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죄의식과 부채의식 그리고 상실과 두려움의 4중주

광포하고 매력적인 치정극으로 홍보되는 이 영화.
치정극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 인생이란게 … 전체가 욕망과 두려움이 뒤얽힌 한편의 치정극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련한 두 남녀의 몸부림이 너무 안쓰럽고, 두 사람의 노력에 비해 삶이 너무 아이러니해서 보기에 많이 아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는 시작부터 죄의식을 자극하며 시작한다.
8년 전 수배 중이던 중식은 짝사랑하던 선배의 집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 선배의 남편도 함께 운동하던 선배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그 상황만 하더라도 중식의 마음엔 이미 부채의식과 죄의식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선배는 구속되었는데 자기는 피신을 해 가며 구속되지 않았다는 부채의식. 그리고 선배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그 아내인 여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죄의식.

그런데 영화는 그 죄의식에 기름을 퍼붓는다. 그저 사랑하는 선배를 한번 안아보려는 인간적인 욕망은, 한 순간 방치된 아이에게 화상을 입히게 되고 중식에게는 그 화상만큼의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남긴다.

미친듯이 갚으려고 해서, 자꾸만 빚지는 남자 중식

그날 이후로, 중식은 그 죄의식을 감당하기 위해 자꾸만 부채를 갚으려 하고,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 버거운 짐을 갚는데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마 은수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상환자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성욕으로 인해 아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트라우마 때문에 은수와의 부부관계도 원만치 아니하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어느정도 죄의식을 취기로 덮은 후에 다시 아내를 찾았을 때 은수의 등에 확연하던 화상자국. 그 화상에 미친듯이 매달리며 외치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자신의 부채를 갚듯이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결국 ‘언니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어’라는 고백으로 끝나고, 속죄를 하려는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런 그녀를 가스 폭발로 인해 잃게 됨으로써 중식은 더 심한 죄책감을 집어 안게 된다.

철거대책위원회의 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른 때, 화염병 사용을 망설이는 철거민들에게 중식은 자신이 화염병 사용에 관한 혐의는 모두 뒤집어 쓸테니 쓰자고 말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보험사기혐의로 연행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려던 중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빚지게 됨으로써 죄의 부채를 늘려 나가기만 한다.

영화 말미 쯤에 ‘이런 일들(운동) 왜 해요. 무슨 의미에요’라고 하는 말에 중식은 ‘자꾸만 할일이 생긴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자꾸만 빚이 생기고, 자꾸만 속죄할 일이 생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한가지 죄의식이 지배할때 그것을 갚지 않으려 했다면 점점 더 부채가 불어나지는 않았을텐데, 죄를 짓고 갚으며 중식은 시지프스처럼 계속해서 그 삶을 살아간다.

잃고 싶지 않아 떠나기 때문에, 자꾸만 잃는 여자 은모

중식을 대표하는 말이 ‘속죄’라면 은모를 대표하는 말은 ‘상실’이다. 은모의 삶은 잃고, 또 잃고, 잃지 않으려고 떠나는 것으로 요약된다.

첫 등장부터 은모는 부모를 상실한 상태이며, 집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있다. 가진 것, 기댈 것이라고는 언니 은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식의 등장으로 은모는 언니 은수를 상실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두렵지만 결국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중식은 형부가 된다.

언니 은수가 중식과의 행복한 관계를 갈구하면 할 수록 은모의 두려움이 커져 나가는 가운데, 부부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언니 은수가 중식과 원만한 밤(?)을 보낸 후 은모를 제외한 둘만의 아침상을 차리는 순간 그 두려움은 극대화가 되고 은모는 또 다시 잃는 것이 두려워 떠난다.

