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꿈엔들 잊힐리야” (원제 : 미망), 15년 만에 다시 읽기


고등학교 때 읽었던 느낌하고는 천양지차다. 전처만, 머릿방아씨, 태임이, 종상이, 태남이, 여란이 등 등장인물들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것만이 내가 예전에 읽었었다는 증거가 될 뿐. 세월을 지나 읽는 그 느낌은 새로운 것을 읽는 것이나 다름 없다.

줄여서 얘기하자면, 지금 읽은 것이 예전에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좋다. 그때는 이 소설이 이렇게 좋은, 그리고 대단한 작품인지 몰랐다.

다르게 보이는 등장인물들
이해할 수 없었던 머릿방아씨의 자기방기(自己放棄), 그런 사람으로 부터 나온 신비할 정도의 놀라운 열망. 고등학교 때 읽을 때는 너무나 모순되어 보였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삼십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으니, 머릿방아씨가 자기방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自己)를 포기할 수 없어서 생활을 방기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활을 풀어놓을 대로 풀어 놓아, 그 힘으로 자기를 지키다가 결국 그 풍선효과로 또 강렬한 생존본능에 사로잡히게 되는 강력한 길항작용을 견디어 내는 삶. 가슴이 아프고 아팠다.

머릿방아씨에 대한 이해가 바뀜에 따라, 전처만의 처(妻) 홍씨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다. 홍씨에게 남아있는 인상이란, 하루 종일 엉덩이 붙이고 있지를 못해 쓸고 닦고 만들고 먹는 살림에 목숨 걸어 domestic goddess가 되고자 하는 psycho 혹은 그악스러운 시어머니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 본 홍씨는 그렇지 않다. 심성이 바르고, 차분히 자기 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일상의 부조리를 원망삼지 않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성취를 찾아나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맑고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다. 자기 앞의 부조리(며느리의 부정)를 원망삼은 단 한번의 댓가로 홍씨가 치르는 대가는 사실 가혹하다 할 만하다.


전처만의 세째아들인 이성이는 고등학교 때 읽은 경험으로 ‘천하에 약삭 빠르고 상도의에 어긋나는 야차 같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는데, 읽고보니 그렇지 않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반보 앞서 보고, 되도 않는 뚝심이나 불도저 정신같은거 없이 착실하게 자기 장사를 해 나가는 사람이다. 대단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저 차분히 시대의 큰 파도를 탈 뿐이다. (라고 평가하는 걸 보면 내가 그 동안 닳고 닳은 것인지도)


주인공 부부라 할 수 있는 전태임, 김종상에 대한 느낌도 예전과는 참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태임이가 거상(巨商), 거목(巨木)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완벽한 판단 오류였다. 고등학교 시절, 읽으면서 이런 거상(巨商)에게 사임당을 닮으라는 “태임”이라는 이름은 너무 스케일이 작은 것이 아닌가 했었는데, 집안을 꾸려나가는 배포에 있어서는 거목인지 몰라도,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당찬 상속녀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어릴 때 읽을 때는 태임이의 이미지에 가려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종상이의 그릇이 보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진보적 가족 – 콩가루 집안? 아니,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가정
읽으면서 놀랐던 건, 이 소설 면면히 흐르는 ‘가족해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문제없이 흘러가는 ‘대안 가족’의 얘기가 깔려있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가부장제에 얽매인) 가족해체를 두려워하고 개탄하는 촌스러운 작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100년전 개성을 그리는 박완서 할머니의 발상에는 혁명적인데가 있다. 세간의 잣대로 보면 콩가루 집안일지 모르나 진정 진보적이고 인간적이다. 청상이 된 며느리가 가진 아이를 거두고 손수 이름을 지어주는 전처만 – 그 핏줄에 대한 인정이, 최초의 가부장의 인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의는 차치해두자-을 비롯하여,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이종상-전태임 커플또한 녹록치 않다.

