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이트 플랜”, 여주인공은 지형지물에 익숙해야 한다.

  



이 영화는 마치 “조디 포스터”의 오랜 팬이 ‘마침내’ 영화판에 뛰어들고 ‘뜻하지 않게’ 초짜가 큰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주연으로 “조디 포스터”를 기용하게 된 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볼을 스스로 꼬집으며 기뻐 날뛰는 마음으로 찍은 팬픽 같다.


철학도 출신으로 무려 컬럼비아 대학과 AFI 같은 영화 명문가에서 영화를 배운 사람이 그토록 인물 클로즈업으로만 일관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거이지 않을까. 그 맘 이해못할 바 아니기에, 그리고 정말 아름답게 나이먹은 “조디 포스터” 모습을 실컷 보았기에 대강 수긍하고 만다.

영화의 전반부는 감쪽같이 사람 하나 바보되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악당과의 대결. 관객들에게 좀더 혼란을 주었으면 했지만, 이 영화의 감독은 “조디 포스터”라는 배우가 주는 강인한 이미지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던 것같다. 개인적으로 『패닉 룸』에서 “조디 포스터”가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한 건 그 배우가 주는 믿음직한 강인함의 이미지 때문에 영화 내내 긴장도가 떨어졌던 탓이다. (뭔 일이 벌어지든 어쨌건 그녀는 악당을 물리치고 딸도 구할 것이니까. 원래 캐스팅대로 “니콜 키드먼”이 연기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폐쇄공간에서 점차 히스테릭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여주인공 캐릭터가 훨씬 더 잘 살았을 거라 생각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서투른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안전한 길을 택한다. 영화 내내 보는 사람들은 “조디 포스터”가 정신 착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은 채 도대체 범인이 누구고 무슨 짓을 했길래 저토록 완벽햐게 사람을 바보를 만들고 있나, 궁금하게 된다. 마침내 범인이 밝혀지고 난 뒤 “조디 포스터”와 악당의 대결 시간은 의외로 짧다. 악당은 맥없이 “조디 포스터”에게 당하고 만다. 
 



 


 


“나이트 플라이트”와 “플라이트 플랜”은 영화 러닝타임의 상당부분이 비행기 안에서 흘러간다는 점 외에도, 악당 캐릭터가 다소 약하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이는 시나리오상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재의 여성의 지위 향상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듯싶다.


이제 우리는 여주인공에게도 – 완력은 약할지 모르나 – 지혜와 재치로 위기를 모면하고 나아가 다른 이를 구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자립적 주인공을 기대한다. 이런 여주인공을 설정하려면 당연히 악당은 완력이 아니라 머리로 범행을 벌이는 사람이어야 하고, 총을 함부로 들이대서도 안 된다.


하긴, 함부로 완력을 들이대는 악당들이 넘쳐나는 시대란 아직 덜 문명화된 시대이다. 돈 때문에 범행을 계획해도 사람을 죽이는 건 별로 원하지 않은 악당의 일반화란, 사회 분위기 전체가 점차 소.위. 문명화되는 대신 아무나 범죄자가 될 수 있는 – 그래서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매력적이고 자상한 남자일수록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는 – 현상을 반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후 스릴러 장르 영화의 숙제란, 이러한 범인을 상대로 어떻게 다른 종류의 긴박감을 만들어내고 그걸 관객들에게 어떻게 설득시키며 새로운 장르 컨벤션을 만들어낼 것인가가 될 듯.


이에 대한 해법 중 두 영화에서 제시해주는 하나는 이것이다.


스릴러 영화의 여주인공들은 앞으로 주변의 자잘한 소품 응용 기술과 재능을 더욱 길러야 할 것! (소화기 사용 예와 “나이트 플라이트”의 집안 가재도구의 다양한 이용 등).


그 두 경우의 공통점을 도출해 보면, 본격적인 대결은 여주인공이 매우 잘 알고있는 공간 내에서 일어나야 한다.


영진공 노바리


 


 


 


 


 


 


 


 


 


 


 


 


 


 


 



 

“용서받지 못한 자”, 서부극판 수퍼 영웅 진지 버전





클린트 이스트우드, 참 대단한 양반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꾸준히 영화에 몸 담은 그는 언제나 일정수준의 완성도를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남들은 다 은퇴를 생각할 시점인 63세에 첫 아카데미를, 그리고 남들은 요양원을 알아 볼 나이인 76세에 두 번째로 아카데미를 쓸어갔다.

