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 영웅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


최근 헐리웃 영화의 한 가지 경향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실화”를 극영화로 재연하고 있는 작품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파이터>는 권투를 소재로 하는 평범한 스포츠 드라마처럼 보이지만 픽션이 아닌 실화이기 때문에 ‘최근의 경향’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영화로 작년 4월에 국내 개봉했던 <블라인드 사이드>(2009)를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작품 모두가 실화이고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으며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안에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감동의 메시지를 발굴해내려는 노력이 담겨있는데, 물론 노력의 이유는 최근에 이런 류의 이야기가 그 만큼 잘 팔리기 때문이렷다. 그리고 아마도 비교적 저렴한 예산으로도 꽤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평범한 인물들의 감동 실화’라는 건 전통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의 영역이라기 보다 – 물론 보통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화는 아니었다 – <오프라 윈프리 쇼>와 같은 TV 프로그램의 영역이란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침마당>이나 <인간시대> 같은 프로그램이고, 이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실제 인물들의 사연과 그 안의 감동 코드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최근에 왜 이런 이야기들을 더욱 부지런히 발굴하고 또 영화화까지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 정말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검증과 함께 –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따라서 <파이터>라는 작품이 그 자체로 유난한 영화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다루기에 따라서는 아침 대담 프로에 실제 인물들이 나와서 진행자와 함께 50분 정도 채워주는 정도만으로도 제 역할을 충분할 수도 있을 법한데, 그 중에 <파이터> – 니키 에클런드와 미키 워드 형제와 그 가족들 – 의 이야기가 유독 각별하게 받아들여지고야 마는 이유란 결국 이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의 힘인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을 통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그외 여러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트로피를 전부 쓸어모으며 만장일치의 지지를 이끌어낸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는 2000년작 <머시니스트>를 통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만큼의, 기대할 수 있었던 것 이상의 경지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 배우가 최근에 다시 만들어져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는 수퍼히어로물과 SF 블럭버스터에서도 주연 배우로 활약 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찬 베일과 달리 마크 월버그는 어느 작품에 나오건 똑같은 마크 월버그만 보여주다가 마는 편이지만 – 마크 월버그가 별로인 것이 아니라 크리스찬 베일이 워낙 연기의 지존이라 이런 식으로 비교가 되는 것일 뿐! – 이번 <파이터>에서는 직접 제작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나서면서 평소에 하던 그 이상의 몫을 해냈다고 생각된다.

나탈리 포트먼이 <블랙 스완>(2010)을 위해 1년 전부터 발레 훈련을 해왔다는 대목에서 가점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파이터>를 위해 무려 4년 전부터 몸 만들기와 권투 훈련을 했다는 마크 월버그의 열정에 대해서는 – 그러면서도 자신의 출연료는 한푼도 챙기지 않았다는군요. 크리스찬 베일은 전체 제작비의 1% 수준인 25만불을 받았다고 합니다 – 도대체 뭐라고 칭찬을 해줘야 좋을지 모를 지경이다. 마크 월버크도 이제 그만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라는 딱지를 떼고 뭔가 다른 전기를 마련하고 싶어하는 듯 한데 아쉽게도 그런 전환점이 그리 쉽게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키(크리스찬 베일)와 미키(마크 월버그)의 인터뷰 장면은 각본에 미리 짜여졌던 장면이 아니라 데이비드 O. 러셀 감독과 세 명이서 즉흥적으로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크리스찬 베일이 살짝 울컥하려다 마는 연기를 보여준 부분이 참 좋았다.

어찌 보면 이 장면은 영화 전체적으로 감동을 강요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해서 관객들에게 무언가 감정적인 방향성을 잡아주기 위한 부가적인 연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과하지도 않았고, 이런 정도의 개입은 극영화에서는 오히려 바람직한 편이라 생각한다.

 


영진공 신어지

When We Two Parted (1)




김씨는 경찰서 유치장에 있었다. 박기호 기자는 김씨의 이야기를 ‘정보 보고’ 했다.