시집와서 시댁 귀신이 되지 않는 다면 스스로 부끄럽다 여기는 것이 마땅한 시대에, 남편옆에 있는 여란에게 보란 듯이 쿨하게 민적을 갈라나가고, 일본 유학 후 재혼을 하는 상철이 댁. 시집와 밥상머리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식구들이 먹고남긴 잔반을 허겁지겁 입에 주워넣던 승재네 며느리가, 남편 살해범을 자처 한 후 당당히 이혼을 요구한 뒤,’혜정이’라는 이름을 새삼스럽게 찾아 갖는 그 장면은 또 어떠한가. 그 혜정은 또 추후에 태남과 재혼하여 사실상 동해랑의 안주인이 되니, 신기하고 신묘한 가족사다. 2006년작 ‘가족의 탄생’이 생각나는 대목이니, ‘미망’이 이 얼마나 앞서간 것인가.

전태임, 김종상의 부부 관계가 모던한 점 또한 주목할만하다. 이부제(異夫弟)와 서자 삼촌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시작된 결혼생활이니, 모던하다못해 황당(?)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재산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의 사업에 관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여필종부의 관계도, 처갓집 뜯어먹고 사는 관계도 아닌, 그저 인생의 동반자 관계. 서로가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관계다. (물론 이 와중에 둘 사이의 소생인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는 전적으로 전태임의 몫이긴 하다.)

박완서는 초기작과 말년작만 읽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왕성하게 필력이 뻗치던 시절. 그 시절의 글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영진공 라이

 

“엘리자베스타운”, 집으로 돌아오라


 

“Welcome Home”
카메론 크로우 감독의 2005년 작 영화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은 이 말로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 온 걸 환영한다는 얘기인데, 그 반김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딴에는 자신들의 모든 자본과 기술력 그리고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여 전 세계로 뿌린 상품이 참 고약하게도 시장에서 거절 당해 반품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안타깝기도 할 터이다. 그리도 원대한 포부와 그림을 그려가며 떼돈도 벌고 세상에도 도움이 되겠다고 확신에 차 들이밀었던 상품이 차갑고 냉랭한 조롱 속에 몽땅 되돌려 보내졌으니.

이런 상황을 감독은 단순한 “failure(실패)”가 아닌 “말짱 꽝(fiasco)”이라 표현하였다. 겉은 번드르르한데 내용은 텅 빈 참으로 낯 뜨거운 그런 실패라 본 것이다.


여기서 잠깐, fiasco에 대해서 알아보자. 원래 fiasco는 “끼안띠(Chianti, 이탈리아의 고급와인)”을 담는 병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와인의 원산지인 Chianti에 어느 중요한 인물이 방문했었는데, 그 사람을 대접하려고 꺼내오는 fiasco마다 웬일인지 술은 한 방울도 담겨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fiasco라는 말은 “태산명동에 서일필”과 비슷한 뜻으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 주인공은 오직 이 말만 되뇐다. “난 괜찮아(I am fine).”
전혀 괜찮지 않은 걸 자기가 알고 남도 알고 세상이 다 아는 데도 그저 그 말만 되뇌는 것이다. 그런 주인공을 붙잡고 사장은 말한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 시장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이런 시장의 흐름은 자신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거라고. 둘 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게다.


그러면서 사장은 또 말한다. 사정이 이러니 환경단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수 밖에 없다고. 거기에 이런 표현이 따라붙는다.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도 있었는데 …… (We could saved the world ……)”

이게 바로 감독이 보는 미국이다. 테러를 뿌리 뽑겠다고, 세상의 모든 독재를 종식하겠다고, 그리고 소위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며 그들의 꽃다운 젊은이들에게 온갖 최신의 무기와 장비를 들려 이역만리 외국으로 등 떠밀어 내보냈지만, 아무도 진정으로 반기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따라 자국의 병력을 파견한 나라 안에서까지 미국에 대한 적대감만 높아졌을 따름이다.

