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하녀가 아니라 마님(들)이 주인공이다






김기영 감독의 원작이 무려 1960년도 작품이다. 아무리 유명하고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50년 전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서 리메이크를 한다는 기획 자체가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흥행 성적이야 내 걱정할 바는 아닌 거고, 그저 한 사람의 유료 관객으로서 보기에 영 어색하지나 않을런지 괜한 걱정이 앞서는 쪽이었다. 때 맞춰 깐느 경쟁부문에도 진출했겠다, 꽤 많은 상영관을 차지하며 개봉했지만 역시나 수도권 상영관 안의 객석은 상당히 한산한 편이다.

‘하녀’라는 단어가 주는 전근대적인 뉘앙스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원작의 설정이 지금의 관객들에게 그리 큰 호감이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듯 하다.











사실 지금이나 원작이 만들어졌던 그 시절에나 ‘하녀’라는 전근대적인 단어가 매우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된다.

특별히 잘 사는 집안이 아니더라도 식모나 그외 집 안 일 도와주는 언니 한 명 쯤은 데리고 살았던 그 시절에도 그들을 ‘하녀’라고 부르며 하대하지는 않았기에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하녀>라고 이름 지을 때에는 그녀의 역할이나 좀 더 확장된 사회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으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다시 만든 <하녀> 역시 단 한 번도 은이(전도연)를 하녀라고 지칭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 하녀가 존재했던 봉건 시대에나 동명의 두 영화가 만들어진 시점에도 그 역할 자체와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녀>의 도입부는 누군가의 집 안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 온갖 아랫 일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비춰주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그 하녀 한 사람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고 그 댓가를 돈으로 받아 생활하는 우리 대부분의 하녀 또는 하인 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되고자 한다.











그러나 하녀의 정의를 새롭게 하는 것은 영화 <하녀>가 관객들을 그 이야기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 취한 출발점에 불과하다.

주인공 은이의 캐릭터 역시 원작의 이상성격자와는 많이 다르다. 지극히 정상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나이브한 면까지 갖춘 – 그리하여 어린 애한테 착하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게 되는 –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면서 관객들이 은이의 입장에서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들 뿐이다.

정작 <하녀>가 집중하고 있는 것은 은이가 하녀의 입장이 되어서 들어간 ‘그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영화 <하녀>는 제목이 되고 있는 하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하녀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그들이 아주 무서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때 그 사람들>(2004)을 통해 10.26 사건 현장에 있었으나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때 그 분들’의 이야기에 집중된 작품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듯이 임상수 감독은 <하녀>를 통해서도 하녀의 윗분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는 작품을 내놓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임상수 감독의 장기인 동시에 한계가 되는 점이기도 한 바, <하녀>는 임상수 감독이 카메라로 다시 쓴 <재벌(의 사생활)을 생각한다>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안의 딸로 출연한 아역 안서현의 큰 눈과 뚱한 표정이 우리나라 대표 재벌가인 이씨 집안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하녀>의 마지막 컷을 차지하는 얼굴도 다른 주연 배우들이 아니라 다름아닌 아역 안서현의 차지가 된다. 어쩌면 <하녀>라는 영화 자체가 임상수 감독이 내던지는 조롱 섞인 농담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주인 남자(이정재)와 여자(서우), 그리고 은이(전도연)의 뻔한 갈등 관계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하녀>가 충분히 각색되고 의도된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서 주연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박지영)와 집사 조병식(윤여정)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주인 남자가 가진 막대한 부의 힘을 잘 이해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메카니즘을 이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취하는 기생형 인물이라는 점이다.




추측컨데 왠만큼 잘 사는 집안 출신인 장모조차도 주인 남자 집안의 절대 권력 앞에서는 기도 못펴는 수준이 되고 마는 바, 장모는 시집 보낸 딸을 통해 그 권력의 쾌적함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인물로서 자신의 계획과 의도에 방해가 되는 은이의 존재를 제거하는 데에 처음부터 몸소 앞장 서는 역할을 한다.