가족사진에서 형부의 얼굴을 오려내고 친구와 며칠 밤 집을 나갔다 온 그 때, 은모는 자신이 두려워했던것 보다 훨씬 더 무섭게. 언니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잃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그래도 형부한테 맘 붙이고 잘 살고 있던 은모에게 또 다시 상실의 두려움이 찾아온다. 바로 자신이 중학생이고 형부가 공부방 교사이던 시절 수업시간에 전해들었던 형부의 첫사랑의 등장. 든든한 보호자였던 형부가, 아기 사진을 들고 온 어떤 낯선 여자 앞에서 엎드려 속절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고3이고, 바로 며칠 사이에 어른이라는 ‘선고’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형부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다시 혼자가 되게 될까봐 은모는 떠난다. 그리고 그 떠남이 결국 중식을 잃게 되는 전조가 된다.



속죄할 권리도, 떠날 권리도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가

자신의 죄의 댓가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발버둥쳐도,
잃지 않기 위해 자기가 먼저 떠나도,
자꾸만 더 깊은 늪으로 빨려들어가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삶을 보면 삶은 허무를 넘어 덫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과 똑같은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은모에게 지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그 진실을 부여잡고 지키려고 하는 중식.

대체 그 한가닥 진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은모를 지켜줄 수 있으랴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 들어앉는 중식과 나이트클럽/용역깡패 사장의 차창을 스쳐가는 은모.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 그 진실하나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풀잎처럼 얇기만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영화 참 … 독하다.’

어쩌면,
중식은 그토록 처절하게 속죄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죄의 짐을 조금씩 덜기는 커녕 물에 젖어가는 목화솜을 진 당나귀처럼 점점 그 짐이 더 무거워지기만 한다.

은모는 훌훌 털고 떠나려고 하는데도 삶이 가진 잔인한 힘은 은모를 ‘상실’과 대면하도록 자꾸만 끌어다 꿇어 앉힌다.

정확히 옮길 순 없지만 중식이 영화 막바지에 교도소 면회실에 앉아서 했던 대사가 마음에 자꾸 걸린다.
‘내가 교만했던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미욱한 놈인지’ 하는 말이 들어가 있던 그 대사.

그래,
사람은 다 미욱하지.
그렇다고 몸부림 치는 것 조차 ‘교만’인 것인지.
어쩌라고 … 대체 사람보고 어쩌라고.

영화 참, 독하다.

영진공 라이

 

“브로큰 임브레이스”, 비극적 멜로와 영화 만들기

<귀향>(2006) 이후 3년만에 찾아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입니다. 페넬로페 크루즈가 다시 한번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 역을 맡고 있는데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작품치고는(?) 매우 통속적인 줄거리의 영화이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서 있어서는 역시나 감독 특유의 색깔을 재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대기업 총수의 정부가 영화배우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감독과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질투심에 가득찬 총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합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런 단순한 이야기를 15년 전의 과거사로 설정해놓고 현재 시점으로부터 조금씩 캐내어 관객들 앞에 펼쳐보이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를 통해 고전적이라 할 만큼 뻔한 내용의 치정극이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과거 시점의 아픔으로서 전달되게끔 하는 것이지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에 관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레나(페넬로페 크루즈)와 마테오(루이스 호마르)가 만나고 사랑한 것은 다름아닌 영화를 매개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 사랑은 질투심에 눈이 먼 자본가 어네스토 마르텔(호세 루이스 고메즈)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지요.