이쯤 됐으면 이제 상황을 똑바로 봐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많은 노력과 기술을 투자했다 해도 소비자가 싫다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는 법인데, 그래도 만들어서 공급하는 이는 자꾸만 “이거 좋은 물건이니 저렴한 가격에 한 번 써 봐”라고 하며 거의 강매하다시피 매달린다. 그러면서 소비자만 탓하고 “왜 나만 미워하느냐”고 따지려 든다.

실패는 저지르기 보다 인정하기가 더 힘들다. 그리고 실패는 그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실패가 발생하면 깨끗이 인정하고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새로 시작하면 되는데, 왜 그런 실패를 저질렀는지 주구장창 따지고만 있거나 아니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고 허구한날 우겨대며 계속 그 쪽으로 쭉 나가기만 하면 자꾸 출구에서 멀어지기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실패를 맛보았는지 얘기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꾸해 주는 것이다.
“I don’t care(그건 상관 없어)!”

어서 실패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판단하여 실천에 옮기라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자기가 보는 위대한 미국을 그려낸다. 그에게 있어서 위대한 미국은 중동의 사막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 어느 구석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남미의 밀림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보는 위대한 미국은 바로 그 곳, 미국의 사람들 속에 그냥 있었을 따름인 것이다.

비록 300년도 안 되는 역사지만 그 기간 동안에 지금의 미국을 건설한 그들이 바로 위대한 미국이라는 걸 그냥 담담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차를 몰아 달리며 들러보는 미국 역사의 흔적이란 게 어찌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게 다 미국을 만들어 온 것들이며, 게다가 그들에겐 편견과 억압에 맞서 피 흘려 인권을 쟁취해 온 어디에 내세워도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잖은가.



그렇게 좋고 훈훈한 내 집(Home)이 거기 있는데 왜 반겨주지도 않는 바깥에서 생 고생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자는 거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들과 웃고 울고 일하고 즐기고 애태우고 보람을 느끼고 그러면서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면 되지, 왜 굳이 미국이 위대하다는 걸 바깥에다가 완력으로 과시하고 억지로라도 인정 받으려 하느냔 말이다.

그렇게 안 해도 세계 자본주의와 그 시장은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예전과 달리 미국이 외부에 행사하는 완력이 오히려 미국의 이익을 깎아내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전에 뉴올리언즈에 휘몰아친 태풍이 그랬고 요즘의 티파티(Tea Party)가 들춰 내 보여줬다시피 미국 내의 갈등과 양극화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집으로 돌아가자.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 그렇다고 아주 가는 게 아니다. 스스로의 기꺼움으로 진정 위대함을 느낄 수 있도록 그 곳에서부터 힘쓰라는 거다. 그래야 “Welcome Home”을 말하는 입김 속에 담긴 씁쓸함이 차츰차츰 자연스럽게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으로 바뀔 수 있을테니.

영진공 이규훈

“상하이 나이츠”, 허허실실 농담 속에 숨기고 있는 의외로 만만찮은 공력


『상하이 나이츠』가 『상하이 눈』과 눈에 띄게 다른 것은 일단 두 편의 장르가 다르다는 점(첫편이 액션이라면 속편은 코미디다)과 『러시 아워』 시리즈 때와 마찬가지로 “성룡”의 비중이 확연하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상하이 나이츠』는 유치하고 불쾌한 수준의 오리엔털리즘과 백인우월주의를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다. 전편보다 뛰어난 속편은 없다는 통설이 이미 여러 차례 뒤집힌 바 있지만, 『상하이 나이츠』 역시 당당히 이 반열에 올려야 할 영화다.