조병식은 고참 하녀로서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꼴을 오랜 세월 동안 감수하며 자기 아들을 또 다른 권력 체계에 편승시키는 데에 성공한 인물로 은이를 마음으로부터 동정은 하되 그 집안이 요구하는 바를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된다.

임상수 감독이 원작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를 걷어내고 그 대신 ‘게임의 법칙’을 채워넣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주인 남자의 장모와 집사 조병식이고 <하녀>가 원작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으되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각색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부분 역시 두 인물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지영이 연기한 장모 역할 덕분에 – 결국 그 시스템 안에서 머물기로 하는 한 어느 누구도 하녀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하녀들>이 되었을 때 영화의 메시지에 좀 더 부합한다 –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영화이긴 했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수준인 것은 아니다.

영화제 출품 일정을 맞추느라 서둘렀던 탓인지 약간 생뚱맞게 보일 수도 있는 에필로그와 함께 – 이 에필로그 때문에 <하녀>는 확실하게 하녀가 아니라 하녀를 부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혀진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는 장면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분위기가 영화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붕 뜨는 느낌을 준다 – 은이의 최후 역시 후련한 감은 있지만 극적인 상황을 좀 더 길게 이끌어갔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은이가 하혈을 한 후 조병식이 주인 남자를 보며 무언가 의사전달을 하다가 다음 컷에서 갑자기 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은 분명 기술적인 실수다. 주절주절 많은 설명을 하는 법이 없는 이런 영화에서 주요 등장 인물들의 표정 하나가 이야기의 흐름에 맥을 짚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점프 컷에 가까운 이 부분의 편집 실수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수준이라 하겠다.

아울러 은이의 폭주에 앞서 조병식의 입장이 갑작스럽게 전환되는 부분 역시 통렬한 느낌을 전달해주기 보다는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아무래도 마지막 씨퀀스를 위해 좀 더 많은 촬영을 해놓고도 러닝타임 때문에 대폭 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 앞 부분에서 이미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해버린 참이었으니 아마도 별도의 디렉터스컷 따위는 만들어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영진공 신어지

 




 

“파주”, 죄의식과 부채의식 그리고 상실과 두려움의 4중주

광포하고 매력적인 치정극으로 홍보되는 이 영화.
치정극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 인생이란게 … 전체가 욕망과 두려움이 뒤얽힌 한편의 치정극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가련한 두 남녀의 몸부림이 너무 안쓰럽고, 두 사람의 노력에 비해 삶이 너무 아이러니해서 보기에 많이 아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는 시작부터 죄의식을 자극하며 시작한다.
8년 전 수배 중이던 중식은 짝사랑하던 선배의 집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 선배의 남편도 함께 운동하던 선배이며 구속되어 있는 상태다.

그 상황만 하더라도 중식의 마음엔 이미 부채의식과 죄의식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선배는 구속되었는데 자기는 피신을 해 가며 구속되지 않았다는 부채의식. 그리고 선배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그 아내인 여선배를 사랑하고 있다는 죄의식.

그런데 영화는 그 죄의식에 기름을 퍼붓는다. 그저 사랑하는 선배를 한번 안아보려는 인간적인 욕망은, 한 순간 방치된 아이에게 화상을 입히게 되고 중식에게는 그 화상만큼의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남긴다.

미친듯이 갚으려고 해서, 자꾸만 빚지는 남자 중식

그날 이후로, 중식은 그 죄의식을 감당하기 위해 자꾸만 부채를 갚으려 하고,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그 버거운 짐을 갚는데 쓰려고 안간힘을 쓴다. 아마 은수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상환자에게 속죄하기 위하여.

성욕으로 인해 아기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트라우마 때문에 은수와의 부부관계도 원만치 아니하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어느정도 죄의식을 취기로 덮은 후에 다시 아내를 찾았을 때 은수의 등에 확연하던 화상자국. 그 화상에 미친듯이 매달리며 외치는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는 처연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자신의 부채를 갚듯이 시작했던 결혼생활은 결국 ‘언니를 제대로 사랑해 주지 못했어’라는 고백으로 끝나고, 속죄를 하려는 목적은 전혀 달성되지 못한다. 게다가 그런 그녀를 가스 폭발로 인해 잃게 됨으로써 중식은 더 심한 죄책감을 집어 안게 된다.