레나와 함께 시력까지 잃어버린 마테오는 두 사람이 함께 묵었던 도피처에서의 이름, 해리 케인이라는 이름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마침내 마르텔의 죽음을 신문 기사로 접하고 과거의 사랑을 복원하기 시작합니다. 마르텔의 손에 의해 최악의 작품으로 편집되어 버린 영화 속 영화 “여인과 가방”이 마테오와 레나를 만나게 해준 작품이었던 동시에 두 사람의 사랑이 빚어낸 결실이었다고 본다면 이 영화를 복원하는 과정은 곧 마테오에게 있어 레나와의 사랑을 불멸의 것으로 남기기 위한 마지막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의 플롯에서 흥미로운 부분들 가운데 하나는 메이킹 필름을 찍는다며 마테오와 레나의 뒤를 쫓아다니던 마르텔의 게이 아들이 결과적으로는 맹인 작가 해리 케인으로 살고 있던 마테오가 레나에 대한 사랑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메이킹 필름의 카메라를 피해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은 그 카메라를 통해 레나가 마르텔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먼 훗날 마테오에게는 레나와의 마지막 순간을 추억하는 결정적인 매개체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조악한 디지털 화면 속에 담긴 마테오와 레나의 마지막 입맞춤 장면을 통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애절하게 표현되고, 그 뒤를 이어 레나가 연기했던 화려한 색감의 복원판 “여인과 가방”이 이어갑니다. 사랑의 기쁨도 슬픔도, 사랑에 대한 추억까지도 모두 영화와 함께 이루어지는 세계가 <브로큰 임브레이스>에 담겨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샤이닝”, 내 속의 또 다른 나

공부하면서 읽은 발달심리학 책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부분의 서두에 인터뷰 기록이 있었는데, 이게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은 “너는 누구니?” 라는 질문에 대해서 4살짜리와 8살짜리, 그리고 13살짜리가 한 대답을 녹취한 글이었다.

4살짜리는 아주 천진난만하다. 내 이름은 아무개이고, 나는 오렌지색 강아지와 아빠 엄마와 누나 둘이랑 같이 살고, 나는 힘도 세고 알파벳도 하고 숫자셈도 할 줄 안다고 자신 있게 자랑한다. 물론 그 아이는 알파벳도 제대로 못하고 숫자셈도 잘 못한다만, 상관없다. 이 나이때는 세상의 중심은 자기자신이니까.

8살짜리는 4살짜리와 약간 다르다. 남이 어떻게 보던 상관없는 나의 모습을 신나게 떠들던 4살짜리와는 달리 이 8살짜리 아이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는 “나는 아주 인기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인기는 내 능력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아무리 잘나도 인기를 얻기는커녕 왕따가 될 수도 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고, 혼자서는 인기인이 될 수 없다. 남들이 그렇게 봐줘야 하는 거다.

즉, 인기는 내가 보는 나(철학자들은 이것을 주관적 자아라고 말한다)가 아니라 남들이 보는 나(이것은 객관적인 자아이다)의 문제이다. 남이 보는 나를 의식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왜 남들은 내 언니를 더 예쁘다고 하는 걸까 …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산수시험 성적이 나보다 좋은 애가 있을까 … 이 흔들림이 자아를 성장시킨다.

13살짜리는 더 달라진다. 그 아이의 인터뷰 첫 마디는 “나도 내가 어떤 애인지 잘 모르겠어요” 로 시작한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스스로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얻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인간의 자아는 간단명료하지 않다. 내 속에는 희망과 절망, 선의와 악의, 정직과 위선이 뒤섞여 존재한다. 천사와 악마는 모두 내 속에 존재한다.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by ~freys on deviantART

다중성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어쩌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실제로 정확히 다중성격장애로 진단된 사람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도 이 장애가 진짜 있는 건지 아니면 영악한 범죄자들의 교묘한 속임수일 뿐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논의가 분분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 증상에 대해서 대단한 호기심을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내 속에 존재하는 다른 나”를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듯, 천길 물 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내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숨어있다면, 이거 상당히 무서운 얘기 아닐까?

『수퍼맨』 같은 만화 속 영웅들의 대오각성도 결국 자기 속에 숨어있던 영웅스러움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내가 잘 아는데 결코 영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속에 숨겨진 미지의 존재는 영웅의 반대쪽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만약 자기 속에 숨겨진 게 영웅이 아니라 골룸 같은 비루함이나 짐승 같은 잔인함이라면? 내 마음속의 심연에 그런 괴물이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다면? 아마 그 어떤 공포도 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거다.
 