사실 <상하이> 시리즈는 단순히 액션 혹은 코미디로 분류하기가 힘든데, 이 시리즈가 서부영화의 틀에 많이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이 시리즈 중 『상하이 눈』은 확실히 서부영화의 장르문법을 변형한 액션이었고, 『상하이 나이츠』는 서부영화의 특성을 거의 지워버리고 공간적 배경도 과감하게 옮겨버리긴 했지만, 전편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여전히 불려나오는 특성이 있는데다 몇몇 장면은 배경이 서부가 아님에도 서부영화의 장면을 새로이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 나이츠』가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 영화가 내지르는 뻔뻔스러운 패러디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지극히 유쾌한 유머감각 때문이다. 영화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성룡”의 연기에 잘 어울리게 패러디하면서도 독특한 재미를 주는 씬 구성하며,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에 밝힐 수는 없지만 몇몇 영국 / 미국의 문화영웅의 기원을 제멋대로 설명해버린다.

우리의 두 친구가 만나게 되는 약간 꺼벙한 경사와 거리의 부랑아 소년이 영화 내내 애칭으로 혹은 퍼스트네임으로만 불리다가 마침내 풀 네임이 언급되는 영화 막판이 되면, 관객의 입장에선 순간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그 문화영웅들의 기원이 실은 작고 나이든 동양인(“샹하이 키드”)이라니. 게다가 이것이 이 영화가 자행해버린 각종 고전 걸작 씬들의 패러디와 결합해 버리면 세계 영화사가 조작돼 버린다. 헐리웃 영화의 모든 특성이 실은 “샹하이 키드”와 “뺀질이 블러퍼”가 겪은 모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말이다.

속편을 먼저 봐서인지 “오웬 윌슨”의 ‘뺀질뺀질한 블러핑의 대가’로서의 코믹한 캐릭터와 “성룡”의 ‘진중하고 현명한’ 성격이 확실하게 드러나며 대조되는 『상하이 나이츠』쪽이 내겐 더 익숙해서 『상하이 눈』은 다소 인물들이 흐리멍덩한 데다 “성룡”은 “오웬 윌슨”을 보조하는 듯한 느낌이다. ‘신기한 몸언어를 구사하는’ 구경거리 배경으로 존재한다는 느낌. 하지만 『상하이 나이츠』에서 “성룡”은 오롯이 씬 전체를 이끌고 가며 “오웬 윌슨”과 찰떡궁합을 과시한다. 액션도 훨씬 아기자기하고, 이것이 ‘걸작씬 패러디’와 만들어내는 상승효과는 더욱 큰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상하이 나이츠』의 모든 즐거운 유머는 실은 『상하이 눈』에서 이미 씨앗이 뿌려진 것들이다. 예컨대 (밝힐 수 없다고 했던 문화영웅 중 한 명을 밝히는 결과가 되겠지만) 영화 속에서 “성룡”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은 ‘천왕’인데, 중국어 발음이 낯선 미국인들은 그를 처음부터 ‘”존 웨인”‘이라고 부른다. 위기에 처한 두 남자를 번번이 멋지게 구해주는 건 “성룡”이 어쩌다 결혼하게 된 인디언 부족의 여성이다. 문제는 『상하이 눈』이 이러한 재치를 씨앗만 뿌린 채 싹도 제대로 내지 못한 반면, 『상하이 나이츠』는 싹뿐 아니라 줄기를 키우고 열매까지 맺게 했다는 점. 게다가 대거 응용까지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백인’인 “오웬 윌슨”은 능글능글한 속물 약탈꾼에 사고뭉치의 자리로 확실히 이동하고, 전편에서 거의 바보 취급을 당했던 “성룡”의 캐릭터는 더없이 현명하면서도 깊은 문화적 유산을 가진 든든한 주인공의 자리를 꿰찬다.