철거대책위원회의 시위가 막바지에 다다른 때, 화염병 사용을 망설이는 철거민들에게 중식은 자신이 화염병 사용에 관한 혐의는 모두 뒤집어 쓸테니 쓰자고 말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보험사기혐의로 연행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려던 중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시 빚지게 됨으로써 죄의 부채를 늘려 나가기만 한다.

영화 말미 쯤에 ‘이런 일들(운동) 왜 해요. 무슨 의미에요’라고 하는 말에 중식은 ‘자꾸만 할일이 생긴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자꾸만 빚이 생기고, 자꾸만 속죄할 일이 생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애초에 한가지 죄의식이 지배할때 그것을 갚지 않으려 했다면 점점 더 부채가 불어나지는 않았을텐데, 죄를 짓고 갚으며 중식은 시지프스처럼 계속해서 그 삶을 살아간다.

잃고 싶지 않아 떠나기 때문에, 자꾸만 잃는 여자 은모

중식을 대표하는 말이 ‘속죄’라면 은모를 대표하는 말은 ‘상실’이다. 은모의 삶은 잃고, 또 잃고, 잃지 않으려고 떠나는 것으로 요약된다.

첫 등장부터 은모는 부모를 상실한 상태이며, 집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있다. 가진 것, 기댈 것이라고는 언니 은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중식의 등장으로 은모는 언니 은수를 상실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두렵지만 결국 그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중식은 형부가 된다.

언니 은수가 중식과의 행복한 관계를 갈구하면 할 수록 은모의 두려움이 커져 나가는 가운데, 부부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언니 은수가 중식과 원만한 밤(?)을 보낸 후 은모를 제외한 둘만의 아침상을 차리는 순간 그 두려움은 극대화가 되고 은모는 또 다시 잃는 것이 두려워 떠난다.

가족사진에서 형부의 얼굴을 오려내고 친구와 며칠 밤 집을 나갔다 온 그 때, 은모는 자신이 두려워했던것 보다 훨씬 더 무섭게. 언니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다. 애초에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잃지 않았을 일이었는데.

그래도 형부한테 맘 붙이고 잘 살고 있던 은모에게 또 다시 상실의 두려움이 찾아온다. 바로 자신이 중학생이고 형부가 공부방 교사이던 시절 수업시간에 전해들었던 형부의 첫사랑의 등장. 든든한 보호자였던 형부가, 아기 사진을 들고 온 어떤 낯선 여자 앞에서 엎드려 속절없이 흐느끼는 모습을 보고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고3이고, 바로 며칠 사이에 어른이라는 ‘선고’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형부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다시 혼자가 되게 될까봐 은모는 떠난다. 그리고 그 떠남이 결국 중식을 잃게 되는 전조가 된다.



속죄할 권리도, 떠날 권리도 인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가

자신의 죄의 댓가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발버둥쳐도,
잃지 않기 위해 자기가 먼저 떠나도,
자꾸만 더 깊은 늪으로 빨려들어가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삶을 보면 삶은 허무를 넘어 덫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과 똑같은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은모에게 지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그 진실을 부여잡고 지키려고 하는 중식.

대체 그 한가닥 진실을 지켜낸다는 것이 얼마나 은모를 지켜줄 수 있으랴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가 들어앉는 중식과 나이트클럽/용역깡패 사장의 차창을 스쳐가는 은모.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 그 진실하나를 지킴으로써 얻어지는 삶의 힘이라는 것이 참으로 풀잎처럼 얇기만 하다.

영화를 다 보고,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영화 참 … 독하다.’

어쩌면,
중식은 그토록 처절하게 속죄하려고 노력하는데도 죄의 짐을 조금씩 덜기는 커녕 물에 젖어가는 목화솜을 진 당나귀처럼 점점 그 짐이 더 무거워지기만 한다.