근데 그에 대한 찬사들이 조금은 이상할 때도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모두들 ‘작품’ 으로 인정해마지 않던 그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1992)를 봤을 때부터 였다. 수정주의 서부극이네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이네 등등으로 불리던 이 영화는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마블코믹스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줄거리는 다들 아실 거다. 술도 팔고 몸도 파는 윤락업소에 카우보이 몇이 향락을 즐기러 왔다가 자신의 작은 물건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한 윤락여성에게 분노를 폭발시켜 그만 그 여성의 생활밑천이자 자아개념의 상징이랄 수 있는 얼굴을 망가트리고 마는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뭐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한 보안관의 조치로 카우보이들은 그냥 풀려나고, 이에 분노한 피해 윤락여성의 동료들이 돈을 모아서 킬러를 고용하기에 이르고. 드디어 은퇴한 왕년의 킬러 이스트우드 아재가 등장한다.

근데 아무리 봐도 빌빌거리는 이 아재는 전혀 킬러 같지가 않다. 소심하기 그지없는 데다 동작은 굼뜨고 총도 제대로 못쏜다. 여차저차 예전 동료 “모건 프리먼”(그러고 보니 이것도 묘한 인연이다. 이 둘이 같이 등장하면 아카데미를 먹는 건가?)과 킬러지망생 한명과 팀을 이루어 카우보이 마을에 잠입하는데, 여전히 빌빌대다 보안관에게 뚜드려 맞고 병을 얻어 드러눕는 등 한심한 꼴은 골고루 보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카우보이 둘을 죽이는데는 성공한다만, 그때까지도 이스트우드 아재는 총도 제대로 못 쏘고 빌빌거린다. 그런데 그만 귀환 길에 동료 “모건 프리먼”이 보안관에게 잡혀 죽으면서 갑자기 대반전이 일어난다 ……

동료의 죽음에 열받은 이스트우드 아저씨가 그동안 입에 대지 않던 위스키 병나발을 불어 제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마카로니 웨스턴 시절의 이스트우드로 변신해서 술집에 쳐들어가 보안관일당을 싹쓸이 해버리고 만다.





그가 예전에 킬러로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웅얼거렸던 것은 진실이었다. 그는 술마시고 필름이 끊겨야 진정한 킬러로 변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는 위스키만 병나발 불면 천하무적으로 변신하는 수퍼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게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내 보기엔 방사능 대신에 위스키가 그 역할을 하는 서부극판 마블 코믹스 영웅이야기거나, 좀더 잘 봐줘서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처럼 수퍼영웅 만화의 진지한 영화 버전인데?

그의 영화에서 기본 스토리만 떼어놓고 보면 다들 이런 식이다. 아주 단순한 신파이거나, 만화이거나 … 그의 이야기틀은 “더티해리”와 “황야의 무법자”같은 만화와 “건틀렛” 같은 신파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줄거리만 보자면 정말 전형적인 신파극이 아니던가 ……

문제는 그 이야기에 독특한 분위기를 입히는 그만의 관록과 아우라이다. 그 아우라는 조금만 도를 넘어 섰다간 유치한 똥폼이 되었을 것이고, 조금만 부족했다간 황당하거나 뻔한 스토리의 골격을 드러내고 말았을텐데, 바로 그 중간지점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 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관록과 아우라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며, 적절히 사용되었을 때 그것이 발휘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똥폼이 정말 잘 숙성되면 이렇게 대단한 아우라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고 말이다.

여튼 그처럼 늙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



영진공 짱가

“화차”, 가장 무서운 것은 사는 일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

여섯 일곱살 무렵. 빛과 어두움에 대한 개념이 생기고 깜깜한 것이 무서워지던 때였다.깜깜한게 뭐가 무섭냐는 엄마의 말에 “귀신이 나올까봐 무섭다.”고 얘기했더니, 엄마가 “귀신이 뭐가 무섭니. 하나도 안 무섭지.”라는 엄마의 말. “엄마. 엄만 그럼 뭐가 무서워?”라고 묻자 엄마가 “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라고 말했다. 내가 사람이 뭐가 무섭냐고 얘기했고, 엄마는 ‘글쎄 그럴 때가 온단다. 귀신보다 사람이 무서운 때가’라고 대답했다. 당시의 나는 귀신이 너무 무서울 때라 얼른 그런 날이 왔으면 했다.

