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센트(The Descent, 2005), “B 무비로 만나는 키에슬롭스키”


러닝 타임이 다소 짧게 느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잘 짜여진 웰메이드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세 가지 색 3부작 가운데 <블루>를 보면 줄리(줄리엣 비노쉬)가 교통사고로 유명 작곡가인 남편과 딸 아이를 잃고 난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뒤늦게 남편에게 임신한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등 자기 삶의 기반이라 믿었던 모든 것들을 잃게되는 상실의 고통과 몹시 더디고 힘든 극복의 과정을 탁월한 영상 감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습니다.

공포 영화 한편 봐놓고 왜 뜬금없이 키에슬롭스키 영화 얘기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디센트>의 주인공들이 동굴 탐험 중에 만나게 되는 상황은 주인공 사라(샤우나 맥도날드)의 내면적 갈등을 구체화시킨 은유라고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블루>에서의 줄리와 마찬가지로 사라도 교통사고를 통해 남편과 딸 아이를 잃었고, 절친한 친구인 주노와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사고 1년 후 친구들과의 탐험 여행에 참여하는 등 일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한편 여행에 참여한 6명의 친구들 가운데 주노는 일행들 가운데 리더의 역할을 자처하면서 여행 가이드북를 일부러 차에 놓고 옵니다. 그리고 동굴 속에 갖히는 곤경에 빠지고 나서야 “새로운 탐험 루트를 발견하여 거기에 사라의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사라에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인지 주노는 영화 후반부에서도 사라를 꼭 데리고 나가야한다며 끝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치 이라크 전쟁에 동맹국들을 끌어들인 미국 같기도 하고 그런저런 정치 지도자들의 행태 같기도 합니다. 악의는 아니었지만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 또한 과연 그러합니다.

<디센트>에서의 동굴 괴물은 실제로 그런 존재가 있을 법도 하다는 데에서 참 흥미롭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빛이 없는 동굴 안에서만 서식한 일종의 유인원으로 마치 박쥐처럼 시력이 아닌 청각으로만 대상을 인지합니다. 그리고 무슨 대단한 초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인공들을 해치기도 하지만 오히려 주인공들에 의해 잘 죽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에일리언이나 좀비류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 중반부터 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부터는 ‘미지에 의한 공포’는 상당 부분 해소되어 버리는 게 사실입니다. 주인공들이 이들과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을 보면서 상당히 실망하실 호러팬들도 있을 것 같구요.

다시 사라의 얘기로 돌아오자면, 몹시 고통스러운 심리 상태이면서도 평상시와 같이 행동하려던 사라는 일행으로부터 떨어져나와 홀로 죽음의 공포와 맞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심리적 고통의 외연화’가 이루어집니다. <지옥의 묵시록>의 오마쥬로 보이는 장면에서 주인공 사라는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여기에 주노의 악행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얻게 되면서 사라는 완전한 복수의 화신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제는 동굴 속 괴물들 보다 오히려 사라가 더 무섭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수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심약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갑자기 <라스트 모히칸>으로 돌변하시니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더군요.

<디센트>는 스타급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B급 호러 무비이긴 하지만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나 이들이 맞부닥치는 상황들, 그리고 마지막 결말 부분까지 무척이나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도 누가 먼저 죽느냐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친구고 뭐고 없는 안타까운 인간의 본성도 적절히 묘사합니다. 구태의연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고,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라의 절망적인 내면을 시각적으로 묘사해낸 마지막 장면이 오랜 잔상을 남깁니다.

영진공 신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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