은모는 훌훌 털고 떠나려고 하는데도 삶이 가진 잔인한 힘은 은모를 ‘상실’과 대면하도록 자꾸만 끌어다 꿇어 앉힌다.

정확히 옮길 순 없지만 중식이 영화 막바지에 교도소 면회실에 앉아서 했던 대사가 마음에 자꾸 걸린다.
‘내가 교만했던 것 같아. 내가 얼마나 미욱한 놈인지’ 하는 말이 들어가 있던 그 대사.

그래,
사람은 다 미욱하지.
그렇다고 몸부림 치는 것 조차 ‘교만’인 것인지.
어쩌라고 … 대체 사람보고 어쩌라고.

영화 참, 독하다.

영진공 라이

 

“파주”, 복잡한 내러티브 그러나 단 하나의 감정

형부와 처제 사이에 벌어지는 금단의 사랑 이야기 – 지고지순한 쪽이든 살색 향연이 펼쳐지는 쪽이든 – 로만 기대한다면 적잖이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더군다나 두 주인공의 미래에 대한 명확한 결말 – 둘이 행복하게 잘 살게 되는 쪽이든 둘 중에 하나 또는 둘 다 죽어 슬퍼지는 쪽이든 – 을 필요로 하는 관객이라면 매우 황망한 기분을 안고 상영관을 나설 수 밖에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들처럼 박찬욱 감독의 적절하게 홍보되지 못한 이상한 영화로 잘못 알고 보는 것이 아니라 <질투는 나의 힘>(2002)의 박찬옥 감독이 7년만에 내놓은 장편이라는 정도만이라도 정확히 알고 본다면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의 틀에서 빗겨 나갈 수 밖에 없는 이 한 편의 영화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으리라 – 그런 준비만 되어 있다면 크게 실망할 일은 없으리라는 얘기다. 오히려 다른 영화들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힘든 꼼꼼한 연출의 힘을 만끽하길 원한다면 <파주>는 올해 하반기 반드시 봐두어야 할 작품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한 치 앞을 알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의 거리 풍경이나 수도권 재개발을 둘러싼 험상궂은 투쟁의 현장 등이 등장 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맞물리며 구구절절한 대사를 대신한다 – 문어체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사용되는 대사들에 비해 차라리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였다고 할까.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중식(이선균)과 은모(서우)가 약 8년의 시간에 걸쳐 겪게 되는 사건들은 <파주>를 의외로 매우 복잡한 내러티브의 영화로 여겨지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데, 감독의 의도는 역시 미스테리로 관객들의 관심을 끌어당기는 일 보다 등장 인물들의 감정을 화면 곳곳에 촘촘하게 새겨넣는 쪽이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파주>는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단 하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영화라고 하겠다. 그러나 <파주>가 표현하고 있는 그 감정의 실체는 사실 매우 모호한 것이어서 단순히 욕망이라고만 정의할 수도 없고 질투와 불안, 죄의식과 두려움의 감정 따위가 마구 뒤섞인 무엇이다. <파주>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줄거리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식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던 영화는 어느새 은모의 이야기 – 정확히 말하자면 은모의 입장과 감정으로 그 중심을 이동한다. 중식의 입장에서 본다면 <파주>는 마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순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모의 입장에서 그 사랑은 구원의 손길이기는 커녕 매우 의심스럽기만 한 구속일 따름이다. 은모가 원했던 것은, 죽은 언니의 남편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보호자 중식과의 결합 – 연인으로서라기 보다는 부모의 죽음 이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안정적인 생활의 터전으로서 – 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언니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 진실이 갓 스물의 은모로서는 절대로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은모는 감당못할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중식을 오해하고, 그 오해를 뒤로 한 채 친구와 함께 50cc 스쿠터에 의지해 다시 한번 자신의 길을 찾아나서지만 그 길이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를 암시하는 지점에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파주>는 은모가 감당못할 진실을 결국 알게 될 것인지, 그런 이후에 중식과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후의 이야기를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기 보다는 바로 그 시점에 은모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과 감정의 복합성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영화 <파주>의 실체다.