 


<16일 오후 서대문구 파출소에서 김모씨(남,34) 난동 피움. 무단으로 경찰 업무용 컴퓨터를 사용하려다가 이를 제지하는 경찰을 구타함. 한 달 전 애인이 사라졌는데 주변 사람 누구도 자신의 애인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여자를 사귀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사라진 애인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이 같은 일을 저지렀다는 경찰 설명. “나는 귀신과 사귄 게 아니다”라며 소리쳤다 함. 현재 공무집행 방해로 조사 중.> 



 


하지만 데스크는 관심이 없었다. 김씨의 이야기에 사실 박기호는 첫사랑을 생각했다. 박기호는 첫사랑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이별하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굳이 기억하려 한다면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냥 바래지게 놔두고 살았다. 바래지자 첫사랑인지 뭔지도 희미해졌다. 그저 기억의 느낌만 남았다. 5월의 햇살이 함박눈처럼 쏟아지는 거리 위에 벚꽃잎 몇 장이 나뒹굴었다. 분홍빛으로 만발해 지천을 물들이던 꽃이 이젠 얼룩처럼 몇 점 보도블럭 위에서 부대꼈다. 박기호에게 남은 첫사랑의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박기호에게는 김씨의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다. 김씨는 감성이 짙은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했다.


 


여자는 외국에서 공부했어요. 영어 뿐 아니라 불어, 독어도 능통했어요. 하얀 팔뚝은 달빛 내린 뒷산마냥 눈부셨는데 그 팔에 들린 책들의 저자는 벤야민이나 들뤼즈 혹은 이정우였어요. 물론 저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죠. 술을 먹고 돌아오는 새벽 길에서는 영어로 된 시를 읊어주기도 했어요. When we two parted in silence and tears, Half broken-hearted to sever for years. 물론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것이 사랑에 관한 시라는 사실은 단박에 알 수 있었어요. 술 기운이 도는 여자의 입술은 그녀의 속살처럼 부끄러워 했고,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싯구는 인적 드문 거리에 안개 젖은 강을 펼쳤으니까요. 저는 그 강을 군 시절에 봤어요. 강 건너편은 키 큰 억새가 넘실대고 그 위로 별들이 쏟아졌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 위에 쌓였던 별들이 사방으로 튕기며 복작거렸죠. 적은 그곳에서 온다고 중대장은 항상 말했어요. 그 억새가 소리를 내며 휘청일 때마다 적들의 발자국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이라고 중대장은 항상 말했어요. 별을 뿜어대는 억새밭을 바라보며 적의 모습을 찾는 것이 저의 임무였지요. 그래서 저는 별이 쏟아지지 않는 흐린 날과 강 너머가 보이지 않는 안개 낀 날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여자의 시가 우리가 걷는 길 앞에 바로 그 강을, 안개 낀 그 강을 펼치곤 했지요. 저는 편안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싯구의 뜻을 알고, 그 안개를 걷어내면 멀리 다시 별을 뿜어대는 억새가 찬란하게 넘실댈 것 같았지요.
 




그래서 영어를 공부했어요. 아침 일곱시 반에 현장에 나가면 오야지는 공구리 판넬 좀 옮기라고 말했어요. 밤새 영어책을 들췄던 제가 판넬이 아니라 패널이라고 대답하면 오야지는 데모도 자리도 못 구해서 데마찌 하고 싶냐고 되물었어요. 기리빠리와 사보로꾸와 시하찌와 각종 세끼다를 옮기다 보면 전날 공부한 영어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흩어지곤 했지요. 저는 데마찡으로 먹고사는 하루살이 노가다였어요. 일을 끝내면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죠. 허름한 다세대 주택의 페인트 떨어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늦은 저녁을 혼자 차려 먹고, 아무렇게나 설거지를 팽개치고, TV를 켠 채로 담배를 피우다, 무거운 엉덩이를 떼 욕실에 들어, 땀에 절은 몸을 씻고, 벌써 서너 번은 썼을 법한 수건을 빨래통에 던지고, 느릿느릿 방에 들어오면 여자는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을 받으며 창가 의자에 앉아 있곤 했어요. 봉지 커피를 나눠 마시며 오늘 하루 일을 이야기하고, 어제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지난 달 일을 재차 이야기하고, 이번 달 여자의 벌이와 저의 벌이를 합쳐 생활비를 계산하다 보면 여자는 갓 따온 복숭아처럼 붉어졌지요. 여자의 솜털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입 안에서는 향기가 났어요. 목울대 너머에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는데 그때마다 여자의 눈동자 아래로 깊은 우물이 생겼어요. 그 어떤 빛도 탈출하지 못할 만큼 우물은 안으로 안으로 어둠이었고, 그 어둠의 끝은 알 수도 없지만 알아도 제가 이해하지 못할 수많은 것들로 고요했어요. 여자의 울대 안에서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와 여자의 눈동자 안으로 가라앉는 고요에 안겨 저는 매일 잠들었어요. 그때 여자는 또 시를 읊곤 했지요. A shudder comes o’er me, Why wert thou so dear? They know not I knew thee, Who knew thee too well. Long, long shall I rue thee, Too deeply to tell. 물론 저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육 개월을 들었으면 외울 만하잖아요. 







