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층을 배가하는 한편, 2004년에 비하면 다양한 소재와 시각 등의 질적으로 검증된 단편영화들이 많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런 독립영화계에서 돋보이는 행로를 걷고 있는 이가 있으니 바로 독립영화 감독 “윤성호”이다.

평소 그의 독립영화들을 두루 섭렵하며, 그의 작품 세계에 빠삭하다 하면, 그건 개뻥이고, 그와의 우연한 술자리에서 이번 온라인 특별전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래서 윤성호감독과의 대충의 삼고초려등을 술자리에서 해결 후, 그의 작품 전체를 다 상영하기로 했다.

물론 작품들이 나온 연도대로 틀어야 함이 마땅하나, 먼저 윤감독의 포스를 충분히 맛보기 좋은 작품인 『우익청년 윤성호』을 먼저 상영해 보겠다.
진정 우익이 가져야 할 도덕을 얘기해주는 당 작품을 즐겨주길 바란다.

필모그라피

– <삼천포 가는 길> (2001년)
– <회화식 아줌마 입문> (2002년)
– <중산층 가정의 대재앙> (2003년)
– <산만한 제국> (2003년)
– <하루 10분씩 그냥 들여다보기만 해도 코펜하겐식 이별 실력이 부쩍느는 비디오> (2004년)
– <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 (2004년)
– <우익청년 윤성호> (2005년)
– <이렇게는 계속할 수 없어요> (2005년)

이번 온라인 특별전을 하는 곳은 영진공 전용관인 “수카라”극장이다. 그럼 즐감~

수카라 극장 – <우익청년 윤성호>: “윤성호” 감독 온라인 특별전 1 (6m43s)
영진공 산하 독립영화 위원회
위원장 엽기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