그리고 또 초등학생 어느 날인가였다. 골목 저 건너편집에 불이 났다. 까맣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긴채 집은 잿더미가 되었고, 다행히 그 집 식구들은 모두 무사히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한동안 화재 목격의 충격은 지속되었다. “엄마 불 날까봐 무서워.” 엄마가 “불은 잘 안나. 불이 무섭긴 하지만 조심하면 그렇게 무섭지 않다.” 나는 또 예전의 그날 처럼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럼 뭐가 무서워?” 엄마는 조용히 대답했다. “엄마는 돈이 무섭다.”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제는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고, 화재보다 돈이 무섭다. 가끔 격심한 공포에 시달릴 때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는 소위 멘붕(멘탈붕괴)상태일 때. 그때는 사람보다 돈보다 내가 무섭다.

‘화차’는 그 모든 것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영화였다.

진짜 공포는 고어가 아니라 바로 삶

영화는 굉장히 잔인한 사건을 내용으로 하고있지만, 고어적인 묘사는 하지않는다. ‘추격자’같이 정을 박고, 자르고, 매달고, 파묻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펜션에서 선영(김민희) 혼자 피칠갑한채 오열하는 것이 ‘피’의 전부이다. 선영이 사창가에 팔려갔다는 것이 암시되지만, 사창가에서 학대당하는 장면이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종일관 으스스하고 공포스러운데,그 공포는 시각적인 촉각적인 공포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무서운 ‘생에 대한 공포’이다. 문호(이선균)의 감정은 처음에는 약혼녀가 납치되었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시작했다가, 그녀의 이름이 강선영이 아니라는 것, 모든 경력이 허위라는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옮겨간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문호와 함께 선영이 과거 아버지의 파산으로 어릴 때 부터 빚에 쫒겨다니다가 어린나이에 결혼과 이혼을 경험하고, 사창가에 팔려가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성매매행위를 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를 출산하고, 그 아이를 잃기까지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가슴아픔과 연민을 넘어 또 다른 차원의 공포에 이른다.

그 공포에 대한 뿌리는 나도 선영이, 경선이 될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이다. 카드를 평소와 같이 쓰다가, 어느날 실직이나 불경기로 수입이 달라진다면 카드연체가 된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는 빚과 신용불량으로 취업할 수 없는 악순환의 도가니.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빠져들 수 있는 그 무서운 수렁. 거기에 상호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연대가 없는 이 사회에서 홀로 남아있다는 공포.

김애란의 소설 ‘노크하지 않는 방’에 사는 이들 모두의 공포가 더해지면 산다는 것 자체가 오싹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발견하는 희망이랄것 없는 희망

종근(조성하)이 댓가없는 사건에 그렇게 집착하고 진실을 풀어내려고 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종근은 실직 중이고,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제수씨가 불쌍하지도 않냐”라고 말한다. 아내가 가게를 꾸리고, 종근과 아이는 가게 곁방에서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조그만 가게지만 그 매출이 줄어든다면 당장에 생계형 빚을 지게 될거고, 종근에게 일정한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생활은 더 기구해 질 수 있을 것이다.

한때 형사였던 종근은 옷을 벗으면서 ‘여기가 내 인생 바닥’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선영을/경선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에서 ‘거기가 바닥이 아님’을 확인해 나가기에 멈출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더 나빠질 것이 없는 절망의 무기력 속에서, 더 무기력해지면 더더욱 나빠질 여지는 얼마든지 많음을 확인하고, 그래서 더 나빠지는 것을 막기위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창고지기 일이라도 시작할 동력을 얻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대의 희망이라니 그 자체가 또 공포스러운 일이고 ……

그러고보니 매달 밀려오는 빚을 다달이 막아내기 위하여(청산이 아니라) 분연히 일어나 일터로 향할 때이다.