강인한 여성이라는 설정을 그저 주인공들을 위기에서 빼내주는 기능적인 역할(그리고 시나리오의 난점 전담 해결사의 역할)로만 한정시켰던 『상하이 눈』과 달리, 『상하이 나이츠』는 맹활약을 펼치도록 든든한 무대를 마련해 준다. 이러한 변화들에서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태생적 한계와 그러한 땅의 백인 미국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오만함에 대한 애교스러운 자조를 슬쩍 드러내면서 스스로 웃음거리로 만든다. 동양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깊고 풍부한 전통들에 대한 열린마음의 존중도 살짝. 이것들을, 정치적 공정함에 강박을 느끼는 영화들이 의례 갖게 되는 구색맞추기적 어거지나 훈계적 경직성을 거의 갖지 않은 채 자연스럽고 유쾌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상하이 나이츠』가 정말로 칭찬받아야 할 부분은, 이것이 영화에 대한 감상문이니까 가장 본래의 취지로 돌아가 보자면, 미장센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다. 아다시피 “성룡” 액션의 주안점은 “주변 소품 이용하기”와 “아슬아슬 곡예”이다. 악당을 멋지게 제압해버리는 “이소룡”과 달리 “성룡”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악당의 칼질이나 주먹을 피하며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혹사한다.

『상하이 나이츠』의 액션씬은, “성룡” 액션의 핵심을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룡” 액션의 특징이 20년대 미국 무성영화, 특히 “버스터 키튼” 영화의 특징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훌륭히 파악하고 있으며 이것을 최대한 드러내도록 구성하고 있다. 카메라는 “성룡” 액션의 장점을 최대한 드러내면서도 매끈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편집의 리듬 역시 적재적소에서 끊고 잇는 노련한 솜씨를 과시한다. 그런데 이것을, 그 무수한 고전들과 다른 유명한 영화들(심지어 <상하이> 시리즈와 비교하기 좋은 『러시 아워』 포함하여)에서 따온 씬들에 녹여내고 있다는 점이다.



『상하이 나이츠』가 인용하고 있는 영화들은 사실 imdb.com에도 30편 가량이 올라와 있는데, 영화광이 아닌 일반관객들이라도 이 영화가 <싱잉 인 더 레인(『사랑은 비를 타고』)>을 시침 뚝 떼고 패러디하는 장면 같은 걸 보다보면 그야말로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노골적이건 은근하건 이러한 인용을 영화 전체 분위기에서 튀지 않고 매끈하게, 너무나 잘 어울리게 변형해가며 수행하고 있는 이 영화는, 『리쎌 웨폰』 시리즈 이후 사라진 것 같았던 버디영화의 낡은 공식, 즉 까불이 사고뭉치와 뒷수습 전담반 커플이라는 설정이 여전히 강력한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까지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종래의 영화들의 온갖 장르와 장르문법을 뒤섞고 패러디하는 하이브리드(‘잡종’이라고 쓰면 왠지 비하의 느낌이…;;)이면서도 가장 고전적인 영화전통들을 한 편의 영화속에서 아름답고 통일성있게 되살려내는 괴상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 엔딩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 않고 웃겨주시는 섬세한 감독의 센스는, “성룡” 주연의 영화에 언제나 따라붙는 ‘NG모음 보너스’를 더욱 즐겁게 보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며 이 영화를 전체적으로 평할 때, 우리는 이 잡종 패러디 코믹 액션 영화가 실은 대단히 흥미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앞에서도 얘기했듯 그 어느 미국 감독들보다도 “성룡” 액션의 핵심을 잘 꿰뚫고 있고, 게다가 수많은 ‘다른 영화 인용’을 통해 “성룡”액션과 고전영화의 유명한 씬들을 접합함으로써, 영화 내적으로는 모든 영화적 중요한 기법과 전통이 실은 ‘상하이 키드’의 모험과 활약에서 기원하였다고 구라를 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영화 바깥으로 오면 거꾸로 “성룡”액션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어떤 영화적 전통과 기법에서 유래하였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며 분석하는 아주 훌륭한 텍스트가 된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영화로 쓴 장르분석이자 배우론이다.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의도가 ‘거짓말 한번 거하게 쳐보자’는 아주 단순한 것에 불과했을지라도, 그 결과는 그들이 의도했든 안 했든 이 영화는 또 한 편의 “성룡”액션 텍스트이자 한편의 매끈한 메타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프레데터스”, 동기부여가 덜 된 서바이벌 게임

애초에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영화였습니다만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마셰티>(2010)에 조연급 단역으로 출연한 님로드 앤탈 감독이 꽤 인상적인 코미디를 보여주는 바람에 챙겨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프레데터스>는 님로드 앤탈 감각의 유머 감각이 반영된 작품은 아니더군요.