다른 괴물로부터는 도망칠 수 있다. 그 괴물과 맞서 싸워서 운이 좋다면 제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나 자신이라면 나는 도망칠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다. 내가 존재하는 한 괴물도 존재할 것이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교사로 일도 하고 소설도 쓰는 한 남자가 한겨울 콜로라도산 속의 빈 호텔에 들어선다. 그는 널럴한 마음으로 폭설로 도로가 끊겨 5개월 간 휴관하는 이 호텔을 관리나 하면서 소설을 쓸 심산이었다. 그런데 호텔 지배인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 몇 년 전에도 어떤 남자가 이 호텔이 휴관할 때 임시 관리인으로 왔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회까닥 돌아버려서는 자기 가족을 다 죽였다는 거다. 얼마 후, 주인공은 호텔에 존재할 리 없는 사람들을 마주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물어본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한다. “그 살인마가 바로 당신이잖소!” 라고 말이다.


『샤이닝』은 우리의 근원적인 공포를 다룬다.
내 속에 존재하는 살인마에 대해서, 내 마음속 심연에 존재하는 괴물에 대해서, 그것이 눈을 뜨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자기 속의 괴물을 느껴본 사람에게 이 영화는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

“용의자 X의 헌신”, 대결 보다는 감동 그리고 고민들

‘두 남자의 뜨거운 대결’이라는 헤드카피와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낯선 제목만으로는 극장에 가볼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영화가 꽤 괜찮다는 평도 접했지만 여태 미루기만 하다가 드디어 감상을 했네요.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신 분들은 조금 다른 평을 하시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원작이나 영화 보다 앞선 TV 시리즈 <갈릴레오> 등에 관한 사전 지식 없이 영화만 본 입장에서 <용의자 X의 헌신>은 정말 오랜만에 접하는 만점짜리 작품입니다. 영화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1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TV 시리즈도 바로 구해서 보고 있는 중입니다만 역시 영화의 감동 만큼은 아니로군요.

원작과 TV 시리즈에는 단편 마다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성격의 말단 여형사 우츠미 카오루(시바사키 코우)가 불가사의한 사건을 천재 물리학자 유카와 마노부 교수(후쿠야마 마사하루)에게 의뢰하면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현상을 설명하고 범인을 잡아내는 식입니다.

마치 <양들의 침묵>(1991)에서 클라리스 스털링 형사와 한니발 렉터 박사의 관계와 유사한 두 사람 앞에 범인들이 하나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식이지요. 원작이나 TV 시리즈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와 동일한 패턴 내에서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을 감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판은 TV 시리즈와 달리 용의자 X에 해당하는 천재 수학자(직업은 고등학교 수학 교사)이며 유카와 교수의 대학 시절 친구인 이시가미 테츠야(츠츠미 신이치)의 입장 쪽으로 관점을 이동시켜 전개해나가는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기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함수 문제”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는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작품 자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범죄 수사극으로 시작해서 두 남자의 두뇌 싸움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결국은 지독한 순애보인 동시에 삶과 진실에 관한 감동적인 드라마로 끝나고 있으니까요.

용의자 X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를 처음부터 밝히고 있음에도 범행의 자세한 경위와 용의자 X 이시가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감춰놓기 때문에 미스테리 스릴러로서의 재미도 결코 포기하고 있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용의자 X의 헌신>이 선사하는 최고의 미덕은 진득한 인간적인 감정을 담고 있으면서도 결코 감정을 구걸하거나 특정한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전달하지 않는 성숙함에 있습니다. 이시가미의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가 하나오카 모녀(마츠유키 야스코 & 카나자와 미호)에게서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심지어 그들의 미래에 관해서도 관객 각자가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대중 영화의 차원을 넘어선 품격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츠츠미 신이치의 열연은 <용의자 X의 헌신>가 진득한 감정의 영화가 될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입니다. 용의자 X 이시가미가 어떤 인물로 비춰지느냐에 따라 <용의자 X의 헌신>은 그 내용 자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온 천재 수학자의 자폐적인 성격을 표현하가다 때로는 싸이코패스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는 츠츠미 신이치의 섬세한 표정 연기는 정말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을 쏟아내는 이시가미의 오열은 <용의자 X의 헌신>에서 가장 격렬한 액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TV 시리즈에 비해 우츠미 카오루 형사의 비중이 매우 작은 편이지만 유카와 교수는 <갈릴레오>의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만큼 충분히 균형잡혀 있습니다. 물론 이처럼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는 다름아닌 TV 시리즈와는 다른 영화판만의 고유한 호흡과 균형추를 잘 잡아낸 니시타니 히로시 감독(TV 시리즈도 연출)의 역량 덕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직접 각본까지 쓴 <아말피 여인의 보수>(2009)는 어떤 작품일런지 궁금하네요.