<계속>



영진공 철구


“소울 키친”, 대중적인 화법으로 풀어낸 작가적 개성


헤아려보니 굉장히 오랜만에 본 유럽영화가 됐다. 작년 11월 말에 본 <더 콘서트>(2009) 이후 거의 넉 달 만인 것 같다. 그나마 전작들을 봐왔던 파티 아킨 감독의 작품이 아니었으면 굳이 볼 생각도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전반적으로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상황이 못되는 탓도 있긴 하지만 그런 와중에 한국 영화와 영미권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일본 영화의 관람 빈도가 높고 그외 국가에서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들은 갈수록 만나기가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종종 예술 영화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유럽 영화 –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정식 개봉까지 하는 유럽계 영화들이란 대체로 완성도가 높고 수상 이력도 화려한 편이긴 하다 – 라고 해서 반드시 챙겨봐야 할 의무감을 가질 필요까지야 없는 일이겠지만 영화 편식증에 대한 습관적인 경계심을 오래 간직했던 이력 때문에 이렇게 오랜 기간 영화 감상의 지역 안배(?)가 잘 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괜한 미안함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의 지난 4개월 간의 유럽 영화 무감상 이력에 종지부를 찍어준 <소울 키친>은 <미치고 싶을 때>(2004)와 <천국의 가장자리>(2007)에 이어 세번째로 국내 개봉된 파티 아킨 감독의 작품 – 감독의 필모그래피 전체적으로는 6편째 장편 극영화 – 이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미치고 싶을 때>가 베를린에서 황금곰상을, 그리고 <천국의 가장자리>가 깐느에서 각본상을 받았었던 이력을 감안하면, 베니스에서 <소울 키친>의 수상은 파티 아킨 감독의 최근 작품들이 유럽이 자랑하는 3대 영화제를 모두 인정받는, 트리플 크라운의 완성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 유럽 내에서 파티 아킨 감독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이와이 슈운지를 모르는 일본인이 많았듯이 파티 아킨을 모르는 유럽인들이 아는 사람들 보다 훨씬 더 많을 것 같다 – 유럽 영화계에서 고른 지지와 사랑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재능이라는 점 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소울 키친>은 감독의 고향인 함부르크를 배경으로, 요리사이자 레스토랑의 사장이기도 한 지노스(아담 부스코스)의 청춘 스케치와도 같은 작품이다. 터키의 정치 현실까지 건드리고 나섰던 전작 <천국의 가장자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소울 키친>은 좀 더 가벼운 청춘 코미디 영화의 포맷을 취했으며 주인공도 터키가 아닌 그리스계 독일인으로 설정되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오마쥬인 것인지, 주인공의 이름이 지노스 카잔차키스라서 괜한 친근감을 자극하기도 한다. 지노스 역을 맡은 아담 보스도코스는 파티 아킨 감독과 같은 함부르크 출신이기도 한데, 북부 독일의 을씨년스러운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울 키친>은 공동 각본가로서 함께 이름을 올리고 있는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여느 청춘 코미디물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어떤 분위기의 영화로 연출할 것인가는 제작자와 감독이 상의해서 결정할 일이긴 하지만 주인공 지노스(아담 보스도코스)가 엄청 무거운 그리스산 식기세척기를 억지로 옮기려다가 허리병을 얻게 되면서 영화는 전반적으로 코미디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장면들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부동산 업자가 된 동창 녀석이 호시탐탐 레스토랑을 헐값에 넘겨받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와중에도 지노스는 중국으로 떠난 애인 곁으로 가고 싶어 레스토랑을 누군가에게 맡기려고 하지만 – 이 레스토랑을 어떻게 해서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민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유산과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자기 뜻대로 풀리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일은 풀려가고 또 새로운 사랑도 찾게 된다는 얘기다.