영진공 신어지

“미쓰 홍당무”는 인간소외에 관한 고찰이다.



    


1. 미쓰 … 홍당무???

어린이 전집류나 학교 도서실에서 책 좀 빌려 본 사람은 아마 읽어봤을 것이다.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홍당무. 신경질적인 엄마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약자를 괴롭히는 못된 심성으로 막내를 대하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막내. 그가 홍당무다. 미스 홍당무의 홍당무는 그 홍당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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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스포일러가 무지하니 출물하니 요주의!!!!!

2. 캐릭터 뒤비기

양미숙씨
집이 없어 고시원도 아닌 심지어 교무실에서 몰래 살고 있다. 학교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면 아마 양미숙 선생일터. 양미숙의 팍팍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어가 인기가 없어져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내려간 양미숙선생. 영어선생이 영어학원 다닌다고 엄청 욕을 먹는다.  나는 영문과 출신이고, 고로 학교 영어선생하는 친구들이 쫌 있다. 얘네 요새 다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 시험문제 하나 내는데도 오류 있을까봐 바들바들 떨린다고 한다.  근데 양미숙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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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고 괴로울 땐 닭발이 쵝오 >.<

완전히 쫒겨난 노동자는 아니지만, 원치않는 비숙련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로써의 삶과, 자본 제로의 상황에 눈이 많이 간다. 그런데 심지어 생긴 것도 별루다. 자본도 없고 생긴 것도 없는 이에게 호감을 갖는 이는 없다. 양미숙의 원피스 패션을 보라. 과연 소외당한 자 답고, 소외 당할만한 자 답다. ‘고아’라는 거짓말. 소외를 많이 겪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호감을 얻기 위해 잘 하는 거짓말이다. (양미숙의 현실로 봐서 실제 고아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고아에 가까운 듯 하다) 아무도 호감을 주는 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10년 전 담임선생님이었던 서선생의 호의를 호감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삶이 너무도 바쁘고, 그녀는 하루종일 너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 가슴 짠하다. 상징적으로 자기 노력이 삽질인지 아닌지 알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왜?’ 그런 노력을 하는 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양미숙은 ‘참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되도 않는 노력을 왜인지도 모르고 하는 우리’모습이다.

이유리양

이유리도 양미숙만큼 짠하다. 모순덩어리 이유리선생을 나는 이해한다. 사람에 따라 시차는 있겠지만 대한민국여성에게 20대 초반은 성과 사랑, 연애에 대해서 참 아무것도 모르고, 그 스스로도 모순에 둘러싸여있다. 나는 이유리선생을 내숭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변태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 성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욕이라 인정하지 못하고, 섹스를 해보고 싶지만 섹스를 할 수는 없는거라고 생각하는 20대 초반 여느 여성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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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쒸~

검정T팬티를 입고 성적 공상에 골몰해 있지만 ‘어머! 저는 결혼전 까지 참지 못하는 남자와는 끝낼거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내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신저로 변태적인 메세지를 받았을 때 이유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너무 튕겨서 남자와 헤어지는 걸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진한 그녀는 그런 고민 때문에 카마수트라에 줄쳐가면서 신음소리를 연습한 것일테고, 그런 고민 때문에 ‘자쥐 깔꽈?’ 퍼포먼스까지 해 버린 것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남자의 마음을 잡는 지 모르는 무지상태. 무슨 짓이라도 불사하려는 그녀의 삽질또한 참 공감이 간다. 예쁜 그녀에게도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
Another version of 왕따. (그녀의 결론은 꽤 괜찮아서 다행.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지만)

종희
소설 ‘홍당무’를 생각해 보면, 종희야 말로 진짜 홍당무. 부모는 둘다 서종희를 사랑하긴한다.  일상에 찌든, 너무 일찍 결혼한 삼십대 중반의 가장 서종철은 즐기지 못한 20대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인터넷 방송에 힘쓰고, 멀끔한 외모를 밑천 삼아 젊은 여선생과 히히덕거리고 있고, 너무 어린 남편을 둔 성은교는 몸매를 가꾸며 (커리어에 몰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쪽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전교 왕따지만, 엄마아빠는 그런 고민은 전혀 모른 채 자기들의 고민에만 빠져있다. 그 사이에서 참 엉뚱한 방향으로 영악해 지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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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메와까!!!!!