영진공 신어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2부







과학혁명으로 체면을 구긴 종교계가 짱돌을 굴려 내놓은 것이 자연신학이었다. 자연신학이란 쉽게 말해 자연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인간들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함으로써 고귀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털끝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이론이다. 즉 과학은 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말이다.




자연신학은 과학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종교는 계속해서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과학혁명 이후에도 과학은 여전히 종교의 앞마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과학을 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본 덕분에 기독교는 과학을 장려했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는 과학에 몰두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도 신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였다. 특히 성경을 장르문학으로 분류시킬 수 있는 지구의 나이와 생물의 발생, 진화에 관한 문제에서 종교는 과학의 발목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다른 과학 분야보다 생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윈 이전의 생물학 논란들




다윈 이전의 보수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생물의 기원을 대략 6000년 전에 하나님이 모든 생물들을 각각 별개로 창조하였다고 보았다. 즉 ‘강쥐는 태초에도 개새끼였으며 고냥이는 태초에도 고양이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산이나 들판, 바다 등과 같은 지질학적, 생물학적 환경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재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하마와 고래는 같은 조상에서 진화하였다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개별창조이론으로 보면 하마와 고래는 태초에도 하마와 고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식물학, 자연사, 지질학과 같은 분야는 견본 수집 말고는 딱히 연구라고 할만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혁명 후 물리학이나 천문학, 화학 등은 빡시게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하며 원리를 정립하는 등 학문의 체계가 잡혀갔고 당연히 그에 따라서 많은 법칙을 밝혀냈다.




하지만 생물학이나 지질학은 할게 없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저 있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선 그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들을 모으는 오타쿠만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18세기에는 식물채집이 유행이었고 많은 부유한 아마추어 생물 오덕들에 의해 표본들이 수집되었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며 역마살이 낀 유럽인들은 세계 구석구석으로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동식물들을 수집했고 이러한 견본들은 런던, 파리, 스웨덴과 같은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지에는 바로바로 그 유명한 분류학의 본좌인 뷔퐁과 린네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표본들을 합리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분류 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피똥을 싸는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누군가 ... 여긴 어딘가 ...




수많은 표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뜻하지 않게 생물 전체를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효과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기리고자 그의 소중한 피조물들을 모았는데 이게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냉수를 끼얻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러한 관찰과 증거들을 토대로 발생과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자 지구의 나이에 관해서도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생기게 된다. 새로운 이론이 전제하는 진화는 아주 작고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환경과 복잡한 구조의 생물종들이 완성되려면 졸라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학자들이 지구가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되었음을 서서히 확신하기 시작한다.




그럼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발생과 진화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던 지구 나이에 관해 당시 종교계의 눈치를 봐야 했던 생물학 본좌들의 고뇌를 간략하게 되짚어 보자.






생물의 발생과 진화에 관해 고민하다







존 레이 John Ray (1628~1705)




옆집 사는 외국인 강사 이름이 아니다. 존 형님은 17세기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이자 생물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한 형님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린네는 어쩌면 편집증 환자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구를 정복이라도 할 기세로 1677년 [조류학], 1686년 [어류의 역사], 1686년 [식물의 역사], 1710년 [곤충의 역사]를 출판하며 생태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종(種)을 분류학의 기본단위로 확립했다는 점이다. 즉, 현대적 의미로 종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이는 존 형님이다.