여기서 잠시 프레데터 시리즈의 연보를 살펴볼까요.


1987년 <프레데터>,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 / 존 맥티어난 감독 /
                             짐 토마스, 존 토마스 각본

1990년 <프레데터 2>, 대니 글로버 주연 / 스티븐 홉킨스 감독 /
                               짐 토마스, 존 토마스 각본

2004년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폴 W.S. 앤더슨 감독/공동 각본

2007년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2>, 콜린 & 그렉 스트로스 감독 /
                                                   셰인 살레르노 각본

2010년 <프레데터스>, 님로드 앤탈 감독 / 알렉스 리트박, 마이클 핀치 각본

1987년의 원작과 1990년의 평범했던 속편으로 사실상 종료되었던 프레데터 캐릭터를 14년만에 다시 소환했던 작품이 바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감독 겸 제작자인 폴 W.S. 앤더슨이었습니다.

각자 다른 시리즈의 외계인 캐릭터였던 에이리언과 프레데터를 한 작품에 출연시켜 대결 구도를 가져가겠다는 농담 같은 발상을 – 벰파이어와 늑대인간들도 자주 그러고 있는데 외계인들이라고 왜 만나면 안되는 거냐능 – 놀라운 실천력으로 현실화시켰던 것이죠.

엄청난 혹평에도 불구하고 시도되었던 두 외계인 종족의 만남은 다시 3년 뒤의 속편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를 통해 연출 데뷔를 하게된 3D 특수효과 전문가 콜린 & 그렉 스트로스 형제는 최신작 <스카이라인>을 후속작으로 내놓고 있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 수 위의 캐릭터라 할 수 있는 에이리언과의 만남 덕분에 부활할 수 있었던 프레데터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일단 이 험상궂은 인간형 전투 외계인 종족을 기억하고 알아봐주는 관객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제작자로 나서 리빌딩을 시도한 작품이 <프레데터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애드리안 브로디, 토퍼 그레이스, 로렌스 피쉬번, 앨리스 브라가와 같은 스타캐스팅이 가능했을 것이고 아울러 4천5백만불의 예산도 확보할 수 있었던 거였겠지요. 내용면에서 보면 영화의 시작과 함께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영화사 Troublemaker 의 로고가 보이고 이후로 시종일관 SF답지 않게 고풍스러운 배경 음악이 사용되고 있으며 대니 트레조가 역시나 단역으로 출연해주고 있다는 점 정도가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그늘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외엔 님로드 앤탈 감독에 의해 정성스럽게 복원된 프레데터 캐릭터들과 이들의 사냥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지구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레데터들이 사냥 게임을 즐기기 위해 지구를 비롯한 각기 다른 행성에서 숙련된 사냥꾼들을 납치해오고, 이런 황당한 상황에 빠진 지구인들은 프레데터로부터 사냥 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또 누군가는 심지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는 내용입니다.

자연히 누군가는 죽게 되고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는 오히려 프레데터를 해치우고 살아남게 되는 장르의 법칙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납치되어 온 지구인들 대부분이 살인 전문가들인 와중에 직업이 의사인 에드윈(토퍼 그레이스)가 끼어있는 점이 나름대로 특색입니다. 지구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이 의사에게 있었기 때문에 함께 불려오게 된 것이라는 사실은 물론 영화 막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살인 게임’류의 액션 영화이지만 님로드 앤탈 감독의 연출 역량 만큼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