영진공 라이


 

“매치 포인트”, 우디 앨런의 직설화법





나 어릴 적에는 대중문화를 즐기는 것 그 자체가 뭔가 부의 상징처럼 보였을 정도였는데, 그건 우리집이 흔히 말하듯 밥 걱정을 겨우 면할 정도로 가난했던지라 그 흔한 라디오 한 대도 없었고,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줏어와서 고친) 작고 볼품없던 단 한 대의 TV 채널권은 언제나 할머니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음악과 영화는 나보단 좀더 살 만한 집 애들이 가진 것이었다. 당연히 더욱 고립되고 소외되고. 어머니가 교육에 한이 맺혀서 아들이 아닌 딸자식이라도 공부 잘 하는 넘은 대학 보낸다는 굳은 결심이 없었다면, 그에 걸맞게 어릴 적부터 질나쁜 버전이나마 책을 잔뜩 들여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난 너무나 일찌감치부터, 부자는 아니지만 라디오 한 대는 갖고 있었을 법한, 혹은 문화적인 세례를 받은 오빠나 언니를 두어 덤으로 그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아이들마저도 나와 다른 처지의 아이들로 두고 경계했고, 그 대가를 나이를 들고나서 치르기 시작했다.

There is no luck.

도스토예프스키 지침서를 옆에 두어가며 [죄와 벌]을 읽는 크리스의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다.

영국에서야 락과 영화는 서민문화를, 클래식과 오페라와 문학이 고급문화를 상징할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선 락과 영화, 특히 예술영화가 바로 지식인 문화의 표상이 아니던가.

딱 대학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마침 당시 발간됐던 ‘키노’를 옆에 두고 영화를 보았고, 이를 매개로 만난 인간들이 걸작이라 혹은 천재라 떠들어대는 락앨범과 락밴드의 이름을 몰래 잘 기억해 두었다가 테이프로 하나씩 사 모으며 음악을 들었다.

21세기에 영화가 이토록이나 히트를 치는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를 줄은 당시엔 몰랐지만. 이런 까닭에, 게다가 이제는 여자가 아닌 남자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나는 크리스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갔고, 심지어 계급상승을 욕망하며 윤리적으로 타락해가는 그 숱한 영화와 드라마의 그 흔한 주인공들처럼 크리스가 멍청하고 얕은 놈이 결코 아닌 것에 안도했다. 심지어는 내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면서도, 그의 범죄가 결코 들키지 않기를 바랐을 정도였다.

영화의 설정과 줄거리는 우리가 너무나 식상하게 보고 보고 또 보아온 것이다. 하지만 깊이가 다르다. 사람들이 흔하게 예상하는 서투른 윤리적 훈계와 설교도 집어넣지 않는다. 너무나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아프다. 기본적으로 영화를 아주 잘 만드는 사람의 그 능수능란하고 대단한 손길은 어떻고? 당연하다, 감독이 “우디 앨런”이니까. 그리고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이전의 “우디 앨런”이라면 엄청난 블랙유머를 가진 코미디로 풀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면서 이 할배가 미쳤나, 노망이 들었나 싶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 할배가 이렇게 굳은 얼굴로 작정하고서 눈앞에 시퍼런 칼을 들이미는 영화를 보고 들은 적이 없기에. 도대체 우디 할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게다가 이 할배는 원래 러브러브 뉴욕~파가 아니었던가. “스칼렛 요한슨”을 빼고 런던 배경에 영국배우들로 꽉꽉 들어찬, 무시무시하고 염세적이고 ‘직설법’을 구사하는 이 영화가 정말 “우디 할배”가 만든 영화라고?


“매치 포인트”의, 이른바 사람들이 ‘반전’이라 부르는 그 마무리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래, 나는 그걸 바랐다. 하지만 그가 그녀들에게 그런 대사를 할 줄 몰랐고, 정말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 이게 자본주의였지. 크리스는 ‘운’이라 말하지만, 그가 그토록 입에 달던 ‘운’이라는 것이 맨 마지막 장면에서는 크리스가 아닌 가족들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그거다. 운이라는 건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내건 은총의 선택이다. 개인의 노력? 성실? 능력? 좋아하는 걸 끝까지 즐기며 하는 것? 웃기는 소리. 자본주의의 간택, 애초의 지배자들의 간택이다.

그것을 지배자들 스스로 ‘운’이라고 부른다. 니가 운이 좋은 거야, 왜냐하면 우린 널 선택했으니까. 넌 우리 편이 되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까, 그리고 결코 네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 대사가 가족들의 입에서 나오는 건, 핏줄로 이어지고 나서야 비로소다. 그제서야 그는 정말로 그들 사회에 포섭된 것이다. 그가 무슨 짓을 했든 … 안 들키면 되는 거다.