식물의 역사는  1686년, 1688년, 1704년에 걸쳐 3권을 출간한다.
여기에는1만 8천 가지 이상의 식물들을 각각의 계통, 형태학, 분포, 서식 등을
기준으로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약으로의 효용과 새싹의 발아 과정 등
식물의 성장과 관련된 특징들도 기술해 놓았다.






하지만 존 형님은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창조에 대한 성경의 말씀과 자신의 연구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했다. 개별창조이론으로 보기엔 생물은 너무도 다양했다. 예를들어 하나님은 벼룩을 창조할 때 조차 개벼룩, 사람벼룩, 고양이 벼룩 등 아주 세세하게 창조했다는 소리인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구렸다. 하지만 순정파였던 존 형님은 결국 1691년 [창조에서 신의 지혜 Wisdom of God in the Greation]를 발표하며 창조설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창조에서 신의 지혜]

존 형님은 신을 뿌리칠 수 없었던 로맨티스트였던 거시다! 








칼 린네우스 Carl Linnaeus (1707~1778)




분류학의 본좌답게 편집증적인 성격을 지녔던 린네 형님은 오늘날도 쓰이고 있는 ‘이명식binomial’ 명명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 덕분에 이후 후배 동식물학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롭게 발견한 종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19세기 들어 종의 관계와 진화법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원천이 된다.




이명식binomial이란 생물분류의 기본단위를 종(種, species)으로 하여, 속(屬, Genus)-과(科, Family)-목(目, Order)-강(綱, Class)-문(門, Phylum) 등의 하위 단계로 생물을 분류하고 이를 토대로 생물 각 종의 이름을 그 종이 속하는 속명(屬名)과 그 종 자체의 이름(種名)을 병기하여 2단어로 구성하는 명칭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데, Homo는 속명이고, sapiens는 종명이다. 이 때 속명의 머리문자는 대문자로, 종명의 머리문자는 소문자로 나타낸다.








이명식이 사용되기 전에는 나라마다 지방마다 같은 생물을 지칭하는 이름은


 다양했으며 그 이름 또한 매우 복잡했다.


프랑스 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였던 Brisson Mathurin Jacques (1723~1806)은


사자를 Felis cauda in flocum definente(꼬리의 끝에 뭉치가 있는 고양이)로,


호랑이를 Felis flava maculis longis nigris variegata(길고 검은 무늬를 가진


황색고양이)로 명명했다. 현재 이명식에 의하면 사자는 Panther leo,


호랑이는 Panthera tigris로 명명한다.


이 얼마나 심플한가!







린네 형님의 히트작 [식물종 Species Plantarum]




린네 형님은 1735년 [자연체계 Systema Naturae]를 출판하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 1753년에 출판된 [식물종 Species Plantarum]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이명식을 언급한다. 그리고 1758년 이 책의 10판 1권에서 이명식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포유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 등의 용어도 정의한다.




린네 형님은 이명식 말고 또 하나 중요한 발걸음을 내딨는데 그건 당시로선 불경스럽게도 생물의 분류에 ‘인간’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게다가 형님은 대담하게도 인간이 원숭이들과 똑같은 속(屬)에 속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현재 DNA에 따르면 사람은 침팬지로 분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린네 형님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들 정도의 깡은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속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분류하였고 지금까지 호모Homo 속(屬)에는 인간 단 하나의 종만 있다.







1746년 출판한 자신의 [스베치카의 동물들Fauna Svecica]에서 그는


사람과 원숭이를 다르게 분류해야 할 과학적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린네 형님은 기독교를 믿었고 따라서 개별창조이론을 믿고 있었다. 그는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종의 수는 태초에 신이 창조했던 종의 수와 같다고 믿었다. 그러나 린네 형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자료와 증거들을 보며 개별창조이론이 뭔가 구리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말년에는 종들 사이의 구별과 종 내부의 다양성이 모두 시간에 의해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