서은교님
다른 사람보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참… 뭐 말할필요없이 공감 많이 가는 캐릭터다. 어학실에서 차분하게 판사인 듯 대단한 침착성과 노련함을 보이더니 어학실을 나와 남편과 함께 걸어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서종철군
그닥 나쁜 놈도 아니고, 전체적인 사실관계를 영화가 보여주는대로만 봤을 때는, 이쁘장한 나이어린 여후배와 몇번 데이트 하며 시시덕거렸는데, 걔가 너무 순진해서 목숨걸고 나오니까 좀 당황하고. 선생으로써 기본이 된 놈이라 왕따 당하는 양미숙을 좀 챙겨준 것 뿐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짝사랑과 스토킹의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딸과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이 놈도 인생의 무게 무거울 그런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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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뜨기라능 ...

그려서 캐릭터 뒤비기의 결론은, 다 이상한 캐릭터들인데 … 거기에 다 내 모습이 있고, 공감이 간다는 얘기다.

3. 이 영화 법정물이었던 거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어학실 장면이 꼭 법정장면 같아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를 생각해봤다.

가만보면 서종철(가해자) vs. 이유리, 성은교, 서종희(피해자) 양미숙(가해자) vs. 서종철(피해자) 이런 구도로 보인다.  서종철은 이유리에겐 ‘심심풀이 데이트상대’라는 상처를, 성은교와 서종희에게는 ‘가장의 부정’이라는 가해를 했으나 실상 양미숙에게는 ‘왕따학생에 대한 수학여행에서의 배려’, ‘한때 제자였던 동료에 대한 친절(교무회의시간에 졸지말라는)’, 혹은 사회가 금지하는 ‘왕따에게 친절 베풀기’라는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영화 보면서 ‘다 저 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곱씹어 생각할 수록 서종철이라는 놈이 참… 나쁜 놈의 범주를 은근슬쩍 잘 비켜간다. (얄미운 놈) 그래서 저 위에서 말한 가해자 피해자 구도도 사실은 모호하다. 다들 상처를 받았는데 막상 왜 상처를 받았는지, 왜 상처를 줬는지는 모르는 상태다.

4. 이 영화는 비극이다???

그리스비극(오이디푸스, 아가멤논 같은거)과 셰익스피어비극은 비극의 원인이 본인의 캐릭터에게 있다(Personality is destiny).

그리고 현실주의, 자연주의 연극으로 오면 개인에게 비극의 원인이 있지 않고 사회에 비극의 원인이 있다. (Riders to the Sea같은 작품)

그러다가 40년대 중반으로 와서 Arther Miller나 Tenesse Williams의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동물원’ 같은 작품을 보면 경제공황같은 사회적 원인과 캐릭터 본인이 가진 성격적 결함이 복합적으로 비극의 원인이 된다.

미스홍당무는 그런 점에서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비슷한 점이 있다. 양미숙, 이유리, 서종희의 비극에는 인간소외라는 사회적 측면 이외에 ‘모자란 개인’이라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다른 점이 있다.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은 ‘가족의 붕괴’로 끝나고, 그것이 비극 그 자체라는 것. 그러나 미스홍당무의 비극은 ‘붕괴된 가족’위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5. 결론

그리하여 이 영화는 왕따들에 대한 각각의 고찰을 통해 인간의 소외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람이 비 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거에요.  설마.  그 사람도 사람인데 …”

양미숙의 말에 공감과 조소를 동시에 날리며 집에 돌아오니 … 묻지마 범죄, 고시원 방화사건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 미숙아 … 힘들더라도 꿋꿋이 살아보자꾸나 …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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