수많은 출세의 욕망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패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출신적인 한계 – 우리가 ‘일말의 양심’이라 부르는 한 가닥의 윤리, 혹은 원래 자리로의 회귀 본능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본주의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가난하지만 자기 고집을 내세우면, 그리고 행복을 찾으려 들다간, 그리고선 감히 지배층과 엮이려 들었다간, 노라 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말씀이다.


영진공 노바리

 


 


 


 


 


 


 



 


 


 

“슈퍼맨 리턴즈”, 세상이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







“슈퍼맨 리턴즈”(Superman Returns, 2006)



이 영화에서 로이스 레인이 “세상은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칼럼을 쓰는데, 그녀의 기사를 제가 대신 써봤습니다.

이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로이스레인은 ‘세상에 슈퍼맨은 필요없다’ 는 기사로 퓰리쳐상을 타는 것으로 나온다. 그녀는 틀렸다. 세상은 단순히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사실 슈퍼맨은 문제 덩어리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든 영화든 <슈퍼맨>의 세계는 너무나도 순진하고 착하다.

이 세상에 슈퍼맨 같은 존재가 있을 때 벌어질 일은 이전에 재기컴치는 슈퍼히어로물 『인크레더블』이 이미 쫙 리뷰한 바 있다. 세상에는 매순간 사건사고가 벌어진다. 매초마다 범죄에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 슈퍼맨이 그들을 다 구할 수 있겠나. 당연히 선택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부터 문제다. 누구는 구하고 누구는 무시하느냐. 이건 정치와 경제와 철학이 얽힌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싸움이 붙으면 결코 끝장이 안나듯, 슈퍼맨의 선택은 결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만약 그가 로이스 레인하고 인터뷰(?)하며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목격된다면, 누가 죽어갈 때 슈퍼맨은 한가하게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영화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박물관이 털렸어요. 슈퍼맨이 이 창녀와 노는 동안 말이죠!” 로이스 레인의 대사다)

사실 슈퍼맨은 MMOG에서 운영자와 거의 비슷한 존재다. 운영자가 어디든 순간이동 해서 중재하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운영자가 투명인간도 되고 엄청난 파워를 발휘해 게임세계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운영자들은 게임이용자들을 위해 일을 하는데, 역시 슈퍼맨도 그렇다. 하지만 MMOG 세계에서 게이머들에게 추앙받는 운영자는 별로 많지 않다. 게이머들에게 ‘영자’ 라고 불리며 하인취급을 받거나, 심지어는 공공의 적 취급을 받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들의 잘못 때문일까? 물론 어떤 운영자는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다. 게임 세계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특정한 팀의 편을 들거나, 심지어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운영자가 욕을 먹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에게 초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기대를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슈퍼맨이 존재할 때 생기는 가장 심각한 큰 문제는 세상의 규칙이 이 슈퍼맨 때문에 바뀐다는 것이다. 그 어떤 사고도 슈퍼맨은 막을 수 있다면,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그 어떤 심각한 범죄도 슈퍼맨이 막을 수 있다면 치안에 관한 시스템이 바뀐다. 그러다보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는데 제대로 수습이 안 되면 책임이 슈퍼맨에게 돌아간다. 원래 이 세상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슈퍼맨 때문이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데는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의 문제의 원인도 따져보면 슈퍼맨 때문이 아니던가. 그가 없었더라면 문제의 ‘슈퍼 수정’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초반의 재난도 클라이맥스의 재난도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안티 슈퍼맨 패거리가 등장하고, 인터넷은 슈퍼맨빠와 슈퍼맨까 들의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번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기독교 구세주를 인용 한다. 슈퍼맨은 예수처럼 고난을 당하다가 옆구리를 찔리고, 지구의 문제거리를 날려버리기 위해 치명적인 크립토나이트에 매달려 죽는다. 마치 인류의 죄를 대신 짋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당연히 그 역시 예수처럼 부활하되 부활의 흔적은 역시 예수처럼 그를 덮었던 침대시트가 치워진 것 뿐이다. 게다가 부활 후 그는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인에게 제일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다빈치코드』의 인용인가?)

그러나 감독은 신약의 구세주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인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를 죽인 것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그가 구원하려던 민중이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구세주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구세주가 등장하면 결국에는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슈퍼맨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슈퍼맨은 이 세상의 적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