전반적으로 가벼운 톤을 유지하면서 흔히 하는 말로 ‘골 때리는’ 상황 전개를 무기로 삼고 있는 코미디이지만 파티 아킨 감독의 흡인력 좋은 연출 솜씨를 재확인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는 작품이었다.

수감 중인 지노스의 형 일리아스 역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친숙한 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가 출연하고 <미치고 싶을 때>의 비롤 위넬이 솜씨는 엄청 좋은데 성격이 괴팍한 요리사 샤인으로 출연하면서 반가움을 더해준다. 지노스가 찾은 새로운 사랑 안나 역으로 출연한 배우는 헝가리 출신의 도르카 그릴루스인데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해나가는 과정이 조금 더 나와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배우였던 것 같다.

파티 아킨 감독의 영화가 전유럽에서 크게 환영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이 만큼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젊은 유럽 출신의 감독들이 그리 많지가 않기 때문이다.

유럽의 영화 시장이 어떻게 되어가는지에 대해서까지 걱정해줄 처지는 못되지만 아무쪼록 영미권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경쟁력 있는 작품들이 좀 더 많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램 만큼은 이렇게 언급을 해두고 싶다.

파티 아킨 감독의 영화도 뭐 아주 대중적인 타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정도의 재미와 작품성을 고루 갖춘 유럽계 영화를 최근에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점은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

영진공 신어지


 

“소름”,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영화

 



『소름』은 당시(2001년)만 해도 신인감독과 신인배우(“김명민”), 그리고 조연이나 단역만 맡으며 서서히 주목을 받고는 있었으나 별 인지도는 없었던 신인에 가까운 배우(“장진영”)가 모여 만들어진 영화다.

단단한 시나리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될텐데, 다소 아쉬운 점들(“장진영”의 시체 위에서 비로소 “장진영”의 ‘숨겨진 이야기’를 플래시백으로 구겨넣거나, 편집 리듬에 있어 너무 조심스러워 정작 ‘클래이맥스’에서 강력한 파워가 부족하거나 등)에도 불구하고 차곡차곡, 치밀하게 설정을 쌓아가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와중에 서서히 비밀을 드러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출생의 비밀’이란 온갖 드라마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는 클리셰 중의 클리셰지만, 그 클리셰를 이토록 새롭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써먹을 수 있었던 힘은 설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설정을 써먹는 방식인 것이다. 화면의 소소한 미장센들과 조명들에도 매우 공들인 티가 난다. 사운드에도 매우 공을 들였다는데, 출시된지 오래된 비디오라 그런지 내가 빌린 비디오의 특히 사운드 상태가 별로 안 좋아 이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감독의 솜씨도 솜씨려니와, “김명민”과 “장진영”은 왜 그들이 ‘잘 나가는 배우’들이 될 수 었는지를 충분히 수긍하게 해주는 연기를 보여준다. “김명민”은 공식적인 첫 데뷔작임에도 범상치 않은 연기를 보여주는데, 『소름』의 연기를 보면서 나는 그가 (물론 이순신 역할로 많이 깨졌다고는 하나) 주로 도시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분노와 광기를 감추고 있는 도시 하층민의 ‘촌스러운’ 모습을 능란하게 보여주는 것에 놀랐다.

이소룡 추종자의 괴상한 비명과 순간 섬뜩한 말 한 마디, 그리고 완전히 사람 달라보이게 만드는 광기의 눈빛, 안정적인 발성과 목소리 …… “장진영”은 또래 여배우들이 고고하고 예쁘고 고상하게 보이는 것에 주력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로, 처참하고 비참하며 악밖에 남지 않은 – 피해자, 그러나 일방적인 피해자이기만 하지 않은 – 도시 하층민 여성을 혼신을 다해 연기한다. (그럼에도, 이건 배우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두 배우 몸이 너무 좋아서 무얼 입어도 세련되고 멋지더라. 도저히 도시 ‘하층민’ 같지 않은 옷태가 좀 거슬렸다.)

귀신이 상정되지만 귀신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 영화, 그럼에도 비주얼과 사운드, 그리고 이야기만으로 오싹한 소름을 경험하게 하는 새로운 호러영화. 그리고 이 속에 담은, 분노와 절규와 광기와 악으로 번득이는 도시 하층민 남녀의 사랑이 담긴 비극적인 러브스토리. 분명 『소름』은 새로운 가능성을 담은 새로운 한국영화였다. 그리고 그 흐름을 잇는 후속 영향작들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